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부녀지만 결혼은 처음입니다
4권
혜용 장편소설
10장
풍족하게 사람 사는 냄새로 가득했던 롬메르비 저택은 폐허와 다름없었다.
에반이 할퀴고 간 흔적은 크게 남아서 롬메르비를 갉아먹었다.
유일하게 남들보다 나은 점이라고 자부할 수 있었던 많은 돈은 어떻게든 암암리에 생필품을 사기 위해 탕진했고, 사용인 배에 들어갈 돈 한 푼이 부족해서 인원은 최소한으로만 남겨 둔 지 오래였다.
‘돈을 벌 수단이 필요한데.’
이미 해스워드와 척을 지었다는 소문이 파다해진 데다, 하던 일도 내팽개치고 비넨으로 온 디르티헨에게 주어질 기회는 더 남아 있지 않았다.
넓은 방, 추운 새벽인데도 온도 조절 장치는 제 몫을 하지 못했다. 냉기가 침실에 감돌았다.
겨우 촛불 하나로 공간을 밝힌 디르티헨은 일인용 소파에 앉아 거듭 마른세수를 했다.
새벽이 되었는데도 디르티헨이 잠에 들지 못한 이유는 단 하나였다.
‘데미아 로렌스….’
데미아에게 이혼 통보를 받은 뒤, 디르티헨은 잠에 들지 못했다. 단 한 순간도 데미아를 생각하지 않은 적 없었다.
그동안 자신에게 단호한 데미아를 본 적이 없었다. 자신을 밀어내는 데미아를 겪은 적도 없다.
‘티헨, 나 있지. 우리가 결혼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아서 매일 아침 일어나면 그날 입었던 옷을 다시 꺼내 봐.’
수줍게 종알거리던 사랑스러운 입술. 자신을 바라볼 때면 애정이 가득 담겨 다정하게 접히는 눈매와 섬섬옥수로 고생한 티 하나 나지 않던 손가락.
‘그날 입은 치마 끝에 묻은 흙을 보면 꿈이 아니라는 걸 실감해. 우리는 정말 부부가 되었구나… 하고.’
분홍색 꽃을 바짝 말리면 데미아의 머리카락이 된다. 가을 하늘이 담긴 눈을 보면 답답했던 숨이 트여 살아 있음을 깨닫게 했다.
다정함을 빚어 숨을 불어넣으면 네가 될 거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을 모아 장식해도 네 아름다움에 비하지 못할 테지.
로렌스가 몰락하고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자신의 손아귀에 데미아가 떨어져 주기를 얼마나 고대했는지 그 누구도 모를 것이다.
‘에반 해스워드보다 데미아를 먼저 찾은 게 내 인생에서 가장 잘한 일이었어.’
디르티헨도 알았다. 남의 집을 전전하며 시녀로 살던 데미아를 찾아 데려오면, 맹목적으로 자신을 사랑하게 될 것이라는 걸.
판단이 흐려진 데미아가 절대 자신에게서 떠나지 못하게 신경을 기울이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방에 기름을 부어 닦아서 냄새만 남기고, 일부러 데미아가 모든 일을 틀리도록 유도하고, 그가 쓴 목록을 조작하는 것도 쉬웠다.
디르티헨은 그렇게 해야만 데미아가 자신을 떠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고, 그게 옳았다.
‘조금만 더 신경을 기울였으면 괜찮았을까.’
수도에 가지 않고 조금 더 데미아를 품에 가둬 뒀더라면.
디르티헨은 자신의 멍청한 선택을 후회하며 손아귀에 얼굴을 파묻었다. 손바닥에 쏟아지는 숨이 뜨거웠다.
‘수도에 데려갈 수 없었어. 다른 사내들이 탐을 낼 게 분명한데 어떻게 데려가. 수도에서 다른 사내랑 눈이 맞아 버리면. 내가 못난 걸 알게 되면….’
수도에 있는 동안 연락도 꾸준히 하고 싶었다. 하루에 한 번은 꼭 데미아에게 편지를 보내고 싶었다.
