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5. 동상각몽
16. 조우
17. 나쁜 꿈의 엔딩
18. 여행이 끝나고 난 뒤
19. 다시 사랑한다 말할까
20. 눈부신 고백
외전1. 신혼일상
외전2. 사내 부부의 사정
15. 동상각몽
사전적 풀이에 의하면, 쓸모없이 된 사람을 폐인이라 한다고.
준경은 지금 제 꼴이 딱 그 짝이지 않나 생각했다.
자택 근무를 핑계로 시작한 칩거와 함께 요즘 그는 술 없이는 살지 못하는 중이었다.
정확히는 술에 취해야 겨우 잠들고, 다시 술기운을 빌려 순간순간을 버티면서 하루를 힘겹게 넘기는 중이라는 표현이 정확했다.
어쩌면 오늘도 그래야 하지 않을까.
“으으…….”
해가 중천에 뜬 늦은 오후에서야 느지막이 눈을 뜬 준경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앉자마자 미간을 구겼다. 숙취가 밀려들어 골이 깨질 것만 같았다.
나직이 한숨을 내쉬던 그는 잠시 침실을 둘러보았다.
여전히 생활감이 느껴지지 않는 고요한 방 안은 적적하다 못해 축축했고, 무거웠다.
갑갑증을 느낀 준경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조갈이 난 목을 축이기 위해 침실 밖으로 나서려던 바로 그때였다.
침대 아래, 실내용 슬리퍼에 발을 끼우려다 말고 제 발끝에 채는 무언가에 멈칫했다. 무심히 고개를 내리고 천천히 몸을 굽혀 주워 든 것은 다름 아닌 진주 귀걸이 한 짝.
당연하게도, 상아의 것이었다.
모를 수가 없었다. 다른 여자를 둬 본 적 없기도 했지만, 할머니의 성화에 못 이겨 결혼기념일이란 구색에 맞춰 제가 직접 선물한 것이었으니까.
매사 정리 정돈이 몸에 밴 상아가 언제 이렇듯 칠칠치 못하게 흘렸을까로 생각을 잇자, 문득 어느 밤의 기억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충동적으로 그녀를 안았던 밤.
기억이 잘 나지 않는 듯 준경은 인상을 찌푸려 드문드문 나는 기억을 끄집어냈다.
술기운에 무작정 화장대를 붙잡고 서게 한 뒤, 그녀 뒤에서 거칠게 허리 짓을 해 댔었다.
신음하는 상아의 턱을 붙잡아 제 쪽으로 돌려 게걸스럽게 입 맞췄던 순간과 그즈음 귀걸이가 떨어진 건지 움찔하던 유약한 몸짓도.
―흐으, 귀걸…… 귀걸이가……. 으읍!
바르작대며 숨 쉴 틈을 바라는 그녀의 의견을 기꺼이 묵살한 채 더욱이 아래를 접붙이기에 정신없었다.
그야말로 짐승 같은 제 만행을 떠올리자니 준경은 순간 구역감이 치밀었다. 과거의 제 모습이 스스로 생각해도 역겨워 견딜 수가 없었다.
늘 이런 식이다. 이렇듯 다 지난 과거의 기억들이 그를 도무지 견딜 수 없게 했다.
상아의 빈자리가 짙어질수록 그 존재의 소중함과 더불어 한없이 모질었던 제 모습을 마주하자면 술 없이는 버텨 낼 수가 없었다.
준경은 결국 달아나듯 침실을 벗어나 곧장 주방으로 향했다.
도수 높은 술병을 손에 잡히는 대로 꺼내 들곤 병째로 들이켰다.
꿀떡꿀떡. 가쁘게 오르락내리락하는 목울대. 입꼬리를 타고 술이 흘러내릴 만큼 조급하게 술을 들이켠 그는 이내 마셔도 도리어 자꾸만 타들어 가는 속에 미칠 것만 같았다.
“하아…… 하아…….”
그대로 장식장에 등을 기댄 채 주르륵 미끄러지듯 주저앉은 준경은 고개를 쳐든 채 두 눈을 감았다.
상아를 떠올릴수록 하루하루, 그녀가 떠난 이유에 대해 이해가 가는 상황들이 가슴을 먹먹하게 했다.
