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너를 너무 사랑해서 그랬어! 알잖아!”
해가 저물어 가던 시각, 남성의 요란스러운 변명에 귀가 따가웠다. 남성의 목소리가 울려 퍼진 곳은 한적한 강가 옆.
무릎을 꿇은 남자는 얼굴 앞에 두 손을 모으고 위아래로 반복해서 비볐다.
해루는 붉은 노을을 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
“정말이야! 사랑해서 그랬어!”
남자는 무엇이 그리 급한지 그녀가 대답을 뱉어 내기도 전에 변명을 하느라 바빴다.
해루는 허리에 손 하나를 올리고, 하늘로 향해 있던 고개를 천천히 숙였다.
꾸역꾸역 화를 누른 그녀는 더 차갑게 꾸짖었다.
“사랑하면 더 말했어야죠.”
“말하면 네가 떠날까 봐 그랬어! 나는 있잖아…….”
남자는 더 할 말이 남아 있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남자의 어이없는 변명을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아 말을 끊었다.
“유부남인 걸 3년 동안 말하지 않은 게, 사랑해서 그랬다고요? 말이 된다고 생각해요? 김태준 씨는 사랑하면 원래 그렇게 이기적이고 야비하게 변합니까?”
조목조목 따지는 그녀의 말에 태준이 당황한 듯 입술에 힘을 주고 변명을 찾아 눈동자를 좌우로 굴렸다.
해루에게 있어서 도덕적으로 비난받아야 마땅할 일, 그중에서도 불륜은 인생 밖의 일이었다.
거짓말에 속았다고 하지만, 본의 아니게 유부남과 3년이나 만났고 동거까지 시작했다.
동거를 시작한 지 일주일이 채 지나지 않았지만, 결혼까지 생각했고 서로의 집에 인사까지 오갔다.
모두 거짓이었다고 생각하니 속에서 천불이 올라와 주먹을 쥔 두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너를 사랑했으니까!”
끝까지 뚫린 입이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태준의 태도에 기가 찼다.
“하, 아들까지 있으신 분이 부인 아닌 다른 여자를 사랑한다? 지금 장난합니까?”
어이가 없어서 말문이 막혔다.
얼마 전 우편함에 꽂혀 있던 하얀 봉투를 보고 나서 그녀는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하얀 봉투 안에 들어 있던 사진 속 태준은 앞으로는 자신을 닮은 어린 남자아이를 안고 있었고, 옆으로는 결이 좋은 허리길이의 머리카락을 가진 아름다운 여인과 딱 붙어 다정하게 웃고 있었다.
사진만으로도 태준을 의심할 수 있었지만, 믿고 싶지 않았던 그녀는 직접 사람을 시켜 확인해 봐야 했다.
확인한 결과, 입수한 서류 속 태준은 분명 유부남이었고, 오늘 아침 한 주택에서 밖으로 나오는 그를 따라 배웅을 하던 아름다운 여성과 다섯 살짜리 아이가 따라 나오는 장면 또한 그가 유부남이라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었다.
차 안에서 숨죽이고 숨어 있던 그녀는 꽉 쥐고 있던 운전대를 놔 버렸다.
힘이 쫙 빠졌다.
원망스러워 눈물이 차올랐다.
어떻게 3년간 매일 보면서도 진실을 말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그녀를 속인 김태준은 그녀와 같은 회사인 성주에 다니고 있던 동료였다.
회사 내규에 따르면 개인사에 대한 이야기가 금지되어 있다. 그래서 자신이 기혼자라는 것을 속이려면 충분히 속일 수 있었다.
홍보 팀 팀장이었던 태준과는 부서가 다르지만 워크숍에서 만났다.
사장의 비서였던 윤해루에게 홍보 팀 팀장이던 태준이 호감을 느끼고 먼저 다가왔다.
모든 면에서 잘 맞아 크게 싸우지 않고 3년간 사귀었다.
그럼에도 정확하고 바른 성격이던 그녀는 태준이 자신의 입으로 유부남이 맞다고 시인하는 순간, 단번에 헤어지자고 말했다.
하지만 태준은 생각이 달랐던 모양이다. 그녀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마치 드라마 주인공이라도 된 듯 매달렸다.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잖아! 우리가 어떻게 헤어져?”
그녀는 발을 위로 확 쳐들며 바지를 꾹 쥐고 있던 태준의 손을 뿌리쳤다.
“됐고, 여기서 끝내요, 우리.”
차갑게 식어 버린 그녀가 뒤돌아서 가려고 하자, 태준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손목을 다급하게 잡았다.
전날 비가 와서 그런지 땅바닥에 닿았던 태준의 손에는 흙이 잔뜩 묻어 있었고, 그 흙이 그녀의 팔목에 까칠하게 묻어났다.
“안 돼, 나 너랑 못 끝내.”
어이가 없어 고개를 홱 돌려 긴 숨을 내쉰 그녀가 다시 태준을 보며 똑바로 말했다.
“아들도 있다면서요? 아들은 책임지셔야죠.”
“헤어질게. 아들도 네가 싫다면 포기할게!”
