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 캐릭터가 엔딩을 기억한다 1권
남자 캐릭터가 엔딩을 기억한다 1권
남자 캐릭터가 엔딩을 기억한다
1
하나영
남자 캐릭터가 엔딩을 기억한다 1권
차례
프롤로그
빙의 여주가 되었다
남자 캐릭터가 엔딩을 기억한다(1)
남자 캐릭터가 엔딩을 기억한다(2)
남자 캐릭터가 이상함을 눈치챘다
남자 캐릭터가 엔딩을 기억한다 1권
프롤로그
“너 누구야.”
황금색 머리카락이 석양빛을 받아 주홍색으로 물들고 있었다. 석양의 빛을 받아 얼굴의 음영이 더욱 뚜렷하게 드러난 그 얼굴은, 제국 제일의 미라고 불리는 황태자답게 아주 아름다웠다.
위로 시원하게 올린 금색 머리카락 아래로, 부드러운 호선을 그리는 이마가 한껏 주름져 험악함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만 제외하면 말이다.
“대체 너 누구냐고!”
신경질적인 외침과 함께 테오의 큼직한 손이 엘라의 손목을 잡아챘다. 조금만 더 세게 쥔다면 엘라의 가느다란 손목이 곧 부러질 것 같았다.
“누, 누구냐니요, 전하. 저, 저는 에버그린 가의 엘라입니다.”
이 와중에도 침착함을 유지하려고 애쓰던 엘라가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했다. 정말 엘라는 귀족 영애의 표본 같다.
“우리가 말하는 건 그게 아니야.”
칼릭스가 만류하며 테오의 어깨를 쥐었다. 그제야 테오는 자신이 흥분했다는 걸 깨닫고 손에 힘을 풀었다. 하지만 테오의 푸른 눈은 여전히 매섭게 엘라를 노려보고 있었다.
“엘라, 너는 엘라가 아니야.”
테오와 마찬가지로 노을 때문에 더욱 붉게 물든 머리카락이 칼릭스의 진한 눈썹 위로 차분하게 내려앉았다.
항상 웃기만 해서 팬들 사이에서는 ‘칼뭉이’라고 불리는 그의 초록색 눈은 여전히 웃고 있었지만, 그에게서 풍기는 분위기만은 전혀 달랐다.
사람의 웃는 얼굴에서, 살기가 느껴지기도 한다는 걸 오늘에서야 처음 알았다.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다들! 내가 엘라인데, 왜 나보고 엘라가 아니냐고 하는 거죠?”
엘라는 이제 돌아 버리겠다는 듯 제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그녀의 솜사탕 같은 연분홍색 머리카락이 마구잡이로 엉켜 버렸다.
아무런 영문도 모르는 엘라의 입장을 생각해 보면, 정말 돌아 버리기 직전이겠지.
나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며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지금 저 사이에 끼어들 수도 없고, 그렇다고 주인 아가씨가 세 명의 남자에게 위협을 받고 있는데 그냥 모른 척 갈 수도 없고!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발을 동동 구르고 있을 때였다.
“엘라 공녀님, 솔직하게 대답해 주셔야 합니다.”
오웬이 허리춤에 있는 검 손잡이를 쥐었다. 옆에서 바라본 그의 턱선은 참으로 잘 빠져 섹시해 보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엘라를 바라보는 오웬의 보라색 눈동자는, 여차하면 정말 칼이라도 뽑아 들 것처럼 형형히 빛나고 있었다.
어딜 보더라도, 세 남자 모두 사랑하는 여자 주인공을 보는 표정은 아니었다.
아니, 이건 이상하잖아.
잘못됐다. 뭐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된 게 틀림없었다.
여자 주인공이 저기에 있는데, 다들 여자 주인공이 어딜 갔냐며 화를 내는 상황이니 분명 이상한 게 맞다.
단체로 기억 상실에라도 걸린 게 아닌 이상, 엘라 앞에서 엘라가 어디 있냐고 묻는 건 이상하잖아.
