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ver
아카데미에서 한글로 살아남기 10권
유우리 퓨전 판타지 장편소설
목차
#하늘에서 뚝 떨어진 방법
#핏빛 사막
#너여야 하는 이유
#다시 시작되는 멸망
#회귀
#세이비어 공방전
#결론은 아카데미
#관리실 공방전
#실패할 수 있는 기회
1
#하늘에서 뚝 떨어진 방법
테른은 생각이 복잡한 얼굴로 첸첸을 바라보았다.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난데없이 듣게 된 황제의 비사였다. 솔직히 어떤 반응을 해야 할 지 당황스러웠다.
더군다나 첸첸이 꺼낸 이야기는 그 스케일부터 남다르지 않은가.
하지만 불현듯 이게 거짓이 아니라는 건 알 수 있었다.
의문으로 남았던 머릿속 퍼즐이 완벽하게 완성된 것이다.
첸첸이 한 이야기들은 충분히 그럴 듯한 개연을 가졌다.
“하나만 더요.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뭐지?”
“현재의 황제 폐하는 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미래에서 돌아 온 황제에 의해 죽은 겁니까?”
첸첸이 말하길 ‘미래의 황제’는 시간여행을 통해 현재, 그러니까 과거로 돌아왔다.
즉 현재 벨디아 제국을 다스리는 황제는 사실 ‘미래에서 온 오웬 벨디아’라는 얘기가 되는데.
그렇다면 기존에 있던 황제는 어찌 되었을까?
아무래도 미래의 황제에게 제거 당했을 확률이 높았다.
첸첸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아니, 미래의 황제는 자신의 현재를 죽일 수 없다.”
“네?”
“■■의 폭주를 막고자 스스로를 희생했던 과거와는 다르다. 미래의 황제는 폭주한 ■■으로부터 도망쳐 과거로 왔을 뿐이니까. 즉 미래의 황제의 몸속엔 ■■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그리고 그 때문이라도 미래의 황제는 현재의 황제에게 그 어떤 위해도 가할 수가 없었다.
현재의 황제 몸속엔 ■이 있으며, 자칫 잘못하면 그게 쾅, 터져버리는 수가 있었으니까.
■이 어쭙잖게 폭발해버리는 것만큼 오웬 황제의 생각과 반대되는 경우는 또 없을 것이다.
“대신 놈은 다른 방법을 고안해냈지.”
“다른 방법이라면…….”
“빙의다.”
“비, 빙의요?”
“빙의를 한다면 현재의 황제를 죽이지 않고도 제 입맛대로 미래를 바꿀 수 있을 테니까.”
에몬이 자아를 장악해 대상을 조종하려 했듯, 황제는 자기 자신의 과거에 빙의하여 살고 있는 것이다.
“즉 멸망을 막으려면 우선 녀석의 내면에 있는 미래의 황제를 끄집어내야만 한…….”
스윽, 첸첸은 갑자기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올려다본 허공엔 쩌저적 균열이 생겨나고 있었다.
“자울이 오는군.”
“네?”
“아무래도 오웬 녀석이 보기에도 너랑 내가 만나는 건 썩 달가운 일은 아닌 거겠지.”
첸첸은 ‘자울’이란 인물도 황제가 만들어낸 또 다른 사역마라고 소개했다.
정확히는 ‘미래의 황제’가 아닌, ‘과거의 황제’가 만들어서 운용하는 오른팔이다.
“과거의 황제가 만든 존재라고 해서 무시할 놈은 못 된다. 애초에 오웬 자체가 보통 괴물 놈이 아니라는 건 네가 더 잘 알 테니까.”
테른은 그 말에 쉽게 납득할 수 있었다.
같은 환생의 개연을 가진 그였기에, 그 개연으로 만들어진 사역마의 위력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블루버드가 까악, 하고 울어대며 으스댔다.
“아무래도 이 이상 이야기를 나눌 여유는 없겠구나.”
첸첸은 수첩을 뒤적이더니 테른에게 웬 나침반을 하나 꺼내어 건넸다.
“테스토스가 길을 안내할 거다. 그 길을 따라 아카데미를 나가라. 그리고 이 나침반을 이용해서 스레미아를 찾아가라.”
“스레미아라면…….”
“애나그램엔 늙은 너구리가 한 마리 있다. 공식선상엔 자주 나서지 않는 놈이라 보통은 알기 쉬운 놈은 아니지만.”
“아뇨, 알고 있습니다. 직접 뵌 적도 있는 걸요.”
테른의 말에 첸첸은 약간 놀란 눈을 떴다.
“접점이 없었을 텐데? 대체 어떻게…… 아하, 그러고 보니 애나그램의 아이가 있군.”
토드 애나그램을 상기했는지 첸첸이 이죽이며 물었다.
“녀석은 어떻게 됐지? 재능 하나는 스레미아 그 이상으로 대단했던 놈이었는데.”
“아직 ‘기’의 세계에서 허덕이긴 합니다만, 얼추 ‘승’의 세계를 넘볼 정도는 됩니다.”
“생각보다 성장이 더디군. 그건 좀 아쉬운데?”
첸첸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어쨌든 스레미아를 찾는 게 우선이다. 이후는 녀석이 어떻게 해야 할지 알려줄 거다.”
후두두둑!
균열이 점점 더 커지고 벌어진 틈새로 누군가가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얼굴까지 전부 뒤덮는 복면을 쓴 게 전형적인 암살자처럼 보이는 사내였다.
실제로도 자울은 ‘첩보’를 목표로 만들어진 사역마로, 암행이 주 업무라고 했다.
“가라. 저놈은 내가 맡을 테니.”
