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란한 비극의 세계 2
지은이 | 해나
펴낸곳 | 신드롬
정 가 | 3000원
ISBN | 9791171359844
투고처 | syndromebook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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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ents
목차
6. 소공녀와 지지고 볶는 수컷들
7. 비 오는 놀이공원
8. 또 한 번 추락할 때
9. 통곡
10. 누구를 선택하든
11. 다녀왔어요
12. 꽃다발은 흉기보다 나쁘다
6. 소공녀와 지지고 볶는 수컷들
"여긴 내 수집품을 전시해놓은 곳이야."
솔로몬이 필리아를 데려간 곳은 복도처럼 이어진 기다란 전시장이었다. 다채로운 예술품들이 일렬로 전시되어 있었다. 필리아는 말없이 화려한 그림과 조각들을 눈에 담았다.
"그 남자에게 마음이 있었나?"
"……예?"
걸음이 저절로 멈춰섰다. 필리아는 인자하게 웃고 있는 솔로몬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뒤늦게야 인상을 썼다.
"장난해요? 제가 화내던 거 보셨잖아요."
"그대와 같은 사람들에게 애정은 증오로 나타나기도 하지."
"절 아세요?"
"아니."
솔로몬은 미소지었다.
"알고 싶어. 내 생각과 같은 사람이 맞는지."
"……설마. 지금도 저를 첫사랑과 겹쳐보고 계시는 거라면 아주 불쾌하다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그대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말야. 난 그대가 화를 내는 게 마음에 들어. 그 사내에게 그리 했던 것처럼 내게도 화를 내줬으면 좋겠어. 조금 더 솔직히 말하자면. 그치에게 하는 것보다 더 많이."
필리아는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이 남자에게 얼마나 항의를 해보았자 고양이가 호랑이에게 대드는 것밖에 안 된다. 확신한 필리아는 제 꼴이 더 우스워지는 걸 막기 위해 화제를 방문의본래 목적으로 바꾸었다.
"크림슨에게서 지켜주신 건 감사하게 생각해요. 여기에 온 건 그 인사를 드리고 싶어서였어요."
솔로몬은 가만히 필리아의 말을 들었다.
"대체 무슨 수를 쓴 거예요? 그 편지에 무슨 말을 적었길래 그토록 나를 소멸시키지 못해 안달이 나있던 그자가 그리 쉽게 물러났던 거죠?"
"여기 온 진짜 목적은 이 질문을 하기 위해서인 걸로 보이는군."
솔로몬은 듣기 좋은 웃음 소리를 흘렸다. 필리아는 뻔뻔하게 대응했다.
"이미 다 예상하셨잖아요."
"그대라면 틀림 없이 제발로 확인하러 올 거라 생각했지. 그럴 사람이잖아. 그대는."
"…………."
"단지 그대와 같은 사람의 행동이 익숙하다는 뜻이니 기분 나빠하지 않길 바라."
"저 같은 사람이 어떤 사람인데요?"
"의심이 많은 불안한 사람."
필리아의 말문이 막혔다. 솔로몬은 즐거운 듯 웃으며 그런 필리아를 가만히 감상하듯 바라보았다. 주변에는 훌륭한 예술품들이 많았지만 솔로몬의 시선은 눈앞의 필리아만을 찬찬히 요목조목 뜯어보았다.
"나는 그대가 조금 더 빠르게 내 성에 방문해주길 바랐어. 크림슨에게 보낼 편지를 그 본인이 아닌 세이지에게 보낸 것이 그런 이유지."
"……제 눈앞에서 크림슨이 편지를 읽는 모습을 보게 하려고요?"
"맞아. 일종의 극적 연출이지. 그대가 나에 대해 궁금하게 하고, 또……."
솔로몬은 애매한 지점에서 싱긋 웃었다.
"그대가 내게 더 고마움을 느꼈으면 해서 말이야."
웃고 있는 솔로몬은 한없이 인자해 보였다. 말로만 들었던 역사책 속 성군이 있다면 이런 모습일 것처럼. 그러나, 필리아는 그가실은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었다.
필리아는 솔로몬을 똑바로 마주보곤 말했다.
"그거, 나한테 빚을 지우고 싶었다는 뜻인가요?"
만들어진 그림 같던 솔로몬의 입 꼬리 한쪽이 비스듬히 기울었다.
"무서운 말을 쓰는군, 필리아 양. 부디 내 진심을 왜곡하지 말아주게."
필리아의 눈이 절로 가느다래졌다.
진심을 왜곡하지 말아달라 하는 사람치고 그의 얼굴은 줄곧 즐거워보였다. 이러니 애써 떠올리지 않으려 해도 소용이 없는 것이다. 교과서에서 배운 고대 왕국. 그 왕국을 다스렸던 뒤나스테스 왕가에 대해.