“우리가 알던 엘라 에버그린 공녀는 어디에 있습니까.”
오웬은 기어코 검을 뽑아 들어 엘라의 새하얀 목에 가져다 댔다. 아니 이러다가 엘라에게 상처라도 나면 어쩌려고!
도대체 어디서부터 뭐가 잘못된 걸까. 내가 이 게임에 빙의하고 나서? 아니면 원작을 따라가지 않고 내가 남자 캐릭터와 이어지려고 해서?
나는 잠깐 눈을 감고 그날을 떠올렸다. 내가 여기에 빙의하기 직전을.
남자 캐릭터가 엔딩을 기억한다 1권
빙의 여주가 되었다
“앗싸! 히든 엔딩까지 공략 성공이다!”
나는 시시덕거리며 스마트폰 화면에 집중하고 있었다. 내가 요즘 푹 빠져 있는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 〈시한부 공작 영애의 소원은 연애〉 때문이었다.
여기에는 총 세 명의 남자 캐릭터가 등장한다.
1. 집착 남주의 표본인 황태자 ‘테오 아를로스’.
그는 아르카나 제국의 황태자로 황금 같은 금발, 바다 같은 푸른 눈을 가지고 있다. 일러스트 하나는 죽여 준다는 피치 게임사답게 진짜 눈부시게 아름다운 미남이다.
2. 후회 남주를 맡고 있는 유명한 제국의 바람둥이 소후작 ‘칼릭스 카를리온’.
주황색 머리카락과 녹색 눈동자, 쾌활한 성격에 사교계를 주름잡는 파워 외향형으로 매일같이 여자를 갈아 치운다.
하지만 자신에게 큰 관심 없는 엘라에게 흥미를 느끼다 나중에야 본인의 마음을 자각하고 열심히 플러팅을 날린다.
3. 마지막! 지고지순 순정 남주 기사단장 ‘오웬 헤르데스’.
칼릭스와는 반대로 오웬은 파워 내향형이라고 할 수 있다. 부드러운 갈색 머리카락, 선명한 보라색 눈동자, 그리고 세상 순하게 생긴 얼굴에 그렇지 못한 몸의 밸런스가 아주 기가 막힌다.
“후후, 흉부가 아주 기가 막히지.”
오웬은 어릴 때부터 엘라의 주변을 맴돌지만 자신의 마음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가, 테오와 칼릭스가 엘라에게 접근하면서 자신의 마음이 충성심이 아니라 사랑임을 깨닫는 마음 아픈 캐릭터다.
아무튼, 위의 세 명을 공략하는 이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은 시한부 공녀 엘라가 ‘죽기 전에 연애를 해 보자!’ 다짐하면서 세 명의 남자 캐릭터를 선택해 공략하는 게임이다.
일러스트도 화려하지만 엔딩이 정말 다양했다. 시한부로 죽는 엔딩, 남자 캐릭터들에게 죽임을 당하는 엔딩, 파산해서 망하는 엔딩 등 배드 엔딩 종류만 해도 열 가지가 넘었다.
행복한 연애에 성공하지만 시한부로 죽거나 연애는 실패해도 자수성가하는 노멀 엔딩도 있었고, 불치병을 치료해 각자 결혼하는 해피 엔딩도 있다.
그리고 내가 오늘 처음으로 성공한 세 명 모두와의 역하렘 히든 엔딩까지!
“하, 이 엔딩 페이지 다 채운다고 돈을 얼마나 쓴 거야.”
히든 엔딩까지 엔딩 슬롯을 모두 채워서 뿌듯했지만, 순간 통장 잔고 생각에 암울해졌다.
남들은 게임에 무슨 돈을 그렇게 많이 쓰냐고 할지 모르겠지만, 내 삶의 유일한 낙이 바로 이 게임이었다.
현실에서 절대 이런 외모의, 나만 바라보는 남자가 있을 리 없으니까! 나는 거지 같은 구남친들을 생각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나는 게임도 하면서 나름 있는 손재주로 부업도 하고 있으니 이 정도는 써도 되는 거 아닐까? 파산할 수준 아니면 됐지.
