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포이베는 한결 나아진 기분으로 저택에 돌아왔지만, 포이베를 기다리던 건 또 다른 갈등과 균열이었다.
“서류상 가족? 그래, 인정해. 아버지 선택이니까. 네 말대로 사정이 있었다고 쳐. 근데 그 이후는? 그 뒤로는 네 선택 아니야? 뭐라도 했어야지, 노력했어야지!”
“노력했어, 나도! 근데 너는 다 싫어했잖아…….”
“…….”
“너도 나와의 관계는 노력한 적 없었잖아.”
“뭐라고?”
까랑까랑한 목소리의 주인이 누군지, 포이베는 단박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긴급회의까지 열렸으면 조용히 지내도 모자랄 판에, 왜 되레 큰 소리를 내는 건지. 짜증을 참던 포이베의 머릿속에서 오늘 있었던 일들이 스쳐 지나갔다.
그들의 입장을 한 번이라도 이해해 보려고 한 적이 있었나.
“너랑 포이베가 무슨 노력을 했는데?”
“……나 뭐?”
어느새 저택 안으로 들어온 포이베가 대화를 듣고는 자신의 이름이 나오자 나지막한 목소리로 대화에 끼어들었다.
“……무슨 얘기 중이었는데.”
“……언니, 언제 왔어? 손에 그건 뭐야?”
싸움이 커지기라도 할까, 캐서린이 포이베에게 다가가 말을 돌렸다. 하지만 포이베는 생각보다 담담했고, 오히려 비앙카가 더 당황한 듯했다.
“지금 왔어. 과일이야. 그래서, 내가 어쨌다고.”
짧지만 성의 있게 -본인 기준이다- 대답한 포이베가 캐서린을 살짝 지나쳐 카마리아와 비앙카가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포이베가 대답하라는 듯 비앙카에게 턱짓했다.
“……오늘 긴급회의 열렸대. 평민 시위 관련한 우리 가문 처분 건이야.”
늘 그렇듯 포이베의 거만한 태도에 기분이 상한 비앙카가 입을 열지 않자, 카마리아가 대신 나섰다.
“알고 있어. 에덴한테 들었어.”
그걸 어떻게? 테오도르가 말했나? 카마리아에게 화젯거리를 던져두고, 포이베는 다시 비앙카를 재촉했다.
제 얘기를 해 놓고선 정작 물어보면 말이 없으니, 슬슬 짜증이 날 것도 같았다.
“내 얘기는 뭐 하다가 나온 건데.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라고.”
포이베의 말에 카마리아가 다시 끼어들었다.
“뭐, 평민 얘기하다가 옛날얘기가 좀 나왔는데, 얘가 말하길 너랑 내가 자기를 무시했다고……. 아니 잠깐만, 포이베, 무슨 상관이냐니. 우리 집안일인데 왜 상관이 없어?”
“나 때문에 일어난 일도 아니고, 내가 할 수 있는 일도 없고. 상관없잖아.”
원체 타인에게 관심 없는 포이베라지만, 아무리 그래도 한집에 같이 사는 식구인데. 남의 일을 관망하는 듯한 태도에 다들 당황한 얼굴로 포이베를 쳐다봤다.
카마리아가 발끈한 얼굴로 쏘아붙였다.
“야, 너는 도망갈 구석이라도 있다, 이거야?”
“……도망?”
포이베로선 정말 듣고 싶지 않은 말이었다. 포이베가 몸을 틀어 카마리아를 마주 봤다.
“아젠툼 공작가. 네 가문이랑 우리 가문이랑 사이 안 좋은 거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잖아. 넌 그쪽 편에 서기로 마음먹은 거지, 지금?”
천천히 말을 되새긴 포이베가 입가에 조소를 머금었다.
“네 가문……. 우리 가문……. 이미 구분 지어 말하고 있으면서 나한테 뭘 기대하는데?”
“……방금은.”
카마리아가 아차 싶은 얼굴로 입을 열었지만 포이베의 마른 목소리가 공기를 덮었다.
