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너에게 1권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너에게 1권
목차
프롤로그
1장
2장
3장
4장
5장
6장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너에게 1권
프롤로그
“이리 와, 아일라.”
쿠르릉.
당장이라도 장대비를 쏟아 낼 듯 신음하는 하늘을 뒤로하고 테오도어는 손을 뻗었다.
손끝이 향한 곳엔 가이에른 왕국의 왕비이자 인간을 사랑한 인어, 아일라 파노페아가 서 있었다.
당장이라도 떨어질 듯, 벼랑 끝에 위태롭게.
“하아?.”
테오도어의 붉은 입술 새로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쪽지 하나만 남겨 두고 사라진 왕비를 찾기 위해 왕국 전체를 헤집고 다닌 게 벌써 며칠이나 되었더라?
찬 바람에 뻣뻣해진 피부가 감각이 없는 걸 보니, 모르긴 몰라도 꽤 오랜 시간이 지났음은 분명하다.
테오도어는 잘 움직이지 않는 손을 거둬들여 새까만 머리카락을 흩트렸다. 손가락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의 놀란 심정을 대변하듯이.
“그대에게 해야 할 말이 있어. 또한 묻고 싶은 것도. 그러니 그만 이쪽으로 오지 그래.”
“제게… 물을 게 있다고요?”
“그래, 그대에게 반드시 들어야 할 답이?.”
“…아니요. 묻지 말아요, 그게 무엇이든.”
“…뭐?”
“어차피 제가 무슨 말을 하든 믿지 않을 거잖아요. 언제나 그랬듯이.”
지친 기색이 가득한 아일라의 음색에 테오도어의 몸이 멈칫했다.
어느새 아일라는 고개를 들어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이 어찌나 메말라 있던지,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덜컥 숨이 막혀 왔다.
늘 투명하게 반짝이던 하늘색 눈동자가 텅 비어 있었다. 어여쁜 밀랍 인형같이.
상대를 향한 그 어떤 기대도, 실망도, 심지어 삶에 대한 의지조차도 담겨 있지 않은 아일라의 눈을 마주한 테오도어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아일라가 이 절벽에 오른 이유는, 스스로 생을 마감하기 위해서라는 걸.
그 추측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하듯, 아일라는 아이를 잃고 판판해진 배를 감싸 안으며 뒷걸음질 쳤다.
“…진작 이랬어야 했는데, 제 욕심 때문에 모두가 불행해졌네요. 당신도, 그리고… 우리 아이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감에 가이에른의 젊은 왕, 테오도어 데본셔우트의 자안이 정처 없이 흔들렸다.
“그리 보지 마세요. 전하께서도 항상 바라셨잖아요. 제가…….”
“…그만.”
“제가… 죽기를.”
“아일라, 나는……!”
아니라고 부정해야 하는데,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손끝에서부터 시작된 떨림이 테오도어의 온몸으로 번져 갔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그래, 분명 그랬던 적도 있었다. 아일라가 눈앞에서 사라지길 바랐던 적이.
‘테오도어 데본셔우트는 자신의 왕비를 증오한다.’
이건 가이에른 왕국의 세 살배기조차 아는 사실이었다.
“그대가 나를 사랑한다? 내 가족과 백성들을 도륙 낸 자의 조카가 내뱉는 사랑 타령이라. 우습다 못해 역겨울 지경이야, 아일라 파노페아.”
가이에른을 짓밟은 적국의 공주.
그런 주제에 순진한 얼굴을 하고선, 종전을 빌미로 제 옆자리를 차지한 가증스러운 여인.
아일라를 향한 이 끔찍한 감상은 테오도어에게 있어 절대 변치 않을, 불변의 명제와도 같았다.
그런데 어째서…….
정말로 아일라를 잃게 될지도 모르는 지금, 공포심에 이토록 이성이 흐려지는 것인가.
