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부녀지만 결혼은 처음입니다
2권
혜용 장편소설
4장
“…그, 그게…. 티헨이, 나에게 번역을 시킨, 글이야…. 나는 열심히, 틀리지 않도록 번역했고….”
“왜 번역을 시켰는데?”
에반답지 않았다. 거친 단어나 속어를 사용하지 않는 부드러운 말투였으니까. 귀족처럼, 아니, 다정하고 곱게 자란 사내처럼 굴었다.
그 모습에서 티헨이 언뜻 스쳐 보였으나, 티헨 특유의 점잖고 다정한 모습과는 달랐다.
풋내가 날 것 같은, 사랑스러운 다정함이었다.
“내가… 멀쩡한, 지 확인… 하려고….”
그래서 그랬을까. 나도 모르게 내 치부를 터놓고야 말았다. 하지만 자존심이 남아 있었는지 내 인지 능력에 문제가 있다고, 내 정신이 온전하지 못하다는 것은 숨길 수 있었다.
에반은 조용히 미소 지었다. 그 미소는 봄볕처럼 따뜻해서 눈이 시큰거렸다.
“그랬구나. 나에게 전해질 거라는 건, 몰랐다는 거네?”
“…응…. 어, 얼마나 상처받았을지…, 미안, 정말 미안해.”
“네가 원해서 한 게 아니잖아. 그래도 상처받았는데… 사과해 줘서 괜찮아졌어.”
에반은 단어를 고르듯 신중하게 말했다. 나를 위해 듣기 좋은 단어를 골라 말하는 게 느껴졌다. 그 따뜻한 배려에 억장이 무너진다.
나는 너에게 상처를 줬는데. 너는 나를 용서해 주는구나.
“나, 너를 싫어하는 이유가 이거였어. 네가 이런 편지를 보내서.”
“…어?”
“편지를 받자마자 롬메르비로 갔는데 디르티헨이 그러더라고. 네가 날 싫어했다고. 빚을 갚아 주지 않아서 날 원망하고 있었다고.”
그럴 리가 없잖아. 난 오히려 네가 부담을 가질까, 너에게 피해를 줄까 봐 만남을 자제한 건데.
문제투성이인 내가 너에게 피해를 주는 게 걱정돼서. 나는, 정말 너를 위해서….
“그랬어, 데미아?”
에반은 목소리 한번 높이지 않고 침착하게 물었다. 나는 억울하고, 미안하고, 서러워서 눈물이 쏟아졌다.
“아냐…. 내가 너를, 너를 왜 싫어해…. 한 번도 그런 적 없어. 너는….”
울음 탓에 문장이 이어지지 않았다. 꼴사납게 울지 않으려고 눈에 힘을 주고, 목을 가다듬어도 눈물은 멎지 않는다.
에반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내 눈가를 손등으로 닦았다. 내 축축한 얼굴에 에반이 더럽혀졌다.
“난 네 커다란 곰 인형이니까. 그렇지?”
나는 에반의 손등을 내 소매로 몇 번이고 닦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에반이 내 손을 조심스럽게 놓고, 천천히 팔을 내밀었다.
나는 달아날 생각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에반의 품에 안겼다. 익숙하고 커다란, 따뜻한 내 곰 인형을 안을 때처럼.
“아니라면 다행이야. 모든 게… 맞아떨어져서 그대로 믿었어. 나에게 실망했어, 데미아?”
“그럴, 그럴 리가….”
에반의 익숙하지 않은 말투. 그걸 증명하듯 느리고, 더듬더듬 이어 가는 문장. 익숙함을 포기하고 나에게 베푸는 배려에 나는 속절없이 녹아 에반의 품에 갇혔다.
“오해라는 걸 알았으니 됐어. 난 네가 싫지 않아. 데미아, 오해해서 미안해.”
“내가, 내가 미안해…. 미안해, 에반. 내가 모자라서…. 내가 바보라서 그런 것도 모르고….”
