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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후, 남주의 내연녀로 빙의했다 1
지은이｜유해령
펴낸곳｜루시노블
투고 및 문의 | lucy@sybook.kr
ⓒ유해령, 2025
이 전자책은 대한민국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저작물입니다. 출판권자로부터 서면에 의한 허락 없이 이 책의 일부나 전체를 어떠한 형태로도 재가공할 수 없습니다.
1
그렇게 해서 공주와 왕자는 평생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소설 속 마지막 문장을 의심하게 된 건 언제부터였는지 잘 기억나지 않았다.
정말 저대로 영원히 행복할 수 있을까.
항상 그런 의문이 한구석에 남아 있었다. 특별히 비관적인 성격이라서가 아니었다. 지금까지 봐 온 인간들이 그랬다.
본래 모든 사랑에는 끝이 있는 법이다.
타오르는 불꽃이 삽시간에 꺼져 버리는 사랑이 있는가 하면, 더 태울 것이 없어 천천히 사그라드는 사랑도 있었다.
만인의 축복 아래 영원을 맹세하는 결혼식장에선 모두가 웃는다.
모든 소설이 해피 엔딩으로 막을 내리면, 그 뒤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소설 속 인물은 물론, 그 소설을 지어낸 작가마저도.
그저 행복하게 식장을 걸어 나가는 두 주인공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언제까지나 그 사랑이 이어지기를, 행복만이 가득하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러나 그 안에서 누군가는 다른 이야기를 원했다면.
* * *
“어서 오십시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문은 두드리기도 전에 열렸다. 동시에 어떤 훤칠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글로리아는 노크하기 위해 들어 올렸던 주먹을 천천히 내렸다. 그리고 고개를 꾸벅 숙였다.
성별조차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모자며 스카프에, 장갑까지 꽁꽁 싸맨 그녀를 집주인은 경계하지도 않고 안으로 들였다.
스쳐 지나가며 글로리아는 슬쩍 그를 곁눈질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보석처럼 보이기도, 핏빛 웅덩이 같기도 한 눈동자였다.
보기 좋게 그은 피부와 그에 대비되는 새하얀 머리카락. 딱 맞는 정복을 두른 태산 같은 몸집.
숨이 막히도록 아름다웠다.
이들은 서로가 초면이었다. 그러나 글로리아는 그가 누군지 잘 알고 있었다.
데일 클라이드.
서브 남주. 경쟁자. 혹은 선택받지 못한 낙오자.
여주인공을 사랑했지만 끝내 그녀의 마음을 얻어 내지 못한 그는 이 행복한 이야기에서 그늘 같은 존재였다.
“이쪽으로.”
데일은 정중하게 글로리아를 안쪽으로 안내했다. 방 안은 이미 어느 정도 손님 맞을 준비가 되어 있는 상태였다.
글로리아는 한쪽 어깨에 짊어진 가방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그 안에서 큼지막한 스케치북과 흑연을 꺼내 글씨를 빠르게 써 내려갔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저에 대한 소개는 이미 들으셨죠.
그러자 데일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발화에 어려움이 있다 들었습니다.”
그는 눈앞에 서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아마도 갤러리 관장으로부터 들은 정보가 알고 있는 전부일 것이다.
―J입니다.
“데일 클라이드입니다.”
급하게 휘갈겨 쓴 글씨를 그는 용케도 금방 읽었다.
글로리아는 선 채로 한 팔로는 스케치북을 지탱하고 여백에 또다시 쓱쓱 글을 썼다.
―제대로 예를 갖추지 못하는 점 미리 사과드립니다.
그리고 흑연으로 제 모자를 가리켰다. 그러자 데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얼굴을 드러내길 꺼리는 분이라는 건 알고 있습니다. 아무 데서나 격식을 강요하는 편도 아니고요.”
글로리아는 순간적으로 드러난 그의 온기 어린 얼굴을 멍하니 응시했다.
그녀가 만일 스스로를 ‘J’가 아니라 본래 이름인 ‘글로리아 페이튼’으로 소개했다면 결코 볼 수 없었을 미소였다.
글로리아는 입을 가린 스카프가 흘러내리지 않도록 단단히 끌어 올렸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한쪽이 글씨를 쓰느라 형식적인 가벼운 대화도 더디게 흘렀지만, 그는 아직까지 귀찮은 내색을 보이지 않았다.
