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부녀지만 결혼은 처음입니다
3권
혜용 장편소설
7장
받아도 되는 걸까 싶다가도, 에반이 날 위해 고르고 챙겨 왔다고 생각하니 그저 기쁘기만 하다.
“예쁘다, 데미아.”
나지막이 중얼거리는 말에 순식간에 얼굴이 뜨거워졌다. 남은 한쪽도 마저 끼워 주기 위해 에반이 고개를 숙였다.
나보다 배는 굵은 손가락이 천 너머로 느껴졌다. 내리깐 눈 위로 쌍꺼풀이 선명하다.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치우자, 에반이 눈만 굴려 날 바라본다.
마치 그 모습이 내 손등에 입을 맞추는 것 같았다.
“고맙지?”
“…응…. 고마워, 에반. 항상 너에게 고마울 일만… 생기는 것 같아.”
“알면 나한테 잘해.”
퉁명스럽게 말한 에반이 내 양손을 잡고 허공에 느리게 흔들었다. 실없는 장난이라는 걸 알지만, 왜인지 에반에게 닿은 손가락이 뜨거웠다.
너무 고마워서 몸 둘 바를 모르는 걸까. 그래서 이렇게 심장이 뛰는 건가.
“응, 나… 에반한테 자, 잘할게….”
내 말과 동시에 에반이 고개를 숙여 내 손등 위로 얼굴을 묻었다. 간지러운 감촉이 드는가 싶더니, 에반이 내 손등에 차례로 입을 맞추었다.
나를 곧게 바라보는 시선에 잡아먹힐 것 같았다. 손끝에서부터 잘근잘근, 나를 씹어 먹을 것처럼 강렬한 시선이었다.
겁이 날 정도로 집요해서 달아나고 싶은 마음이 들 만큼.
에반은 길게 내 손등에 입술을 누르다 간질이듯 고개를 도리질 쳐 문질렀다.
먹잇감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떻게 잘할 건데?”
입술을 댄 채, 에반이 말했다. 그가 말할 때마다 손등에 스쳐서 간지러웠다. 어깨를 움츠리고 손가락을 굽히니 에반이 더 입술을 꾹 눌러 왔다.
대체 무엇을 바라 이러느냐고 묻고 싶을 지경이었다. 심장이 너무 뛰어서 터져 버리는 게 아닐까 두려워졌기에.
에반이 내 붉어진 얼굴을 보았을까 무섭다. 나는 왜 이러는 걸까. 에반에게 미안해서 이러나? 고마워서?
“대답, 안 할 거야? 누나?”
누나라는 말에 약해지는 날 알면서도 너는.
언제나 너는 나를.
나는 어색하게 고개를 돌렸다.
“…그, 글쎄…. 어떻게 해 줘야….”
나는 끝내 이렇다 할 해답을 찾지 못했다. 에반은 내가 줄 수 없는 많은 것을 갖고 있었으니까. 돈도, 거대한 저택도, 가족과 사용인, 넓은 소유지까지.
내가 줄 수 있는 것은 고작 자수나 조악한 뜨개질, 프레아의 교육 외에는 없었다.
에반은 내 손을 뒤집어 손바닥 위에 뺨을 얹었다. 꽃받침을 한 것처럼 장난스럽게 웃었다. 에반의 뺨이 묘하게 뜨거웠다.
“그건 누나가 찾아야지. 내가 알려 주면 재미없잖아.”
일종의 퀘스트였다. 반드시 내가 해야 하는 일.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엄지로 에반의 뺨을 문질렀다.
장갑 너머로도 결 좋은 피부가 느껴진다. 고작 두 살 차이인데 에반은 왜 이렇게 피부가 탱탱하고 부드러울까.
“아…! 맞아, 슬슬 빚 독촉장이 올 텐데….”
주소지를 바꾸지 않았으니, 독촉장은 롬메르비로 갈 것이다.
나는 꾸준히 빚을 갚아 왔으나, 해스워드에 온 이후로 빚을 갚은 적이 없었다. 돈도 없거니와 여간 바쁜 게 아니어서 잊고 살았던 것이다.
문득 롬메르비에 가서 독촉장을 받아 와야 한다는 생각으로 뱉은 말이었는데 에반은 눈썹만 까딱일 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내가 롬메르비에 가는 것을 입에 거품 물 것처럼 기겁하며 싫어하던 에반이기에 그의 반응이 의아했다.
“내가 갚았는데, 그거.”
“…어?”
에반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순간 심장이 내려앉은 것 같은 충격과 함께 생각이 어지럽게 흩어진다.
빚을 어디에 갚아야 하는지도 말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알고 갚았다는 건지 모르겠다. 에반이 짓궂은 거짓말을 한 것 같아서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에반, 나에게 빚이 얼마나 큰 존재인지 알면서, 그, 그런 장난은 좀….”
“갚았다니까?”
태연하고, 당연하게 말해서 깜빡 속아 넘어갈 뻔했다. 그 많은 빚을 어떻게 쉽게 갚는다고.
물론 해스워드가 돈이 썩어 넘치게 많기는 하지만, 고작 날 위해 큰돈을 쓸 필요는 없었다. 에반도 손해 보는 장사이지 않은가.