그녀는 숨이 턱 막혔다.
아들도 포기한다는 말을 듣고 나니 아버지 윤해석이 운영하던 회사의 직원과 바람이 나서 해루를 버리고 집을 나갔던 어머니 김장미가 떠올랐다.
태준이 말을 하면 할수록 그녀의 표정이 더 일그러졌다.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요? 낳았으면 책임을 지셔야죠.”
“그래도 나는 네가 먼저야!”
“하- 기가 차서 말이 안 나오네요. 그냥 우린 모르던 때로 돌아가죠, 그게 최선인 것 같아요. 김태준 씨, 다시는 연락하지 마세요.”
그녀는 거세게 태준의 손을 뿌리쳤다. 그 후 미련 없이 돌아섰다.
돌아선 그녀는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주먹을 꽉 쥐고 앞으로 거침없이 걸어갔다.
그녀가 태준을 이렇게 단칼에 잘라 낼 수 있었던 이유에는 그녀의 성격도 한몫했지만, 초등학교 저학년 무렵 어머니 김장미가 아버지 윤해석의 회사 동료와 바람이 나 회삿돈을 모두 챙겨 달아난 일의 영향이 컸다.
어머니가 나간 후 아버지의 회사는 망할 수밖에 없었다.
그 후 단란했던 집안은 쑥대밭이 되었고, 아버지는 홀로 해루를 키우느라 고생을 하셨다.
그 모습을 보고 자란 그녀는 불륜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치가 떨렸다. 그래서 더 차갑게 돌아설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눈물을 쉬이 흘리지 않아 독종이라는 소리를 종종 듣던 해루는 충격이 심했는지 태준에게서 멀어지자 참고 있던 눈물이 흘러내리는 눈을 두 손으로 가리고 커다란 소나무 뒤에 주저앉았다.
그녀는 한동안 소나무 뒤에 주저앉아 일어나지 못했다.
***
다음 날 금요일 아침, 그녀는 아무 일 없다는 듯 출근을 했다.
봄 햇살이 따스하게 들어오는 아침이라 평소 같았다면 콧노래를 흥얼거리면서 운전을 했을 테지만 지금 그녀의 마음에는 장마가 시작된 듯 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있던 터라 우울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표정만으로도 그녀의 감정을 모두 읽을 수 있을 만큼 입술 양 끝은 축 처져 있었고 눈동자는 죽은 동태눈처럼 매가리가 없었다.
출근하는 내내 기운이 나지 않아 축 처진 어깨로 회사의 지하 주차장에 도착했다.
지하 주차장에 도착해 차 문을 열고 내린 그녀는 문을 닫는 동시에 차창에 보인 자신의 축 처진 어깨를 보고 고개를 흔들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거야.”
똑같은 말을 몇 번 더 반복하며 마음을 다잡은 그녀는 어깨와 허리를 쫙 편 뒤 살짝 미소를 짓고는 뚜벅뚜벅 걸어갔다.
지하 2층 엘리베이터 앞 자동문을 지나, 엘리베이터 근처에 도착한 해루는 주머니에 있던 핸드폰을 들여다봤다.
오늘 해야 할 일을 한 번 더 확인하기 위한 행동이었는데, 그녀가 취직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부터 해 왔던 습관이었다.
별다른 어려운 일정이 없어 보이는 일정표를 보고 있음에도 일정표를 보는 내내 그녀의 입에서는 한숨이 흘러나왔다.
일정표 때문이 아니라 차에 있던 짐 때문에 나온 한숨이었다.
차에 있던 짐을 생각하니 한숨이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일단, 동거하는 집이 태준의 명의로 되어 있기에, 오늘 아침에 집에서 나올 때 자신의 짐을 SUV 차에 싣고 오긴 했으나 딱히 갈 만한 곳이 없었다.
지방에서 식당을 하시는 아버지의 식당 증축 비용을 자신이 집을 빼면서 받은 보증금으로 드렸기에 여유가 없었고, 저번에 인사를 갔던 태준이 유부남이었다는 사실을 아버지가 알게 된다면 안 그래도 혈압이 높으신 아버지께서 쓰러질 수도 있는 일이었다.
딱히 저 짐을 싣고 갈 만한 곳이 생각나지 않았던 그녀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눈앞에 들어오는 일정들이 그저 까만 그림자처럼 형태만 보였다.
“하.”
고민이 많아 한숨을 내쉬었는데, 발소리가 들렸다.
출근하는 사람들이 엘리베이터 앞에 모여들었으나, 매번 먼저 인사하던 직원들이 모두들 이상한 눈으로 그녀를 힐끗거리며 두세 명씩 모여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어쩜 저렇게 낯짝이 두꺼워?”
그녀의 귀에도 그들의 소란스러운 험담이 들려왔다.
그녀는 귓가에 들릴 정도로 시끄럽게 떠들던 여자 두 명에게 고개를 돌렸다.
정신없이 떠들던 두 여성은 차갑게 굳은 얼굴의 그녀를 보자, 눈동자를 어색하게 돌리며 입술을 입안으로 말아 넣었다.