한 가문의 후계이자 현재 왕국의 기사단을 책임지는 그가, 평민으로 보이는 일개 화가에게 정중하게 대하는 모습만 봐도 어떤 성품의 사람인지 알 수 있었다.
글로리아는 스케치북을 먼저 테이블에 내려놓고 의자에 앉았다. 그녀가 먼저 자리를 잡자 데일도 따라 맞은편에 앉았다.
자리에 앉은 그녀는 다시 글을 썼다.
―초상화가 필요하시다 들었습니다. 저택에 걸어 두시는 건가요?
그렇게 쓴 스케치북을 돌려 보여 주자 고개를 끄덕였다.
“영지로 보낼 겁니다. 어머니께서 받아 보실 거고요.”
오늘 방문은 의뢰인을 처음 만나, 그가 원하는 그림을 파악하기 위한 자리였다. 글로리아는 미리 생각해 두었던 질문을 하나씩 적기 시작했다.
―생각해 두신 그림의 크기는요.
“따로 없습니다.”
원하시는 분위기나 의상은 있으신가요.
“원하는 게 있으시다면 준비해 두겠습니다.”
글로리아는 다음 문장을 쓰려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그는 스케치북이 아닌 글로리아를 보고 있었다. 필담에 상관없이 대화 상대에 집중하려는 듯, 진득한 시선에 글로리아가 먼저 눈을 돌렸다.
그리고 다시 흑연을 움직였다.
―그런 건 보통 의뢰인이 정합니다.
“그림만 필요했다면 그랬을 겁니다.”
글로리아는 그와 눈을 맞추는 대신 말문이 막혀 흑연으로 스케치북을 천천히 톡톡 두드렸다.
‘관장 말이 진짜였나 봐.’
처음 클라이드 기사단장이 그녀에게 의뢰하고 싶어 한다는 말을 전해 들었을 땐 당연히 거짓말이라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게, 어느 누가 모델을 구하지 못해 인물화를 그리지 않는다는 화가의 사정을 듣고 덜컥 초상화를 의뢰하겠는가.
그러나 관장의 말을 전해 준 그녀의 스승은 이렇게 덧붙이기까지 했다.
데일 클라이드가 J의 그림에 관심을 보이는 것도 모자라, 신인이라는 걸 알고 도움을 주고 싶어 한다고.
그가 그렇게까지 할 이유가 있냐는 반문에 스승은 그래서 그녀가 운이 좋은 거라고 했다.
데일은 이 바닥에선 은근히 유명한 컬렉터로 여태 화가의 인지도와 상관없이 마음에 드는 그림을 사 가기만 했지, 직접 의뢰를 한 것은 처음이라고 설명했다.
보통이라면 고민할 이유가 없었겠지만, 글로리아는 고민했다.
그녀는 일반적인 화가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글로리아 페이튼은 누구인가.
데일이 소설의 긴장감을 올려 주기 위한 서브 남주였다면 그녀는 그저 악역이었다.
행복한 완결을 맞이한 작품에 갑작스럽게 나타나 여주인공 이사벨 데비어스를 괴롭게 하는 연적.
부정한 관계. 정부. 혹은 내연녀.
글로리아는 남주인공 잭 데비어스가 여주와 결혼한 후 바람피운 상대였다.
그녀가 누구인지 데일이 알게 된다면 지금처럼 대할 리 없었다.
저 루비 같은 눈동자에도 혐오와 경멸이 형형하겠지.
비단 데일뿐만 아니라 누구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글로리아는 처음 눈을 뜬 순간부터 그런 위치였다.
데일은 이사벨의 소꿉친구로 아주 오래 그녀를 사랑해 왔으니 남들보다 더 많이 글로리아를 싫어할 것이다.
그러나 결국 글로리아가 고민 끝에 이렇게나 수상한 몰골로 그의 앞에 나타나 의뢰를 수락한 이유는 다른 게 아니었다.
데일은 그녀의 최애였다.
그녀가 글로리아이기 전부터, 그러니까 일개 독자였을 때부터 그랬다.
누구보다 데일을 좋아했던 그녀가 지금은 남주의 내연녀가 된 건 순전히 운이 나빴다고밖에 말할 수 없었다.
