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 오브 테이스트(One of Taste) 2권
원 오브 테이스트(One of Taste) 2권
원 오브 테이스트(One of Taste)
· 2 ·
© 리봄
원 오브 테이스트(One of Taste) 2권
· 차례 ·
CHAPTER. 04
CHAPTER. 05
CHAPTER. 06
원 오브 테이스트(One of Taste) 2권
CHAPTER. 04
서이재의 말대로 심심할 틈은 없었다.
신랑 신부의 집안은 재계에서 꽤 알아주는 기업들이라 하객의 규모도 어마어마했다.
그중에는 뉴스나 다른 매체에서 본 유명한 인사들도 있었다.
“저기 저 사람 연예인 아니에요?”
하객 구경에 여념 없던 채원이 이재의 팔을 톡 치고 물었다. 그가 관심 없는 얼굴로 시선을 던졌다가 다시 채원을 응시했다.
“그런가.”
“나 연예인 가까이서 보는 거 처음이에요.”
원형 테이블 앞에 샴페인 잔을 들고 선 채원이 홀린 듯 중얼거렸다.
엉겁결에 이재의 옆에 섰을 때는 마냥 불편한 자리라고만 생각했으나 지금은 파티의 매력에 제대로 사로잡혀 있었다.
테이블 단위로 자유로운 이야기가 오갔다.
채원도 자연스럽게 주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자리가 어색하게 느껴질 때마다 등 뒤를 지키듯 서 있는 남자를 흘긋 올려다보았다. 그러면 왠지 모르게 마음이 안정됐다.
본식보다 더 화려한 축가 무대와 소소한 이벤트들로 분위기가 달아올랐다.
사회자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거나 분위기에 맞추어 박수를 치던 채원이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는 별 감흥 없는 얼굴이었다.
다만 시선이 마주칠 때마다 가볍게 눈썹을 들썩이긴 했다. 그리고 무언가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는 게 전부였다.
이렇게 가만히 있을 거면서 나는 왜 붙잡았나. 심심하지 않게 해 주겠다던 말은 또 뭐고.
키가 큰 남자를 흘겨보는데, 갑자기 사회자의 음성이 크게 울렸다.
잔잔하게 깔리던 음악 소리가 점점 커지더니 곧 손을 잡은 신랑 신부가 테라스의 중심으로 나왔다.
본식 때보다 캐주얼한 턱시도를 입은 신랑과 레이스가 손목까지 덮은 화려한 살구색 드레스를 입은 신부가 아름다운 재즈곡에 맞추어 춤을 추었다.
한 곡이 끝날 때까지 파티에 참석한 하객들의 박수와 환호가 계속되었다.
중세 시대의 귀족 같기도, 어릴 적 꿈꾸던 동화 속 한 장면 같기도 해 눈을 뗄 수 없었다.
노래가 끝날 때쯤 사회자가 마이크를 잡았다.
“자, 이 아름다운 순간을 신랑 신부만 즐기면 안 되겠죠? 지금 마음에 드는 파트너가 있다면 바로 손잡고 나오세요! 잠깐 시간 드립니다!”
춤출 이들을 기다리는 동안 노래가 잠시 멈추었고 사회자의 말에 몇몇 커플이 기다렸다는 듯 중앙으로 나섰다. 파티와 잘 어울리는 아름다운 드레스들이 이목을 끌었다.
즐겁긴 했으나 더 길어지는 파티는 조금 부담되는 터라 채원이 이재의 팔을 살짝 잡아당겼다.
“그만 가야겠어요. 시간이 너무―.”
“한 곡 출까요.”
줄곧 무표정하게 파티를 감상하던 그의 시선이 이채를 띠었다.
그래서 알 수 있었다.
그가 지금 이 순간만 기다려 왔다는 걸.
채원의 얼굴에 당혹이 서렸다.
“나, 춤 못 춰요. 진짜로 못 춰.”
불안한 기운을 감지한 그녀가 한 걸음 물러서며 급히 손을 내저었다.
