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tents
목차
chapter 1. 회귀, 그리고 약혼
chapter 2. 친구, 귀부인의 비밀
chapter 3. 성장
chapter 1. 회귀, 그리고 약혼
“저와 약혼해 주세요.”
뭐 하나 다를 게 없는 일상이었다. 병색이 완연한 얼굴로 우아하게 앉아 느닷없이 말을 꺼내는 이 소녀만 제외하면.
라르젠은 생각지도 못한 말에 대답할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레이디 아스티에, 그게 무슨…….”
“브륀헬트의 아스티에가 다르실리암 대공, 라르젠 벨레스터 로너레일즈 전하께 청혼하는 바입니다.”
“…….”
“기간은 그리 길지 않을 거예요. 제가 죽거나 전하께서 실종되실 거니까 짧으면 5년, 길어야 6년이죠.”
하얗고 노란 실타래 같은 두 사람 머리카락 위로 창문을 통해 들어온 겨울 햇살이 커튼 자락처럼 조용히 내려앉았다.
겨울의 어느 날이었다.
***
방금 눈을 떠서 그런지 머릿속이 부옇게 흐렸다.
아스티에는 하녀의 부축을 받아 쿠션에 몸을 기대어 앉았다.
가장 먼저 보이는 건 연한 톤의 벽지와 커다란 풍경화, 벽면을 장식한 태피스트리였다. 벽난로의 장작이 타닥거리며 타들어 가는 소리도 들려왔다.
익숙한 풍경에 멍하니 눈동자를 굴리고 있는데, 누가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아스티에 님, 괜찮으세요? 정신이 드세요?”
침대에 바짝 다가앉은 이는 눈물을 그렁그렁 매단 채 그렇게 물었다.
부드럽게 구불거리는 갈색 머리카락에 꽃잎 같은 분홍색 눈동자가 어여쁜 사람이었다. 초점이 맞지 않던 아스티에의 눈이 점점 커다래졌다.
“……레니아?”
“네, 저예요. 좀 괜찮으세요? 어휴, 이게 다 무슨 일인지…….”
레니아, 아스티에의 측근 시녀는 그렇게 말하며 뼈가 앙상한 손등을 쓰다듬었다. 제비꽃을 닮은 보라색 눈동자가 그 움직임을 쫓았다.
최근 몇 년은 만난 적 없는 레니아였다. 그런데 당연하다는 듯이 제 옆에 있는 게 아닌가.
레니아가 결혼한 상대는 수도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동부의 백작이었다. 수도까지 올라오는 데만 한 달은 더 걸릴 테니 지금 그녀가 여기 있는 건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상한 게 한둘이 아니었다. 아스티에의 눈이 스르르 굴러갔다.
분명 수도는 유례없는 더위로 난리였다. 그랬는데 벽난로가 웬 말이며, 눈앞에 걸린 풍경화는 아스티에가 결혼하자마자 뺏겨 새어머니의 침실에 걸린 지 오래였다. 이혼 후에 가문으로 돌아와서는 그 빈 자리를 발견하고 속상해 울었던 기억이 있으니 분명했다.
분홍색 눈을 보던 아스티에의 눈이 혼란으로 요동쳤다.
“혹시 내가, 쓰러졌었어?”
확인차 묻는 아스티에의 목소리에는 의구심이 가득했다.
쓰러지기는 했다. 원인이 지병이 아닌 독이었을 뿐.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아스티에는 독을 먹고 쓰러져 있는 자신을 누군가 방으로 옮겼고, 가문의 주치의가 치료했다고 여겼다.
그런데 본능은 그게 아니라고 경고음을 울렸다.
“네? 설마, 기억이 안 나세요? 그 여우 같은 여자가 인형에 무슨 짓을 해 놨잖아요.”
인형? 난데없는 단어의 등장에 고운 미간이 구겨졌다. 쓰러졌냐고 물었는데 갑자기 인형 이야기는 왜 꺼내는 건지 모를 일이었다.