문득 테른은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테스토스를 보았다.
첸첸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그는 여백을 열고 있었다.
“자, 심연을 빠져나가려면 여길 통과해야 한다.”
테른은 질색한 얼굴로 질문을 던졌다.
“……진심이십니까?”
“그럼 장난이겠냐?”
테스토스가 열어낸 여백 너머를 살핀 테른은 섣불리 걸음을 내딛을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게, 활짝 열린 여백 너머로부터 심상치 않은 마력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뜨거운지, 차가운지, 혹은 따가운지…… 욱신거리는지, 심지어 간지럽기까지 한 공기.
한 공간에서 별별 감각이 동시에 느껴진다는 건 말로 형용하기 힘든 감상을 줬다.
말 그대로 ‘설정 오류의 폭풍’이다.
-머뭇거리지 말고 들어가라. 어차피 여길 통과하지 못한다면 심연을 빠져나갈 길은 없으니까.
테스토스가 말하길, 이 폭풍은 아카데미의 곳곳에 있는 ‘설정 오류의 구멍’으로 연결되었다고 한다.
일찍이 첸첸과 테스토스가 심연을 벗어날 때에도 늘 이런 통로를 이용했다고 했으니 돌아갈 길은 없는 셈.
테스토스는 대체 무엇이 문제냐는 듯 중얼거렸다.
-심연을 빠져나가는 길이다. 설마 꽃길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겠지?
“물론 그건 아니지만…….”
말을 흐리는 테른을 향해 테스토스가 재촉했다.
-얼른 들어가기나 해라. 그리 여유롭지 못해.
* * *
그렇게 테른이 이를 악물고 폭풍 속으로 몸을 내던질 즈음, 디에고 빅토르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거 곤란한데.”
디에고 빅토르는 언덕 아래의 전장을 내려다보았다.
수를 헤아릴 수 없는 몬스터들이 파도처럼 밀려오고 있었다.
“끝이 없잖아.”
나타난 몬스터의 종류도 각양각색이었다.
흔하디흔한 고블린부터 오크, 그 정체를 알기 힘든 키메라나 드래곤의 아종으로 분류되는 희귀 몬스터인 드레이크.
심지어 범람의 재앙마저 섞여 있어서 전투 자체가 유리하게 흘러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까아아아악!
기묘한 울음이 가까워지자 전장의 사람들은 다급한 얼굴로 몸을 웅크리기 시작했다.
“분노의 재앙이다! 모두 피……!”
콰아아아앙!
말이 채 이어지기도 전에 재앙이 폭발했다.
가까스로 피한 사람도 있었지만 결국 피하지 못해 그 반경에서 터져 나간 사람도 있었다.
사방에서 폭발이 터지고 요동을 쳐대는 풍경은,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절망을 떠오르게 했다.
“후퇴해야 해. 이대로는 전멸밖에 답이 없어.”
누군가가 중얼거린 말마따나 이미 패색이 짙게 깔린 현장이었다.
여기서 버티어봐야 더 많은 희생자만 나온다.
“어디로 후퇴하라는 거냐? 우리한테 뒤가 어디에 있는데?”
“그건…….”
“여기서 전선을 물리면 그 다음은 로그로드야. 그때는 정말 답도 없다. 수천 명이 죽겠지.”
“그래서 여기서 우리가 뭘 더 할 수 있는데?”
디에고 빅토르는 열띤 토론이 이어지는 회의장을 바라보았다.
그의 형인 사덴 빅토르는 다른 아카데미 선배들과 열을 올리며 회의를 잇고 있었다.
“지원은 대체 언제 오는 건데? 아직도 연락은 안 되는 거야?”
“해방자 놈들이 아예 통신을 틀어막았어. 지금으로서는 무리야.”
“빌어먹을, 제대로 돌아가는 구석이 없군!”
“일단 진정해. 발 빠른 녀석들을 보내놨어. 곧 지원군이 와줄 거야.”
하지만 그 말을 한 학생이나 그 말을 들은 학생이나 하나같이 얼굴색은 어두웠다.
지원이 제아무리 빠르게 온다고 하더라도 하루, 내지 이틀은 족히 더 걸리기 때문이다.
그때쯤이면 이곳은 이미 초토화가 된 뒤일 터.
“대체 저놈들은 어떻게 갑자기 이 후방에 나타난 거야?”
“패드로 영지의 전이처럼 고대에서 전이된 거 아닐까?”
“그건 아니야. 미엄 패드로 님이 시공간 좌표는 이미 꽉 틀어쥐고 계신다고 들었어.”
“그럼 어디서 나오는 건데?!”
학생들의 목소리는 점점 커지고 그 동안에도 전장은 더욱 끔찍하게 물들어갔다.
가만히 있던 사덴 빅토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들 정신 차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지금도 지천에 깔린 게 몬스터야. 더 머뭇거렸다가는 퇴로마저 막혀.”
“그럼…… 결국 후퇴를 하자는 거야? 로그로드의 시민들이 죄다 죽을 지도 모르는데?”
“선택을 하자는 거야. 이렇게 있어 봐야 우리들도 로그로드의 시민들과 함께 죽는 것밖에 안 돼.”
사덴 빅토르는 그것만은 있어선 안 될 일이라고 주장했다.
일반 시민의 희생보다도 마법사의 희생이 훨씬 더 큰 손해였기 때문이다.
“물론 로그로드를 포기하자는 건 아니야. 여기서 무의미하게 버티느니, 차라리 로그로드를 중심으로 결계를 치자는 거지. 그러면 오래 버티진 못해도…… 하루 이틀은 더 버틸 여유가 생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