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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는 찢기지 않는다>
<파도는 찢기지 않는다>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인어가 사는 바닷속 왕국’이란 대개 비슷한 정경이다. 신비롭고 찬란한 세계, 바다의 깊은 곳에 자리잡은 화려하고 아름다운 성. 파도 안에서 찰랑찰랑 흔들리는 오색 빛깔의 산호들과 알록달록한 조개가 잔뜩 박힌 바위.
물결 따라 흔들리는 한가로운 빛, 그 안에서 노니는 아름다운 인어들과 인어들의 심부름을 하는 작은 물고기들까지, 대단히 평화롭고 환상적인 세계.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사람의 상상과 실제는 조금 다르다.
이렇게 말하면 누군가는 ‘인어의 바닷속 왕국이 실재하느냐’고 먼저 따져 물을 것이다. 당연하다. 인어란 인간에게는 그저 상상 속의 존재일 뿐이니까.
그러나, 인어는 있다.
한낱 인간이 닿지 못하는 저 푸르고 깊은 심해 속에.
심해왕국 솔라토리움.
단 한번도 인간의 발길이 닿지 못한, 아주 먼 옛날부터 존재해 온 그곳. 바다의 신 솔라토스의 가호를 바탕으로 긴 시간동안 인어들은 그곳에서 살아왔다.
솔라토리움은, 그곳에 사는 인어들에게만은 한없이 자비로운 곳이었다. 태양빛 대신 바닷속 식물과 산호초가 발하는 은은한 빛이 인어들을 인도하는 곳.
솔라토스를 모시는 신전으로 가는 길에는 수정처럼 맑은 산호와 진주들이 장식되어 방문자를 환영한다. 인어들의 아름다운 노랫소리가 끊이지 않으며, 시간은 느리게 흘렀다. 서로가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며, 인어들의 평화를 위해 제 역할을 다했다.
하지만 동시에 솔라토리움은 매우 잔혹한 곳이기도 했다.
놀라운 행운과 우연의 연속으로, 한 인간이 그곳에 살아서 도달한다 치자. 그래도 인간이 맞닥뜨린 인어의 왕국은 상상과 매우 다를 것이다. 새카맣고 깊은 심해에서 인간의 눈은 거의 제 기능을 하지 못하니까. 그뿐인가. 높은 압력과 호흡 곤란으로, 인어를 인지하기도 전에 죽어버리겠지.
만약 그 인간이 모종의 가호와 경이로운 마법으로 살아있다 해도, 인어의 왕국을 제대로 감상할 기회는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오랫동안 역사가 이어져 온 제정일치 국가란, 그를 구성하는 것이 인간들이건 인어들이건 별반 다르지 않으니까.
인어들은 이방인을 경계한다.
자신과 다른 것이라면 무조건 배척하고, 추방한다. 그것이 솔라토리움을 오랫동안 평화롭게 유지한 비결이라 믿어 의심치 않기에. 그것은 설사 같은 인어라 할지라도 마찬가지였다. 떠돌이 인어들이 솔라토리움에 들어왔다가 겪는 경멸은, 무섭도록 차가웠다.
그러니 인간이 만약 그곳에 도달한다면, 인어 왕국을 채 눈에도 담기 전에 공격당해 죽어버릴 것이다.
그토록 잔혹한 곳이 솔라토리움이었다.
그리고 그 솔라토리움에, 한 작은 인어가 있었다.
***
아이들끼리의 싸움이란 대개 유치하고 자잘하다. 그리고 어린 인어들 또한 그 범주에서 벗어나지는 못했다.
바다신 솔라토스의 신전 안뜰, 어린 인어들의 작은 놀이터 안.
자연스럽게 형성된 석호와 동굴이 마치 궁전처럼 보이는 그 곳에서, 한 떼의 어린 인어들은 한창 말다툼 중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한 아이를 다섯 아이가 괴롭히고 있다고 보는 것이 맞겠다.
<멍청이! 인간이 그렇게 무섭냐?>
<아냐, 이 바보들아!>
인어들은 대단히 오래 사는 것에 비해 아이를 별로 낳지 않는다. 10년 동안 태어나는 어린 인어는 아무리 많아봐야 백여 두 남짓.
필연적으로, 솔라토리움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는 곳은 어린 인어들의 놀이터였다.