아스티에의 표정을 본 레니아는 정말 그녀가 기억을 잃었다고 여긴 건지 울상을 짓기 시작했다.
“어떡해, 어떡하지…….”
“뭔데 그래? 무슨 인형을 말하는 거지?”
“브렐디 인형이요! 파란색 브렐디 인형, 정말 모르시겠어요? 네? 아스티에 님이 이실라 그 나쁜 년에게 주겠다고 직접 주문하셨잖아요!”
파란색 브렐디 인형. 그 단어를 듣자마자 거짓말처럼 망각 저편으로 사라졌던 기억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열여섯 살 겨울에 일어난 일이었다.
벨레스트에는 태어날 아이가 건강하고 행복하길 바라며 브렐디라는 이름의 말 모양 인형을 선물하는 전통이 있다.
그래서 아스티에는 직접 파란색 체크무늬 천과 최고급 재료를 써서 브렐디 인형을 제작 주문했다.
만드는 데만 꼬박 일주일이 걸렸다.
아스티에는 그걸 오랜만에 참석한 저녁 식사 자리에서 이실라에게 주며 가족이 된 걸 환영한다고, 얼른 조카를 보고 싶다고 말할 생각이었다.
“제가 직접 몇 번이나 확인했는데, 기억 안 나세요?”
레니아는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 아스티에를 위해 몇 번이고 인형을 확인한 그녀였다. 잘못 만들어진 곳은 없는지, 날카롭지는 않은지, 재봉이 터지지는 않았는지.
그랬기에 아스티에가 이실라에게 찢어진 브렐디 인형을 선물했다는 사용인들의 말을 들었어도 믿지 않았다. 상자에 인형을 넣는 마지막까지 확인한 사람이 레니아였으니 당연했다.
“하인이고 하녀고 하나같이 멍청한 소리만 하고 있고, 아스티에 님은 이렇게…….”
눈물을 찍으며 건네는 말에 아스티에는 몇 년 전에 일어난 일임에도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아스티에는 진심으로 좋은 마음만 담아 인형을 선물했다. 그런데 어떻게 된 영문인지 이실라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바닥에 떨어트린 상자 안에는 반으로 찢어진 인형이 들어 있었다.
화가 난 공작과 공작 부인, 그리고 배다른 오빠 로윈이 아스티에를 사납게 몰아붙였다. 당연히 어렸던 아스티에는 자신이 그런 게 아니라는 변명만 반복했고, 그러다 그만 쓰러지고 말았다.
지병이 도진 것이었다. 그 이후 나흘쯤 열병으로 고생한 기억이 선명했다.
다만 그건 벌써 몇 년도 더 지난 일이었다.
혼란으로 흔들리던 제비꽃색 눈동자가 문득 창문에 닿았다. 솜뭉치처럼 크고 굵은 함박눈이 소리 없이 내리고 있었다.
“……레니아, 내가 몇 살이지?”
“네?”
“몇 살이냐고 물었어.”
“음…… 열여섯 살이죠. 곧 열일곱이 되시고.”
레니아가 고개를 갸웃하며 대답했다.
“아나레스트 황녀 전하의 황태녀 즉위식도 지났고?”
“그렇죠?”
“그래, 그렇구나…….”
아스티에는 창틀에 소복하게 쌓이는 눈을 보며 혼잣말했다.
찢어진 브렐디 인형, 황태녀 즉위식, 그리고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것처럼 함박눈이 퍼붓던 날의 열병까지.
모든 게 열여섯 살 겨울의 어느 날 그대로였다.
허탈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아무래도 자신이 죽은 모양이었다. 그게 아니고서야 과거에 일어난 일을 그대로 다시 겪는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날 리가 없었다.
뼈마디가 도드라진 손이 가슴께를 꾹 눌렀다.