그러나 그러지 못한 이유는, 데미아가 자신에게 질려 버릴까 봐. 그에 더해 자신이 관계의 우위를 점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데미아의 편지에 답장하지 않은 것도, 근황을 알리지 않은 것도 전부 자신이 관계의 우위에 서기 위해서. 그래야 데미아가 자신을 떠나지 못하도록 손을 쓸 수 있으니까.
‘내 방식이 문제라는 건 알아. 하지만 어떻게 하란 말이야. 어떻게 했어야 했느냐고.’
머리가 아팠다. 며칠 자지 못한 몸은 비명을 지르며 휴식을 달라고 외치고 있었다.
‘…아니야. 내가 틀렸을 리가 없잖아. 내가 한 행동은 옳은 일이었어.’
디르티헨은 여러 겹으로 겹쳐 입은 옷을 여미고, 마지막으로 본 데미아를 떠올렸다. 경멸과 혐오가 섞인 시선이 가슴에 박혀 무수한 상처를 남겼다.
다시 한번 데미아를 만나러 갈까. 편지를 몇 번이나 보냈지만, 답장이 돌아오지 않아 초조하다.
“꺄아악!”
그때, 굳게 닫힌 문을 넘어 비명 소리가 들렸다. 디르티헨은 익숙한 첼리드의 목소리에 반응하여 그의 침실로 뛰었다.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저택을 뒤흔들 만큼 커다란 비명이었는데도 나와 보는 사람 하나 없다.
디르티헨은 긴 복도를 지나 붉은 나무로 만들어진 문을 열어젖혔다.
“…어머니. 무슨 일입니까?”
“티헨! 티헨, 이거 봐라. 이것 좀 봐!”
겁에 질린 채 침대 구석에 몸을 웅크린 첼리드가 자신의 목을 움켜쥔 채 베개를 가리켰다.
디르티헨이 숨을 헐떡이며 침대에 다가갔다. 흰 이불은 혈흔으로 더러워져 있었고, 베개를 관통한 단도 아래에는 작은 쪽지가 놓여 있었다.
[복수.]
찬 공기가 침실을 휩쓸었다. 머리끝까지 오싹하게 소름이 돋았다.
“분명 해스워드가 한 짓이야. 그 망할 꼬맹이 녀석이…!”
“어머니, 무슨 일인 겁니까. 복수라는 말은 무슨 의미입니까?”
디르티헨이 거칠게 숨을 헐떡이는 첼리드를 내려다보았다. 목덜미에서 피가 흘러내려 침대를 적시고 있었다.
“너는 어미가 목이 너덜거리는데도 걱정되지 않니? 괜찮으냐 물어보지를 않아, 왜!”
첼리드가 악을 쓰며 바락바락 소리 질렀다. 디르티헨은 귀가 먹먹해지는 것을 느끼며 미간을 찌푸렸다.
이명이 들리는 것 같았다. 높게 찢어지는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귀를 난도질하는 것처럼.
“…괜찮으십니까.”
“내가 아들을 잘못 키웠지. 잘못 키웠어! 네 아버지가 보면 얼마나 실망하실까!”
지긋지긋하다. 디르티헨은 한숨을 억누르고 이불을 끌어당겨 첼리드의 목에 댔다. 주름진 목덜미가 소름 끼쳤다.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 네가 나한테 이러면 안 되지. 다른 것보다 어미를 우선해야 하는 게 자식 된 도리 아니니? 매정한 게 네 아버지랑 쏙 빼닮았어!”
“…약 가져오겠습니다.”
“어미를 이렇게 두고 가? 네가 사람이야? 네가 그따위로 구니까 데미아 로렌스 그년이 달아난 거 아니야! 수도에 가서 한 게 뭐야. 해스워드가 이런 말도 안 되는 행패를 부리는데 그거 하나 해결하지 못하고!”
“죄송합니다.”
