15장.
월요일 아침 갤러리 소파에서 무연이 눈을 느리게 깜빡였으나, 여전히 밤인 줄 알고 붙으려는 눈을 떠 보려 이마에 힘을 주며 간신히 눈을 떴다.
커다란 유리창 안으로 햇살이 강렬하게 반짝였다. 무연은 눈앞을 손으로 가리며 몸을 일으켰다.
일어난 그녀가 채 자리에 앉기도 전에 문이 퍽! 열리고는 또각또각 구두 소리를 내며 무연의 어머니가 들어왔다.
어머니 이해선은 급히 다가와 그녀의 팔뚝을 때렸다.
“집에도 안 들어오고 이게 뭐야?!!”
언성이 높아졌던 어머니는 무연의 팔뚝을 때리다 말고 고개를 돌렸다. 테이블 아래와 위에 널브러진 초록색 병이 보였다.
“너 술까지 마셨니?”
“어. 보면 몰라? 왜 왔어.”
밤새 무연이 만들어 둔 흔적을 보고 입을 살짝 벌리고 서 있던 어머니는 재빠르게 발로 바닥에 떨어져 있던 소주병을 툭툭 차며 테이블 아래로 밀어 넣었다.
툭, 툭, 투둑, 투두둑.
어머니의 바닥에 있던 병을 다 테이블 아래로 넣은 후 허리를 굽혀 테이블 위에 있던 병들을 테이블 아래로 감췄다.
“할머니 올라오고 계셔!”
‘할머니’라는 단어를 듣자 무연의 눈매가 또렷해졌다.
“뭐?!”
“오늘 아침에 집에 너 없길래, 너 일하다가 못 들어왔다고 했어.”
말도 안 하고 집에 들어가지 않았으나 집이 나뉘어 있기에 들키지 않을 거라고 예상했으나 착각이었던 모양이다.
술을 잔뜩 펼쳐 두고 혼자 술 파티를 벌였다고 하면 혼이 날 게 뻔했다.
“뭐 한다고 여기까지 오신 거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무연은 창을 열고 주변을 빠르게 치웠다. 그때 밖에서 대찬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분명 할머니의 발소리였다.
다급해진 무연은 몸을 빠르게 움직이며 주변 정리를 했고, 마지막 소주병을 치우려고 들었을 때 할머니가 들어오셨다. 무연은 마지막 남은 소주병을 다급히 테이블 아래로 치웠다.
“뭐 한다고 킁킁.”
할머니는 미간을 찡그렸다.
“여기서 술 마셨어?!”
목소리가 마치 호랑이의 울음소리 같아서 흠칫 놀랐던 무연은 차디차게 식어 버린 자신의 두 손을 맞잡고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요! 소독한다고 소독제를 뿌렸더니.”
할머니는 의심스러운 눈을 하고 주변을 둘러봤으나 병이 보이지 않자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그녀와 어머니도 소파에 앉았다.
“그런데 무슨 일이세요?”
“해루가 돌아왔던데, 해루 우리 집에서 내보내는 건 어떠냐?”
아직 해루와 무혁의 사이가 어느 정도 진전된지 모르고 있던 할머니지만, 청춘 남녀가 회사도 모자라 집에서까지 붙어 있는 게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다. 하지만 무연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언제까지 같이 살 수 있는 건 아니잖니.”
무연은 싫었다. 그동안 같이 살자고 집으로 들어오라고 해도 들어오지 않았던 해루를 어떻게 설득시켰는데, 내보내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쫙 찢어진 눈매로 할머니를 째려본 무연이 씩씩거렸다.
“언제는 일 잘한다고 좋아하셨잖아요! 그런데 무혁이랑 이어지는 건 싫으신 거예요?”
옆에 있던 엄마가 무연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하지만 무연은 할머니를 똑바로 본 눈을 거두지 않았다.
“그래! 무혁이는 서영이랑 돼야 회사가.”
“무속인 말 그만 믿으세요. 그리고 둘이 벌써 사귀어요.”
“뭐?!”
말을 끝낸 무연은 입술을 한 손으로 막고 헉! 숨을 마셨다.
“그게.”
“어머, 벌써 그렇게 된 거니?”
