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부녀지만 결혼은 처음입니다
1권
혜용 장편소설
1장
“그럼 네 삶은, 내가 없으면 없었던 거네?”
에반은 나를 곧게 바라보며 말했다. 집요한 시선에 눈을 피하려다가, 더는 에반의 눈을 피하고 싶지 않아 시선을 맞췄다.
흐트러진 머리 모양에 열이 오른 건지, 붉어진 얼굴과 내 양옆을 막은 두꺼운 팔 아래로 약간 벌어진 셔츠가 보였다.
꼭 이상한 기분이 드는 자세였다. 에반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나쁜 짓이라도 하는 것 같았다.
“…그렇지?”
“나 덕분에 여태 살아 있는 거고?”
“…으응.”
“그럼 네 삶을 나한테 줘.”
당연한 듯 뱉는 요구여서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 에반은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기나 하는 걸까?
마치 청혼하는 것 같지 않은가.
깜짝 놀라 입만 벙긋거리니, 에반이 미간을 찌푸렸다. 기분 나빠 보이는 건 아니었다.
“내가 살린 네 목숨, 나한테 써. 고마운 거 갚고 싶다며.”
심장이 뛰는 게 이상하다. 남편인 디르티헨과 마주할 때마다 느꼈던 감정이 왜 에반에게서 느껴지는지.
5년간 느낀 남편의 공백이 커서 누구든 마음에 들이고 싶었을까. 그래서 에반에게 미묘한 설렘이 느껴지는 건가.
에반이 내 남편이길 바란 적이 있다. 디르티헨이 아닌 에반과 함께했다면 어땠을까 상상하기도 했다.
“…나, 나는… 유부녀야….”
그러나 상상일 뿐이라는 걸 안다. 아무리 비밀 결혼이라고 하더라도 나는 기혼자다. 남편도 있는 처지에 누군가에게 내 삶을 내어 줄 수 없다.
에반은 내 대답을 예상이라도 했는지 허탈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시원하게 벌어진 입술이 호쾌해 보였다.
“어차피 비밀 결혼이잖아. 그게 핑계가 될 수는 없어.”
“하지만….”
“데미아.”
에반의 얼굴이 짐짓 굳어진다. 난 그가 농담을 한 것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진심으로 날 원하고 있다.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안 된다는 말만 하면 되는 건데 왜 쉽게 말이 나오지 않을까.
왜 비논리적인 변명만 쉽게 나오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네가 입은 옷, 네가 신은 신발, 네가 낀 장갑, 네가 저녁에 먹은 음식과 낮에 먹은 디저트, 네가 마시는 공기뿐만 아니라 네가 잠드는 침실까지 전부 내 것인데.”
책상을 짚은 손이 어느새 내 손목을 타고 올라와 어깨를 쥐었다. 그리고 부드럽게 내 목덜미를 훑어 뺨을 감쌌다.
달아날 수 없었다. 돌처럼 그대로 굳어 에반의 손에 나를 맡길 수밖에.
“널 이루는 전부가 내 것인데 왜 너는 내 것이 아니야?”
에반은 소유욕이 많거나, 통제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런데 왜 나에게는? 왜 나를 소유하려 들까. 나는 값어치 있는 존재도 아닌 데다 나보다 더 좋은 사람이 널리고 널렸는데.
“롬메르비에 돌아갈 게 아니라면, 나에게 줘.”
롬메르비에 돌아갈 일은 없다. 대부인이 살아 숨 쉬고 있는 한, 티헨이 와도 난 돌아가지 않는다.
내가 갈 수 있는 곳은 없고, 가고 싶은 곳도 없다. 내 일생의 목표였던 빚도 하루아침에 사라져 자유가 되었다.
나에게 남은 것은 다 무너진 로렌스라는 남작 가문뿐.
‘날 너에게 준다면, 뭐가 달라질까.’
말도 안 되지만, 궁금해졌다. 친구 사이에서도 이렇게나 아껴 주는 네가, 얼마나 더 정성을 들여 소중하게 대할지.
여기서 얼마나 더 다정해질 수 있을지 보고 싶어졌다.
***
푸른 물결이 솟아올라 모래사장에 닿자 하얗게 부서졌다. 발치에 닿아 내 발목을 휩쓸고 달아나는 파도는 저 멀리 사라진다.
나에게 장난이라도 치는 건지, 파도는 몇 번이고 내 발목을 움켜쥐고 달아났다. 나는 치맛자락을 쥔 채로 바다에 발을 담갔다.
거센 바닷바람이 내 뺨을 훑고,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짜고 비린 냄새….’
나는 바다를 보는 것을 좋아했다. 끝도 없이 펼쳐진 바다 끝에 어렴풋이 보이는 지평선. 그 너머에 있는 게 무엇인지 궁금했다.