그건 로판 애독자라면 누구나 아는 흔하디흔한 빙의에서 비롯되었다.
지금으로부터 반년 전, 글로리아의 텅 빈 육신에 낯선 영혼이 뚝 떨어졌다.
‘보통 빙의라고 하면 낯선 천장에서 시작해, 집안 사용인들이 이상 행동을 하는 주인을 보며 비명을 지르는 게 일반적이지만.’
다시 생각해도 아찔한 순간이 떠오르자 글로리아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떴다.
글로리아 엘렌 페이튼. 그녀의 두 번째 인생은 그보다 더 많은 이들의 비명 속에서 시작되었다.
장소는 장례식이 한창인 성전이었다.
글로리아는 새하얀 꽃이 한가득 담긴 관짝에서 몸을 벌떡 일으켰다.
언젠가 그녀는 생각했다.
만에 하나, 자신이 로판에 빙의를 하더라도 그동안 읽어 온 수많은 매뉴얼과 데이터가 있으니 능숙하게 상황을 대처할 수 있으리라.
‘꺄아악!’
‘시, 시체가 살아났다!’
그러나 글로리아는 누구라도 이 상황에서 의연할 수 없었을 거라 장담했다. 귀신을 보기라도 한 것처럼 비명을 내지르는 사람들 앞에서 대체 뭘 할 수 있겠는가.
게다가 그녀는 공포에 질린 이들에게 침착한 목소리로 ‘진정하세요.’라고 말할 겨를이 없었다.
그녀 역시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파악하기 바빴으므로.
‘설마…… 나 죽은 거야?’
죽었다는 건, 다른 게 아니었다.
본래 그녀의 영혼, 평범한 대한민국에서 태어나 평범하게 졸업 전시를 코앞에 둔 미대생 강재희는 자신에게 벌어졌던 일을 떠올렸다.
이러다 정말 죽겠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긴 했지만 정말 죽을 줄은 몰랐다.
아주 잠깐의 어지럼증으로 화장실에서 발을 헛디뎠고, 그대로 미끄러졌으며 머리에 둔탁한 통증이 느껴졌다.
시야가 점멸하다 이내 어두워졌다. 그리고 다시 눈을 뜨니 이곳이었다.
그녀는 앙상하고 새하얀 팔로, 제 금색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점차 사그라드는 분위기 속에서 이번엔 그녀가 비명을 질렀다.
‘이딴 게 어딨어!’
다시 성전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렇게 강재희는 글로리아가 되어 새 인생을 시작했다.
그 후로 반년의 시간이 흘러 지금이었다.
―그렇다면 클라이드 님.
글로리아는 스카프 속에서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지금부터 제가 무얼 그리고 싶은지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러니 다시 말하자면, 그녀가 데일을 만나기로 결심한 결정적인 이유는 이것 하나로 귀결되었다.
글로리아는 합법적으로 최애의 팬아트, 아니 초상화를 그릴 수 있는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이상입니다.
그 문장을 끝으로 바쁘게 움직이던 흑연이 멈추었다.
의뢰인의 니즈를 파악하기 위한 질문을 하며 동시에 초안도 그리느라 글로리아의 손은 이 종이 저 종이 위를 넘나들었다.
초안을 완성한 종이에는 초상화를 어떤 식으로 그릴 건지에 대한 메모가 여기저기 적혀 있었고, 그 메모 한가운데에는 윤곽만 잡힌 남자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가만히 그림을 들여다보던 데일은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마음에 드시나요?
“예.”
그는 간단명료하게 대답했다.
데일을 잘 모르는 사람이면 그 대답이 진심인지 겉치레인지 헷갈렸을 테지만 글로리아는 잘 알았다.
데일은 불만이 있거나 이견이 있으면 그것 또한 간결하게 전달하는 사람이었다. 모든 일을 효율적으로 처리했고, 데일만큼 공과 사를 구분하는 사람도 없었다.
그에게 있어 사적인 영역은 말할 것도 없이 이사벨뿐이었고.
―그럼 필요한 재료와 캔버스를 가지고 다음 주에 다시 방문하겠습니다.
글로리아 역시 의뢰인이 마음에 든다 했으니 더 덧붙일 말은 없었다.
대신에 마지막으로 그에게 전할 말을 적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