이해선은 명숙의 말이라면 “네, 알겠습니다. 어머님.” 하고 따르는 편이었다. 그래서 제 의견을 말 못 하고 있었지만, 해선은 두 손을 입 가까이에 모으고 옆에 앉아 있던 무연에게 고개를 돌리며 눈 옆에 주름을 만들었다. 싫어하는 모습은 아니었다.
한숨을 푹 내쉰 무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대답을 하다가 눈을 번쩍 뜬 무연은 할머니를 똑바로 쳐다봤다.
“그렇다고 해루 불러서 뭐라고 하셨다간 저 진짜 가만 안 있어요. 할머니!”
“가만 안 있으면?”
턱을 번쩍 든 명숙은 목소리를 키웠다.
“예전에 문제 많은 청소년일 때처럼 문제 많은 성인으로 살 거예요.”
“무연이 너! 지금 할미한테 협박하는 게냐?”
옆에서 조용히 있던 어머니가 할머니의 얼굴을 살피더니 팔꿈치로 무연의 허리를 쿡쿡 찌르며 괜히 목소리를 키웠다.
“무연이 너! 할머니께 무슨 말버릇이야!”
무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명숙과 이해선은 자리에서 일어난 무연을 따라서 시선을 올렸다.
할머니를 쳐다보던 무연은 어머니 쪽으로 고개를 돌려 내려다보며 소리쳤다.
“엄마도 해루한테 한마디라도 해 보세요! 내가 가만히 있나!”
“뭐?! 무연이 너 그게 무슨 말버릇이야!”
해선은 명숙의 얼굴을 눈으로 힐끗거리며 괜히 더 목소리를 키웠다.
한숨을 내쉰 무연은 쿵쿵 발걸음 소리를 내며 사무실에서 나갔다. 무연이 눈앞에서 사라진 후 명숙은 문을 향해 손가락질하며 성을 냈다.
“저, 저! 버르장머리 없는!”
할머니가 커다란 목소리로 “다시 못 와!!” 소리쳤으나 무연은 돌아가지 않았다.
무연도 해루와 무혁의 사랑이 반갑지는 않지만, 해루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건 지켜볼 수 없는 일이었다.
***
회사에 출근한 해루는 사장실 책상 앞에 서 있었다.
조금 전까지 회사 일에 대한 대답을 잘하던 해루는 어느 순간부터 대답이 없었다.
책상 앞에 앉아 있던 무혁의 옆에 서서 태블릿을 들고 허공을 보고 있었다. 그는 책상 앞 컴퓨터 화면을 들여다보다가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고개를 들었다.
“윤 비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으나 소음이랄 게 없던 사무실 안은 조용했기에 못 들을 수 없었을 텐데 대답이 없는 것을 본 무혁은 등을 등받이에 붙이고 그녀를 바라봤다.
빤히 바라보던 무혁은 그녀를 다시 불렀다.
“윤 비서.”
제법 커진 그의 목소리에 몸을 움찔거린 해루가 고개를 숙였다.
“네? 찾으셨어요?”
“뭘 그렇게 생각해요?”
해루는 입술을 꾹 다물고 이쪽저쪽으로 움직였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 앞으로 걸어가더니 책상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아 그녀와 눈을 맞췄다.
“왜요? 뭐가 그렇게 걱정인데?”
숨을 푸 내뱉은 해루는 고개를 숙였다가 들었다.
“걱정돼서 그래요.”
“뭐가 그렇게 걱정이죠?”
눈에 힘을 푼 그는 조금 더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물었다. 그 후 그녀의 뺨을 살며시 어루만졌다.
해루는 크게 숨을 내뱉으며 그의 손목을 잡아 내렸다.
“무연이 어젯밤에 나갔나 봐요. 새벽에 방에 가 보니까 없더라고……. 연락도 안 받고.”
“그래서? 후회합니까?”
그는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그녀와 거리가 제법 가까워졌고 해루는 뒤로 한발 물러섰다. 해루는 숙인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요. 거짓말하는 게 더 나쁜 거니까.”
그래도 전에는 마음속에 죄책감이 있었는데, 지금은 죄책감보다는 미안함이 있어서 전보다 괴롭지는 않았다.
그는 그녀의 얼굴을 잡아들고 눈을 맞췄다.
“잘했어요.”
“뭐가요?”