허억. 테오도어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싫다고 할 때는 지긋지긋하게도 들러붙더니 이제 와 날 떠나시겠다? 왜, 그 대단하신 사랑놀음이 이젠 지겨워지셨나?”
으르렁거리는 낮은 음색에 아일라의 눈매가 슬프게 휘었다.
“네, 지겨워졌어요. 그래서 이젠 그만두려고요, 전하를 사랑하는 일 같은 건.”
“누구 마음대로.”
테오도어가 짓씹듯 내뱉으며 성큼 걸음을 옮겼다.
웃기지도 않는 소리.
이딴 식으로 놓아줄 생각은 추호도 없다.
“도망을 갈 거라면 애초에 시작도 하지 말았어야지.”
이것은 애증일까, 아니면 집착일까. 무엇인지 모를 질척한 감정들이 한데 뭉쳐 아일라에게로 향했다.
그러나 둘의 거리가 가까워지는 것보다, 아일라의 몸이 뒤로 넘어가는 게 더 빨랐다.
“……!”
용수철처럼 튀어 나간 테오도어가 떨어지는 아일라의 손목을 가까스로 낚아챘다.
“잡았……!”
그 순간, 붙잡았다 여겼던 마른 손목이 미끄러지듯 손안에서 빠져나갔다.
놓쳐 버린 아일라의 모든 게 빠르게 멀어져 간다.
테오도어는 눈앞에 펼쳐진 장면을 넋이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바라봤다.
추락한다.
아일라 파노페아가.
나의… 왕비가.
그 순간 콰르릉! 울부짖는 천둥소리와 함께 차가운 빗방울이 머리 위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마치 이 모든 비극의 시작점인 13년 전 폭풍우가 치던 그 밤, 바다에 빠져 죽어 가던 자신을 아일라가 살려 냈던 그날처럼.
“안 돼, 아일라!”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너에게 1권
1장
“테오, 표정 좀 풀지 그래?”
헤이든이 골이 나 있는 제 동생의 미간을 꾹 눌렀다.
그러자 창백한 뺨을 부풀리고 있던 남자아이가 눈을 뾰족하게 떴다.
“오늘 연회의 주인공인데 계속 이렇게 죽상을 하고 있을 거야? 좀 웃어 봐. 생일이잖아.”
“형 같으면 웃음이 나오겠어? 이런 시골구석에 갇혀 있는 신세인데.”
아이는 시큰둥하게 답한 후 난간에 팔을 걸쳤다.
화려하게 장식된 선박이 움직일 때마다 눅눅한 바닷바람이 얼굴을 때렸다.
‘오늘 밤 비 소식이 있다던데 그래서 그런가.’
짭조름한 향에 불쾌해할 틈도 없이, 한 무리의 귀족들이 근처로 다가왔다.
“2왕자 저하, 탄신일을 축하드립니다.”
“…….”
그랬다.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해안가의 시골 마을과는 어울리지 않는 화려한 선박. 그 위에서 열리는 연회는 가이에른 왕국의 2왕자인 테오도어 데본셔우트의 탄신일을 축하하기 위한 것이었다.
흑발에 자안이 퍽 매력적인 이 아이에게서 돌아오는 답이 없자, 헤이든이 어색하게 웃으며 대신 인사를 받았다.
“하하, 고맙네. 칼만 백작. 즐거운 시간 보내시게.”
그렇게 귀족들을 돌려보낸 후, 헤이든은 테오도어의 머리를 장난스럽게 헝클어뜨렸다.
“갇혀 있는 신세라니. 테오, 너도 알잖아. 네 안전을 위해 여기 머물게 한 거란 걸.”
“그러니까 왜 나만이냐고. 형은 계속 왕성에 머물잖아.”
“넌 아직 어리니까.”
“열둘이면 다 컸거든.”
쉬쉬하고 있긴 하나 가이에른의 왕성은 현재, 그 어느 때보다도 분위기가 날이 서 있었다.
