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쥐 백작의 키스 2권 (완결)
박쥐 백작의 키스 2권 (완결)
박쥐 백작의 키스 2권 (완결)
9.



이현은 탁자 앞에 앉아 월화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가 첫 휴가를 나간 뒤 5일 만에 보게 되는 것인데 몇 년은 떨어져 보낸 양 조바심이 났다. 자신은 월화가 없는 동안 허전하고 초조하였는데, 그녀는 어땠을지 궁금했다. 가족들에게 돌아가서 기뻤을 테지. 오랫동안 못 보았던 딸을 보아서 행복했을 테지. 이현은 곁에 월화가 없는 동안 가족들에게 둘러싸여 지낼 그녀를 상상하며 괜스레 고독감을 느꼈다. 그는 이토록 외로운데 월화에게는 언제든 돌아갈 가족의 품이 있다는 사실이 가슴을 허하게 만들었다.

“백작님.”

방에 들어온 월화가 공손하게 허리 숙여 인사했다. 낯빛이 창백하여 이현을 놀라게 했다. 살이 빠진 것인지 메이드복이 약간 헐렁해 보였다.

“집에는 잘 다녀오셨소?”

“네, 배려해 주신 덕분입니다.”

이현은 손을 들어 그녀를 불렀다.

“부인, 이리 좀 가까이 오시오.”

월화가 두 손을 앞으로 모은 채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좀 더 가까이 와 보시오.”

이현이 안타까운 표정으로 채근했다. 월화가 주춤주춤 탁자 앞으로 다가섰다. 이현은 숨결이 닿을 만큼 가깝게 상체를 들이밀었다.

“이건…….”

이현은 눈을 크게 뜨고 숨을 삼켰다. 월화의 뺨에 희미한 붉은 줄이 나 있었다.

“얼굴에 이 상처는 뭐요?”

월화는 입술을 달싹거렸으나 말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눈가에 물기가 어렸다.

“회초리를 맞은 자국이에요.”

“회초리? 아니 누가 부녀자 얼굴에 회초리 자국을 남긴단 말이오. 누가 이랬소?”

이현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서늘한 분노가 묻어 나왔다. 월화는 입술을 바들거리며 천천히 숨을 토했다.

“제 잘못이에요. 제가 종아리를 걷지 않았기 때문에.”

“그래서 뺨을 쳤단 말이오? 도대체 부인이 회초리 맞을 일이 뭐가 있소?”

“이 집에서 목욕을 했기 때문입니다.”

“목욕?”

이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월화가 점점 알 수 없는 얘기만 하고 있었다.

“부인, 자초지종을 들려주시오. 어찌 된 일인지 나도 좀 알아야겠소.”

월화는 휴가 때 시댁에서 겪었던 일을 털어놓았다. 옷을 벗고 전신욕을 했다는 이유로 매를 맞고, 첫 월급과 목걸이를 빼앗긴 기막힌 사연을 들려주었다. 이현은 조용히 듣고만 있었으나 점차 미간이 좁아지고 입술이 실룩거렸다. 결국 나지막하게 신음과 한숨을 토하는 이현이었다.

“부인, 왜 그런 남자와 살고 있는 것이오?”

“네? 무슨 말씀이신지…….”

“첩을 두고, 시부모와 작당하여 아내를 학대하고, 죽도록 일만 시키는 남자와 왜 헤어지지 않느냐는 거요.”

이현의 질문이 선뜻 이해가 되지 않는 월화였다. 월화는 이혼 청구권이 아내에게도 있는 줄 알지 못했다. 남편은 칠거지악의 죄를 가진 아내를 언제든 소박하고 쫓아낼 수 있지만, 아내는 남편이 아내의 부모를 살해하거나 장모와 간통하지 않는 한 먼저 이혼을 청구할 수 없는 것이 조선의 법이었다. 그 밖의 사유로 아내의 이혼이 허용된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백작님, 아내가 고작 그런 이유로 남편과 헤어질 수는 없잖아요? 남편이 친정 부모를 살해하거나 친정의 어머니와 사통하지 않는 한…….”

이현이 실소하며 혀를 찼다.

“부인, 그건 왕조 시대의 법이지 않소. 지금은 일본의 법령이 조선인에게도 의용(依用)되므로 아내도 얼마든지 이혼을 청구할 수 있소. 경성의 법정에서 이혼하는 부부의 반절 이상이 아내가 청구한 소송으로 된 것이오.”

“그게 정말인가요? 아내가 먼저 헤어지려고 하면 할 수가 있나요?”

“그렇소. 물론 경성의 법정이 쉽게 이혼을 허락해 주는 건 아니오. 재판관들은 남자들이고 여자 편을 쉽사리 들어주진 않소. 하지만 아내를 지속적으로 학대한 증거가 제출되면 얼마든지 이혼을 할 수 있는 게 요즘 세상이오.”

월화는 충격을 받아 멍하니 입을 벌리고 섰다. 결혼한 여자는 지아비를 하늘로 알고 모셔야 한다는 것만 알고 살았다. 아내에게도 남편에 맞서 뭔가를 요구할 수 있는 자격이 있고, 나라에서 그걸 들어준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모던 걸들이 좋아하는 신문명이란 게 바로 이런 것이구나 싶었다.

“세상 변한 것이 이혼뿐이겠소. 구라파에서는 남자와 여자는 인격적으로 평등하다는 생각이 널리 퍼지고 있소. 멀리 볼 것도 없소. 내지만 해도 축첩이 거의 사라졌고, 요즘은 남자에게도 정조의 의무가 있다는 주장이 나오는 판이오.”

월화는 입을 가리고 웃었다.

