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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



“무슨 소리야. 네가 말한 것들, 난 다 기억하고 있는데.”
“내가 말 안 한 게 있는데, 그건 기억하지 못하잖아. 그러니까, 그건… 나중에 말해 줄게.”
“대체 무슨 말인지….”

기억 속을 헤집어 보아도 도무지 떠오르는 건 없었다.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어. 그냥, 언젠가 알게 될 거야.”

에반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엘라처럼 음흉한 꿍꿍이가 있는 건 아니겠지?’

나는 의심스럽게 에반을 바라보았다.

“그나저나 내가 궁금한 건 다른 쪽인데. 음. 그러니까….”

에반은 잠시 동안 말을 꺼내기를 주저했다.

“요즘 너, 공작이랑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지?”
“무, 무슨 일이 있을 리가!”

아차. 괜히 허를 찔린 느낌에 순간 당황하고 말았다.
에반은 내 반응을 살피더니, 표정을 차갑게 굳혔다.

“…무슨 일이 있었구나.”
“알잖아. 저번에도 말했다시피 바실레온과 나는 동료 사이일 뿐이야. 그마저도 내가 요즘 악령으로서의 역할을 하지 않아서 애매해졌고.”

솔직히 말해서 이런 변명을 에반한테 왜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바실레온에 대한 내 마음이 커지는 걸 접어 둔다 해도, 내가 에반을 좋아할 일은 없을 게 분명한데.

“네 마음은 중요하지 않아. 레이븐우드 공작의 마음이 중요하지.”
“내 마음이 중요하지 않다고?”

어이가 없었다. 나를 완전히 무시하는 발언으로 느껴졌기에.
나는 잔뜩 기분이 나빠져서 에반을 매서운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좋아한다는 사람한테 태도가 그러니? 내가 물건이라도 돼?”

내 대답에 에반은 주먹을 꽉 쥐었다. 마치 올라오는 울분을 참기라도 하듯이.

“…미안해. 하지만, 나는 레이븐우드 공작에게 몇 번이고 무참히 살해당했던 사람이야. 내가 말하고자 하는 건…. 네가 나에게 마음이 있건 없건 너를 존중한다는 거야. 하지만 공작이 너에게 마음이 있다면, 그건 못 참겠어.”
“하지만 에반. 바실레온도 살인마가 되고 싶어서 된 게 아니야!”

순간, 나는 엉겁결에 언성을 높여 버렸다.
저벅-.
그런데 대화 소리를 들었는지, 누군가가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악령?”

복도를 지나가던 릴리스와 눈이 마주쳤다.

“뭐야. 에반, 당신이 여긴 왜… 분위기가 왜 이래요?”

그 말을 듣자 감정이 북받쳐 올라, 나도 모르게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그 탓에 상황이 조금 이상하게 비쳐졌다.

“악령. 너랑 한번 대화해 보고 싶어서 찾고 있었는데. 그런데 상황이, 음….”
“릴리스. 미안하지만 나중에 대화해. 지금은 도저히 그럴 기분이 아니라서 말이야.”

나는 얼굴을 보이지 않으려 애를 쓰면서 자리를 피했다.
구석진 곳을 빠져나오자 참고 있던 눈물이 주룩주룩 흘러나왔다.

“훌쩍-.”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에반의 입장을 내가 전혀 고려하지 못했던 것 같다.
당연한 거겠지. 생존자들의 입장에서 바실레온은 살인마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닐 것이다.
더군다나 모든 기억이 되살아났다면 더욱이.

‘거기서 왜 바실레온을 변호해. 바보 같으니. 멍청하고 답도 없는….’

그때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졌다.

“뭐, 뭐야. 악령 너. 울어?”

몰래 구석에 숨어 있던 메리가 입을 틀어막고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메리 크로우. 언제부터 거기 숨어 있었지?”
“흥. 내, 내가 굳이 왜 숨겠어. 그냥,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오가길래 가던 길을 멈춘 것뿐이라고.”

그리고 메리의 뒤쪽에서 시커멓고 우람한 실루엣이 보였다.

“어. 네 뒤에!”
“메리 크로우. 엄청 흥분했다. 재밌다고. 에반, 악령 좋아한다고. 완전 대박 사건이라고 했어. 엿듣자고.”

갑자기 나타난 하벨이 모든 사실을 떠벌렸다.

“하벨! 입 좀 다물어요!”

퍽-!
메리가 하벨의 어깻죽지 부근을 주먹으로 내려쳤다.

“걔 맷집이 장난이 아닐 텐데, 그걸로 되겠어?”
“진짜, 이 사람을 정말!”

아니나 다를까, 메리는 하벨을 때린 제 주먹이 아픈 듯 손을 감싸 쥐었다.

“메리 크로우. 거짓말은 나쁘다.”

하벨이 정색했다. 나름 충고랍시고 하는 말이 웃겼다.

“당신이 몰래 식량 축내는 것보단 안 나쁘다고요!”
“그 음식들도 내 입안에 들어오는 걸 더 좋아한댔어.”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를…!”
“쉬, 쉬! 잠깐 조용해 봐.”

나는 메리와 하벨의 입을 다물게 한 후, 귀를 기울였다.

“당… 악령… 무슨…!”

조금 떨어진 곳에서 릴리스와 에반의 목소리가 조금씩 들려왔다.
조금 소란스러운 것을 보니, 서로 다투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흐응. 또 재밌는 구경거리가 있나 봐?”
“메리. 싸움 구경이 재밌어?”

나는 먼저 메리를 앞장서 날아가면서 물었다.

“너도 괜히 궁금하니까 가 보는 거잖아.”
“그건 맞지만.”
“내가 숨어 듣는 건 또 전문이니까 이리 와. 하벨, 당신도요.”

메리는 자리를 잡고 하벨과 나에게 오라고 손짓했다.

“이런 넓은 성이나 저택에는 사용인들이 사용하는 공간이 숨어 있어요. 눈에 띄지 않게 말이죠.”

메리도 하녀 출신이니, 그쪽 방면으로는 전문 분야일 것이다.
릴리스와 에반의 대화를 몰래 엿듣기에 적당한 거리였다. 그리고 숨겨져 있기에 티도 나지 않았다.

“그러니까, 에반. 악령을 좋아하는 게 사실이란 말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