마지막까지 눈에 담은 사람이 이실라여서 이런 일이 일어난 걸까. 날 저주라도 한 건가. 내가 뭘 잘못했다고.
‘심장이 터질 것 같죠? 알아요, 그런 독이라고 했으니까. 남들 눈에는 아스티에 당신이 결국 지병으로 죽은 것처럼 보여야 하거든요.’
기억 속 이실라는 발치까지 흐른 아스티에의 피를 피해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자기 입으로 직접 아스티에의 죽음을 꾸미려고 독을 썼다고 말하면서.
아직도 누가 심장을 터트리려는 것처럼 꽉 옥죄는 듯한 통증이 또렷하게 남아 있었다.
화끈거리는 식도와 입 밖으로 넘어오던 뜨끈한 피도, 고통에 몸부림치는 자신을 보며 환하게 웃던 이실라의 모습 역시 눈앞에 아른거렸다.
금방이라도 그 순간으로 돌아갈 것만 같았다.
그건 싫었다.
여기가 꿈속이라 해도 떠나고 싶지 않았다.
“으휴, 아직 힘드시죠? 잠깐 계세요, 약을 조금 더 달라고 말하고 올게요.”
죽음을 직면했던 공포로 자연스레 어깨가 떨리자 그걸 본 레니아가 혀를 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그녀가 걸음을 옮기는 것보다 아스티에가 손목을 낚아채는 게 더 빨랐다. 강한 악력에 눈이 휘둥그레진 레니아가 아스티에를 바라봤다.
“아니야, 가지 마. 여기에 있어.”
보라색 눈동자가 촉촉하게 젖어 들고 있었다. 그 눈물에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벅찬 감정이 죄 들어 있었다. 레니아로선 차마 그 손을 떼어 낼 수 없었다.
지금이 꿈인지 아니면 죽음 이후의 세상인지 알 수 없다.
다만 그 어디라 해도 진짜처럼 이렇게 선명할 수 있을까.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었다.
어쩌면,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독을 먹고 죽은 자신이 열여섯 살 겨울로 되돌아온 것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한참을 숨죽여 흐느끼던 아스티에는 뼈가 앙상한 손을 들어 뺨을 닦았다. 축축한 물기가 손에 묻어났다. 눈꺼풀이 몇 번 깜박이고, 드러난 보라색 눈동자가 형형했다.
멍청이처럼 똑같이 굴 수는 없다.
아스티에는 제게 남은 시간을 가늠했다. 열일곱 살이 머지않았으니 죽은 스물한 살까지는 4년 남짓 남았다.
어찌저찌 독살을 피한다 해도 오래 살 수 있는 몸은 아니었다. 어릴 때부터 열 살을 넘기지 못할 거라는 말만 수십, 수백 번 들었고, 딱히 오래 살고 싶은 욕심이 나는 인생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또다시 같은 삶을 반복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기에는 스물한 살의 자신이 너무 불쌍했다.
“결정했어.”
“뭘요?”
레니아가 되물었다.
“진심을 다해도, 다하지 않아도 거기에 내 자리는 없는 거라면 그냥 후회 없이 살다 죽을래.”
“아스티에 님!”
“당한 만큼 돌려주는 복수도 필요 없고.”
무덤덤한 목소리로 하는 말에 레니아가 아연실색했다.
하나 아스티에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잡고 있던 손목을 한 차례 당긴 그녀는 어딘가 모르게 단단해진 눈빛으로 레니아를 응시했다.
“그래서 말인데, 결혼하기 좋은 사람 어디 없을까?”
“……에?”
생뚱맞은 질문이었다. 당황한 레니아는 바보 같은 소리를 흘리고 말았다.
“나이 상관없고, 작위는 높되 후계 문제가 없는 사람. 적어도 후작 이상?”