“참 나. 바보같이 울기는 왜 울어. 그러다 가뜩이나 부은 눈, 터진다?”
에반이 나를 싫어하지 않아.
나를 원망하지도, 혐오하지도 않아.
나는 아이처럼 목 놓아 울었다. 이까짓 눈이 터져도 좋을 성싶었다.
에반은 흐느끼며 우는 나를 나무라거나 타박하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곁을 지키며 내 어깨를 다독였다.
그가 입을 연 것은 한참 후였다.
“어휴, 얼굴이 난리가 났네. 올해 가뭄은 걱정 없겠다.”
에반의 말을 듣고 나는 눈물과 콧물이 얼굴에 범벅이 된 채 고개를 들었다.
인중 위로 콧물이 흘러내리는 게 느껴졌다. 황급히 고개를 다시 숙이려는데, 에반이 헛웃음을 지으며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인중을 문질렀다.
낡고 너덜너덜한 오래된 손수건. 내가 어릴 때 선물한 허접한 손수건이었다. 누더기처럼 보일 지경인데도 향수를 뿌린 건지 향기로웠다.
“…이 손수건….”
나는 에반의 손목을 붙잡고 손수건을 내려다봤다. 코끝에 에반의 향이 일렁거렸다.
“…뭐가?”
에반은 모르는 척했지만,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나는 비로소 에반이 정말 나를 싫어하는 게 아니라는 걸 확신했다.
“에반, 버리지 그랬어…. 이렇게 너덜너덜할 때까지 쓰면 어떡해.”
“준 거 간직하고 있어도 난리야.”
퉁명스럽게 한 대답 속에서 나를 향한 애정이 느껴졌다. 내가 줬기에 간직했다는 말이다.
나는 그게 너무도 고맙고, 기뻤다. 겨우 멎어 가던 눈물이 다시 쏟아진 것도 에반의 탓일 것이다.
“…바보.”
“누가 누구더러 바보래? 막 나간다, 데미아 로렌스?”
“에반은 정말, 바보야….”
편지에 관해 만나자마자 묻지 않은 것도, 오해로 감정이 상해 있으면서도 날 도와주고 배려해 준 것도, 손수건을 간직하고 있는 것도.
바보처럼, 착하고 다정해서.
“…너에게 줄 게 있어, 에반.”
“뭔데. 엿이라도 먹이게?”
“나쁜, 말.”
“콧물 질질 흘리는 사람한테 듣고 싶진 않은데.”
나는 괜히 찔려서 코를 훌쩍였다. 에반이 우스운 것을 본 것처럼 피식 웃는다.
날 보고 웃어 주는 에반이 옛날의 그와 비슷해서, 나는 과거에 머무르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황급히 치마 주머니 속에서 손수건을 꺼내 건네자, 에반은 놀란 얼굴로 손수건을 바라봤다.
“손수건, 오래 썼잖아….”
“…나, 주는 거야?”
“당연하지. 내가 받은 게 많으니까….”
에반은 손수건을 받아 펼쳤다. 오래된 것과 같이 붉은 꽃 세 송이가 수놓아져 있었다. 훨씬 정교하고 아름다운 자수가 손수건 귀퉁이를 장식한다.
나는 에반의 반응을 살피기 위해 고개를 숙인 채 곁눈질로 힐끔거렸다.
에반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손수건을 펼친 채 굳어 있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 건가, 걱정이 되어서 조심스럽게 고개를 드는 순간이었다.
“…….”
에반의 얼굴이 새빨갛게 익었다. 나는 에반이 아픈 것도 아니고, 수치스러워하는 것도 아니라는 걸 알았다.
에반은 좋아하고 있는 것이다. 고작 다른 것도 아닌, 내가 준 손수건 하나를 받고.
‘우리는 본질을 봐야 해. 물질은 우리를 현혹시키고, 우리를 눈멀게 하지.’
‘본질….’
나보다 본질을 더 잘 아는 이는 에반이 아닐까. 물질 속에 파묻혀 있으면서 본질을 볼 줄 아는 게 대단한 것이 아닌가.