나는 에반에게서 손을 떼고 뒤로 물러났다.
“자, 장난치지 마.”
“진짜라고. 왜 못 믿지? 누나, 저번 달 봉급 안 받은 거 알아? 그걸로 빚 갚은 거야.”
“…뭐?”
굳어 버린 내 반응을 살피던 에반이 목덜미를 긁적이더니 멋쩍게 말했다. 어색한 미소는 덤이었다.
“…그냥 돈으로 줄 걸 그랬나? 기분 나빠?”
“…네가, 네가 왜… 내 빚을 갚아? 왜?”
기분이 나쁜 건 아니었다. 오히려 기쁜 일이다. 그러나 내가 모르는 사이에 빚을 갚아 버린 것도, 그 많은 부채가 순식간에 사라져 자유의 몸이 된 것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7년간 날 괴롭히던 빚 독촉장도 이제 오지 않을 것이고, 로렌스 가문도 언제든 가주를 들이면 일어설 수 있게 됐다.
무엇보다 빚을 떠안아 홀로 남은 로렌스 가문의 여식으로 비웃음당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너무 많은, 돈이잖아…. 너에게 평생 다 갚지도 못할 텐데….”
내 가족을 죽였던 그 빚이 더는 날 괴롭히지 않겠구나. 나도 언젠간 가족처럼 살해당할지 모른다는 공포 속에서 더는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겠구나.
나는 자유다.
“왜 울고 그래….”
에반의 손가락이 내 눈 밑을 훑었다. 그리고 뺨을 감싸 엄지로 눈가를 여러 번 문질렀다.
나는 그제야 내가 울고 있다는 걸 알았다. 의자에서 일어나 앞에 무릎 꿇은 에반은 나를 올려다보며 눈썹을 늘어트렸다.
“부담되어서 그래? 부담 갖지 마. 네가 꾸준히 갚아서 얼마 남지 않기도 했고, 안주인 일을 해 주는데 그 정도 돈은 줘야 했어. 네가 빚으로 힘들어하는 것 같아서 바로 갚았을 뿐이야.”
다정한 거짓말이다.
빚이 얼마나 남았는지 내가 제일 잘 안다. 안주인 일을 한다고 저택 하나는 사들일 돈을 쉽게 내어 줄 리도 없다.
그냥 봉급을 핑계로 내 빚을 갚아 버린 것이다. 날 위해서. 내가 오랜 시간 동안 빚으로 힘들어했으니까.
“누나, 화났어? 미안해. 다음부터는 멋대로 굴지 않을게. 그러니까 뚝 하자, 응?”
아이라도 다루는 건지, 내 눈가를 거듭 닦고 타이르는 말투가 다정하다. 촛불이 비친 에반의 얼굴은 오롯이 날 위한 걱정으로 가득했다.
절대로 날 해치지 않을, 순한 강아지 같은 얼굴. 다른 사람은 물어 찢어 버리더라도, 나만은 물지 않을 강아지 같은 얼굴.
나를 모독하고, 매정하게 비하하는 사람들과 달리 처음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날 해치지 않았던 에반.
‘처음 만난 순간부터 날 아껴 준 사람은 에반이야.’
에반의 콧대에 머물렀던 내 시선은 머뭇거리며 천천히 이동했다.
나는 비로소 에반의 눈을 마주할 수 있었다. 내가 좋아했던 분홍색 눈에서 그간 읽지 못했던 여러 감정이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걱정, 불안, 두려움, 애정, 애정, 또 애정….
너는 날 이런 눈으로 보고 있었구나. 내가 소중해서 죽을 것 같은 눈으로, 프레아를 보는 것과는 사뭇 다른 애정으로 날 마주하고 있었어.
“…에반….”
누군가 몸에 불을 지핀 것처럼 뜨겁다. 프레아가 쇠막대기로 신나게 두드리는 듯 심장이 지끈거렸고, 필레가 실수로 표백제를 부어 버린 것처럼 머릿속이 새하얗게 지워진다.
내 커다란 곰 인형. 내가 어떻게 너에게 화를 낼 수 있겠어. 그런 눈으로 날 보고 있는데, 내가 어떻게 그래.
“안아 줘….”
홀린 듯 말을 토했다. 통제를 벗어난 문장이 쏟아져서 당혹스러울 지경이었다.
그와 동시에 에반이 무릎을 세워 일어나 곧장 나를 끌어안았다. 단단하고 커다란 덩치가 짓누르며 압박한다.
숨이 막혀도 싫지 않았다. 뼈가 으스러져도 좋았다. 다 자란 사내의 품이 이런 느낌이었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
“화나지 않았어…. 에반.”
나는 에반의 등을 끌어안았다. 뺨과 목덜미에 에반의 머리카락이 닿아 간지럽다.
내 가슴에 맞닿은 심장이 뜀박질하는 게 느껴지고, 그의 뜨거운 체온이 느껴진다.
“넌 항상 날 위해 주잖아…. 해스워드에 온 순간부터, 나는 네 덕에 살아 있는 거야….”
