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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후, 남주의 내연녀로 빙의했다 3
지은이｜유해령
펴낸곳｜루시노블
투고 및 문의 | lucy@sybook.kr
ⓒ유해령,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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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여러 가지 일이 몰아치듯 한꺼번에 닥친 후, 아주 잠시 평화로운 일상이 이어졌다.
그동안 뻔질나게 드나들던 잭도 찾아오지 않았고, 이사벨로부터도 특별히 소식이 들려오지 않았다.
수도 사교계 모임도 거의 막바지에 접어들었다. 대규모 파티도 앞으로 두어 번밖에 남지 않았다.
그중 하나가 곧 있을 왕실 무도회였다. 건국제 다음으로 큰 행사이니만큼, 다들 이날을 준비하느라 따로 무도회나 티파티를 열 여력이 없었다.
해 봤자 소소하게 지인을 불러 놀거나 저녁을 먹는 정도였지만, 안타깝게도 글로리아에겐 그 정도로 가까운 인맥이 여전히 다니엘 외에는 없었다. 하지만 본인은 조금도 아쉽지 않았다. 예쁘게 차려입고 하하 호호 수다를 떨 시간은 애초에 없었다. 글로리아도 그녀 나름대로 바빴다.
그녀는 다시 피터의 화실로 출퇴근을 시작했고, 매주 화요일과 금요일에 데일을 만났다.
데일은 그날 일로 글로리아를 배려하듯 처음 만났을 때로 돌아간 것처럼 말수가 줄었다. 사담도 없었으며, 그림을 그리다 말고 흑연을 들고 글을 써야 할 일도 없었다.
아쉬움을 느낄 새도 없었다. 덕분이라고 해야 할지, 글로리아도 오로지 초상화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그날 스쳐 지나가듯 나누었던, 피터의 전시회에 대한 이야기도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J로 집 밖에 나서면서 이사벨이 신경 쓰이지 않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글로리아가 더 이상 수동적으로 그녀의 말을 따르지 않을 것임을 알게 되었다. 적반하장으로 경고까지 했으니, 그래도 섣불리 건드리진 않을 것이다.
데일의 저택에 무작정 쳐들어올 가능성 역시 낮아 보였다. 글로리아도 반격할 수가 있다는 걸 알게 됐으니 이제 전처럼 막무가내로 굴지는 못할 테다.
그녀 나름대로 계획을 수정하느라 바쁘겠지. 갈팡질팡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제발 그 과정에서 이사벨이 잭에게 글로리아와의 관계를 직접 묻기를 바랐다. 그러면 어떤 의미에선 글로리아와 잭의 거래가 성립될 테니까.
잭은 ‘이사벨이 먼저 찾아오도록 하라.’라는 조건만 내걸었으니, 글로리아는 그 말대로 한 셈이었다. 그 뒤로 둘의 관계가 좋아질지 악화될지는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지금까지의 일들을 다니엘과 공유했다. 글로리아는 어떻게 피터를 알게 되었는지와 함께, J로 활동하고 있는 상황을 설명했다.
다니엘은 지난번에 급하게 사정을 전하느라, 미처 다 말하지 못한 이야기를 자세히 들려주었다.
‘어머니가 누이를 죽이러 사람을 보낸 사실을 알게 된 건, 하녀 한 명이 이 사실을 몰래 엿들었기 때문입니다.’
그 하녀는 어려서 저택에 들어와 누이와 다니엘 두 사람과 함께 자라 왔고, 특히 누이와 사이가 좋았다. 그래서 곧장 다니엘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누이가 어디에 살고 있는지는 저도 알고 있었습니다.’
편지가 딱 한 번 왔다고 했다. 거기에는 히아신스의 이름도 적혀 있었다. 아이가 무사히 태어나고 누이의 건강도 이상 없다는 소식에 그는 멀리서나마 함께 기뻐했다. 다니엘은 그녀가 가문에서 벗어나 잘 살길 바라는 마음으로 굳이 그곳을 찾아가지 않았다. 답장을 보내지도 않았다.
설마 어머니가 딸을 죽일 만큼 잔혹한 사람일 거라곤 상상도 못 했겠지.
그렇게 간신히 히아신스만 구해 냈지만, 다니엘은 곧바로 국경으로 원정을 나가야 했다. 그때가 딱 원작 소설이 끝날 즈음이었다.
