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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생의 본분은 공부일 텐데 2권
지은이│슬로프
펴낸곳│로즈엔
투고메일│editor@ridi.com
ⓒ 슬로프,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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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로즈는 금요일 저녁만 손꼽아 기다리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본격적으로 늘어난 과제 때문에 바쁜 와중에도 박람회에 갈 생각만 하면 힘이 났다.
겉으로는 들뜬 기색을 내비치지 않았다. 함께 다니는 레베카가 늘 울상을 짓고 있었기에, 그녀의 감정부터 살피려 했다. 레베카를 도와주려다가 얼결에 자신만 이득을 본 것 같아 오히려 미안해졌다.
그랬기에 금요일 아침에 브라일리가 오늘의 일정을 물어봤을 때에서야, 처음으로 박람회 이야기를 꺼냈다.
“뭐? 박람회를 간다고? 너랑 제스퍼랑?!”
콧노래를 부르며 교복 셔츠 단추를 채우던 브라일리의 손이 우뚝 멈추었다. 브라일리가 입을 벌린 채 로즈를 바라보았다.
“아. 혹시 오해하는 거면 그럴 필요 없어, 브리. 사적인 데이트 이런 건 절대 아니야. 그저 케일럽에 관한 정보를 알아봐 주는 대가로….”
“그 대가로 박람회를 같이 간다? 이게 뭔 소리니. 자세히 말해 봐 봐.”
브라일리가 눈을 반짝이며 로즈에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로즈는 당황해서 커다란 눈을 깜빡이다가 차근차근히 설명했다.
상황을 모두 공유받은 브라일리는 손으로 제 턱을 톡톡 두드리며 눈을 가늘게 떴다.
“거기서 제스퍼의 과제를 도와주기로 했단 말이지?”
“응.”
“대충 어떤 상황인지 알겠다.”
“아, 오해가 풀린 것 같아서 다행이다.”
“허어….”
브라일리가 잠시 기묘한 소리를 내다가 로즈의 어깨를 부드럽게 움켜잡았다.
“그래서 박람회에는 뭐 입고 갈 거야?”
“음. 그건 딱히 생각 안 해 봤는데…. 교복 입지 않을까?”
“아니, 아니지, 로즈 벨! 정신 차려! 무려 위어 컴퍼니의 박람회 야간 입장권을 얻어 놓고, 엉? 교복 입고 가겠다는 게 말이 되니! 최대한 꾸미고 가야지.”
브라일리가 갑작스레 열의를 뿜어냈다. 로즈는 어깨를 살짝 움츠리며 당황했다.
“그, 그럴 필요가 있을까? 이것저것 볼 게 많을 텐데, 다니기에 불편할 것 같아서.”
“예쁘지만 편의성도 놓치지 않는 옷이 필요하단 거군. 알았어.”
“뭘 알았다는….”
“이 언니가 근사한 드레스를 빌려주도록 하지.”
“언니 아니잖아.”
로즈가 웅얼거렸지만 브라일리는 못 들은 척하고는 우다다 말을 쏟아 냈다.
“하아, 미리 알았으면 여기저기 더 알아봤을 텐데! 바로 오늘 저녁이라니. 시간이 촉박하지만 어떻게든 해 볼게.”
“아니야. 그럴 필요 없어, 브리. 난 그냥 조용히 구경하다가 나오려고 했는데….”
브라일리가 과장되게 숨을 포옥 내쉬더니 고개를 내저었다.
“이런, 로즈. 그런 곳에 교복만 입고 가는 게 오히려 더 눈에 띌걸? 다들 힘 빡 주고 차려입고 올 거라고!”
“그래?”
로즈는 듣다 보니 점점 브라일리의 말에 설득당했다. 충분히 일리가 있는 조언이었다. 어디에서든 적당한 드레스 코드를 지키는 건 기본 에티켓이었으니까.
게다가 교복이 더 눈에 띌 거라니? 사람들에게 주목받는 상황이야말로 로즈가 가장 꺼리는 것이었다.