조건을 들은 뒤로는 또 다른 의미로 할 말을 잃어 말문도 막혔다. 하위 귀족이라 윗분들 사는 세상은 모른다고 잡아뗄 수 있는 레니아가 들어 봐도 이상한 조건이었다.
“세상에 그런 조건을 단 결혼 상대가 어디에 있어요? 어느 가문 후처로라도 들어가실 생각이세요? 아니, 그것보다 정신이 드시자마자 갑자기 결혼이라뇨?”
“그렇잖아. 허약해서 가주는 꿈도 못 꾸고, 결혼이 아니면 이 가문을 떠날 방법이 없는걸. 몸이 이러니 아무래도 아이도 못 가질 거고.”
아스티에는 웅얼거리듯 대답했다.
성인이 되자마자 한 번 결혼해 가신인 백작의 후처가 된 적이 있었다. 옐레나가 아들을 위해 백작의 손을 잡으려고 아스티에를 팔아치우다시피 들이민 결혼이었다.
그녀가 시한부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으니 남편도 아내라는 존재보다는 브륀헬트의 피를 이은 자식이 필요했을 뿐.
그런데 몸이 약해서일까, 해가 지나도 아이가 생기지 않았다.
원인은 아스티에의 불임이었다.
남편은 사실을 알자마자 일방적인 이혼을 요구했다.
애초에 이 결혼이 성사된 것은 아스티에의 배를 빌려 태어날 아이 때문이었으니 그 일로 옐레나와 백작의 거래가 깨진 건 당연한 순서였다.
‘아이 하나 덥석 안겨 주지 못하는 것도 여자라고, 으휴.’
옐레나의 폭언이 뒤따라오는 것도 당연했다. 아직 꿈인지 아닌지 확실하지는 않으나, 이번에는 똑같은 경험을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이 가문을 떠날 방법이 결혼뿐이라면 차라리 레니아처럼 멀고 먼 곳으로 떠나서 죽을 때까지 조용히, 평화롭게 사는 것도 좋을 것 같은데.
생각이 거기까지 미친 아스티에는 입을 꾹 다물었다.
어지간한 고위 귀족은 후계자가 필요하고, 그 문제를 해결하려면 결국 후계자가 성인인 나이 많은 이와 재혼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그렇게라도 해서 떠날까 고민하는 아스티에의 머리 위로 레니아의 목소리가 떨어진 것은 바로 그때였다.
“적어도 제가 알기로는 지금 그 정도 작위의 가문에서 약혼자가 없는 곳은 없어요. 한 분을 제외하면.”
순간, 아스티에의 얼굴에 환한 빛이 돌았다.
“그게 누군데?”
“누구기는요. 아스티에 님도 아시잖아요. 다르실리암 대공 전하요.”
생각지도 못한 이름이 튀어나왔다.
***
벨레스트에는 두 명의 대공이 있다. 한 명은 파사칼리아 황제의 부군, 국서 로넨펠트 대공.
그리고 다른 한 명이 바로 북부의 지배자, 다르실리암 대공이었다.
대공령이 위치한 곳은 벨레스트의 북부로, 오랜 옛날 영토 확장을 하면서 차지한 왕국의 땅이었다.
그러다 그게 현 황제 대에 와서야 다르실리암 대공이라는 이름의 작위로 주인이 생겼다.
처음에는 황제의 동생인 황녀, 그러다 그 황녀의 아들이 물려받았다. 즉, 지금 그곳을 다스리는 대공은 방계 황족이었다.
황족. 결혼만이 가문을 벗어날 유일한 방법이라고 말하면서도 미처 떠올리지 못한 대상이었다.
해가 채 뜨지 않은 새벽녘. 어슴푸레한 빛이 창문에 달린 커튼 사이로 들어왔고, 남들보다 일찍 하루를 시작한 사람들의 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식재료나 생필품을 전달하러 온 건지 수레바퀴 소리도 고요한 새벽 공기를 찢으며 창문을 두드려 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