어린 인어들의 놀이터가 솔라토리움의 중심이나 마찬가지인 바다신 솔라토스를 모시는 신전 안뜰에 자리하고 있는 이유도 그것이었다. 신관 인어들에게 보호받으면서, 동시에 엉뚱한 말썽을 방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누가 누구보고 바보라는 거야? 노래할 줄도 모르는 덜떨어진 게!>
<얼레리꼴레리, 키리는 노래도 못 한대요!>
물론, 아이들이 저들끼리 싸우는 것은 그 엉뚱한 말썽의 범주에는 들어가지 않는다.
<아니라고! 아, 아버지가 몰래 인간들 곁에 가면 큰일이 난다고 했어!>
어린 인어들의 가운데, 한 어린 인어가 분한 듯이 주먹을 쥐고 큰 소리로 외쳤다. 길고 매끈한 푸른 머리카락, 그리고 반짝이는 분홍빛 눈동자는 다른 인어 아이들과 비교해 보지 않아도 대단히 사랑스러웠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사랑스러운 얼굴은 오늘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또래 아이들에게 마구 놀림당하고 있는 탓이다.
<웃기고 있네. 언제부터 자기가 아빠 말을 그렇게 잘 들었다고.>
아이들이 싸우는 내용은 별 것 아니었다.
솔라토리움 인어들의 삶은 길고 평화롭다. 솔라토스의 가호와 더불어, 인어 왕국을 지키는 경비대장이 워낙 무력으로 이름높기 때문이었다. 솔라토리움을 호시탐탐 노리는 상어 일족이 왕국의 경계를 침범할 엄두를 내지 못한 지 벌써 십여 년은 되었다.
당연하게도 바닷속 생활은 대체로 단조로웠다. 물론 대부분의 인어들은 그 삶에 크게 만족했다.
하지만 어린 인어들에게 그런 생활 아무래도 지루하고 답답하기 마련. 어린이들은 끊임없이 모험을 갈구하는 성질이 있으니, 당연하다. 매일 보는 얼굴들과 반복되는 놀이를 하는 것도 질릴 터.
그러던 참에, 한 아이가 눈을 반짝이며 말한 것이다.
‘그거 알아? 나 인간 본 적 있다?’
‘뭐라고? 인간?’
‘나 얼마 전에 졸다가 해류에 쓸려서 잘못 떠올랐거든. 그런데 인간의 배가 지나가는 거야!’
아직 먼 곳까지 헤엄치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 그 어린 인어는, 잠에서 깨어나 보니 낯선 곳에 떨어져 있었다고 했다. 더럭 겁을 먹었지만, 지나가는 거북이에게 저를 솔라토스로 데려다달라 부탁할 셈으로 수면 근처까지 올라갔다.
그리고 보게 된 것이다.
거대한 인간의 배를.
‘우와…. 어땠어?’
‘별 것 없던걸? 배라는 거, 괴상하게 생겼더라. 우리 집보다도 작은 물건에 옹기종기 모여서 떠다니는 꼴이라니!’
인간을 구경하고 온 아이는 한참이나 제 모험담을 펼쳐내며 으스댔다. 다른 인어들은 그 애를 대단히 부러워했다. 그에 결국 모험을 하고 온 아이가 입을 열었다.
‘나…그곳 기억하는데, 혹시 우리 인간 구경하러 다녀올래?’
‘헉!’
‘정말? 무서운데….’
그러나 아이들이란 종종 대범해진다. 다른 인어 아이가 조심스럽게 덧붙인 말이 초석이 됐다.
‘우리 언니도 어릴 때 심심하면 인간 구경을 갔다고 했어. 길도 전에 알려줬는데….’
기실 어린 인어들이 인간을 구경하고 싶어하는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워낙 흔한 일이었기에, 사실 딱히 금지된 일도 아니었다. 금기일수록 아이들이란 더 어기고 싶어한다는 것을 잘 아는 현명한 인어 신관들 덕분이었다.
다만 어린 인어들이 자칫해 흥분해 사고를 치거나 인간들에게 잡혀가는 것을 염려한 신관들은, 성인이 되기 전에는 반드시 어른들과 함께 나가기를 종용했다. 실제로 어른 없이 지나치게 위험한 몇몇 행동을 한 어린 인어들은 대개 돌아와서 큰 벌을 받았다.
‘우리 언니한테 같이 가자고 하자! 언니가 저번에 인간들 배 앞에서 노래했는데, 죄다 물에 뛰어드는 꼴이 정말 웃겼다고 했어!’
‘우와! 나도 노래할래!’
‘나도, 나도!’
‘그래! 그러자!’
아이들은 흥분해 당장이라도 올라갈 것처럼 굴었다.
하지만 한 아이만은 달랐다.