“게다가 야간에는 초대권 받은 사람들만 입장하는 걸 텐데. 낮이랑은 분위기가 완전히 다를 거야.”
“정말? 그건 몰랐어.”
로즈가 귀족일 때만 해도 박람회는 지금처럼 대중적인 문화가 아니었다. 마정석 불빛으로 수놓은 행사장에 들어가는 야간 입장은 아예 존재하지 않던 시기였다.
“야간 박람회란 자고로 완벽한 데이트 코스… 지만! 물론 너희는 어쩔 수 없이 가게 된 거지. 응, 나도 알아. 그래도 이 언니는 널 교복 차림으로는 절대 못 보낸다.”
로즈는 혼란스러워졌다. 위어 컴퍼니 박람회에 나올 발명품 생각만 했지, 이런 부분은 신경 쓰지 못했다.
‘교복만 입고 가면 제스퍼가 부끄러우려나.’
그럴지도 모른다. 일행의 모습이 너무 초라하면, 제스퍼의 위신이 깎일 것 같았다. 제스퍼에게 피해를 주긴 싫었다.
“브리…. 그러면 뭘 입고 가는 게 좋을까?”
보기 드물게 로즈가 제 의견에 동조하려 하자, 브라일리의 눈동자가 빛났다.
“나한테 맡겨! 우선 치수부터 재자!”
흐흐. 브라일리가 낮게 웃으며 로즈의 양어깨를 꽉 붙들었다. 로즈는 그 기세에 눌려 고개를 끄덕거렸다.
***
타닥타닥. 로즈가 아카데미 정문을 향해 빠르게 걸어갔다. 제스퍼가 시간에 맞추어 정문으로 마차를 보내 준다고 하였다. 그 마차를 타고 박람회장에 갈 예정이었다.
‘늦지는 않았겠지?’
드레스가 아슬아슬한 시각에 기숙사에 도착했다. 브라일리가 로즈의 체형에 맞추어 급하게 수선을 맡긴 드레스였다.
브라일리가 말하기를, 이 드레스가 그녀의 것 중에 가장 수수한 것이라 하였다. 정숙한 척해야 할 때만 꺼내 입는다면서.
드레스는 짙은 카키색이었고 장식도 화려하지 않았다. 군데군데 은실로만 무늬가 들어가 있었고, 목깃을 감싼 하얀 레이스는 나풀거림 없이 정갈했다.
스커트는 무릎 아래에서부터 살짝 퍼지는 형태였다. 연회복 등에 비해서는 기장도 짧은 편이었다. 소매는 원래 칠부로 나온 것이었으나, 로즈에게는 딱 맞게 떨어졌다.
허리 쪽은 끈으로 한 번 돌린 후 리본 모양으로 묶어 고정했다. 어깨나 가슴 부분이 헐렁한 감은 있었으나, 크게 이상하지는 않았다. 평소에도 로즈는 옷을 낙낙하게 입는 편이었다.
드레스를 갖춰 입은 후에는 브라일리에게 붙들려 머리 손질까지 받았다.
‘어색해….’
오랜만에 머리를 완전히 틀어 올렸다. 거기에 꽃 장식까지 꽂았다. 모두 브라일리의 솜씨였다. 목깃이 목의 절반까지만 덮는 형태라, 뒷머리 아래로 가느다랗고 흰 목이 얼핏 보였다.
브라일리가 모자와 장갑까지 챙겨 주려 하였지만, 그것만은 극구 사양하고 나왔다. 로즈는 지금이 딱 좋았다. 평소 수수한 모습과 너무 달라지면 그것대로 이상할 것 같았다.
‘브리가 센스 있게 잘해 줬어. 브리는 정말 좋은 애야.’
솔직히 로즈는 오래간만에 제 모습에 만족했다. 언제 이런 걸 또 입어 볼까. 부담스러울 정도로 화려하지 않으면서도, 옷감이 고급스러워 태가 났다. 단정하게 차려입은 중산층 여자의 모습과 비슷했다.
