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움받는 결혼 3권
지은이 : 트위티블리
펴낸곳 : 필연매니지먼트
E-mail : feelyeon2015@gmail.com
정가 : 3,800원
ISBN : 979-11-7294-75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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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움받는 결혼
3권
트위티블리
목차
9장
10장
외전
특별 외전
9장
“……누가 재워 준대요?”
너무나 당당한 그의 선언에 희주가 불쑥 방어했다. 그러자 그가 입매를 살짝 휘어 올리며 손전등을 돌려 앞집을 비추었다.
불빛이 만든 길을 따라가던 희주의 시선이 앞집에서 멈췄다.
순간, 희주의 미간이 좁아졌다.
설마.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하던 그때, 윤재가 그 상상에 친히 못을 박아 주었다.
“저 집, 내가 매입했어. 다행히 당신한테 신세 질 일은 없어. 그러니까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돼.”
“……허.”
희주가 이번엔 정말 말도 안 된다는 듯이 헛웃음을 뱉었다.
“당신 앞집에 범죄자가 살았었어. 걱정돼서 웃돈 주고 집 매입했고 이 동네에서 나가게 했어.”
윤재의 말에 어둠에 가려진 희주의 표정이 묘하게 이지러졌다.
분명 고마워해야 할 마음과 행동인데, 왜 자꾸 짜증이 나는지 모를 일이었다.
오히려 더욱 반발심만 거세졌다.
“그러니까. 여기에 그런 사람이 살든 말든, 차윤재 씨가 무슨 상관인데요.”
그래서 이런 삐뚠 말이 자꾸만 튀어나왔다. 그리고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소리까지.
“내가 어떻게 되든 말든. 그건 또 무슨 상관이고.”
“정희주.”
흔치 않은 그의 엄중한 목소리가 공기를 무겁게 짓눌렀다.
윤재가 잠시 머리를 헝클더니 다시 손을 제자리로 가져다 놓았다.
“……희주야.”
“이제 와 대체 왜 이러는 건데요. 나랑 뭘 어쩌고 싶은 건데요!”
나지막하고 다정하게 불린 제 이름에 희주가 조금 격양된 투로 감정을 뱉었다.
왜 이러느냐는 말과 달리, 솔직히 그의 행동엔 조금 이해되는 구석이 있긴 했다.
미안함, 죄책감. 그런 것들.
저를 아프게 한 상황과 별개로, 제가 아는 그는 착한 사람이었다.
그런 차윤재는, 제게 의도치 않게 아픔을 줬으니 미안해할 것이다. 그리고 윤해원만큼은 아닐지언정 저를 조금이나마 마음에 담았으니, 당연히 죄책감을 느낄 터였다.
그러니 지금 제 앞에서 저런 표정을 하는 거겠지.
언젠가 그랬던 것처럼, 그의 마음을 이해했다.
하지만 이해해 주고 싶지 않았다.
제가 원하는 건, 그를 미워할 수 있을 때까지 미워하다가 철저히 잊는 것이었으니까.
희주의 상념이 안개처럼 짙어지던 그때, 윤재의 짙은 목소리가 울렸다.
“……어쩌고 싶냐고.”
“…….”
“여전히 난, 당신이 내 인생에 섞여 들길 바라.”
윤재의 고백 아닌 고백에 희주의 몸이 일순 꼿꼿하게 굳었다.
곧 몸에 힘을 푼 희주가 아름다웠던, 그러나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것을 회상하듯 아득한 눈을 하며 운을 뗐다.
“예전에 당신한테 그 말을 들었을 때는 그게 세상 전부처럼 느껴졌어요.”
하지만 이내 눈빛은 차게 식어 버렸다.
“……근데 어쩌죠. 이제 내가 당신 인생에 섞이고 싶지 않은데.”
희망에 찼을 땐 극복하게 되리라 믿었던 것을, 이제 와서 부정하려니 왠지 서글펐다.
“나는 아마, 평생 당신의 첫 번째가 될 수 없을 거예요.”
이제 더는 그의 마음을 원하지 않음에도 말이다.