“어쨌든 엔딩은 다 봤고~.”
나는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게임 초기 화면으로 돌아갔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오웬 해피 엔딩을 한 번 더 볼까?”
원래 좋은 건 한 번 더 보고 싶은 법 아니겠는가? 생긴 것부터 하는 행동까지 모두 내 스타일인 여주바라기 오웬의 엔딩을 한 번 더 플레이하려고 ‘초기화하기’ 버튼을 눌렀다.
처음으로 되돌아가시겠습니까? 모든 추억이 사라집니다.
익숙하게 뜨는 경고문.
나는 ‘네’ 버튼을 누르고 네모난 로딩 바가 다 채워지길 기다리며 횡단보도를 건넜다. 어서 집에 가서 새로 플레이해야지~.
빵빵!
순간 커다란 경적이 귓전을 때렸다. 뭐야, 하고 돌아볼 틈도 없이 내 몸이 붕 떠올랐다.
어라?
큰 충격과 함께 아스팔트 도로 위를 덮은 검붉은 피가 보였다. 그리고 피가 튄, 할부가 12개월이나 남아 있는 스마트폰 액정 역시 눈에 들어왔다.
와, 액정이 산산조각 났네. 큰일이다. 내가 액정 파손 보험을 들었던가? 저거 수리는 될까?
“꺅!”
“119 좀 불러요!”
사람들의 외침이 들렸다. 어휴, 어서 누가 병원으로 좀 데리고 갔으면 좋겠네.
※초기화 오류※
그때, 빨간 글씨로 에러 창이 뜬 화면이 보였다. 아무래도 차에 같이 치이면서 핸드폰도 맛이 간 모양이다.
“여기요! 여기예요!”
“이봐요, 아가씨! 괜찮아요?”
구급대원이다. 아, 모르겠다. 우선 치료부터 받고 생각하자.
“아가씨 눈 떠요! 정신 차려요!”
구급대원을 보자 마음이 놓여서인가? 잠이 몰려온다. 조금 자고 일어나야지.
* * *
웃음을 멈출 줄 모르는 남자는 결혼식을 앞두고 있었다. 사방은 색색의 꽃들이 서로 자태를 뽐내면서도 어느 것 하나 모나지 않게 장식되어 있었다.
화려한 샹들리에는 넓은 연회장을 밝히고 있었고, 풍부한 선율이 홀을 감쌌다. 결혼식에 초대받은 이마다 아름다운 식장을 보며 감탄을 흘렸다.
「신부가 정말 아름답죠?」
「에버그린 공녀가 원래 아름답기로 유명했잖아요.」
「신랑도 얼마나 듬직해요? 선남선녀가 따로 없어요!」
신랑과 신부를 칭찬하는 하객들 사이에서, 새하얀 드레스를 입은 엘라가 등장했다.
사랑스러운 분홍색 머리카락은 하나로 틀어 묶어 생화와 비즈로 장식되어 있었고, 티아라에 이어진 새하얀 면사포가 그녀의 가녀린 어깨 위로 떨어졌다. 반짝이는 다이아와 레이스가 장식된 드레스는 엘라 정도의 외모가 아니면 차마 소화해 내지 못할 정도로 화려했다.
그런 엘라를 사랑스럽게 바라보는 남자의 눈앞에 갑자기 이상한 게 떴다.
※초기화 오류※
두 눈을 비비고 다시 바라봤지만, 여전히 창이 떠 있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사람들을 쳐다봤지만 아무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마치 그의 눈에만 보이는 것 같았다.
‘이게 대체 뭐지?’
미간을 찌푸린 남자가 조심스럽게 오류 문구를 향해 손을 뻗는 순간, 세상이 암흑으로 뒤덮였다.
“헉!”
지끈거리는 두통에 눈을 떴을 때, 나는 웬 길거리에 서 있었다.