전쟁을 거듭하며 날로 강해지는 왕권과 개국공신이라 일컬어지는 가문들 사이의 힘겨루기가 한창이었기 때문이다.
귀족들은 왕권이 자신들의 통제 범위를 벗어나는 걸 막기 위해, 어떻게든 왕을 저지하려 했다.
그 과정에서 어린 아들에게 괜한 불똥이 튈까 염려한 국왕이 테오도어를 이곳으로 보낸 것이었다.
다만 헤이든은 성년식을 앞두고 있고 왕세자이기도 한 터라, 상황이 달랐다.
뭐, 테오도어 역시 모르는 건 아니었으나 괜히 심술이 났다.
“그래도 이 마을에 인어가 있단 소문이 돌던데. 어때, 흥미가 좀 가지 않아?”
“관심 없거든.”
어린애 취급 하기는.
툭. 어긋난 바닥재를 가볍게 걷어찬 테오도어가 몸을 돌렸다.
“응? 어디 가려고?”
“안 알려 줘.”
“저거 봐, 다 크기는 무슨.”
뒤에서 헤이든의 웃음소리가 들렸지만, 테오도어는 모른 척 인파를 헤집고 걸어갔다.
그러나 얼마 못 가 테오도어 주변으로 슬금슬금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어머, 2왕자 저하!”
“왕자 저하, 저희 광산에서 귀한 광물이 나왔는데 저하의 선물로?.”
연회에 참석한 귀족들 속내야 뻔했다. 이 기회에 환심을 사 왕실과 사이가 틀어진 가문들의 자리를 한번 차지해 보려는 속셈이겠지.
그 의도를 모르지 않기에, 테오도어로선 죄다 귀찮기만 할 뿐이었다.
‘어디 적당히 덜 시끄럽고, 적당히 사람이 없는 곳은 없으려나.’
질린 표정으로 주변을 살피던 테오도어는 곧 적당한 곳을 찾아냈다.
“후, 이제야 좀 조용하네.”
배 선미에 간이로 마련된 공간에 들어온 테오도어는 머리에 고인 물방울을 털어 냈다.
안 그래도 바람이 심상치 않다 싶더니, 어느새 빗방울이 하나둘 떨어지기 시작했다.
어깨에 앉은 물기마저 털어 내던 그때, 덜컹거리는 소음과 함께 희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테오도어의 새까만 눈썹이 구겨졌다. 이제야 혼자가 됐나 싶었는데, 또 방해꾼인가 싶어 짜증이 났다.
소리가 난 쪽으로 다가가니 커다란 천으로 덮인 철창이 보였다.
그 옆으로 각종 선물 상자가 쌓여있는 걸 보니, 이것도 어떤 얼빠진 귀족이 준비한 선물 중 하나인 모양이다.
사치스러운 비단 천에 새겨진 족제비 문양은, 이 마을의 영주인 에반스 가문의 직인이었다.
그러고 보니 영주 아들이라는 놈이 의기양양하던 게 떠올랐다. 재미있는 선물을 준비했다면서.
“설마 살아 있는 건 아니겠지.”
테오도어는 반신반의하며 천으로 손을 가져갔다.
하지만 천을 채 걷어내기도 전에, 철창이 한 번 더 크게 흔들리더니 쿠당탕 소리와 함께 넘어졌다.
그 충격으로 천이 공중에 뜨며 시야를 가렸다 빠르게 바닥으로 떨어졌다.
다음 순간, 테오도어는 숨을 들이켰다.
끽해야 희귀한 동물쯤일 거라 예상했건만. 철창 안에 있는 건 동물 따위가 아니었다.
“…뭐야, 너?”
커다란 하늘색 눈동자를 동그랗게 뜨고 테오도어를 바라보고 있는 건, 또래의 여자아이였다.
그 존재에 놀랄 틈도 없이, 몸이 앞으로 쑥 딸려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