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에반 마르티네즈에게 〈빙의〉를 사용했습니다.

내가 악령이 된 이후, 처음으로 사람에게 빙의를 시도한 순간이었다.
살인마에게 인간을 갖다 바치기 위한 이유였다.

“이비엔.”

섬뜩하고 익숙한 목소리가 나를 불렀다.

“이비엔 몬트로즈. 어디 있는 거지?”
“으응, 바실레온! 나 여기 있어!”
“…거기 있었구나?”

말할 때마다 느껴지는 은은한 광기.

‘미친놈.’

그림자 속에서 내 모습을 드러냈는데, 어째선지 놈의 표정이 점점 굳어 가는 게 보였다.

“왜, 왜 그래?”
“…나와.”

나는 곧장 말귀를 알아먹고, 빙의를 풀었다.
빙의가 풀리자 의식을 잃은 인간이 바닥에 쓰러졌다.
스릉-.
놈은 그 인간을 향해 망설임 없이 검을 뽑아 들었다.
바실레온 레이븐우드. 저 극악무도한 살인마의 이름.
흑발 곱슬머리에 핏방울을 연상시키는 붉은 왼쪽 눈. 창백한 피부 아래로 날카로운 눈매가 차갑게 빛났다.

“…내가 인간 남자한테 빙의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에?”

‘이보세요. 나는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없습니다만.’

…아무래도, 살인마가 나한테 집착하는 것 같다.
나는 저 섬뜩한 살인마를 도와줘야 하는 깜찍한 악령 이비엔 몬트로즈.
아. 사실 깜찍하지는 않고, 놈과 비슷한 ‘미친 악령’이다.

* * *

〈레이븐우드가의 저주〉.
이 서바이벌 탈출 호러 게임의 이름.

게임 속 메인 빌런인 미친 살인마, 레이븐우드 바실레온을 피해 공작령 바깥으로 탈출하는 게 목적인 게임이었다.
나는 이 공포게임의 고인 물로서, 새롭게 업데이트된 모드를 쉽게 깰 수 있었는데….
내 뛰어난 게임 실력으로 단시간에 클리어한 게 패착이었을까?

10… 9… 8… 7… 6….

분명 게임이 끝났는데, 화면 속에서 숫자가 카운팅되더니 의식을 잃고 말았다.
그리고 눈을 떠 보니 이 게임 속이었다.
평소에 빙의물을 재밌게 읽었지만, 진짜 게임 속에 빙의할 줄은 누가 알았겠냐고!
그것도 머리는 산발, 온몸은 피투성이에 낡은 보라색 옷을 입고 다니는 질 나쁜 악령에게.
그뿐 아니라 악령은 어린아이쯤 되는 정신 연령에 장난기 넘치는 사이코패스였다.

“헤헤. 나아. 네가 좋아하는 등유 램프를 숨겼어! 아무것도 안 보이겠지만 찾아 볼래?”
“풉. 놀란 얼굴 하고는. 너 지금 뭉개진 밀가루 반죽 같아! 우히히!”
“으응…. 너 지금 장롱에 숨은 거야? 그럼 내가 간지럽히기 딱 좋잖아! 깔깔깔!”

…이런 대사를 날리고 다니는 사이코.
이럴 줄 알았으면 평소에 농사짓는 힐링 게임이나 할걸.
그 사이코 같은 말투를 따라 하는 건 배우 지망생도 어려울 거라 생각했는데.
한국 사회에서 나대지 않고 본능을 잠재우며 살아왔기 때문일까?
내 안에 숨어 있던 중2병과 관종병이 발휘되어, 악령 흉내가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좋았어. 히힛, 죽어! 못생긴 인간!”
“꺄하하. 그걸로 나 때리게? 때려 봐! 때려 봐!”

단지 적응이 안 되는 건 악령이다 보니, 공중을 날아다니고 아무것도 만질 수가 없다는 거였다.
어쨌든, 악령에 빙의한 이후 생존자들에게 공포를 심어 준 뒤 바실레온에게 갖다 바치곤 했다.
나쁜 악령 역할에 맞게 메인 빌런인 바실레온을 도와줘야 게임에서 나갈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결국, 내 도움으로 바실레온은 모든 생존자를 빠르게 없앨 수 있었다.

! 모든 플레이어를 처치했습니다.
GAME OVER
! 시작점으로 되돌아갑니다.

하지만 게임 오버가 뜨자마자 첫 장면으로 되돌아가 버렸다. 욕이 저절로 튀어나왔다.
그 뒤, 도저히 현실을 믿을 수가 없어 다시 충실히 악령 역할을 수행해 왔지만, 결과는 같았다.
그 짓을 몇 번 반복한 뒤로, 깨달은 점이 있는데….
아무리 악령답게 행동해 봐도 내가 여전히 게임 속에 갇혀 있다는 건, 다른 시도를 해야만 엔딩을 볼 수 있다는 게 아닐까?
그러니까, 지금까지 해 온 것과는 상반되는 방향으로.
지금까지는 바실레온을 도왔다면, 이번에는 생존자들을 도와준다거나.
그럴듯한 생각을 떠올리자, 눈앞에 그놈의 지긋지긋한 상태창이 나타났다.

! 시작점으로 되돌아갑니다.

‘이런….’

마음의 준비를 할 새도 없이 나는 또다시 지옥에 내던져졌다.

* * *

“레이븐우드 공작께서는 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거지?”

호화로운 샹들리에 아래. 한 귀족이 이마에 주름을 잡으며 불평을 늘어놓았다.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걸까요? 이렇게 많은 사람을 모셔 놓고 말이에요.”

시간이 흐를수록 공작의 생일 연회에 초대받은 손님들의 표정이 점점 더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가주님께서는 여러분을 위해 특별한 선물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시기를 바랍니다.”

집사는 자동 응답기처럼 똑같은 말을 한 시간째 반복했다.

‘제발 그만 좀….’

반복된 게임을 거쳐 왔기에, 이 모든 대화는 아주 지겹게 들었던 거다.

“드디어 레이븐우드의 가주를 보는가 했더니, 역시 기대하지 말았어야 했어.”

그중, 대머리 귀족이 분노를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런 푸대접을 받고 싶지 않다면, 여러분도 얼른 나가는 게 좋을 겁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을 돌아보며 충고했다.
그 후 만찬장을 나가기 위해 입구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는데.
하인들이 튀어나와 대머리의 앞을 막아섰다.

“이게 대체 무슨 짓인가?”
“…가주님의 허락 없이는 이곳에서 나가실 수 없습니다.”

대머리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달아올랐다.

“허락? 정신이 나간 건가? 지금 누구보고 못 나간다는 거야! 비켜!”

그가 하인들을 밀쳐 내고 나가기 위해 어깨를 들이밀었다.
그런데.
철푸덕-.
하인들을 관통해 바닥으로 엎어져 버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