일반 학생들은 교과서 맨 앞장에 짤막히 서술되는 왕가의 이름을 한번 보고 덮어버렸겠지만 필리아는 아니었다. 거지 같은 메리골드 집안에서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어린 필리아가 선택할 수 있던 일은 당장 눈앞의 공부였다. 학교 성적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일이었다.
모두가 무시하는 내용도 두 번 더 되짚었고 그 덕에 교과서 속 인물을 마주보고 있는 지금 그 내용이 머리에 아주 선명했다.
뒤나스테스 왕가가 어떻게 몰락했는지.
솔로몬 딘젤로 크라운 뒤나스테스. 수많은 뒤나스테스 왕가의 일원들 중 유일하게 교과서에 기재된 그 이름은, 어느 날 반역을 일으켜 형제들을 모조리 몰살시키고 그와 관련된 가문들을 잔혹하게 학살한 뒤 왕위에 오른 왕국의 마지막 왕, 그의 이름이었다.
필리아는 솔로몬에 대해 읽었던 내용을 하나씩 떠올리며 피가 차갑게 식고 모골이 송연해지는 걸 느꼈다.
‘왕국의 마지막 왕’이라는 것은 이후에 왕좌에 오른 자가 없다는 소리다. 필리아의 기억이 맞다면 그는, 왕좌에 오른지 단 하루 만에 자기 시녀가 건넨 독주를 마시고 목숨을 잃었다.
왕국에 피바람을 불러온 폭군의 황당하리만큼 허무한 말로에 그의 최후가 교과서에까지 기록되어 있던 것이다.
"……자꾸 그리 뜨거운 시선으로 바라봐오면 멋대로 굴고 싶어지는데."
솔로몬이 그윽이 웃었다.
"꼭 권하는 것 같단 말이지."
"농담하지 마요."
복잡한 머리와는 달리 필리아의 말투는 냉정했다.
"크림슨에게 편지로 뭐라고 했죠? 뭐라고 했길래 그 고지식한 벽창호가 단번에 나한테서 손을 뗀 거냐고요."
"역시 그게 가장 궁금했군."
빙글거리던 솔로몬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사실 숨길 것도 아니야. 단순한 얘기지. 나는 크림슨, 그자의 전생을 알고 있어."
"전생이요……?"
"그래. 그자의 가장 큰 약점이지."
"……편지에 그걸 가지고 협박한 거군요."
"부드러운 회유라고 해주면 고맙겠군."
필리아는 생각에 잠겼다. 남들에게 알리고 싶지 않은 전생이라.
"당신은 그걸 어떻게 안 거죠?"
크림슨의 성품으로 추측해보건대, 그는 결코 자신의 약점이 될 만한 일을 남들에게 떠벌리는 유형이 아니었다. 솔로몬은 필리아의 질문에 뜻밖에 뿌듯하게 웃었다.
"내 특별한 수집품 덕분이지. 놀라지 말아, 필리아 양. 내 수집품 중에는 망자의 전생을 비춰주는 영사기가 있다네."
"네? ……아아. 혹시 그, 머리카락을 감으면 재생하는 영사기요?"
놀란 듯 눈이 동그래지던 솔로몬은 이내 김이 식은 얼굴로 물었다.
"어떻게 알았지?"
필리아는 피식 웃었다.
"나디아의 수리점에 갔다가 봤어요. 고장이 나서 수리점에 맡겼나봐요?"
"……그래. 맞아. 감탄하는 귀여운 얼굴을 보려고 했는데 다음 기회를 노려야겠군."
"노리긴 뭘 노려요. 그보다 얼마나 가지고 놀았으면 그게 고장이 나요?"
"가지고 놀았다고 할까. 자주 사용해야만 하는 일이 있었거든."
필리아가 무슨 의미냐는 듯 눈썹을 일그러뜨리자 솔로몬이 말했다.
"혹시 모르잖아. 누가 내 첫사랑일지. 어쩌면 아이의 모습일 수도 있고. 어쩌면 우락부락한 사내의 몸으로 환생했을 수도 있지. 허리가 굽은 노파거나 나디아 양과 같은 불편함이 있는 몸으로 태어났을 수도 있어. 그게 어떤 모습이든. 영사기를 사용하면 그자가 전생의 내 첫사랑이었는지 아닌지 알 수 있으니까."
"……설마. 지금까지 환생을 거부하고 있던 이유가 첫사랑을 다시 만나기 위해서예요?"
솔로몬은 점잖이 미소를 지으며 침묵했다.
필리아는 혀를 내둘렀다.
"말도 안 돼."
"뭐가 말이 안 되지?"