재벌가 자제들이야 이런 자리에 어울릴 법한 춤을 알고 있겠지만 자신은 아니었다. 하얗게 질린 얼굴로 내젓는 손을 그가 감아 잡았다. 얇은 손가락 사이를 긴 손가락이 깊게 얽어맸다.
“소원.”
“…난 들어줄 이유가 없는데?”
“내기에서 졌잖아요. 찜질방에서.”
이해할 수 없는 얼굴로 기억을 더듬던 채원이 작게 턱을 떨어뜨렸다.
“먼저 물 가져다 달라며. 그래서 나갔던 건데요?”
“그럼 돌아왔어야지.”
그때 채원은 몰아치는 감정 때문에 바로 탈의실로 내려갔었다.
“아니 그래도….”
이건 소원보다 벌칙에 가까운 것 같은데.
난감한 얼굴로 웨이브 진 머리를 쓸어 올리는 사이, 음악은 다시 시작되었다.
Carla Bruni의 ‘Moon river.’
귓가에 감겨드는 음악 소리와 그가 잡고 있는 손의 체온이 심장 박동을 바쁘게 만들었다. 입 안이 바짝 말랐다.
장난스럽게 다가오는 시선이 채원을 느른히 독촉했다.
짙은 밤하늘에 길게 이어진 노란빛 전구, 즐거움에 젖어 부드럽게 미소 짓고 있는 하객들.
하필이면 좋아하는 노래.
남자의 다정한 체온과 눈빛.
…반칙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춤을 청하는 건.
“…조금만이에요.”
허락하자마자 매력적인 남자의 입술이 곡선을 그렸다.
성큼성큼 벌어지는 걸음을 따라 채원이 테라스의 중앙에 섰다.
이미 시작된 노래에 맞추어 생각보다 많은 이들이 춤을 추고 있었으나, 떨리는 시야는 눈앞의 남자를 담는 것만으로 벅찼다.
마주 선 그녀가 어정쩡하게 손을 망설이자 그가 픽 웃으며 하얀 손을 제 어깨에 둘렀다. 커다란 손이 가느다란 허리를 바짝 끌어당겼다.
반동에 놀란 채원이 이재의 가슴팍을 짚었으나 그 손마저 반대쪽 손에 부드럽게 잡혔다.
자세를 취하고 나서야 영화에서 많이 보았던 무도회 장면이 떠올랐다.
경직된 어깨에 힘을 빼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발은, 어느 쪽부터 움직여요?”
품에 안겨 묻자 그는 대답 대신 천천히 발을 뗐다.
여자를 배려한 남자의 걸음은 여유롭고 느긋했다. 같은 노래에 호흡을 맞추는 다른 커플보다 확연히 느린 속도였다.
채원이 시선을 내려 스텝에만 집중했다.
그가 박자를 늦춰 준 덕분에 간신히 그의 밟을 밟지 않았다.
다가오면 물러나고, 그가 물러날 때 한 발 다가가기를 반복했다.
“잘하네.”
채원이 곧 스텝의 순서를 익혔다. 단순한 걸음만으로도 춤이 될 수 있다는 걸 깨달은 얼굴이 조금 상기되었다.
이제 고개를 아래로 떨어뜨리지 않고도 그와 호흡을 맞출 수 있게 되었을 때, 노래는 반이 지났고 그만큼 남아 있었다.
그의 눈을 바라보며 춤을 추었다.
며칠간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남자와 가깝게 서 있었으나 우습게도 지금은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호흡을 맞추는 일에만 집중했다. 실수는 하지 않았지만 여전히 춤은 그가 이끄는 대로 흘러갔다.
“몸으로 하는 건 다 잘하네요.”
은은한 음악에 나긋한 음성이 겹쳤다.
“파트너로 손색이 없네.”
서이재와 파트너.
순간 채원은 그의 발을 밟을 뻔했다. 갑자기 머릿속이 혼란하고 뺨이 달아올랐다.