세간에서 말하는 대로 이 세상은 평평할까? 아니면 둥글까? 나는 둥글다는 데에 손을 들어 주고 싶다.
동그라미는 안정적인 도형이니까. 모난 곳도 없고, 하나의 선으로 도형을 완성할 수 있다는 게 마음에 들었다.
“데미아, 오늘도 나왔어?”
걸걸하고 투박한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생선잡이를 생업으로 삼는 아저씨였다.
내가 종종 이곳에 오는 걸 알고, 가끔 말을 걸어 주고 따뜻한 차를 챙겨 주기도 했다. 아저씨는 오늘도 나에게 차를 건네주며 옆에 앉았다.
“요즘 자주 오네. 마님이 또 괴롭혀?”
“아, 아뇨. 그럴 리가요. 마님은… 언제나 잘해 주시는걸요. 제, 제가 부족해서 그렇죠.”
나는 고개를 저으며 차를 홀짝였다. 싸구려 찻잎으로 우린 물은 밍밍하고, 약간 떫었다.
“갈수록 안색이 안 좋아지는데. 걱정되어서 그래.”
아저씨는 내 안색을 살피며 안타까운 듯 미간을 찌푸렸다. 나는 아저씨에게 민폐를 끼친 것 같아서 성급히 고개를 저었다.
“정말 그런 거 아니에요. 추워서 그, 그런지 잠이 안 와서….”
아저씨는 조심스럽게 내 눈가에 손을 얹으려다가 그만두었다. 뺨과 턱, 코밑을 잇는 수북한 수염은 어딜 봐도 뱃사람으로 보였다.
“남부라고 해도 춥긴 해. 정 잠이 안 오면 솜으로 만든 옷이라도 챙겨 줘?”
“괜찮아요! 아저씨도 추, 추울 텐데, 저한테 낭비하지 않아도… 돼요.”
나는 투박한 찻잔을 움켜쥐어 손을 녹이다가 화들짝 놀라서 고개를 여러 번 저었다.
아저씨는 한숨을 내쉬더니 자신의 수염을 손가락으로 빗어 내렸다.
“낭비라니,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섭섭하게.”
“죄송해요….”
아저씨의 심기를 상하게 한 것 같아 미안해졌다. 나는 아저씨의 눈치를 살피며 찻잔을 꼭 쥐었다. 차는 겨울 날씨에 못 이겨 금방 차가워진다.
“미안하면 받든가.”
“하지만 요새 생선잡이가 자, 잘 안 된다고 했잖아요…. 받을 수 없어요.”
“그럼 더 자주 오든가?”
아저씨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내 머리 위로 손을 얹어 마구 흩트렸다. 나는 바다에 올 때마다 만난 아저씨의 투박한 상냥함이 고마웠다.
가까운 사이도 아니고, 그저 바다를 구경하다 만난 사이에 아저씨는 날 무척 잘 챙겨 주었다. 아저씨에게 받은 배려를 다 갚으려면 내 생의 반을 써도 부족했다.
“이거 봐. 또 상처가 생겼잖아.”
아저씨는 내 손등 위로 생긴 상처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아….”
나는 파랗게 멍이 든 손등을 보고 황급히 잔을 내려놓고 치마폭에 감추었다.
“이건 제, 제가 부족해서….”
“이렇게 작은 손을 때릴 데가 어딨다고?”
아저씨는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대답을 바라고 한 말 같지는 않았기에 나는 더 깊이 치마에 손을 파묻었다.
“하여간, 이 지긋지긋한 비넨도 떠야지.”
“떠나려고요?”
아저씨는 바닥에 손을 짚어 기대며 푸념하듯 말했다. 나는 가깝게 지낸 아저씨가 떠난다는 말에 화들짝 놀라 물었다.
아저씨까지 가 버리면 정말, 많이 섭섭하고 슬플 것 같았다.
“그냥 하는 말이야. 진짜 가겠어?”
아저씨는 금방 식어 버린 찻물을 한 번에 들이켜고는 소매로 수염을 닦았다. 콧수염이 물기에 젖어 축축하다.
“뱃사람으로 태어났으면, 죽을 때까지 뱃사람이지.”
“그럼 아, 안 간다는 말이네요….”
“너랑 이렇게 시간 보내는 것도 요즘 재밌고.”
내 어깨를 가볍게 툭 친 아저씨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나는 그 미소와 아저씨가 뱉은 말에 크게 안도했다. 날 귀찮아하지 않고, 재미있게 여겨 줬다는 게 정말 고마웠다.
“비넨도 지내기 조, 좋으니까요.”
“그럼. 선대 해스워드가 무역 길을 터서 장사도 활발해졌고. 비넨에서 사는 귀족도 하나뿐이라 뜯길 돈도 적지.”