‘우선 먼 곳에 떨어진 보육원에 아이를 맡겼습니다. 그리고 돌아오자마자 수도로 데려왔죠. 어머니는 그사이 영지로 내려가셨기 때문에 숨겨 둘 수 있었습니다.’
‘몇 년간 지낸 보육원이 안전했다면, 계속 그곳에서 키울 수도 있지 않았나요?’
‘한 번 누이를 잃고 나니 차라리 눈에 보이는 곳에 두는 게 낫겠다 싶더군요.’
글로리아는 곧바로 이해했다. 전 백작 부인의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멀리 보낸다고 하더라도 언제 어떻게 들킬지 모르는 일이었다.
또 다니엘은 유일한 보호자로서 책임감도 느끼고 있었다. 전 백작 부인을 피해서 아주 멀어지면 그 아이를 보살필 수 없게 될 테니까.
그로서는 최선의 선택을 내렸다. 들킬 가능성은 높아도, 언제든 지킬 수 있도록 가까이 두는 것.
그래서 임시로 숨겨 둘 장소도 수도 내에서 찾았다. 그러다 알게 된 게 글로리아와 피터였고.
히아신스가 피터의 집에 머물게 된 후로 다니엘은 이곳을 몇 번 찾아왔다. 눈에 띄지 않는 차림에 모자를 깊이 눌러 쓰고 와 히아신스와 잠시 놀아 주고 피터와 글로리아와 이야기를 나눈 뒤, 그림 한 장을 사 갔다.
그 역시 전 백작 부인이 외출할 때를 노려 잠깐 들르는 거였고, 눈에 띄지 않도록 항상 2층에만 머물렀다.
오늘도 그는 히아신스를 무릎에 앉히고 글로리아와 마주 앉아 대책을 세우고 있었다.
“과연 공작 부인이 여기까지 알아내려 할까요.”
“미행을 붙일 수도 있어요. 이미 한 번 제 하녀를 이용한 전적이 있고요. 변장한 얼굴을 들켰으니 마음만 먹으면 알아낼 수 있을 거예요.”
“그렇게 해서 공작 부인이 얻을 게 있습니까?”
“속을 긁어 놨잖아요. 뭐가 되었든 협박할 거리를 잡으려 하겠죠. 그렇게 되면 히아신스도 위험할 테고요.”
“글쎄요. 어머니라면 몰라도, 공작 부인은 글로리아 양 미술 선생의 꼬질꼬질한 심부름꾼 아이가 저와 연관 있을 거라고 알아내기는 쉽지 않을 거 같은데요.”
글로리아는 그가 말하는 ‘꼬질꼬질한 심부름꾼 아이’를 바라보았다. 히아신스는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배시시 웃었다.
아이는 신기할 정도로 이곳에 잘 적응했다. 우선 자꾸만 피터를 ‘엄마’라고 부르는 걸 ‘선생님’이라고 부르도록 가르쳤다. 눈에 띄는 윤기 나는 머리카락을 단발로 싹둑 자르고, 옷도 평민이 입는 무명옷으로 갈아입혔다.
그렇게 며칠이 채 되지 않아, 히아신스는 금방 길거리 아이들처럼 적당히 지저분하고 해맑은 여자아이가 되었다.
이름 또한 새로 붙여야 했다.
다니엘은 전 백작 부인이 히아신스란 이름을 알지도 모른다고 했다.
‘그때 누이의 집에 찾아온 하인이 이름을 알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누이가 아이를 보호하려다 말한 거겠죠. 혹시 모르니 이름도 바꾸는 편이 좋겠습니다.’
글로리아는 다정한 목소리로 아이를 불렀다.
“베니스. 밑에 계신 선생님께 가서 도와드릴 게 없는지 여쭤보겠니?“
그러자 히아신스는 크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냉큼 다니엘의 무릎에서 내려왔다. 그러고는 종종걸음으로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1층에서 ‘선생님!’ 하는 외침이 들려왔다.
둘만 남겨지자 글로리아는 본격적으로 히아신스에 대한 소식을 알렸다.
“여차하면 히아신스를 스승님의 어린 제자 정도로 소개하기로 말을 맞춰 놨어요. 사정이 있어 맡게 된 먼 친척인데, 아직 나이가 어려 심부름만 시키고 있다고요.”