"이미 지나간 사랑을 다시 만나겠다고 그렇게 많은 세월을 환생도 하지 않고 이러고 있었단 거잖아요. 너무 무모해요."
"무모하지 않아. 전혀."
솔로몬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수백, 수천 년이 흘러도 닳지 않은 그리움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경악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어린시절 의미있던 인연도 고작 십 년만 지나면 희미해지는 게 사람이었다. 고대 인간의 이해하지 못할 사고방식 같은 걸까? 사랑을 해본 적 없는 필리아는 오만하게 고개를 주억거리며 중얼거렸다.
"그래요, 뭐. 그럴 수 있겠죠. 하지만 지독히도 무의미한 일이에요. 좋아하는 감정이란 거 언제든 다른 사람으로 대체될 수 있는 거니까. 세상에 여자는 많잖아요."
"…………."
솔로몬이 지그시 필리아를 내려다봤다. 침묵이 길어져 불안해지려던 찰나 솔로몬이 부드럽게 손을 들어올려 필리아의 뺨을 살며시 만졌다.
"뭐하는……."
"그대. 사람의 이름이 왜 하나만 존재하는지 아나? 단 한 사람에게만 소중히 불리우기 위해서라네."
"네?"
"그렇다면 심장은 왜 하나인 줄 아나?"
설마.
"오직 한 사람에게만 뛰기 위해서지."
"……심장은 원래 뛰는 거예요. 멈추면 죽는다고요."
"문학적 소양이 아쉽군, 필리아 양."
솔로몬은 필리아의 뺨에 대었던 손을 천천히 아래로 떨어뜨리며 서글프게 웃었다.
"세상에 그 사람을 대신할 수 있는 건 없어."
"…………."
"그 사람을 만나서 내 심장이 뛰기 시작했으니……, 내 심장을 멈출 수 있는 것도 그 사람뿐이지. 그 사람을 다시 보기 위해 고집을 부리는 것은 개가 주인을 기다리듯 당연한 일이라네."
필리아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첫사랑이 듣는다면 감격할 일이네요. 이렇게 죽어서까지 열렬히 자신을 찾는 남자가 있다니. 하지만. 아무리 맹목적이고 헌신적인 애정이라 해도 이토록 오랜 시간 동안 환생하지 않고 있는 걸 안다면 첫사랑이 가슴 아파할 거예요."
"……글쎄."
솔로몬은 입꼬리를 묘하게 휘며 필리아를 장난기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잘 모르겠군. 내 첫사랑은 그리 마음씨 착한 여자가 되지 못해서. 오히려 이제껏 자신을 기다렸다니 지독하다며 내 잔에 독주를 채워줄지 모르지."
"뭔 시답잖은 소리예요, 그게?"
"내 첫사랑은 그런 여자거든. 필리아 양. 그 여자가 준 독주는 내가 마신 모든 술 중에 가장 향기롭고 달콤했지."
필리아의 표정이 서서히 굳자 솔로몬의 입가에는 진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아는가? 내 첫사랑은 나를 위해 가장 맛있는 술을 독주로 준비해줄 줄 아는 시녀였다네."
필리아는 얼마간 멍하니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니까 그 말뜻은…….
머리에 지끈, 두통이 일었다. 마조히즘인 것 같더라니. 그러니까 교과서의 내용이 정말 사실이라고?
세상에 자신을 죽인 여자를 사랑할 수 있는 남자가 얼마나 될까. 필리아는 혼란스러웠다. 자신의 상식이 이 세계의 영향으로 아직 오염되지 않아 건재하다면, 남자가 첫사랑 첫사랑 노래를 부르는 건 순수한 마음이 아니라 복수심이어야만 했다. 만약 그게 아니라면. 남자가 진실로 그 여자를 가슴 깊이 사랑하고 있는 거라면.
이 남자는 과연 얼마나 미쳐있다고 봐야 하는 걸까.
필리아는 자신을 살해한 첫사랑을 찾아헤메는 남자로부터 몇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솔로몬은 그 걸음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면서도 가만히 웃는 얼굴을 했다.
"……사실은."
그의 입술이 고요히 열렸다.
"그 숲에서 그 여자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어. 그 여자라면 왠지 이승을 버리지 못하고 그 숲에 이끌려올 것만 같았거든. 어리석은 바람일 지도 모르지만. 그 여자가 숲에 오리라는 희망을 버릴 수 없었지."
"그래서……."
"그대에게는 미안했네."
솔로몬의 얼굴에서 미소가 스르르 가셨다.
"나로 인해 불편했을 테지. 하지만 그 숲에서 그대를 만났을 때 견딜 수 없이 기뻤어. 기적을 겪고 심장이 떨리는 순간은 두 번 다시 경험할 수 없으리라고 생각했는데. 정말 오랜 만에 살아있는 기분이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