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부녀지만 결혼은 처음입니다
5권
혜용 장편소설
13장
나와 비슷한 사람이 있다는 게 우습게도 동질감이 들어서.
‘나중에는 외할아버지 만나도 안 무서울 것 같아. 그때는 꼭 사과해야지. 저번에 인사도 안 하고 울어서 미안하다고!’
착하고 다정한 아이. 아픈 과거는 쉽게 잊고 바닥을 딛고 일어날 줄 아는 아이.
나는 여전히 이따금 이유 없는 겁에 질려 버린다.
나이를 먹을수록 상처가 낫지 않는다던데. 틀린 말이 아니었다. 내 목이 다친 것도 낫기까지 오래 걸렸고, 다친 마음도 아직 다 낫지 못했다.
어린 나이가 그 순간만큼 부러운 적이 없었다.
“아줌마, 아줌마.”
“…응?”
프레아가 내 옷깃을 잡아당겼다. 나는 친구들이 모인 쪽으로 걸어가다 프레아를 향해 몸을 숙였다.
그러자 프레아가 내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수업 재미없으면 아줌마랑 있어도 돼?”
되겠니….
나는 고개를 저었다. 프레아는 입술을 댓 발 내밀었다가 우리를 부르는 목소리에 몸을 돌려 달려갔다.
박물관 입구에 모인 내 친구들과 친구들의 아이들, 그리고 가정 교사가 서 있었다.
아이들은 벌써 들떴는지 왁자지껄하게 떠들고 있었고, 며칠 전부터 시달린 건지 내 친구들은 지친 얼굴로 맞장구를 쳐 주고 있었다.
사람 사는 건 다 똑같구나 싶다.
“시간 딱 맞춰 왔네, 데미아.”
“미안. 오래 기다렸어?”
“아니, 우리도 방금 왔어.”
선생은 인상 좋은 중년의 여성이었는데, 대학까지 갈 정도로 능력이 좋았으나 결혼 문제로 대학을 그만두고 가정 교사로 오래 일했다고 했다.
배운 게 많고, 가르치는 것도 잘하다 보니 부르는 게 값이라고.
선생은 우리에게 먼 곳에서 지켜보기만 하고 가까이 오거나 수업에 개입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다.
“편하네.”
“그렇지?”
나를 포함한 내 친구들은 거리를 유지하여 아이들을 따라다녔다.
물론 자기 아이가 사고라도 칠까 봐 걱정되어 한시도 시선을 못 떼기는 했지만, 멀리서 지켜보기만 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박물관 오랜만에 오네.”
“그러게.”
오전인 데다 사람이 없는 시간대라 그런지, 박물관 내부는 정말 고요했다. 선생의 목소리가 반대편 구석에 있는 우리에게까지 들릴 정도였으니까.
사교 시즌이었다면 아마 사람이 꽤 많았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어릴 적 몇 번 와 본 기억을 추억 삼아 조용히 옛 물건들을 감상했다.
‘조용해서 좋다.’
에반과 프레아와 함께 왔을 때도 이렇게 조용했었지.
나는 신전 같은 건물 양식을 눈에 담았다. 신전과 비슷하게 위용이 넘치지만, 성스러운 느낌은 없었다.
박물관은 꽤 미로처럼 되어 있었다. 시기별로 나뉘어 나열된 탓에, 자칫하면 같은 곳을 빙글빙글 돌 수도 있었다.
“이 검은 대략 100년 전, 이스라 황제 폐하께서 직접 하사한 검으로….”
아이들은 서로를 잃을세라 손을 꼭 잡고 붙어 다녔다. 병아리가 모여 있는 것 같아서 귀여웠다.
선생도 설명을 정말 알기 쉽게 잘하는 편인 데다, 아이들도 푹 빠져서 사고 칠 걱정도 없었다.
아이들은 정말 친구들을 똑 닮았다. 날카로운 눈매나, 통통한 입술이라든가.
“……?”
그런데 왜 프레아가 없지.