“당신이 윤해원 씨를 어떻게 사랑했는지 아니까, 당신의 사랑이 어떤 건지 나는 너무 잘 아니까…….”
목소리가 조금 떨려 왔다.
눈물이 날 것도 같았다.
하지만 다행히, 어둠이 그렁한 눈을 가려 주었다.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은 희주가 다시 차분히 말을 이었다.
“당신이 날 마음에 담을 수는 있지만, 사랑할 수는 없다는 걸 알아 버렸어요. 전화를 받지 않은 그날.”
희주가 담담히 현실을 읊었다.
“사실 이전엔 나보다 차윤재 씨 마음이 옅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어요. 근데 내가 생각보다 욕심이 많은 사람인가 봐요. 그런 당신이 싫어진 걸 보면.”
현실을 읊다 보니, 지금껏 이상한 반발심에 사로잡혔던 이성이 완벽히 제자리를 찾았다.
마른침을 한 번 삼킨 희주가 잠시 고민하다 처음으로 온전한 제 마음을 꺼내 보였다.
“엄마 그렇게 된 거……. 나 사실 차윤재 씨 탓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장례식장에서 했던 말도, 오늘 아침에 했던 말도 다 잊어요.”
“…….”
“내가 줬던 마음을 돌려받지 못한 만큼, 딱 그만큼만 미워할게요. 차윤재 씨를.”
여기서, 그와의 모든 걸 정리해야겠다고 마음먹은 희주가 진심을 꾹꾹 눌러 담아 내뱉었다.
“그러다가 서서히 잊어 갈게요. 그렇게 완벽한 남이 돼요. 우리.”
“난…….”
“그러니까 차윤재 씨도 나한테 마음을 돌려주지 못한 만큼의 죄책감만 느껴요.”
윤재의 말을 끊은 희주가 제 얘기부터 다 들으라는 듯 급히 이어 갔다.
“버티다 보면 서로 미안해하지도, 미워하지도 않는 날이 분명 올 거예요.”
희주가 크게 숨을 들이켜고 마지막 한마디를 뱉었다.
“그러니까 지금 서울로 가요. 가서 다시는 오지 말아요.”
머리에 있던 말을 차근히 다 끝낸 희주가, 힘껏 오므렸던 발끝에 힘을 풀었다.
그래. 잘했어. 잘 말했어.
이제 정말로 끝인 거야.
안도하며 속으로 그렇게 되뇌던 찰나, 윤재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흘렀다.
“……난.”
희주의 이야기 내내, 하고 싶은 말이 있는 사람처럼 입술을 벙싯거린 것치고는 맥이 빠지는 목소리였다.
곧 당장에라도 해명을 할 거 같았던 윤재의 입술이 굳게 닫혔다.
윤해원은 애초에 나를 버린 여자였고, 그래서 남은 감정 따위는 없으니 신경 쓰지 말라는 그런 최악의 해명을 할 수는 없었기에.
그렇게 말하면 그녀는 분명 더 크게 오해할 터였다. 해원이 있어야 할 자리를 저로 채웠다고.
저는 윤해원의 빈자리를 희주로 대신한 것이 아니었다.
애초에 그녀는 누군가의 빈자리를 거름 삼아 싹을 틔운 적이 없었다.
온전히 정희주라는 존재로 제 마음에 안착했고, 뿌리를 내렸다. 윤해원으로부터 배신을 당했다는 사실을 알기 전부터.
사랑인지 아닌지 헷갈렸던 순간은 있었어도, 단언컨대 그녀가 해원의 대용이었던 적은 한순간도 없었다.
망설이던 윤재는 곡해된 제 마음을 설명하는 것을 포기하기로 했다.
지금, 저는 그녀에게 단 한 줄의 설명도 할 수 없었다.
변명은 더더욱 안 되었다.
하지만 그런 제게 허용되는 한 가지 말이 있다면…….
“사랑, 아니었던 적 없어.”
사랑한다는 말뿐이었다.
“당신한테 처음 입 맞추고 싶었던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
“헷갈렸던 순간마저도, 사랑이었다고.”