정문으로 향하는 와중에, 로즈는 간간이 저에게 꽂히는 시선을 느꼈다. 외출복 드레스를 입고 다니니 눈에 띄는 모양이었다.
로즈가 어색함을 내리누르려 애쓰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렇게 정문에 다다랐을 때, 옆에서 불쑥 누군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로즈 벨 아가씨 맞으십니까?”
“아, 네. 제가 로즈 벨인데요….”
“제스퍼 도련님이 보내셔서 왔습니다. 박람회장까지 모셔다드리겠습니다. 타시지요.”
남자는 정중하게 인사하며 마차를 손으로 가리켰다. 제스퍼가 미리 설명해 주었던 생김새와 똑같은 마차였다.
“네…. 감사합니다. 목적지까지 잘 부탁드려요.”
로즈가 꾸벅 고개를 숙여 남자에게 인사했다. 저보다 나이가 많은 남성이 자신에게 깍듯하게 구는 상황이 어색했다. 어릴 때는 이런 대접을 받기도 했지만, 그건 정말 한참 전 일이었다.
남자는 마차 문을 열고 로즈를 에스코트까지 해 주었다. 로즈는 마차 안으로 발을 디디려다가, 남자를 돌아보며 물었다.
“저… 제스퍼는 따로 오는 걸까요?”
“그러신다고 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남자는 꼬박꼬박 인사하는 로즈를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아가씨. 말씀 편히 하셔도 됩니다. 도련님의 파트너이시니까요.”
“네? 그런 건 아닌데….”
“안전하게 모시겠습니다.”
남자가 빙긋 웃으며 마부석으로 향했다. 로즈는 당황한 채 마차 안으로 들어가 창가 쪽에 몸을 딱 붙이고 앉았다.
“후우….”
왜인지 긴장이 되었다. 두 손을 꼭 모아 무릎 위에 올려놓고서 숨을 골랐다.
‘파트너라고?’
제스퍼가 그렇게 말해 둔 걸까. 마부가 예의를 차리려 한 말이겠지. 사실이 어떠하든 간에, 파트너란 단어를 들은 순간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거긴 데이트 코스잖아! 브라일리가 폴짝 뛰면서 소리치던 것도 문득 떠올랐다.
***
박람회장에 다다를 무렵, 해는 저물고 있었다. 이제 수도의 가로등이 하나둘씩 켜질 시각이었다.
박람회장은 이미 내부 조명에 불을 밝히고서 야간 입장객을 받을 준비를 마쳤다. 오전에는 사람으로 붐볐으나, 저녁에는 비교적 한산했다.
위어 컴퍼니 박람회의 야간 개장은 오늘과 내일 단 이틀 동안 진행되었다. 초대권을 받은 소수의 사람만이 조명이 켜진 박람회장에 발을 들일 수 있었다.
로즈는 콩닥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애쓰며 마차에서 내렸다. 제스퍼가 아니었다면 오지 못했을 곳이었다.
브라일리에게 이번 박람회 초대권은 얻기 힘들다는 말을 전해 들은 후로, 제스퍼를 향한 고마움이 짙어졌다.
‘제스퍼는 어디 있지?’
로즈가 마차 앞에 잠시 멈추어 서서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주변에 속속들이 마차가 한두 대씩 들어오고 있었다. 그러나 제스퍼는 아직 보이지 않았다.
로즈는 시선을 박람회장 쪽으로 돌렸다. 위어 컴퍼니 박람회는 수도에서 손꼽힐 만큼 거대한 규모로 열렸다.
박람회장 옆면이 유리로 되어 있어, 내부 조명이 뿜어내는 빛이 바깥까지 퍼져 나왔다. 어두운 하늘 아래에 우뚝 선 박람회장은 경이로워 보였다.
마도공학 혁명의 거대한 산물을 바로 눈앞에서 맞닥뜨리자, 로즈는 압도당하면서 동시에 설레기도 했다.
‘나도 저런 곳에 내 발명품을 전시할 날이 올까.’