침대 위에서 서로의 몸을 공유하는 사이가 되는 걸 수십 번, 수백 번 상상해 왔던 터라 찔린 채원이 당혹스러운 얼굴로 주변을 살폈다.
“생각할 시간 주기로 했잖아요.”
부드럽게 이어지는 동작을 따라 버건디 색 드레스가 결 좋게 흔들리며 감겼다.
“춤 말한 건데.”
“…?”
“춤, 파트너.”
“…아.”
그가 시원하게 웃었다. 예쁜 분홍색이던 채원의 뺨이 더 붉어졌다.
“물론 그쪽으로도 손색없긴 하고.”
“알겠어요, 그만 놀려요.”
목울대를 진동하는 낮은 웃음소리가 노래 위로 겹쳤다. 춤은 곧 끝나 갔다.
항상 관계의 주도권을 쥐고 있던 여자는 처음 걸음마를 떼는 아이처럼 그의 손에 이끌려 춤을 추었다.
남자에게 몸을 맡기는 건 생각보다 쉬웠다.
…침대에서도 마찬가지일까.
“나한테 와요. 그만 생각하고.”
채원이 발을 멈추었다. 그도 기민하게 발을 세웠다.
“그만 기다리게 하고 나한테 오라고.”
제법 로맨틱한 고백이었다.
섹스가 아닌 사랑에 관한 말이었다면.
“생각보다 내 인내심이 형편없어서.”
위험하게 다가오는 눈빛을 마주했다. 끝으로 치닫는 나른한 음악이 둘 사이의 긴장된 침묵을 채웠다.
모든 상황이 그에게 안기도록 등을 떠미는 지금.
자신을 원하는 서이재의 눈빛을 거부하는 건 불가능이었다.
“…정말 반칙이에요, 이거.”
뜨거운 시선이 깊게 얽혔다.
* * *
깊게 시선이 얽힌 순간부터, 룸으로 올라가 밀폐된 공간에 둘만 존재하게 될 때까지.
입술은 여러 번 부딪혔고 몸은 한껏 달아올랐으나 머릿속은 여전히 복잡했다.
그를 허락했으나 외면할 수 없는 본능에 무너진 자신을 온전히 인정하는 건 쉽지 않았다.
깔끔한 기계음을 낸 도어록이 풀렸고, 발을 들인 채원은 현관에 그대로 멈추어 섰다.
그녀를 지나 유유히 객실로 들어선 남자는 소파에 재킷을 벗어 던지고 타이를 끌어 내렸다.
셔츠 단추를 툭, 연 그가 현관을 응시했다.
“거기서 하게.”
“한 걸음 더 걸으면 돌이킬 수 없을 것 같아서요.”
순식간에 시야를 덮칠 듯 다가온 이재가 채원의 허리를 부드럽게 감아 당겼다.
“그럴 리가. 지금도 충분히 늦었어요.”
정염에 젖은 시선이 오롯이 채원을 삼켰다.
“나한테 왔잖아.”
“…….”
“그럼 안겨야지.”
룸까지 이동하는 사이 조금 물고 빨았을 뿐인데 벌써 살짝 부어오른 채원의 입술에 이재의 눈빛이 머물렀다.
채원이 시선을 올려 그를 응시했다.
“후회할 걸 알면서도 기어이… 그쪽을 따라왔네요, 내가.”
그녀의 하얀 손끝이 아직 잠겨 있는 남자의 세 번째 단추를 매만졌다.
온몸이 더워졌다. 손끝을 타고 울리는 심장 소리의 주인을 단언할 수 없어졌다.
짙게 물든 이재의 시선이 단추를 푸는 작은 손을 응시하다가, 느리게 올라와 여자의 벌어진 입술에 고정되었다.
채원이 단추 하나를 채 풀기도 전에 입술이 맞물렸다.
이재의 품에 완전히 갇힌 채원이 깊게 파고드는 뜨거운 열기를 밀치지 않고 받아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