‘나는 가기 싫어.’
키리. 물빛 머리카락과 보석처럼 빛나는 눈동자, 푸른 비늘이 무지갯빛으로 빛나는 꼬리를 가진 어린 인어는 올해로 딱 열 살이 된 참이었다. 꼬리를 뺀 이유는 간단했다.
‘아버지가 가지 말라고 하셨어.’
보통 때라면 아이들은 그 말을 무시할 것이다. 하지만 키리의 말을 아이들이 쉽게 무시하기란 어려웠다. 키리의 아버지야말로, 무력 높기로 유명한 솔라토스의 경비대장 칼데라스였으니까.
‘어…너희 아버지?’
‘칼데라스 님이 그러셨어?’
본래 아이들이란 단체행동에서 누구 하나가 빠지는 것에 민감하다. 하물며 아이의 아버지가 경비대장이라니. 슬금슬금 꼬리를 빼는 아이들이 하나, 둘 생겼다. 맨 처음 말을 꺼낸 아이가 발끈한 건 당연했다.
‘너희 아버지야 당연히 그렇게 이야기하시지! 경비대장이시니까!’
‘맞아, 맞아.’
이러니 저러니 해도 아이들은 아이들. 다시금 물 밖에 나가고 싶어진 아이들은, 죄책감을 면하기 위해서라도 키리를 몇 번이고 구슬렸다. 경비대장의 딸인 키리가 같이 가면, 만약 돌아와서 벌을 받게 된다 해도 그 강도가 낮아질 것 같아서였다.
‘그래도 나는 싫어.’
그러나 키리는 완강했다. 평소 아이의 아버지가 ‘너는 절대로 물 밖으로 나가면 안 된다’고 강하게 일렀던 탓이다.
결국 아이들은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고, 지금에 이르렀다.
가장 앞에 선 아이가 하! 하고 비꼬았다.
<큰일은 무슨. 겁나서 그러는 거겠지.>
<야, 쟤네 아빠가 경비대장이기는 하잖아….>
<그거랑 상관 없어!>
아이는 허리에 손을 얹고 꼬리를 세차게 흔들어 보였다.
<너, 네가 노래를 못 하니까 우리끼리만 재미있을 것 같아서 그러는 거지?>
그 말에 아이들의 시선이 일제히 키리의 목에 꽂혔다.
키리는 반사적으로 제 목을 가렸다. 하지만 키리의 자그마한 손바닥으로는 그 목을 가리기가 힘겨웠다. 당연하게도, 아이의 목에 있는 커다란 상처는 그 자리의 누구나에게 보였다. 아이 하나가 픽 웃었다.
<새삼스럽게 가리기는. 다 보이는데.>
그랬다. 그 상처는 키리가 갓난아이일 때부터 있었던 상처다. 그리고 그 상처 때문에 키리가 노래하지 못한다는 것을 솔라토리움의 인어들이라면 누구나 알았다.
인어들은 텔레파시로 소통한다. 그렇기 때문에 키리 또한 다른 인어들과의 상호 소통에는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노래였다. 인어들이라면 무릇 물 밖에서 노래로 인간을 유혹하는 것이 기본 소양으로 여겨졌다. 당연하다. 감히 무엄하게도 물 위를 정복하고자 나무 따위로 배를 만들어 바다를 가르는 버르장머리 없는 인간들 아닌가. 그런 인간들을 물에 빠트려 바다신 솔라토스에게 공양하는 것이 인어들의 보람이었다.
그러나 키리는 그럴 수 없었다.
목을 다쳐 노래하지 못하니까.
그리고 노래하지 못하는 인어란, 솔라토리움에서는 반푼이로 여겨진다. 다만 그것을 어린 키리에게 대놓고 말하는 것은 잔혹한 일이기에, 어른 인어들은 키리의 앞에서는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어른들끼리 수군대는 이야기를 귀담아 듣는 아이들은 꼭 있기 마련이다.
그리하여 지금, 키리를 공격하는 아이는 ‘키리가 노래를 하지 못하니까 질투가 나서 심술을 부리느라 바다로 올라가는 우리를 훼방놓는다’라고 몰아가고 있었다.
<아, 아니야. 그렇지 않아. 너희들도 바다 위로 가면 크게 혼쭐이 날걸?>
키리는 애써 눈을 사납게 뜨고 말했다. 하지만 아이들은 코웃음쳤다.
<혼쭐은 무슨.>
<그럴 줄 알았지. 별 말 못하는 거 봐.>
뿐만 아니었다. 그 모양새를 지켜보던 다른 아이 하나가 비웃음을 띠었다.