“남자에게 정조를 지킬 의무가 있다고요? 듣던 중 가장 해괴한 소리네요.”

과거 조선에서 간통한 여자는 그 자리에서 죽여도 죄가 되지 않았지만 남자는 상대방이 유부녀가 아니라면 얼마든지 사통할 수 있었고, 첩을 둘 수도 있었다. 식민지 조선에서도 여성의 간통은 징역형에 처해지는 중범죄였지만, 남자의 축첩이나 간통은 이혼 사유로도 인정되지 않았다. 오히려 남자가 많은 여성을 거느리는 것은 높은 지위와 재력을 상징하는 자랑거리였다. 하지만 내지에서는 히라쓰카 라이초, 조선에서는 나혜석과 같은 걸출한 여성들이 나타나 여성만을 옥죄어 온 정조 관념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아직 법이 개정되지는 않았지만 세상은 이미 남녀평등의 미래상을 만들어 가는 중이었다.

“남녀 정조공수론(貞操共守論)이라고 요즘 신여성들이 많이 떠들고 있는 것이오. 생각해 보시오. 부군께서 첩실과 잠자리를 하면서 정조를 지키지 않는데, 부인이 밖에서 목욕했다고 회초리로 때리는 건 공평하지가 않소.”

“백작님 말씀을 듣고 보니 제 가슴속에 원통한 마음이 쌓여 있는 게 당연지사인 듯합니다. 그런데 백작님은 집 안에만 계시면서 어찌 그런 일들을 훤히 알고 계세요?”

이현이 탁자 아래에서 활자가 빼곡한 인쇄물을 꺼내 보여주었다. 종이에선 잉크 냄새가 심하게 났다.

“신문이오. 나는 매일같이 이걸 읽는다오. 신문은 정말 놀라운 발명품이오. 세상 돌아가는 소식을 앉아서도 다 알 수 있으니까. 나는 신문을 통해서 요즘 지식인들이 결혼이나 성도덕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소상히 알게 됐소.”

월화는 문득 궁금증이 생겨났다. 신학문을 배운 사람들은 월화의 결혼 생활을 어떻게 봐줄까? 그리고 이현 백작은 월화를 어떤 눈으로 바라보고 있을까? 무지몽매하고 불운한 구여성이라고 여기겠지. 월화는 우울한 기분이 들었다.

“백작님은 저희 부부를 어떻게 생각하세요?”

“부인, 그게 무슨 뜻이오.”

월화는 이현의 눈을 똑바로 보았다. 지금까지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당돌한 질문이었다.

“제가 한 결혼은 합당한 것인가요?”

“그건 어떤 태도를 갖느냐에 달렸소.”

“저는 지금의 서방과 시부모를 계속 모셔야 하는 걸까요?”

“…….”

이현은 월화의 질문에 압박감을 느꼈다. 자신의 대답이 진월화의 인생과 결혼에 대한 엄중한 지침이 될 수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구라파에 있는 서전(瑞典)이라는 나라에 엘렌 케이라는 여성이 있소. 케이가 말하기를 혼인은 반드시 남녀가 연애를 통해서 사랑을 기반으로 해야만 행복해진다고 하였소. 부모들이 주혼자가 되어 어린 나이에 자식들을 혼인시키면 영육이 일치하지 않는 결합이므로 결혼이 끔찍한 감옥이 되는 것이오.”

월화는 눈자위와 콧등이 빨개지고 서서히 눈물이 차올랐다. 가슴속에 켜켜이 쌓여 있는 울분이 이현의 한마디에 용암처럼 끓어올랐다.

“그러면…… 사랑이 없는 결혼 생활은…… 끝내도 좋다는 뜻인가요.”

이현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가정은 부부의 애정이 바탕이 되어야 하는 것이오. 아내가 시부모와 남편의 학대를 견디며 사는 것은 절개도 아니고 효도도 아니오. 그건 그냥 생지옥이잖소.”

월화는 드디어 왈칵 눈물을 쏟았다. 구슬 같은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선 채로 눈물만 흘리는 월화를 어쩌지 못해 이현은 안타까운 얼굴로 바라만 보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와락 끌어안고 뺨을 적신 눈물을 핥아 주고 싶다. 하지만 월화는 엄연히 유부녀였고 이현의 연애 상대도 아니었다.

“저도…… 연애를 해보고 싶어요. 저도…… 사랑을 느껴 보고 싶어요.”

이현은 심장이 조여들었다. 고통스러운 삶 속에서 사랑을 갈구하는 여인을 지켜보기만 한다는 것은 괴로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참아야 했다. 아직 남아 있는 인간의 욕정을. 그리고 움찔거리는 짐승의 본성을.

“하지만…… 힘들겠지요. 제 처지에 자유연애라니…….”

“부군과 이혼할 생각은 없소?”

월화는 두 손으로 뺨에 남은 눈물 자국을 닦아내며 고개를 천천히 가로저었다.

“백작님 말씀을 듣고 마음이 동하긴 했지만…… 법정에 설 자신이 없습니다. 제 딸이 손가락질받는 것도 싫고요.”

이혼이 급증하는 세태라고 해도 이혼녀는 살아가기 힘든 세상이었다. 이혼하고 친정에 돌아갔다가 죽어도 시댁 귀신이 되라며 쫓겨나는 경우도 있었고, 사회적으로는 인륜을 저버린 탕녀 취급을 받았다. 이현은 더 이상 월화의 슬픈 눈빛을 응시하기 어려워 시선을 바닥에 두었다. 부인…… 난 당신을……. 이현의 입안에서 맴돌던 말은 엉뚱한 말이 되어 튀어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