호흡하는 것조차 허락을 받아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머니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해 자괴감이 들고, 이 나이가 되도록 아무것도 성취하지 못한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사랑하는 사람 하나 잡지 못해서 이따위 몰골로 사는 게, 자신에게 걸맞은 처지인 것 같기도 했다.
“네 아버지 때문에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잖아, 티헨. 네가 나한테 이러면 안 되지.”
“예, 맞습니다.”
“가서 어서 약이나 가져오렴. 머리가 어지럽구나.”
“네, 그러겠습니다.”
디르티헨이 상비약을 가져와 첼리드의 목을 치료했다. 엉성한 치료였으나, 이를 문제 삼고 도와줄 사람은 없었다.
부서진 창문이 바람을 타고 덜컹거리며 흔들린다.
분노가 사그라진 첼리드가 이불을 바닥에 던져 버리며 한숨을 토했다. 디르티헨이 첼리드의 한숨에 몸을 움츠렸다.
“괘씸한 새끼…. 천박한 놈.”
“…무슨 일입니까.”
욕을 중얼거리던 첼리드가 베개도 바닥에 내던졌다. 디르티헨이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데미아 로렌스 그년 좀 건드렸다고 발작하는 꼴 좀 봐. 어떻게 똑같이 굴 수가 있지? 주제도 모르고….”
“데미아에게 무슨 짓을 하신 겁니까?”
디르티헨이 첼리드의 팔을 잡아당겼다. 첼리드가 화를 내고, 어깨를 내리쳐도 물러나지 않았다.
사납게 치켜뜬 눈에 붉은 핏줄이 섰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흔적도 없이 갈가리 찢어 버리고 싶을 만큼 열이 끓는다.
내가 여태까지 왜 참았는데.
공들여 내 것으로 만든 그 아이를 두고 내가 어떤 심정으로 떠났는데.
내가 꺾어 온실에 모신 꽃을.
당신이 뭐라고. 감히!
데미아가 자신의 어머니와 똑같은 일을 겪었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데미아에게 무슨 짓을 하신 거냐고요!”
디르티헨은 처음으로 자신의 어머니에게 목소리를 높였다.
첼리드가 데미아를 만만하게 보고 싫어한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으나, 이렇게 막무가내로 가당치 않은 짓을 벌일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첼리드가 자신의 어머니가 아닌, 세상에서 가장 원망하고 혐오스러운 원수처럼 느껴졌다.
“너… 지금 나에게 고함을…. 네가 어떻게…!”
“데미아를 죽이려고 했어요? 사람을 시켜서 다치게 했습니까?”
“그래! 마침 해스워드에서 쫓겨난 하녀가 있어서 정보 좀 샀다! 그깟 년, 네 앞길 막는데 내가 어미로서 어떻게 가만 두니? 너 어떻게 어미에게 이렇게 무례하게 굴 수가 있어!”
첼리드가 목이 다쳤든, 생명의 위협을 느꼈든 알 바가 아니었다. 사내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어머니가 아니었다.
디르티헨은 자신의 어깨를 붙잡고 소리치는 첼리드를 뿌리쳤다.
당장 데미아를 봐야만 했다.
***
제임이 치료하고 돌아간 뒤, 저녁 식사 시간이 되어서야 에반과 프레아를 마주할 수 있었다.
식당은 이전처럼 평화로웠다. 습격이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말이다.
나는 목을 끝까지 덮는 옷으로 갈아입은 채 에반과 프레아를 마주했다.
“아줌마, 오늘 바빴어? 오늘 많이 못 만났어.”
프레아는 자신을 만나 주지 않은 나에게 약간의 원망과 섭섭함을 품고 있는 것 같았다.
입술을 댓 발 내밀고 얼굴을 엉망으로 찌푸렸으면서 프레아는 내 옆에 앉았다. 결국 날 미워하지는 못한다는 게 느껴져서 더없이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미안해. 프레아, 많이 섭섭했어?”
“보고 싶은데 만나지 못하게 했잖아.”