<솔직히, 혼쭐 나야 하는 건 너희 아빠 아냐?>
<뭐라구?>
키리가 발끈했다. 하지만 그 아이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렇잖아. 너희 아빠야말로 떠돌이 인어나 만나서 널 낳아온 거 아닌가? 따지고 보면 네 상처도 그래서 난 거라며.>
다른 아이들이 헉, 하고 입을 가렸다. 그 말은 어른들 사이에서도 일종의 금기였기 때문이다.
칼데라스. 키리의 아버지이자 자랑스러운 솔라토리움의 경비대장. 솔라토리움을 상어 일족에게서 지키며, 거대한 전투를 늘 승리로 이끄는 엄격하고도 영웅적인 인어.
하지만 그런 칼데라스에게도 젊은 시절의 치기가 있었다.
칼데라스는 젊은 시절, 솔라토리움의 인어들이 상상도 못할 일을 저질렀다. 바로 떠돌이 인어를 만나 사랑을 나누고, 기어이 어미 없는 어린 인어를 데리고 솔라토리움으로 돌아온 것이다.
바다신 솔라토스를 모시는 솔라리움의 인어들은, 해류에 따라 떠돌아다니는 타지의 인어들을 경멸했다. 자신들보다 훨씬 지성도 낮고 거주지도 불분명하다는 이유 때문이다. 그 때문인지 떠돌이 인어들은 수명도 짧았다.
하지만 칼데라스는 솔라토리움의 경비를 위해 외부 해역을 돌아다니다가 떠돌이 인어를 만났다. 그리고 사랑하여, 결국 키리를 얻었다.
칼데라스가 갓 태어난 키리를 솔라토리움으로 데려왔을때 신관들이 어찌나 놀랐는지.
게다가 아이는 태어나는 과정에서 문제가 생겨 목에 상처까지 입은 상태였다. 칼데라스의 절친인 신관장 아티루가 아니었다면, 키리는 솔라토리움의 아이로 인정받지 못했을 것이다.
솔라토리움에는 워낙 아이들이 귀했기에, 키리 또한 처음에는 별 어려움 없이 다른 아이들과 섞여서 놀았다. 하지만 어른들의 시선 속에 알음알음 키리를 향한 차별이 섞여 있음을, 아이들도 자라면서 진즉 눈치챈 터였다.
노래하지 못하는 아이.
거기에 더해, 출신지도 모르는 천한 떠돌이 인어의 아이.
<너, 무슨 말을 그렇게….>
키리는 주먹을 쥐고 바들바들 떨었다. 하지만 그 말을 꺼낸 아이는 도리어 자신이 틀린 말을 했냐는 듯 고개를 쳐들었다.
<내 말이 틀려?>
다른 아이들이 서로 눈치를 봤다. 그 아이의 말이 맞기는 하지만, 자신들과 잘 어울려 놀던 친구인 키리에게 대놓고 나쁜 말을 하기는 꺼려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키리를 공격한 아이는 멈추지 않았다.
<쟤 평소에도 맨날 얌전 빼느라고 자기는 안한다는 것 투성이잖아?>
듣고 보니 그건 맞는 말이었다.
키리는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는 핑계로 같이 노래하는 일에도 빠졌고, 아이들끼리 놀 때도 종종 뒤로 물러나는 일이 있었다.
알게 모르게 아이들 사이에서 놀이를 할 때, 키리를 배제하는 분위기가 형성된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정확히는 키리만을 봐주는 분위기.
‘키리는 봐주자, 노래로 물고기들을 부리지 못하잖아. 불리해.’
‘키리는 봐주자, 같이 합창하는 건 우리만으로 충분하잖아.’
자연스럽게, 거기에 평소 불만이 있던 다른 아이들 몇몇이 동조하기 시작했다.
<맞아, 맞아!>
<자기만 착한 척 하지!>
<맨날 키리만 봐줘야 해? 양심도 없어!>
<아니야!>
당연하지만 키리에게는 대단히 억울한 일이었다. 자신은 그저 아버지의 말을 듣자고 한 것 뿐인데, 분위기는 점점 험악해졌다.
결국 키리의 눈에 눈물이 괴었다. 하지만 아이들은 잔인했다.
<야, 됐어. 네가 안 간다고 무슨 일이나 있을 줄 알고? 넌 여기서 혼자 놀든가.>
키리를 빼고 가자는 선언에, 다른 아이들도 동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