에반이 주섬주섬, 고장이라도 난 것처럼 손수건을 접기에 나는 엷은 미소를 지었다.
“…좋아, 에반?”
에반이 기뻐해 줬으면 좋겠다. 돈도, 재능도 없는 내가 유일하게 해 줄 수 있는 것이니까.
돈이 들지 않는, 재화 가치도 없는 내 선물이지만 에반이 기뻐해 주기를. 날 위해 웃어 주길 바랐다.
“나랑 장난해? 좋은 게 당연하잖아. 무려 10년을 넘게 썼다고.”
평소와 같은 거친 말투의 에반이었지만, 흐물흐물하게 풀린 입매와 기분 좋게 가늘어진 눈가가 얼마나 좋은지 티를 내 주었다.
에반이 솔직해서 다행이었다. 솔직하지 않았다면 에반이 정말 기뻐하는 건지 의심해야 했으니까.
나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는 사람이라서 그의 기쁨을 고스란히 받아들일 수 있었다.
“더… 많이 만들어 줄게. 10년이나 쓰지 않도록.”
에반이 나를 싫어하지 않는다는 오래 묵힌 오해를 풀었으니 나는 욕심이 났다.
‘에반이 나를 싫어하는 줄 알고 다시는 만나지 않으려고 했는데. 더 자주 보고 싶어. 그간 소원했던 5년의 시간을, 다시 채우고 싶어.’
나의 소중한 친구. 영생을 살아도 또 만나지 못할 귀한 친구. 나에게 에반은 소중하고, 사랑스럽고, 귀했다.
에반은 내 말을 듣고 잠시 멈칫하더니, 손수건을 안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난, 네가 해스워드에 더 오래 머물렀으면 좋겠어.”
어디서 조언이라도 듣고 온 건지, 나에게 설득을 할 때마다 점잖은 단어를 고수한다. 나는 그런 에반이 어색하면서도 꽤 달갑게 느껴졌다.
그가 평소에 하지 않을 짓을 하면서까지 나를 대하는 게, 나를 소중하게 여기는 것처럼 느껴져서.
나에게 에반이 소중한 만큼, 에반도 나를 소중히 여기는 것 같아서 좋았다.
“내가, 염치없이 그럴 수는 없지….”
“데미아, 저번에도 말했지만 너 많이 아파. 건강도 안 좋아졌고, 마음도 다친 것 같아.”
에반은 섬세한 공예품을 다루듯 내 어깨를 쥐었다. 아주 약한 악력이 느껴졌다.
“게다가 대부인이 널 위협하고 있다며. 대부인이 해스워드까지 뒤지, 아니, 찾아보더라도 숨을 수 있잖아. 들켜도 대부인이 해스워드를 건들 수 없을 거고.”
비넨의 경제는 물론, 제국의 경제를 쥐고 흔드는 해스워드에게 롬메르비가 밉보일 필요는 없다. 내가 해스워드에 의탁한 걸 알게 되더라도 굳이 해스워드를 위협하거나, 제재를 가할 수 없다는 소리다.
롬메르비는 해스워드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한 덕에 여러 이득을 본 적 있다. 그러니 더욱 해스워드와 척을 지고 싶지 않을 것이다.
나는 에반이 하는 말뜻을 이해했다. 해스워드에 숨어 버리면 나는 안전할 수 있다.
“하지만 내가 그래도 돼? 나 따위가… 네 앞길을 막는 거면 어떡…해? 에반, 나는, 난… 내가 너에게 피해를, 줄까 봐 그게 너무 무서워…. 무서워서, 달아나고 싶어.”
나는 겁쟁이에, 머리도 나쁘고, 할 수 있는 것도 없어서 에반에게 도움이 될 수 없다.
에반은 나를 위해 일을 주고, 돈을 주고, 치료를 해 주고, 여러 선물을 주었는데도 나는 그에게 갚아 줄 수 있는 게 없었다.