처음엔 막연히 주제넘게 욕심이 크다― 생각한 게 사실이었다. 애초에 계약으로 시작한 결혼이었고, 조건을 내걸면서 이어진 부부관계였지 않냐고.
대체 왜 사랑 같은 성가신 마음까지 바라는 거며, 그걸 제가 왜 줘야 하느냐고.
상아가 떠난 후에도 줄곧 괘씸한 마음으로 갑갑함을 느꼈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번번이 마주하게 되는 과거의 형상들.
―비 오는데 왜 나와 있습니까?
―……빗소리가, 좋아서요.
―뭐?
―잠시 산책하던 중이었거든요. 근데 때마침 퇴근길이셨네요?
―…….
―제가 별로 안 반가우실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저는 여기서 마주친 거 너무 반갑고 좋아요.
―…….
―오늘도 고생 많았어요, 준경 씨.
상아의 자잘한 애정 표현들과 수줍은 얼굴.
그녀의 애틋한 마음들이 드러났던 순간들을 되돌아볼 때마다 준경은 자신의 삐딱한 생각들이 꼬집히는 기분을 맞닥뜨렸다.
그 마음들을 단 한 번도 곱게 봐준 적 없던 제 오만함을 기억하기 때문이었다.
―먼저 들어갑니다. 더 놀다 오든지.
어디서 같잖게 수작질이냐며 경멸 어린 시선으로 낮춰 봤던 마음과 끝내 제 머리 위로 우산을 씌워 주기 위해 까치발 드는 상아 옆을 무심히 지나쳐 버렸던 무시까지.
“도대체 어디서부터 글러 먹은 건데, 차준경.”
실성한 치처럼 낄낄대던 준경은 과연 버림받아 마땅하다는 자책과 함께 또 한 모금 술을 들이켰다.
사는 게 재미없다.
별로, 안 살고 싶은 것도 같다.
대체 그동안 무엇을 목표로, 뭐 때문에 그렇게 치열하게 살았지? 주변 한번 돌아볼 여유 없이 뭐에 그렇게 미쳐 살았나.
제 삶을 돌아보며 준경은 낮은 제 숨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훅 도는 취기에 눈앞으로 뿌옇게 그려 낸 과거의 어느 풍경.
―준경 선배!
낭랑한 목소리가 귓가를 스친 순간.
까무룩 잠에 빠져들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 * *
대학 시절. 한 학기가 정신없이 지나가면서 종강까지 얼마 남지 않은 6월 중순이었다.
다가오는 여름방학과 함께 할아버지의 입에서 슬슬 유학 얘기가 나올 즈음, 당시 준경은 꽤 심란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진작 예정되어 있던 유학이었으면서도 그맘때 그를 자꾸만 신경 쓰이게 하는 존재가 있었다.
―선배님, 오늘 시간 없으세요?
―네, 없으세요.
―왜요?
매사에 배시시, 햇살을 한가득 머금은 듯 쓸데없이 환한 미소를 가진―
그래, 저기 걸어오는 여자애.
이제 막 강의실을 나서며 저 복도 끝에서 제 쪽으로 향해 오는 김상아 때문이었다.
언제부터인가 함께 점심을 먹으러 가는 게 일상이 되고, 빈 공강을 때우기 위해 찾은 도서관 옆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는 말간 얼굴.
―안 바쁘니?
무슨 시간이 그리 많아 이런 식으로 사람을 쫓아다니느냐 비꼬듯 물으면,
―저 공부 열심히 해요.
뚱딴지같은 답변으로 웃음 짓게 하던 그녀가 자꾸만 준경의 마음에 걸렸다.
소리 없이 물끄러미 하얗고 여린 옆모습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둥그런 이마에서 오뚝한 콧대를 타고 내려와 선이 곱고 살구색을 띠는 여린 입술에서 오래도록 머물렀던 시선.
―왜 그렇게 보세요? 제 얼굴에 뭐 묻었어요?
―먼지.
―네?
―방금, 바람에 날아갔어.
―아…….
―신경 쓸 거 없어. 과제나 해.
‘우리가 당분간 못 보게 될 것 같다고 말하면, 너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만약 안 가면 안 되느냐고 되물어 오면 어떡하지.