“하하….”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치맛자락을 움켜쥐었다. 손가락 끝이 따끔거렸다.
르네히디 제국의 끝자락에 있는 바다와 맞닿은 지역, 비넨.
그곳에는 오래전 황제의 미움을 사 쫓겨난 롬메르비 백작 가문과 바다를 이용해 무역으로 큰돈을 벌어들인 사업가 가문, 해스워드 가문이 있었다.
수도와 가장 먼 지역이다 보니 롬메르비 백작 가문을 제외한 귀족은 살지 않는 탓에 해스워드 가문과 롬메르비 가문은 제법 친밀했다.
“아무튼 간에, 데미아. 일이 힘들면 그만둬도 돼. 내가 배 타는 법이라도 가르쳐 주마.”
“신경 써 줘서 고마워요….”
“뭘. 네가 딸 같아서 그래.”
아저씨는 사람 좋은 미소로 호탕하게 웃었다. 나는 즐겁고 편안한 분위기에 들떠서 아저씨의 눈치를 살피며 농담을 던졌다.
“결혼도 안 했으면서….”
“그래, 노총각이다, 왜!”
내 농담도 기분 좋게 받아넘기기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무례하지 않았던 농담이었구나.
“결혼 못 한 노총각이어도, 딸뻘인 애를 보면 마음이 쓰이는 법이지.”
아저씨는 내 등을 가볍게 두드렸다. 큼직하고 거친 손은 내 등을 가득 채울 정도였다.
“그러니까 데미아, 고생하지 말고 행복하게 살아.”
“고마워요….”
걸걸하지만 다정한 목소리였다. 내 아버지가 살아 있었다면 이런 말을 해 줬을 거라는 생각에 가슴이 미어지고, 눈가가 시큰거렸다.
눈을 질끈 감았다 뜬 나는 지평선 너머에 해가 걸쳐진 것을 보고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갑작스러운 내 행동에 놀란 아저씨가 따라 일어난다.
“벌써 가? 데미아, 차는 다 마시고 가지.”
“대부인이 차, 찾을 시간이에요. 가야 해요.”
“다음에 또 와.”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축축하게 젖은 발을 닦을 새 없이 신발을 구겨 신고 치마를 정돈했다.
시간을 지체하면 정말 대부인에게 혼쭐이 날 수도 있었으니까. 나는 아저씨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부리나케 달려갔다.
‘혼나겠다.’
바다와 내가 일하는 롬메르비 백작가는 꽤 가까운 거리였다. 걸어서 이십 분이면 부둣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롬메르비 백작 저택은 대대로 이곳에 뿌리내려서 살고 있었는데, 옛적에 황제의 눈에 잘못 들어 이곳에 처박혀야 했다.
그래도 시간이 많이 흘러 롬메르비는 수도에 드나들 수 있었다. 내가 모시는 대부인은 이따금 정말 다행이라며 안도하고는 했다.
‘내가 바다에 있는 동안 대부인이 날 찾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말도 없이 사라진 나를 또 혼낼 것이다. 대부인은 다정한 분이지만, 쉽게 화를 내고는 하셨다.
나는 숲길을 가로질러 지름길로 빠졌다. 지름길이 조금 험하더라도 시간을 단축할 수 있어서 내가 자주 애용하는 길이었다.
눈이 녹았다가 다시 언 탓에 미끄러웠지만, 나는 서둘러야 했다.
“데미아! 왜 이제 와요!”
담장 밖에서 며칠 전 내린 눈을 치우던 하녀가 나를 발견하고 손을 휘저었다.
“왜요? 무, 무슨 일 있어요?”
“마님이 화가 엄청 나셨어요. 데미아가 없다고요. 또 어딜 갔다 온 거예요?”
하녀는 나를 질책하듯 위아래로 흘겨보았다. 나는 부끄럽고 민망해져서 고개를 푹 숙였다. 손가락 끝과 손등이 따끔거렸다.
삽을 들고 있던 하녀는 한숨을 내쉬고 내 어깨를 두드렸다.
“차라리 그만두는 건 어때요? 이렇게 일을 내팽개치고 밖에 나도니, 마님이 화낼 수밖에 없잖아요.”
“죄송해요….”
“데미아는 몰락하긴 했지만, 나름 귀족이잖아요? 그냥 관두고 돈 많은 귀족 잡아서 결혼해 버려요.”
나는 어색하게 웃고는 대답을 얼버무렸다. 모자라고, 일도 못하는 날 미워하는 건 당연했으니까. 면박 때문에 멋쩍은 건 아니었다.
내가 다른 남자와 결혼한다는 건 불가능했다.
이 저택의 주인, 롬메르비 백작과 결혼한 사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