“나는 이 집에서 지낸 시간보다 아젠툼 공작가에서 보낸 시간이 더 길어. 난 아버지 얼굴도 황궁 연회에서 처음 봤어. 아카데미 상급반도 나만 공국에서 다녔지. 내가 이 집 어디에서 소속감을 느껴야 하는데?”
“……포이베, 내 말은, 우리는 같은 성에 피가 섞인 자매니까.”
다급하게 말을 늘어놓으며 카마리아는 횡설수설했다. 비앙카는 ‘피가 섞인’이라는 말에 마음이 시큰해졌다. 참, 누구 하나 마음 편한 이가 없다. 캐서린도 이런 상황에선 섣불리 말을 거들기 곤란하니 상황이 더 악화되지 않도록 눈치만 보고 있었다.
“내가 이 저택에 들어오기로 결심한 건, 너희가 가족처럼 보였기 때문이었어.”
한 번도 속마음을 보여 준 적이 없었던 포이베기에 지금 이 말이 모두에게 크게 와닿았다. 포이베는 조금 더 솔직해져 보기로 했다.
“내 태도에도 문제가 있었다는 거 인정해. 그렇지만 여기 캐서린 말고 당당할 수 있는 사람이 있어?”
카마리아도, 비앙카도, 그리고 정작 이 말을 꺼낸 장본인인 포이베도, 지난날 제 모습들이 어땠는지를 떠올렸다.
“서로를 탓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
포이베는 대답을 듣는 게 무서워서 도망치듯 방으로 올라왔다.
잘한 거 하나 없는 제 말을 누가 들어 줄까. 이제 와서 잘난 체한다고 뭐라 하진 않을까. 정말 완전히 모두를 밀어내 버린 게 아닐지 걱정이 되었다.
아젠툼 공작저에서 물질적으로 부족함 없이 자랐지만, 심적으로 기댈 사람은 없었다.
어머니는 아파서 온종일 누워 계셨고 형제 하나 없이 홀로 책을 읽거나 일하는 어른들을 지켜볼 뿐이었다.
아젠툼 공작가는 끈끈한 가족이라기보다 서로의 이해관계에 충실한 하나의 집단이었다. 다들 서로에게 무심했고 유일하게 저를 종종 찾아 주던 이모는 제게 은근한 학대를 일삼았다.
그러니 자연스레 본 적도 없는 아버지를 찾게 되었다. 아버지의 얼굴을 연회에서 처음 봤다고 하면 믿을까.
나도 그랬듯 아버지도 날 어색하게 대했지만, 시간이 해결해 줄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되면 언젠가 왜 나를 한 번도 보러 오지 않았느냐고, 왜 편지 한 통 보내지 않았냐고 편하게 물어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로시난테 공작저로 들어오게 되었을 때는 내심 큰 기대를 하고 있었다. 이제 정말 가족이 생길 것 같아서. 그렇지만 저가 낄 틈은 없어 보였다.
이미 오랜 시간을 함께하고 유대감을 쌓은 카마리아나 캐서린은 물론이고, 갑자기 나타난 비앙카마저 저보다 큰 사랑을 받는 것처럼 보였다.
아젠툼 공작저에서도, 로시난테 공작저에서도 제 자리는 없었다. 그저 어디에도 끼지 못하고 우두커니 서 있을 뿐이었다.
***
“로……. 포이베 님.”
자신을 뭐라고 부를지 고민하는 집사를 보며 포이베가 됐다는 손짓을 했다. 어차피 뭐라 부르든 상관없었다. 포이베는 저택의 내부를 잘 아는 듯 아주 능숙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모든 것이 익숙했지만 마음가짐이 달라서 그런지, 감상이 새롭기도 했다.
‘모처럼 드레스가 아니라 바지를 입어서 그런가.’
예스러운 저택과 복도를 가득 채운 역대 공작의 초상화는 아젠툼 공작가의 고고한 역사를 보여 주었다. 포이베는 저택의 가장 안쪽으로 들어갔다.
문 앞을 지키던 기사는, 익숙한 얼굴에 자연스럽게 자리를 피해 주었다. 포이베가 천천히 문을 두드리려는 찰나, 근엄한 목소리가 방 안에서 들려왔다.