나는 프레아의 무릎 위로 냅킨을 깔아 주었다. 흰 다리 위로 하얀 천이 덮여 가려진다.
“섭섭하게 해서 미안해. 대신 이번 주에 바다를 보러 갈까?”
“바다?! 좋아! 아빠도 가?!”
프레아는 눈을 빛내며 에반을 바라보았다. 가지 않으면 정말 매우 무척 많이 섭섭해할 게 뻔했다.
에반도 거절할 때에 보일 프레아의 반응을 예감했는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아빠가 안 가면 누가 가? 응? 우리 아들이랑 같이 가야지.”
“와! 와아! 놀러 간다!”
프레아는 무척 기뻐했다. 날이 풀리기는 했지만, 아직 겨울인 건 여전했기에 프레아가 감기에 걸리지 않도록 신경 써서 옷을 준비해야 했다.
두꺼운 옷을 비롯해 털이 보송보송한 담요도 몇 개 챙기고, 인근에 몸을 녹일 가게가 있는지도 확인해야겠다.
식사 시간은 평소 같았다. 프레아는 고기만 잘 썰지 못할 뿐이지, 흘리지 않고 음식을 먹을 수 있게 되었다.
“아들. 밥 먹고 아빠랑 아줌마랑 할 이야기가 있는데 기다릴 수 있지?”
“응! 빨리 끝내고 나랑 놀아 주기야!”
식사가 끝나고 프레아는 필레의 손을 잡고 먼저 거실로 돌아갔다.
우리는 저녁 식사가 끝나면 거실에 모여 시간을 보내는 게 일상이 되었는데, 나는 자수를 놓고 프레아와 에반은 유행하는 카드놀이나 단어 공부를 하고는 했다.
가끔 피아노를 치기도 했고, 프레아의 진을 빼놓기 위해 몸 장난을 치는 날도 잦았다.
에반과 나는 식당에서 남은 디저트를 입에 넣었다. 사용인들은 최소한만 남아 우리의 시중을 기다리고 있었다.
“데미아, 몸은 괜찮아? 침입자는 잘 처리했어. 의뢰인도 누구인지 알아냈고.”
“제임이 잘 치료해 줘서 괜찮아…. 누가 의뢰했는지 알 수 있을까?”
과일즙으로 만든 셔벗은 숟가락으로 퍼 담아 바로 입에 넣어도 곧 녹아 사라졌다.
입안에서 상큼하게 녹아내리는 차가움에 미간을 옅게 찌푸렸다가도 나는 평온하게 표정을 풀 수 있었다.
“롬메르비 백작 대부인.”
예상하고 있던 사람이었다.
내 친척은 사람을 고용해서 날 해칠 정도로 부지런하지도 않고, 귀족 사이에 퍼진 소문을 바로 들을 수 있을 만큼 사교계에서 활발히 활동하지도 않았다.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그, 그렇구나…. 대부인이 날… 아직 포기하지 못하셨나 봐.”
“어쩌고 싶어, 넌.”
“으, 응?”
차가운 셔벗을 언제 다 먹어 치웠는지, 에반은 깨끗해진 그릇을 치우며 물었다.
언뜻 차분하게 가라앉은 그의 얼굴에서 흉흉하게 분노가 들끓는 눈이 보인다. 그는 무엇을 위해 분노하고 있을까.
해스워드가 침입을 받았다는 것? 머무는 객 하나 지키지 못한 무능함에 치가 떨린 것일까? 혹은 연인을 지키지 못해서?
나는 반이나 남은 디저트를 밀어 버리고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입맛이 없었다.
“대부인이 미워…. 롬메르비에서 달아났는데도 여전히 날 괴롭히잖아. 벼랑 끝까지 내몰려서 차라리 죽고 싶어 했으면 좋겠는데….”
더듬거리고 듣기 싫은 내 목소리에도 에반은 묵묵히 경청했다. 끼어들어 자신의 말로 덮거나, 내 말에 반박하지도 않고 가만히.
나를 바라보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