‘그럼, 진짜 안 가고 싶어질 것 같은데…….’
멋대로 한 생각에 잠겨 있기를 한참.
모퉁이 벽 뒤로 숨어 있던 준경이 상아의 걸음 속도에 맞춰 우연을 가장해 모습을 드러내며 말을 걸어 볼까 결심한 찰나였다.
“김상아!”
준경이 발을 내미는 것보다 상아 뒤에서 그녀를 부르는 활기찬 목소리가 먼저였다.
동기 여자애는 자연스레 상아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물었다.
“김상아, 너 오늘은 밥 누구랑 먹어?”
“글쎄, 아직 생각 안 해 봤는데.”
두 사람이 준경을 미처 발견하지 못한 채 자연스레 그 앞을 스쳐 지나갔다.
“왜, 그 선배 있잖아. 오늘은 그 사람 안 만나?”
“누구? 아…… 준경 선배?”
대화 사이에 낀 제 이름에 반사적으로 멈칫한 것도 잠시.
“야, 그 선배네 돈 엄청 많다는 소문 알아?”
“어? 아…… 뭐…….”
“어머! 그치, 상아 너도 그 선배 집안 관련해서 알고 있었구나?”
“그런 건 아닌데…….”
“야, 너 진짜 계산 빠르다! 순진한 얼굴로 영특한 데가 있네, 우리 상아?”
준경의 표정이 점차 굳어져 갔다.
“우리 과 사람들 말 들어 보니까 그 선배도 너한테 꽤 마음 있는 것 같던데, 기회 잘 노려 봐.”
“기회라니?”
“야, 됐어. 우리끼리 내숭은. 암튼 나는 그 썸, 적극 찬성!”
“썸은 무슨…….”
“아, 왜에. 없는 놈보다는 그래도 있는 놈이 낫지 뭐 그러냐?”
“됐어. 그래서, 밥 뭐 먹을 건데?”
“글쎄, 네 썸남한테 연락해서 같이 먹을까?”
“야아!”
준경은 멀어져 가는 상아의 뒷모습에서 오래도록 눈을 떼지 못했다.
동기의 적극적인 권유에 이도 저도 아닌 애매한 태도를 보이던 상아를 떠올리자니 어쩐지 헛웃음만 나왔다.
손톱 옆에 핀 거스러미처럼 마음에 찝찝하고 거슬리는 부스럼이 피어난 기분이었다.
―거봐라. 차일의 차준경이니까, 그런 네놈이라 그것들이 붙어 있는 게 맞다니까.
할아버지의 목소리를 떠올린 순간에 든 마음은 그냥 딱 하나.
‘너도 다를 거 없구나.’
그토록 싫은 티를 내는데도 굴하지 않고 열심히 접근한 이유가 결국 다른 이들과 같은 이유, 잘난 제 배경 때문이었나 싶은 짙은 실망감이었다.
그러나 고작 그게 전부였다. 그녀가 자신을 어떤 이유나 목적으로 접근해 왔건, 준경은 왜인지 모른 척 그대로 묻어버리고 넘어가고 싶었다.
할아버지에게 당신 말이 틀리기도 한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는지도 몰랐다. 오기라는 걸 알면서도 그랬다.
며칠 후, 햇살을 듬뿍 받아 한층 더 보랏빛에 물든 등나무 아래에서.
“좋아해요, 선배님.”
기어코 저에게 고백하기 전까지는.
늘 제게 건네던 초록색 캔을 손에 꼭 움켜쥔, 수줍음에 물든 얼굴에 공연히 가슴이 뛰었던 게 사실이었다.
그러나 곧바로 밀려들었던 허무함에서 비롯된 반발심.
“나에 대해 뭘 얼마나 안다고?”
그 앞에서 준경은 서늘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종강을 코앞에 둔 시기였다. 고백했다가 까여도 적당히 안 보고 살다가 자연스레 멀어지기 좋은 타이밍이었다는 뜻이다.
‘고백을 받아 주면 좋고, 안되면 말고 식의 고백인가?’
상아한테 자신이 그 정도로 가벼운 존재였나, 그렇게 생각하니 제법 허탈하기까지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