“포이베냐. 들어와라.”
할아버지, 그러니까 아젠툼 공작의 서재는 책의 종류가 바뀌었을 뿐 전체적인 구조나 가구의 종류는 옛날과 똑같았다.
여기서 늘 혼나던 게 엊그제 같은데, 왠지 그리운 곳에 온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이 역시 시간은 추억을 미화하나 보다.
“할아버지, 안녕하셨어요.”
“그래, 앉아라.”
아젠툼 공작이 편하게 자리를 잡을 때까지 기다린 포이베가 먼저 말을 꺼냈다.
“저 약혼해요.”
“누가 모르냐. 집 나갔다고 이제 남보다 못한 취급 하는 거냐? 키워 준 은혜가 있지, 다른 것도 아니고 인생의 중대사를 남의 입 통해서 듣게 만들어.”
“……죄송해요.”
애정 어린 서운함인지 실망 어린 질책인지. 포이베는 변명이라도 할까 했으나 공작이 가장 싫어하는 게 쓸데없는 변명이라, 변명 대신 사과를 택했다.
“상단주라…….”
“…….”
“큰 상단을 끼고 있다만……. 네 짝으로 적당한지는 모르겠구나. 네 아비가 붙인 게지?”
“……괜찮은 사람이에요.”
“붙여도 수준이 있지, 어디서 그런 돈벌레를.”
제가 에덴을 두둔하는 날이 오다니, 포이베는 오늘이 참 기념비적인 날이라고 생각했다.
“계속 우리 가문에서 지냈으면 다른 멀쩡한 귀족 자제를 이어 줬을 거다.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고, 돈독 오른 놈이 돈독 오른 놈 알아본 거지.”
“그렇지도 않아요. 그 사람, 좋은 일도 많이 하고요.”
“벌써 물든 게냐?”
“……물들긴요.”
에덴을 깎아내리는 할아버지의 말에 포이베는 울컥했다. 표정을 갈무리하기 위해 찻잔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뭐, 네가 선택했을 거라고 생각은 안 했다만, 하여튼 네 아비가 문제야.”
“…….”
“마음에 드는 구석이 어떻게 한 개도 없어!”
“…….”
“아비 욕하는 건 싫으냐?”
포이베는 대답 대신 난처하다는 미소를 지었다. 태어날 때부터 전부 정해져 있던 포이베에게, 자꾸 무언가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은 그저 부담일 뿐이었다.
“아픈 네 엄마랑 핏덩이였던 네가 안중에도 없던 놈이다. 여기서 살 때 기억나지? 널 보러 온 적이 한 번도 없지 않냐.”
그 말을 듣는 포이베의 마음이 어떨지는 생각을 못 하나 보다. 로시난테 공작의 흉을 보기 바쁜 아젠툼 공작은 그 후로도 차가 식을 때까지 로시난테 공작의 험담을 늘어놓았다.
“그래, 뭐 아무튼 그거 얘기하려고 온 거냐?”
“네, 뭐……. 오랜만에 어머니 방에도 가 보고……. 안부 여쭤본 지도 꽤 됐잖아요.”
“안부는 자주 물어라. 몸이 예전 같지 않아.”
“외출은 자주 하세요?”
“요즘은 집에만 있지.”
“회의에도 안 가세요?”
최대한 아무 의미도 없는 척, 포이베가 넌지시 회의 얘기에 대한 운을 띄웠다.
“……나한테 말해도 의미 없다. 최근 회의는 거의 네 외숙이 가고 있으니까.”
“그래도 할아버지 의견이 들어가는 거잖아요.”
한마디에 바로 의미를 간파한 공작이 선을 긋자, 이왕 이렇게 된 거 밑져야 본전이라고 포이베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그 말 하려고 온 거구나. 이런 일 아니면 얼굴은 비추지도 않는다, 이거냐?”
“그런 게 아닌 거 아시잖아요.”