말을 끝맺은 윤재가 천천히 손을 올려 희주의 뺨을 감쌌다. 그리고 어둠에 감춰진 눈물을 닦아 냈다.
제가 어느새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것조차 인지하지 못했던 희주가 흠칫, 몸을 웅크렸다.
흐르는 눈물보다 뜨거운 그의 손에 말문이 막혔다. 이제 반발심에 의한 미운 말도, 이성에 의한 바른말도 나오지 않았다.
“당신이 안은 불행도, 슬픈 마음도 다 내 탓으로 돌려도 돼. 내 사랑, 믿지 않아도 돼.”
뺨에 닿은 그의 손이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런 건 다 내가 감당할 테니까…….”
강도 높은 청소로 진을 다 빼 버려 힘이 다 떨어지기라도 한 걸까.
밀어내고 밀어내도 밀리지 않는 남자를 막아 낼 힘이, 오늘은 더 남아 있지 않았다.
“그냥, 내가 원하는 건. 당신이 조금이나마 편해지는 거야.”
그러니, 이 힘없는 밤을 보내고 새로운 해가 뜨면 다시 이 남자를 밀어내는 수밖에 없었다.
***
다음 날 오전.
희주가 마을 입구를 지나 가게로 나왔다.
아무리 실의에 빠져 있다지만 그걸 핑계로 마냥 놀 수는 없는지라, 희주는 얼마 전 마을 입구에 빵집을 열기 위해 점포를 얻었다.
예전에 용이 아저씨와 엄마가 함께 일했던 곳처럼 소담한 가게를 꿈꾸며 오픈을 준비 중이었다.
다행히 마을 안쪽에 있는 집과 달리 지대가 높은 마을 입구 쪽의 점포는 피해가 거의 없었다.
가게 문을 열고 정리를 마친 희주가 살짝 피곤한 듯 이마를 문질렀다.
오늘 새벽, 희주는 해가 뜨기 전에 일어나 집을 마저 정리했다.
윤재가 보낸 사람이 대충 집을 치워 주었다지만, 흙탕물이 들어찼던 집은 몇 번이고 알코올로 바닥을 다시 닦아 내야 했다.
엉망으로 널브러진 물건들도 제자리에 정리했다. 살림살이가 없는 편인데도 치우는 데 은근히 시간이 걸렸다.
그러면서 희주는 제가 그날 술을 마시며 보던 엄마와의 사진이 물에 쓸려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사실에 세상이 무너지는 거 같았다. 하지만 이미 벌어진 일에 온종일 눈물만 쏟을 수는 없었다.
그날 보던 게 가장 아끼던 사진이긴 했으나, 그나마 다행인 점은 앨범을 통째로 바닥에 꺼내 놓고 본 건 아니라는 거였다.
마음을 겨우 다잡은 희주는 강아지가 있어 대피소로 가지 못한 옆집 황 씨 아주머니의 청소를 도왔다.
집을 함께 치워 주며, 마을의 소식통인 황 씨 아주머니로부터 보호소의 상황을 전해 들었다.
‘아이고, 보호소 쪽으로 식사나 간식이 다 가서 군인들 먹을 식량이 부족하단다.’
언제 그런 소식까지 들은 건지, 황 씨는 그것 말고도 마을 곳곳의 이야기를 희주에게 재잘댔다.
소식을 전부 들은 희주는 수많은 지원에도 소외되는 이들에게 빵을 만들어 나누어 주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래서 가게로 왔고, 이제 작업만 시작하면 되는데 몸이 잘 움직여지지 않았다.
단순히 피곤해서라는 핑계를 대기엔, 머릿속에 윤재가 가득했다.
제가 편해졌으면 좋겠다는 말을 한 어젯밤의 그 장면이 집요하게 머리를 파고들었다.
이제는 왜 그러느냐는 마음도 들지 않았다. 그저 제게 다시금 다가오려는 남자를 어떻게 밀어내야 하나, 그 걱정만 앞섰다.
계속 저런 식으로 나온다면, 어제저녁처럼 순간순간 뿌리칠 힘을 잃는 순간이 올까 두려웠다.
아니, 분명 올 것 같았다. 그의 앞에서 무력해지는 순간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