에반이 저택에 날 들이지 않았다면 눈에 파묻혀 죽었겠지. 그게 아니라면 대부인이 고용한 누군가에게 처참히 살해당했을 것이다.
그도 아니라면 아저씨에게 붙잡혀 다시 그 열악하고 더러운 집으로 끌려갔겠지.
나는 에반의 어깨에 얼굴을 묻으며 말했다.
“나는 네 호의로 살아 있어…. 네가 없었으면 난….”
내 허리를 감싼 팔에 힘이 들어갔다. 무엇이 에반을 자극했는지는 모르겠다. 에반은 내 허리를 들어 올려 책상 위에 앉혔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그가 드는 대로 들려 책상에 걸터앉은 나는 에반의 어깨를 쥔 채 숨을 들이켰다.
“그럼 네 삶은, 내가 없으면 없었던 거네?”
에반은 나를 곧게 바라보며 말했다. 집요한 시선에 눈을 피하려다가, 더는 눈을 피하고 싶지 않아 시선을 맞췄다.
흐트러진 머리 모양에 열이 오른 건지 붉어진 얼굴. 내 양옆을 막은 두꺼운 팔 아래로 약간 벌어진 셔츠가 보였다.
꼭 이상한 기분이 드는 자세였다. 에반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나쁜 짓이라도 하는 것 같았다.
“…그렇지?”
“나 덕분에 여태 살아 있는 거고?”
“…으응.”
“그럼 네 삶을 나한테 줘.”
당연한 듯 뱉는 요구여서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 에반은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기나 하는 걸까?
마치 청혼하는 것 같지 않은가.
깜짝 놀라 입만 벙긋거리니, 에반이 미간을 찌푸렸다. 기분 나빠 보이는 건 아니었다.
“내가 살린 네 목숨, 나한테 써. 고마운 거 갚고 싶다며.”
심장이 뛰는 게 이상하다. 티헨과 마주할 때마다 느꼈던 감정이 왜 에반에게서 느껴지는지.
5년간 느낀 공백이 커서 누구든 마음에 들이고 싶었을까. 그래서 에반에게 미묘한 설렘이 느껴지는 건가.
에반이 내 남편이길 바란 적이 있다. 티헨이 아닌 에반과 함께했다면 어땠을까 상상하기도 했다.
“…나, 나는… 유부녀야….”
그러나 상상일 뿐이라는 걸 안다. 아무리 비밀 결혼이라고 하더라도 나는 기혼자다. 남편도 있는 처지에 누군가에게 내 삶을 내어 줄 수 없다.
에반은 내 대답을 예상이라도 했는지 허탈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시원하게 벌어진 입술이 호쾌해 보였다.
“어차피 비밀 결혼이잖아. 그게 핑계가 될 수는 없어.”
“하지만….”
“데미아.”
에반의 얼굴이 짐짓 굳어진다. 난 그가 그냥 농담을 한 것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진심으로 날 원해서.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안 된다는 말만 하면 되는 건데 왜 쉽게 말이 나오지 않을까.
왜 비논리적인 변명만 쉽게 나오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네가 입은 옷, 네가 신은 신발, 네가 낀 장갑, 네가 저녁에 먹은 음식과 낮에 먹은 디저트, 네가 마시는 숨뿐만 아니라 네가 잠드는 침실까지 전부 내 것인데.”
책상을 짚은 손이 어느새 내 손목을 타고 올라와 어깨를 쥐었다. 그리고 부드럽게 내 목덜미를 훑어 뺨을 감쌌다.
달아날 수 없었다. 돌처럼 그대로 굳어 에반의 손에 나를 맡길 수밖에.
“널 이루는 전부가 내 것인데 왜 너는 내 것이 아니야?”
사람을 소유한다는 말이 얼마나 바보 같고, 오만한지. 사업가라고 해서 사람을 소유할 수 없다는 것쯤은 에반도 잘 아는 것일 테다.
에반은 소유욕이 많거나, 통제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다. 프레아를 대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왜 나에게는? 왜 나를 소유하려 들까. 나는 값어치 있는 존재도 아닌 데다 나보다 더 좋은 사람이 널리고 널렸는데.
“롬메르비에 돌아갈 게 아니라면, 나에게 줘.”
롬메르비에 돌아갈 일은 없다. 대부인이 살아 숨 쉬고 있는 한, 티헨이 와도 난 돌아가지 않는다.
내가 갈 수 있는 곳은 없고, 가고 싶은 곳도 없다. 내 일생의 목표였던 빚도 하루아침에 사라져 자유가 되었다.
나에게 남은 것은 다 무너진 로렌스라는 남작 가문뿐.
‘날 너에게 준다면, 뭐가 달라질까.’
말도 안 되지만, 궁금해졌다. 친구 사이에서도 이렇게나 아껴 주는 네가, 얼마나 더 정성을 들여 날 소중하게 대할지.
여기서 얼마나 더 다정해질 수 있을지 보고 싶어졌다.
그러나 내가 에반의 앞길을 막을 수는 없다. 정신이 번쩍 들면서 동시에 한 가지 가능성이 떠올랐다.
“혹시… 에반, 너, 로렌스가 탐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