“아니긴 뭘. 한 지붕 아래 산다고 벌써 거기로 붙어서는. 제 아비 곤란하니까 그렇게 발길 뜸하던 애가 바로 찾아오는 거 봐라.”
“저 그렇게 그 가문에 애정 없어요. 가문 명예에 누가 될까, 그거 걱정하는 거예요.”
통하지 않는 듯, 아젠툼 공작이 단호하게 말했다.
“이미 내뱉은 말, 무를 수도 없다.”
“당연히 없는 말이 되지는 않겠지만, 정기회의 때 더 나서지 않는 것만으로도-.”
“평민을 귀족 가문에 입적시킨 그날로부터 로시난테 가문의 명예는 이미 죽은 명예였다.”
“…….”
“너는 지금 허상을 좇고 있어.”
아젠툼 공작은 소파에서 일어나 다시 책상 앞으로 자리를 옮겼다. 나이에 비하면 정정하지만 역시 세월의 흐름은 속이기 힘든지 걸음이 많이 느려진 공작이었다. 그는 무릎에 무리가 가지 않게 의자에 천천히 앉았다.
“쓰러져 가는 집 억지로 붙잡는 것보다 빨리 뛰쳐나오는 게 도움이 될 거다. 모두 이해할 테지. 너에게 있어서 도움이 되는 명예로운 가문은 아젠툼 하나로도 충분해.”
“쉽게 무너질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돌 던져서 안 무너지는 집 없다. 처음에야 작은 흠집 정도겠지만 점점 틈이 생기고 시간이 지나면 큰 균열이 되겠지.”
“막상 집이 무너지면 비난받는 쪽은 어디겠어요. 할아버지는 집을 무너뜨리는 데에만 집중하시느라 집 안에서, 또 할아버지 뒤에서 사람들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도 모르시잖아요.”
약간 언성이 높아진 포이베가 제 모습에 놀라 목소리 크기를 줄였다. 아젠툼 공작은 동요 없는 표정으로 말했다.
“……나가 봐라. 얼굴 봤으니 됐다.”
“……건강 잘 챙기세요.”
“이리나와 마주치지 않게 조심해라.”
포이베는 문을 열고 나가기 전 공작을 향해 고개를 살짝 숙였다. 공작은 서류에 집중하며 그쪽은 쳐다도 보지 않았다.
잠시 그대로 서 있던 포이베가 결국 돌아서자, 공작은 그제야 포이베의 뒷모습을 눈에 담았다.
***
어머니가 쓰던 방은 어린 날의 흐릿한 기억 그대로였다. 그래도 주기적으로 청소는 하는지 가구에 쌓인 먼지는 없었다.
아젠툼 공작저에 올 때마다, 포이베는 방 안을 돌며 어머니의 손길이 담긴 모든 것을 눈에 담았다. 포이베가 침대 옆에 멈춰 섰다.
어머니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곳. 희미하게 어머니의 냄새가 느껴지는 것도 같다. 당연히 착각이겠지만 그렇게 생각하면 정말 그런 것처럼 느껴진다.
일찍 돌아가신 어머니와 큰 유대가 있었던 것도 아니면서 이런 데 의미 부여하는 것은,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제 인생이 너무 외롭고 공허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죽은 사람에게는 기대도 실망도 하지 않으니, 혼자만의 유대감을 안고 버틸 수 있다는 게 좋았다. 하지만 이젠 제게도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생겼다.
‘저 약혼해요. 저는 행복하게 살 거예요.’
어머니의 방에서 나온 포이베의 시선이 맞은편에 닿았다. 방문을 소리 나지 않게 닫은 포이베는 발소리를 죽이고 저택을 빠져나왔다.
막 저택을 나선 포이베의 뒤로 찢어지는 고함이 들렸다.
“너! 너……. 포이베니?”
뒤를 돌아본 곳엔 퀭한 눈을 희번덕거리는 이리나가 있었다. 급하게 쫓아 내려왔는지 신발 한 짝이 없었다. 이리나의 뒤로 다급하게 뛰어오는 시녀 두 명이 보였다.
“너, 너 때문에, 나는 이렇게 살고 있는데…….”
“……일단 신발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