말은 그렇게 했으나 피터의 화실에 드나드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문가에 있는 커다란 창문도 그림이 상하지 않도록 전부 커튼으로 가려 두어 밖에서는 안이 보이지 않았다.
간혹 그녀의 의뢰인이나 갤러리 관계자가 찾아오긴 했지만, 피터는 그때마다 히아신스를 2층으로 올려보냈다.
갓난아이 때부터 숨어 자라서 그런지, 히아신스는 이런 부분에선 눈치가 빨랐다.
아이는 한 번도 떼를 쓰지 않았고 늘 얌전히 있었으며 피터도 잘 따랐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행동을 하는 아이를 보는 어른들의 마음은 늘 좋지 못했다.
잠깐의 침묵이 흐르고, 글로리아는 다시 화제를 가져와 말을 이었다.
“그럼 전 백작 부인이 공작 부인과 접촉할 가능성은요?”
“접촉할 순 있어도 별문제는 없을 겁니다. 어머니가 함부로 가문의 일을 공작 부인에게 알리진 않을 테니까요.”
다니엘이 조금 씁쓸하게 웃었다.
“주위 평판에 예민하고, 가문의 일이 남 입에 오르내리는 걸 끔찍하게 싫어하십니다. 명예를 위해선 죽음도 마다하지 않으시는 분이고요. 그러니 제 누이를 죽였겠죠.”
글로리아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백작 부인께서는 지금 어떻게 지내시나요.”
“수도에 오랜만에 올라왔으니 친구들을 만나며 시간을 보내고 계십니다.”
아무리 설명을 들어도 쉽게 불안감이 해소되지 않았다.
“만약, 부인이 히아신스를 찾아내면 그 뒤의 일은 생각해 두셨나요?”
“저도 글로리아 양과 마찬가지입니다. 협박은 협박으로 막아야겠죠.”
덤덤하게 말했지만, 그 안에는 분명 증오가 서려 있었다.
“어떻게요?”
“방법이 있습니다.”
글로리아와 다르게 그는 차분했다. 나름대로 모든 경우의 수를 고려한 듯 보였다.
괜찮겠지 하는 안일한 마음으로 누이를 잃었으니, 이번에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는 거겠지.
다니엘은 제 누이를 특이하다고 했지만, 글로리아 눈에는 그도 만만찮게 별종이었다.
현재 수동적으로 상황을 피하고 있었지만, 마주해야 할 상황이 오면 그는 거리낌 없이 어머니에게 대적할 생각이었다. 잘은 몰라도 충분한 무기가 다니엘의 손에 들려 있었다.
그러니 전 백작 부인이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채, 얌전히 수도에 머물다 영지로 돌아간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히아신스도 원한다면 좀 더 여기에 있을 수 있을 것이다. 가방에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커지기 전까지는 저택과 이곳 화실을 오고 갈 수도 있었다.
다행히 아이는 가방에 들어가는 걸 일종의 놀이로 생각해 큰 거부감을 보이지 않았다.
‘그럼 그 뒤에는?’
그녀는 아파 오는 머리를 짚으며 생각했다.
물론 모든 게 잘 풀리면 다행이겠지만 언제까지 이렇게 살 순 없었다.
“다니엘 경은 히아신스가 가문으로 돌아가길 원치 않으시나요?”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부인이 모르고 있는 사이 히아신스를 가문에 입적시키는 방법도 있는데, 그렇게 하지 않으셨으니까요.”
“그렇다고 해서 아이가 안전해지는 건 아닙니다. 어머니가 살아 계시는 한 위협 속에서 살 테죠.”
그는 전 백작 부인이 히아신스를 반드시 죽이려 들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건 비단 누이의 죽음으로 인한 과민 반응뿐만은 아닌 듯 보였다.
“무엇보다…….”
다니엘은 잠시 고민하다 말을 이었다.
“누이가 편지에 그런 말을 썼습니다. 히아신스는 자신처럼 살지 않기를 바란다고. 저는 아이가 제 엄마를 닮았을까 걱정됩니다.”
글로리아는 그가 말하는 ‘걱정’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히아신스에게 선택권을 주고 싶습니다. 원한다면 얼마든지 브라이트 성(姓)을 줄 수 있지만, 원하지 않는다면 그대로 떠날 수 있도록요.”