대답도 하지 않은 그는 버럭 끌어안더니 곧 뒤통수를 커다란 손으로 느리게 쓸어내렸다.
누나인 무연의 반응 때문에 해루가 흔들릴까 봐 불안했다. 그러나 그녀의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니 안도의 한숨이 퍽 나왔다. 꼭 칭찬을 해 주고 싶었던 그는 그녀를 안은 팔에 더욱 힘을 줬다.
“흔들리지 않고 나 좋아한 거.”
“내가 뭐 마음이 오락가락하는 사람이에요?”
“알잖아 내가 당신 앞에서만 작아지는 거.”
해루는 궁금증을 견디지 못하고 그의 가슴을 밀었다. 그 후 고개를 들었다.
“왜 그래요? 내가 확신을 안 줬어요?”
해루의 눈동자는 동그랗게 커져서 깜빡거렸다. 그는 그런 앙증맞은 그녀의 얼굴을 두 손으로 잡았다. 그 후 고개를 한번 흔들었다.
“아니요.”
“아니면, 왜 그래요?”
“너무 좋아해서.”
그냥 무덤덤하게 한 말에 그녀는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뱉지 못했다. 귀에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것 같이 멍멍했다. 세상에 그와 자신 둘만 있는 것 같았다.
그와 눈을 맞추고 있는데, 그가 얼굴을 들이밀었다. 자기 그의 얼굴이 가까워지자 해루는 눈을 꾹 감았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그의 입술이 닿지 않았다. 그러자 해루는 슬그머니 눈을 떴다.
눈앞에 그가 눈을 꼭 감고 일자로 다문 입술 안에 고인 침을 꿀꺽 삼켰고, 그럼으로 인해서 목의 울대가 들썩였다.
“뭐 해요?”
고개를 살짝 기울인 그녀가 또렷한 눈동자로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이러면 안 될 것 같아서.”
“네?”
“10분 뒤에 있는 회의, 못 갈 것 같아.”
“왜요? 입맞춤이 그렇게 오래 걸려요?”
그녀는 쪽 맞추고 떨어지면 될 것을 뭐가 그렇게 오래 걸린다고 참고 있나 싶었다.
맑은 눈동자를 깜빡거리며 물어 오자 그는 그녀의 얼굴에서 손을 내려 두고 몸을 돌렸다.
“이러지 말죠.”
해루는 조금 멀어진 무혁에게 다가가 몸을 쭉 내밀고 그의 얼굴을 바라봤다.
“뭐를요?”
뽀뽀 정도는 회사라도 할 수 있는 거 아닌가?
지금은 둘뿐이고 게다가 무연에게 말하고 난 뒤라서 들키면 안 되는 대상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니 입술 정도는 맞춰도 된다고 생각했다.
“떨어져요.”
한 손으로는 눈을 가린 무혁은 다른 한 손을 흔들며 경고했다.
“왜요?”
“유혹하지 말라고요.”
“내가요?”
해루는 자신의 가슴에 손을 올리고 고개를 쭉 내밀었다. 이 정도가 유혹이라면 평생 ‘유혹’의 ‘유’자도 꺼내 보지도 못할 터였다.
“네!”
“내가 언제요!”
억울했다. 한 거라곤 눈을 감은 것뿐인데.
“눈 감고 기다리는 거. 그게 사람 얼마나 미치게 하는 줄 압니까?”
“네?”
“그리고 조금 전에 ‘입맞춤이 그렇게 오래 걸려요?’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고 말해요?”
생각해 보니 이상할 수 있는 소리였다. 그녀는 자신이 너무 밝힌 것 같아 얼굴이 붉어졌다.
“아니 그건. 짧게 그냥 쪽 이런 뽀뽀를 말한 거고, 그리고 무혁 씨가 다가오다가 안 다가오니까.”
“아무튼 지금은 뽀뽀 못 해요.”
그는 등 돌리고 책상에 널브러져 있던 하얀 자료들을 집어 들었다. 이제 곧 열 시에 있을 회의에 참석할 시간이 다 되어 가고 있었다.
“누, 누가 하고 싶다고 했어요?”
당황한 해루는 그를 잠시 째려보다가 천천히 그의 뒤로 다가갔다.
책상 옆에서 회의 자료들을 작은 서류 가방에 넣던 그는 태블릿을 손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