서로를 아끼고, 소중하게 여기는 친구라고 해도 한쪽만 베푸는 관계가 과연 좋은 관계라고 할 수 있을까?
“나는 쓰레기라서… 네가 베풀어 주는 만큼 갚아 줄 능력이 되지 못해…. 나는, 구제 불능이고….”
“그만.”
에반이 내 어깨를 가볍게 흔들었다. 나는 화들짝 놀라서 몸을 움츠렸다. 난로에 불을 때지 않았는데도 침실이 따뜻했다.
롬메르비에 있을 때에는 아무리 난로에 불을 때고, 난롯가에 쭈그리고 앉아도 바람이 들어와 추웠는데.
“난 너를 위해 할 수 있는 건 다 할 거야. 게다가 널 해스워드에 그냥 모셔 두는 것도 아니잖아. 안주인 일, 네가 해 주고 있으니까.”
다정한 어투, 다정한 문장, 다정한 에반.
에반의 향이 내 코끝을 간질이고, 부쩍 가깝게 다가온 에반의 체온이 피부에 닿는 것 같았다.
거대한 사내의 몸집은 나를 보호하듯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친구끼리 무슨 말을 그렇게 하냐. 피해라든가, 앞길을 막는다든가. 더럽게 섭섭하네.”
“…섭, 섭해?”
“사과하지 마.”
나보다 먼저 입을 뗀 에반이 내 말을 막아 버린다. 사과하려고 했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귀신같기도 하다.
에반은 내 어깨에서 천천히 팔뚝을 쓸면서 내려와 내 손목을 쥐었다. 붕대가 꼼꼼하게 감긴 내 손은 둔해 보였다.
“나랑 있어. 눈이 그치고, 기찻길이 다시 멀쩡해져도 나랑 있자. 데미아.”
아주 점잖고 어른스러운 껍데기를 뒤집어쓴 칭얼거림이었다. 같이 있자고 조르는 모습에서 옛날의 에반이 겹쳐 보였다.
동그란 뺨을 부풀리고, 내 손을 꼭 잡은 채 놓지 않고 매달리던 어린 에반이.
‘누나, 나랑 있어! 왜 가! 가지 마! 나랑 더 놀아 준다며!’
변성기도 아직 오지 않은 높은 목소리의 투정이 생생하다.
나는 주먹을 쥐어 조금이나마 못난 손을 숨겼다. 손가락이 따끔거린다.
“내 조카도 봐야지. 여기서 돈 모으면 되잖아. 새 친구도 생긴 거 아니야? 나랑 있는 게 싫어? 그래?”
점점 평소의 에반으로 돌아온다. 보다 저급한 단어를 사용해 체면도 신경 쓰지 않고 조르는 게 더 익숙하다.
나는 아주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울음 탓에 기운이 없어져서 그런지, 더 환하게 웃을 수 없는 게 아쉽다.
“나랑 있어. 내 옆 말고 또 어딜 간다고 그래? 어딜 가든 내가 아주 졸졸 따라다녀서 귀찮게 해 버리는 수가 있어.”
“내 옆에 있, 으면 지, 지루해서 어떻게 버텨…. 유부녀 옆에 있으면 네 소문도 안 좋아지고….”
에반이 내 손등을 부드럽게 감아쥐었다. 나는 양손이 에반의 손아귀에 갇혀 옴짝달싹할 수 없게 되었다.
큼지막한 손안에서 내 손은 조금도 보이지 않는다. 내 치부가 전부 에반의 손에 가려졌다.
에반이 툭, 내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부딪쳐 혼을 냈다.
“내가 소문에 휘둘리는 사람 같아? 유부녀 따라다닌다고 소문나면 세상 유부녀들 다 나한테 들이댈걸.”
자신의 얼굴을 보라며 에반이 눈을 두어 번 깜빡거렸다. 그래, 에반의 얼굴과 몸, 재력이나 성격을 보면 따라다니지 않을 여자가 없기는 했다.
아마 에반이 결혼했어도 유혹하는 여자는 많았겠지. 나는 미약하게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