몸까지 완전히 돌린 그녀가 두 여성에게 물었다.
“지금 저를 두고 하신 말입니까?”
그녀는 손가락 하나로 자신의 턱 쪽을 콕 찍으며 물었다.
궁금한 점이 있으면 앞에서 묻고 해결하는 성격이었던 그녀는 그래서 그런지 회사 내에서 뒷말이 없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들어온 회사에서 이른 나이에 비서실장까지 오른 이유에 그 솔직함도 한몫했다.
그녀의 당당한 태도에 일부는 입 주변에 주먹을 올리고 목을 가다듬으며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었고 일부는 시선을 돌렸다.
그녀가 콕 찍어 물어본 여자는 우물쭈물 입술을 열 듯 말 듯 움직이다가 고개를 살짝 돌리고 아랫입술을 물었다.
조금 더 가깝게 다가간 그녀는 다시 물었다.
“뭐죠? 제가 그쪽들 입에 오르내릴 이유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른셋이 되는 동안 많은 일들을 겪었다. 그래서 소문쯤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해결할 수 있었다.
항상 당당했으니까.
그 순간 사사건건 그녀의 일이라면 걸고넘어지던 본부장의 비서 김자련이 어디서 나타났는지 마침 문이 열리는 엘리베이터에 올라타며 말했다.
“유부남 꼬셔 놓고 뭐가 그렇게 당당해.”
김자련은 웃으며 그녀를 바라봤고, 다른 이들도 마치 그녀가 전염병에 걸린 것처럼 그녀를 피해 엘리베이터 안으로 빠르게 들어갔다.
곧 해루의 눈앞에서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고 해루는 인상을 쓰며 닫히는 엘리베이터 문을 바라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다.
유부남이라는 소리에 말문이 턱 막혔다.
김태준에게 속아서 모르고 불륜을 저지른 것이었으나, 불륜은 맞았으니 겁이 덜컥 났다.
‘…어떻게…그걸.’
그녀는 회사에 알릴 생각이 전혀 없었다. 자신이 피해를 보긴 했지만, 남들의 입에 불륜으로 오르내리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어떻게 알았는지 이미 회사 사람들이 힐끗거리는 것을 보니 소문이 다 퍼진 듯 보였다.
***
정신을 차리고 빠르게 비서실에 올라간 그녀는 주변에 수군거리는 소리에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어떤 일에도 겁을 먹는 법이 없던 그녀였지만 심장이 두근거렸다.
자리에 앉은 그녀의 손은 바빠졌다.
회사 내 익명 게시판은 이미 윤해루에 대한 이야기들로 가득했다.
최근 페이지부터 적어도 4개의 페이지 모두 그녀의 불륜에 대한 부도덕성을 욕하고 있었다.
[부도덕한 직원 해고가 답!]
[유부남은 건드는 게 아닌데.]
[평소에는 도덕책인 척하더니.]
모두 그녀를 두고 하는 이야기였다.
페이지를 넘겨 보던 그녀는 5페이지에서 멈췄다.
사실 저를 믿어 주던 사장은 몸이 아파 사표를 냈기에 사장 자리가 잠시 공석이 된 상태였다. 그래서 딱히 어떤 윗선에 제 억울함을 소명해야 할지 눈앞이 캄캄했다.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 자리에 우두커니 앉아 있는데, 멀끔하게 차려입은 직원 한 명이 비서실 문을 열었다.
“윤해루 비서실장님, 잠시 시간 되십니까?”
비서실에 있던 모두가 고개를 들었다.
회사 내 윤리 위원회 직원이었다.
긴장감에 입안에 고인 침을 꿀꺽 삼킨 그녀가 태연한 척 천천히 일어났다.
“네. 가시죠.”
속은 전쟁이라도 난 듯 어수선했지만 겉으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사람처럼 행동했다.
두 사람은 작은 회의실 안으로 들어갔다. 책상 두 개를 사이에 두고 서로를 보고 앉았다.
딱딱한 의자가 그녀의 몸을 더 굳게 했다. 그녀는 마치 나쁜 일을 해서 경찰에게 잡혀 와 심문을 받는 기분이 들었다.
자리에 앉은 직원은 하얀 키보드를 열심히 두드리며 그녀와 눈 한번 마주치지 않고 차갑게 물었다.
“떠도는 소문, 사실인가요?”
“아닙니다. 저는 몰랐습니다.”
“뭘 몰랐다는 거죠?”
직원은 고개를 들어 그녀와 눈을 맞췄다. 그녀와 눈을 맞추는 순간 직원의 손은 멈췄다.
“김태준 씨가 유부남이라는 거 모르고 만났습니다.”
“어떻게 그걸 모를 수 있습니까?”
처참한 기분이 들었던 그녀는 입술 안쪽을 씹고 있다가 울음이 날 것 같은 마음에 목을 가다듬고 차분히 대답했다.
“속였습니다. 김태준 씨가 저를, 그것도 3년 동안.”
직원은 다시 숙인 고개를 갸웃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