글로리아는 침묵으로 동의했다. 매번 느끼지만, 다니엘의 귀족답지 않은 개방적인 사상이 신기했다.
“제 욕심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럴 수도 있겠죠.”
다니엘의 눈동자가 소리 없이 글로리아에게 향했다.
“하지만 원래 아이들은 성인이 될 때까지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게 몇 없어요. 그때까지는 보호자가 대신해 주죠. 다니엘 경은 히아신스의 보호자 아닌가요.”
글로리아와 다니엘이 서로를 마주 보며 미소 지었다.
그러는 사이, 1층에서 또다시 요란하게 계단을 올라오는 어린아이의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재히! 선생님 도와주고 왔어.”
“잘했어, 베니스.”
해맑은 얼굴의 히아신스가 뛰어와 글로리아의 치마에 폭 안겼다. 글로리아는 아이를 들어 무릎에 앉혔다.
히아신스는 아직 발음이 어눌해도 나름 또박또박 말하려 애썼다. 그러나 글로리아의 이름, ‘제이’만큼은 어떻게 해도 ‘재히’가 되었다. 그녀를 부를 때마다 웃음이 새어 나오기 때문인 듯했다.
글로리아는 자신을 예전 이름으로 불러 주는 아이의 부스스한 머리카락을 가만히 쓸어내렸다.
여러 좋지 않은 상황에서도 하나 긍정적인 건, 아이가 이곳에 온 뒤로 피터와 글로리아도 웃을 일이 많아졌다는 점이었다.
피터도 그렇고, 글로리아도 이 작은 생명에게 꽤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다. 물론 다니엘만큼은 아니겠지만. 아이는 여전히 그녀에게 어려웠다.
다니엘은 오래 머물 수 없어 금방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번에도 그는 화실을 한 번 둘러본 뒤, 피터가 그린 작은 그림을 하나 골랐다.
돈을 받는 피터의 표정은 미묘했다.
“매번 이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양육비라 생각해 주십시오. 물론 선생님의 그림이 마음에 든다는 이유도 있고요.”
어느 순간부터 다니엘은 히아신스를 따라 피터를 ‘선생님’이라 불렀다. 이를 보며 글로리아는 데일도 자신을 ‘선생’이라 부르는 걸 떠올렸다.
‘친구라서 닮은 건지, 아니면 비슷한 사람끼리 어울리는 건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다니엘이 글로리아를 돌아보았다.
“그건 그렇고, 전부터 궁금했는데.”
“네?”
“저건 글로리아 양의 작품입니까?”
그가 가리킨 방향으로 글로리아와 피터의 고개가 돌아갔다. 피터의 바짓단을 쥐고 있던 히아신스의 고개도 함께 같은 곳을 향했다.
“아.”
글로리아는 말할지 말지 고민했다. 그건 전부터 따로 조금씩 그리고 있던 데일의 그림이었다. 초상화라고 하기도 뭣한.
평소에는 흰 천으로 가리고 있었는데, 히아신스가 건드렸는지 조금 흐트러져 삐죽이 캔버스가 보였다.
다니엘은 글로리아가 데일에게 초상화 의뢰를 진행하고 있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그때, 그는 ‘어쩐지, 요즘 외모에 신경을 좀 쓰더군요. 대련할 때도 그렇게 얼굴을 가리더고요. 생전 안 그러던 놈이 말입니다.’라고 말했고, 글로리아는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해 그저 하하 웃었다.
“네, 뭐.”
그에겐 딱히 숨길 일은 아니었기에 글로리아는 슬쩍 천을 들어 보였다. 제 친구의 얼굴이 불쑥 나타나자 다니엘은 그림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그러다 곧 시선을 떼고 그녀를 돌아보았다.
“글로리아 양, 데일에게는 계속 비밀로 할 겁니까?”
“그래야겠죠.”
“그런 허술한 변장이 먹힌 것도 신기한데, 지금까지 모르고 있다는 것도 신기하군요.”
그는 저번 글로리아의 몰골을 상기하듯 슬쩍 웃었다.
“글로리아 양은 데일이 여자는커녕 사람에게 도통 관심이 없는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합니다.”
눈썰미가 있는 사람이라면 바로 이상함을 눈치챘을 거라는 뜻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