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막과의 소개팅을 파투 내는 방법
흑막과의 소개팅을 파투 내는 방법
흑막과의 소개팅을 파투 내는 방법 [1권]

지은이 봄나물
발행일 2025년 6월 14일

펴낸곳 (주) 테라핀
홈페이지 http://www.copinnovel.com
전자우편 easycontents@terapinstudios.co.kr
등록번호 제 25100-2019-000007호

ⓒ 봄나물,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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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가 3,200원
ISBN 979-11-7314-964-1 [05810]

흑막과의 소개팅을 파투 내는 방법
편지
“왜 말이 없지?”
그러니까 지금 이 상황은.
“그렇게 죽어라 피하던 구혼 상대의 얼굴을 본 소감은 어때?”
“……당신이 왜 ‘그 레페르트 대공’일까요?”
‘한 달간 발에 땀 나도록 피한 소개팅남이 알고 보니 아는 사람이었다―’라는 클리셰적인 상황이었다.
“이런 걸 바로 운명이라고 부른다지.”
제 성질만큼이나 붉은 눈동자가 가느스름하게 접혔다. 화들짝 놀라는 바람에 코끝에 묻어 버린 휘핑크림을 훔쳐 가는 손가락이 퍽 간지러웠다.
제가 가져가 놓곤 티슈를 뽑아 손을 박박 문지른 또라이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군.”
“뭐, 뭘.”
봄바람에 나부끼는 까만 머릿결이 뺨을 간지럽혔다. 참고로 제릴의 머리는 은색이었다.
그러니까, 저 또라이가 바로 코앞에 있다는 소리다.
숨결이 느껴질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이 소설의 흑막 ‘카르온 레페르트’가 야살스레 속삭였다.
“당장 후작가에 인사드리러 가지.”
“네?”
“5월에 식을 올리려면 일정이 빠듯하겠군.”
그야 오늘이 4월의 마지막 날이니까, 미친놈아!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된 거지?’
자신은 그냥 소개팅 자리에서 끽, 죽어 버리는 일회용 엑스트라였을 뿐인데.
“아니지, 하객은 필요 없으니 당장 주례 사제부터 구하는 게 좋을까?”
장난기가 가득한 눈이 번뜩였다.
자리에 앉자마자 칼을 휘두르지 않는 걸 보면 일단 죽음은 피한 듯한데, 문제는 저놈 속이 시커멓다는 점이었다.
‘당장의 데드 플래그만 피하면 뭐 하냐. 쟤랑 같이 있으면 목숨이 간당간당한데!’
그도 그럴 것이 원작 속 ‘카르온 레페르트’는 악명 높은 살인자였다.
수틀리면 제 가족도, 친구도 주저 없이 죽이는 미친놈.
그런 주제에 능력은 대단해서 매번 주인공들의 앞길을 가로막는 최후의 악역이 바로 그였다.
“제릴 루비안. 당신 생각은 어때?”
번뜩이는 적안이 그녀를 응시해서일까, 마지막으로 미뤄 두었던 최후의 변명이 저절로 튀어나왔다.
“저, 저 사귀는 사람 있습니다!”
“……뭐?”
물론 이어질 일을 예상했더라면 절대 내뱉지 않았을 문장이었다.
* * *
“아가씨, 편지가 또 왔는데요?”
“태워 줘! 아니야, 가져와. 내가 직접 불태워 버릴라니까!”
“아무리 그래도 레페르트 대공가의 직인이 찍힌 편지인데요…….”
제릴은 미치기 일보 직전이었다. 카르온 레페르트 대공, 그러니까 이 소설의 흑막과의 소개팅을 거부한 지도 어언 한 달째.
“이번에도 답장 안 하시면 이젠 쳐들어올 기세던데요. 그냥 선 자리 한번 다녀오세요. 대공 각하께서 성격만큼 얼굴도 미치셨다잖아요.”
그러니까 그 성격이 문제라고…….
‘제릴 루비안’은 《성녀의 칼날은 황태자를 향한다》에 등장하는 엑스트라였다.
20년도 전에 읽은 소설은 성녀가 제 쌍둥이 동생을 죽인 황제에게 복수를 다짐하면서 시작된다. 하지만 황제의 아들인 황태자와 사랑에 빠지면서 복수가 흐지부지되는 용두사미 내용이었다.
작가의 말로는, 결국 사랑이 증오를 이긴다나 뭐라나.
‘죽은 성녀 동생만 불쌍하지 뭐.’
하지만 지금 제릴에게 중요한 건 이름 모를 성녀의 쌍둥이도, 주인공들도 아니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대공 각하가 설마 아가씨를 죽이기라도 하겠어요?”
“응.”
“에이, 농담도 잘하셔라.”
농담이 아니라니까?
작품 속 흑막인 레페르트 대공은 광증을 앓고 있어서 종종 사람을 죽이곤 했다.
그리고 제릴은 그 광증 때문에 대공과의 소개팅 자리에서 끔살당할 예정이고.
‘그 사실을 깨닫고 나서 정말 까무러치는 줄 알았지.’
스물네 살의 정신 상태로 갓난아기의 몸에 빙의했을 때는 ‘육아물인가?’ 하는 기대감도 있었다.