아니, 보통 이런 경우에는 침대 위에서 눈을 뜨는 게 정석 아닌가? 의아했지만 어쨌든 주변을 살폈다. 중세 시대 유럽풍의 길거리가 눈에 들어왔다.
“와, 대박.”
살면서 유럽 여행을 가 본 적은 없었지만, 이곳이 유럽풍 배경의 어느 작품 속이란 건 확신할 수 있었다.
치렁치렁한 드레스를 입은 아가씨들, 그 뒤를 따라가는 사용인들, 도로 위를 달리는 마차와 저 멀리 우뚝 솟아 있는 성까지.
아무래도 내가 그 유명한 빙의 트럭에 치인 모양이었다.
“그거 들었나? 에버그린 공작가가 곧 망한다는 소문!”
“들었다마다. 공작님께서 갑자기 돌아가시고 나서, 방계 가문의 조카가 공작 대리를 맡더니 모든 게 엉망이 되었지 않나.”
에버그린 공작가. 너무나 익숙한 그 이름과 지겨울 정도로 플레이해서 외워 버린 대사들.
분명 내가 죽기 전까지 하던 〈시한부 공작 영애의 소원은 연애〉. 즉 ‘시소연’이 분명했다. 그것도 게임의 프롤로그 부분 말이다.
“후후후! 하하하!!”
나는 길거리에서 음흉하게 소리 내어 웃었고, 지나가던 사람들은 그런 나를 미친년 취급하며 슬금슬금 피했다.
하지만 알 바냐! 다른 사람 시선 따위 상관없었다.
시소연은 내가 모든 엔딩을 본 게임이다. 공략법도 익히 다 알고 있다. 이 게임에 빙의했으니 해피 엔딩이야 따 놓은 당상!
심지어 게임 속 여주 엘라는 세계관 제일의 미녀에, 공녀라는 귀한 신분이었다. 이런 곳에서 빙의? 너무나 좋지!
“무슨 엔딩을 타지?”
생각해 보자. 황태자인 테오와 결혼하면 부와 권력까지 손에 얻는다.
이 제국에서 가장 높은 지위를 가진 여자가 될 수 있다. 하지만 내가 복잡한 궁중 예절이나, 머리 아픈 내명부 서류를 과연 처리할 수 있을까?
무리다, 무리. 게다가 황태자는 집착 하나는 쩌는 집착 남주의 표본이잖아? 그런 남자와의 연애라니.
남의 입장일 때야 설레고 즐겁지, 막상 당사자가 되면 피곤하기만 하고 심지어는 공포라고.
그렇다면 소후작 칼릭스? 이리저리 방탕하게 놀던 나쁜 남자가 나에게 푹 빠져서 플러팅하는 모습은 물론 매력적이다. 게다가 후회 남주라니 짜릿하지.
하지만 개인적으로 바람둥이는 질색이다. 한 번 나쁜 놈은 영원한 나쁜 놈이라는 걸, 현실에서 지겹게 겪어 봤잖아?
“사람은 고쳐 쓰는 거 아니랬어.”
무엇보다 나쁜 남자에게 끌릴 나이는 이제 아니지.
그렇다면 내 최애인 기사단장 오웬! 젊은 나이에 오직 실력 하나로 기사단장 자리를 차지한 사람.
용모 단정은 물론 성격까지 좋아서 많은 제국민들의 존경을 받는 사람이다. 역하렘인 히든 엔딩도 끌리긴 하지만, 그래도 역시 최애와의 해피 엔딩이 최고 아니겠어?
오웬은 게임 초반부터 여주바라기 설정이라 다른 남주 공략할 때도 찌통을 유발하던 캐릭터로 명실상부한 나의 최애였다.
“좋아, 역시 최애다!”
오웬의 해피 엔딩 공략법이 어떻게 되더라. 우선 누구를 공략하든지 간에 초반에 공작가를 말아먹고 있는 공작 대리를 먼저 치워 버려야 해.
게임 속에서는 남자 주인공들이랑 천천히 꽁냥꽁냥거리면서 정보를 캐냈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