나는 당황해서 아이들을 다시 살펴보았다. 교묘하게 가려진 게 아닐까 싶어서 자리를 옮겨 다시 보아도 프레아는 없었다.
잠깐 눈을 뗐다고 흔적도 없이 사라질 수가. 너무 자연스럽게 사라져서 없어진 것도 모르다니.
“왜 그래, 데미아?”
“프레아….”
“뭐?”
“프레아가….”
하얗게 질린 내 얼굴을 보던 친구들이 예삿일이 아니다 싶었는지 아이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나처럼 하얗게 질려 버렸다.
“수업 중지하고 프레아를 찾을까?”
“세상에, 어떡해. 어디로 간 거야?”
친구들도 당황하여 선생에게 다가가려고 했으나, 나는 그들을 말렸다.
“소란 피우면 쫓겨나. 게다가 수업 중이잖아. 내가 찾아올게.”
“그럴 수 있겠어? 같이 찾자.”
같이 찾아 준다는 친구들에게 고개를 저었다. 다들 하얗게 질려서 당황하는 모습을 보니, 나를 정말 걱정해 주는 것 같았다.
“너희도 애들 봐야 하잖아. 혹시라도 프레아가 다시 돌아오면 사용인을 시켜서 날 찾아 줘.”
“그럴게. 꼭 그럴게.”
주위를 둘러본 나는 그대로 빠른 걸음으로 다른 방으로 향했다. 하지만 주변의 방에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곳곳에 배치된 직원들에게 프레아의 행방을 묻고 다녔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곳은 미로 같았고, 길을 잘못 들면 계속 같은 곳을 빙빙 돌게 되니까.
프레아가 갇혀서 울고 있지는 않을까. 겁에 질려 있지는 않을까. 걱정되어서 피가 마르는 기분이었다.
“이만큼 작고 머리는 옅은 갈색에… 보라색 눈을 가진 아이 보셨나요.”
직원 중 몇은 프레아를 보았다고 했다. 들뜬 얼굴로 종종 걸어가기에 보고 싶은 게 있나 보다 해서 내버려 뒀다고.
저번에 가족끼리 왔을 때는 사고는 쳤을지언정 혼자 돌아다니는 일은 없었다.
‘아이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데!’
게다가 이미 말도 없이 눈 오는 숲으로 사라진 전적이 있지 않은가. 그 이후에는 시선이 안 닿는 곳까지 사라진 적은 없었지만.
나는 발길이 닿는 대로 걸었다. 미친 사람처럼 걸었다.
박물관에서 사람이 길을 잃어 죽었다는 소식은 들은 적 없으나, 프레아는 어리니까.
호기심이 많아서 검이라도 만졌다가 다치게 되면 어떻게 해.
“프레아….”
내 부주의로 프레아가 다치면 어떻게 하지. 내가 프레아를 제대로 보지 못해서 프레아가 영영 흉이 남는 큰 상처를 입게 된다면.
나 때문에 프레아가 영원히 고통받게 되면 난 어떻게 살지.
외국에서 약탈해 온 옛 물건들이 늘어진 곳을 지나, 선조들이 사용했던 옛 물건이 나열된 곳으로 들어섰다.
그곳에는 검이나 도끼, 투구 등 전쟁에 사용된 물건이 즐비해 있었다.
“프레아…. 어디 있어.”
지레 겁을 먹었다는 걸 안다. 프레아가 다치지 않았을 수도 있다. 멀쩡히 있던 곳으로 돌아올 수도 있다.
그런데 만약이라는 아주 희박한 가능성 때문에.
나는 보이는 사람들에게 전부 프레아의 행방을 물었다. 그중 방금까지 보았다던 직원에게 답을 들을 수 있었다.
“200년 전에 만든 조각상 아십니까? 히트그라스의 작품. 그쪽으로 갔습니다.”
히트그라스는 200년 전 시대를 풍미했던 예술가였다. 살아 있는 것처럼 조각하여 후대에도 칭송받는 천재.
나는 그곳이 어디인지 정확하게 알았다.
‘아빠, 이거 뭐야? 진짜 멋있다….’