현실은 신전 앞에 버려진 고아에, 요절이 예정된 엑스트라였지만.
어찌 되었든 간에 생존은 인간의 본능이라 하던가.
철저히 본능에 따라 소개팅 자리를 피하던 제릴은 2주 전부터 테러에 가까운 편지 세례를 받고 있었다.
‘소개팅 못 나갑니다 하면 예, 그렇군요 하고 물러나는 게 보통 아니야?’
하지만 대공은 편지로 그 이유를 꼬치꼬치 캐묻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집요하게!
“벨, 황족이 몇 살까지 결혼해야 하더라?”
“아마 스물일곱 살일 거예요.”
“레페르트 대공은 몇 살인데?”
“스물여섯 세시죠. 그러고 보니 내년까지 미혼 상태라면 황족 신분을 박탈당하시겠네요.”
망할 황법.
하지만 대공은 왜 굳이 자신을 고집하는 거지?
신분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면 아무나 골라잡아도 괜찮을 텐데.
‘혹시 그건가, 날 거부한 여자는 네가 처음이야?’
차이점이 있다면 ‘날 거부한 여자는 네가 처음이군, 죽어라.’겠지만.
입술을 삐죽인 제릴은 충성스러운 하녀인 벨이 시간순대로 정리해 놓은 편지 뭉텅이를 집었다.
레이디 루비안에게.
대공가에서 요청한 맞선을 거절했다 들었습니다. 갑작스러운 제안이 당혹스럽겠지만 내일 오후 1시, 광장 앞 카페에서 다시 한번 만남을 청합니다.
물론 안 나갔다.
그래도 그때는 제릴의 마음속에 예의라는 것이 남아 있던 시기였다. 답장을 보냈으니 말이다.
레페르트 대공 각하에게.
죄송하지만 몸이 좋지 않아 어려울 것 같습니다. 부디 좋은 레이디가 각하의 짝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하지만 다음 날 온 답신은 가관이었다.
레이디 루비안에게.
그런 사정이 있으셨군요. 하지만 레이디께서 망아지같이 거리를 쏘다닌 것을 제 충실한 집사가 목격했다 하니 변명은 집어치우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흑막 각하께서는 작디작은 인내심을 첫 편지에 다 쏟아부은 모양이었다.
‘그때부터였지, 편지 테러가 시작된 게.’
레이디 루비안에게.
며칠이 지나도록 답장이 없으니 레이디의 손가락이 부러진 게 아닐까 걱정이 되는 아침입니다…….
레이디 루비안에게…….
레이디 루비…….
레이디…….
.
.
.
<언제까지 무시할 셈이지?
날이 갈수록 격해지는 편지 속에서 존댓말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심지어 가장 최근에 온 편지에는 수신인도 적혀 있지 않았다.
살아남기는커녕, 데드 플래그를 창조하고 있는 건 아닌지 걱정되었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는다면 하루라도 더 늦게 죽으리라!
그렇게 다짐했을 무렵, 편지가 뚝 끊겼다.
그게 바로 3일 전이었다.
‘근데 왜 또 보낸 거야!’
두려움과 분노로 바들바들 떨리는 손을 벨에게 내밀었다.
“……오늘 온 편지 좀 줘 볼래?”
연푸른색 눈동자가 우울하게 가라앉았다. 햇빛을 한가득 머금은 은발까지 더해져 마치 비련의 여주인공 같은 모습이었다.
제릴이 탄내를 솔솔 풍기는 봉투를 개봉했다.
“제 성질에 못 이겨 편지를 태워 먹기라도 했나? 하긴 대공은 적 마법사니까 가능하겠구나……. 날 구워 먹지나 않으면 다행인 걸까.”
이 세계에서 마법은 세 갈래로 나뉘었다. 일반 마법, 적 마법 그리고 청 마법.
위력은 약하지만 모든 마법을 구사할 수 있는 일반 마법사들과 달리, 적과 청의 마법사는 특정한 분야에서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자들이었다.
그중 적 마법사들은 파괴 계열에 특화되어 있는데, 능력에 걸맞은 성질머리로도 유명했다.
‘그래……그 성질머리 때문에 원작에서 내가 죽었단 말이다.’
대공이 자신을 홀라당 구워 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어깨를 부르르 떤 제릴은 유려한 필체를 눈에 담았다.
걱정과는 달리 빽빽하지 않은 편지에 마음이 놓이는 것도 잠시였다.
2주간의 무시, 3일간의 공백.
그 끝에 도착한 편지에는…….
야.
인사도 뭣도 없는 담백한 한마디만 적혀 있었다.
X 됐다.
그렇게 외치는 제릴의 눈에서 얼핏 투명한 방울이 보였다.
* * *
아무리 인생이 고달파도 삶은 계속되기 마련이었다.
그런고로 제릴은 생과 사의 갈림길을 앞두고도 치료소에 출근해야 했다.
마차를 기다리며 죄 없는 저택의 잔디밭을 아수라장으로 만들고 있을 무렵, 머리 위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야, 또 꼬맹이들 치료소 가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