사람들을 놀라게 할 무언가를 제 손으로 만들고 싶었다. 어렸을 때부터 고이 품어 온 꿈이었다. 과연 그런 날이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아니야. 안 될 것도 없잖아. 내가 더 열심히 하면 되지.’
로즈가 잠시 다른 생각에 잠겼을 때,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로즈 벨?”
“제스퍼?”
로즈가 몸을 돌리자, 바로 그 앞에 제스퍼가 서 있었다. 기대감으로 들뜬 로즈의 얼굴에는 환한 미소가 번졌다. 그 어느 때보다 생기 넘치는 모습이었다.
제스퍼는 로즈 옆에 우뚝 선 채로 로즈를 몇 초간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어… 왔네.”
제스퍼가 로즈를 뚫어지게 직시하다가 뒤늦게서야 입을 열었다.
로즈는 왜인지 제스퍼가 평소와 다르게 느껴졌다. 로즈가 목을 한참 꺾어 제스퍼를 마주 보고서는 그 이유를 찾아냈다.
‘머리 스타일이 바뀌었구나.’
제스퍼가 앞머리를 말끔히 뒤로 넘겼다. 늘 절반가량 가려져 있던 이마가 고스란히 드러났고, 날카로운 눈매와 단단한 이마가 도드라져 보였다.
원래도 고상하고 차가운 이미지였지만, 지금은 더더욱 다가가면 안 될 듯한 분위기를 풍겼다. 이미 성년을 넘긴 남자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옷은 정장을 반듯하게 차려입고 있었다. 제스퍼는 교복을 입을 때는 재킷을 잠그지 않는다거나 와이셔츠 위 단추를 몇 개 푸는 등, 다소 껄렁하게 하고 다녔다.
지금은 어느 한 군데 흠잡을 구석 없이 격식을 지킨 차림새였다. 심지어 타이까지 맸다. 진한 군청색 정장은 제스퍼를 위해 맞춤 제작된 것처럼 빈틈없이 맞았다. 그 덕에 각진 어깨선과 단단한 흉곽이 부각되었다.
귀족 신사의 정석 같은 모습에 로즈는 잠깐 움츠러들었다. 누구나 지금의 제스퍼와 맞닥뜨리면 저절로 긴장하리란 생각이 들었다. 한편으로는 브라일리의 도움을 받기를 잘했다는 안도감도 들었다.
‘그냥 평소처럼 왔으면 큰일 날 뻔했어.’
제스퍼를 부끄럽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아무리 단순히 친구 사이라고 할지라도, 일행으로 온 이상 제스퍼의 위신을 상하게 할 수는 없었다.
야간 박람회는 다들 한껏 꾸미고 온다는 브라일리의 말은 정말 사실이었나 보다. 현재 기숙사 방 안에 있을 브라일리에게 마음속으로 고마움을 쏘아 보냈다.
‘브리한테 더 잘해 줘야겠어.’
로즈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서는 제스퍼에게 말을 건넸다.
“참, 마차 보내 준 덕분에 정말 편하게 왔어. 고마워.”
“다행이네.”
“너는 따로 혼자 온 거야?”
“중간에 좀 들를 데가 있어서 거기 갔다가. …그런데 교복이 아니네?”
“응. 그냥 대충 입고 왔으면 부끄러울 뻔했다, 그치.”
“난….”
제스퍼가 입술을 뗐다가 다시 꾹 다물었다. 그의 미간이 살짝 일그러졌다.
“응?”
“…나는 네가 드레스 같은 걸 부담스러워하는 줄 알았는데.”
“맞아. 그런 편이지. 이 옷도 브리가 빌려준 거야.”
로즈가 어색하게 웃으면서 사실을 털어놓았다. 완벽한 귀족 신사의 모습을 한 제스퍼에게 말하려니 부끄러웠지만, 숨겨야 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브라일리 옷이라고?”
내내 꼿꼿하게 서 있던 제스퍼의 자세가 삐딱해졌다. 제스퍼는 인상을 찡그리더니 습관적으로 제 앞머리를 헤집으려 했다. 로즈가 다급하게 그를 말렸다.
“어, 제스퍼. 머리!”
“…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