‘그러게. 이거 뭐야.’
우리끼리 왔을 때 프레아가 눈을 떼지 못했던 곳.
‘이건 히트그라스의 작품인데…. 어머니, 라는 제목이야.’
‘멋진데. 살까? 정원에 두면 딱이겠는데?’
‘뭔 소리야.’
뛰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난 다급하게 발을 내디뎠다. 내 구두 굽 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뛰지 말라는 직원의 목소리에도 사과할 정신은 없었다.
내 예상이 맞는다면, 프레아가 아직 거기에 있다면.
‘아빠, 나 나중에 또 오고 싶어!’
‘그래. 바쁜 일 끝나면 또 오자.’
‘응! 그때도 이거 또 봐야지!’
어머니라는 작품은 갓 태어난 아이를 끌어안고 눈물을 흘리는 조각상이다.
행복과 안도, 기대에 찬 여성의 표정이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생생한 데다, 아이는 이제 막 태어나 눈도 뜨지 못하고 허공을 쥔 채 울고 있다.
작품의 제목처럼 어머니 자체를 상징하는 조각상.
나는 복도를 내달려 문 없는 방으로 들어섰다. 그곳에는 프레아가 주저앉아 멍하게 조각상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다행이야…. 정말 다행이다.’
아이의 둥근 머리를 보고서야 나는 머리끝까지 차오른 불안을 흘려보낼 수 있었다.
맥없이 풀리려는 다리를 딛고 서서 프레아에게로 달렸다.
그리고 앉아 있는 아이를 뒤에서 힘껏 끌어안았다.
“…아줌마?”
프레아가 놀라서 나를 돌아봤다.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아이가 다친 곳 없이 성하게 앉아 있어서.
울고 있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한참 찾았잖아…. 프레아, 왜 말도 안 하고 사라진 거야.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나 사고 안 쳤는데?”
“쳤어. 말도 없이 사라졌잖아.”
이성을 유지하려고 애쓰는 건 내 버릇인데. 가족과 연관된 일에는 어찌 이렇게 바보가 되는지.
프레아가 내 뺨에 손을 얹었다. 땀이 밴 뜨거운 체온이 느껴졌다.
“아줌마…. 울어?”
울고 있었나 보다. 프레아가 눈 덮인 숲속에서 발견되었을 때가 떠올라서 그랬을까.
아니면 프레아가 무사해서 나온 안도의 눈물일까.
넌 한참 저 조각상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친어머니를 상상하며 그리워하고 있었니? 내가 주지 못하는 근본적인 것을 그리워하면서.
“울지 마, 아줌마….”
“프레아. 네가 어떻게 되면 난…. 난 못 살 거야….”
“왜 못 살아?”
프레아가 작은 손으로 내 눈물을 거듭 닦았다. 내 눈물이 아이의 손을 축축하게 적셨다.
내가 할 수 있는 말이 달리 뭐가 있을까. 다른 대답을 할 수 있다는 선택지도 없었다.
나는 눈물에 흐려지는 시야에도 꿋꿋하게 프레아를 눈에 담았다.
“사랑하니까.”
프레아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불쾌해 보이지는 않았다. 그저, 무언가 벅차오르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것처럼 엉망으로 구겨진다.
“아줌마, 나 사랑해?”
“응, 사랑해.”
“왜?”
이 질문에 대한 답도 정해져 있다. 나는 울먹이는 프레아의 눈가에 입 맞췄다. 매캐한 먼지 향에 아이의 향이 뒤섞여 있었다.
“내 아들이잖아.”
대답을 듣자마자 프레아가 내 품에 안겼다. 내 어깨가 젖어 가는 게 느껴졌다.
“…응, 나도 아줌마 사랑해.”
비록 엄마라고 불리지 못하더라도, 내 아들이라고 인정했다는 사실이 벅차서 눈물이 나왔다.
‘어머니라는 저 작품. 사실은 히트그라스의 상상으로 만든 거야.’
‘왜? 베드릭, 또 거짓말하는 거면 아버지한테 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