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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종말도 SNS 중독은 못 막는다 2
지은이｜카호야스
펴낸곳｜이클립스
투고 및 문의 | eclipse@sybook.kr
ⓒ카호야스, 2025
이 전자책은 대한민국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저작물입니다. 출판권자로부터 서면에 의한 허락 없이 이 책의 일부나 전체를 어떠한 형태로도 재가공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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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같이 자도 괜찮아?”
건일은 피로한 표정으로 주한을 바라보았다. 검은 눈에 잠시 의아함이 깃들었다. 안광 없는 눈은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들을 때마다 저런 눈빛을 보내곤 했다.
꼭 외계인을 보는 것 같은 표정에 주한이 어색하게 웃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저런 표정까지 지을 것까지 있나 싶다. 딱 붙어서 뭘 하자고 한 것도 아닌데.
“그냥, 밤에 할 말이 있는데 회사보다는 다른 곳에서 말하는 게 좋을 거 같다고 생각해서.”
“회사랑 집은 층만 다른 것 아닙니까.”
“아무리 그래도 회사에서 이야기하는 거랑 집에서 이야기하는 건 달라. 라면 가지고 갈 테니까 들여보내 주면 안 될까?”
“알겠습니다.”
내내 경계하는 표정을 짓고 있던 건일은 라면이라는 말에 간단히 수긍했다. 주한은 이번에는 정말 황당하단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방금까지는 갑자기 왜 같이 자려고 하냐는 듯이 이상한 사람처럼 쳐다봐 놓고.
“사람보다는 라면이 반가운 모양이네.”
“아무래도 요즘 세상은 그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
그는 아닌 것 같으면서도 먹는 것에 꽤 많이 집착하는 편이었다. 아무래도 부랑 생활을 하다 보면 식사 같은 게 제대로 챙겨지지 않는 경우가 많으니까 이해는 한다.
그러나 실제 식사량을 보면 그렇게까지 많이 먹지 않았다. 그냥 딱 그 나이 평균 정도로 먹고, 음식이 더 남아 있어도 욕심을 부린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살기 위해서는 먹어야 하고, 그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는 태도 정도로 보였다.
“그런데 하실 말이 있다면 그냥 밤에 방문해도 되냐고 묻는 게 맞지 않습니까. 갑자기 같이 자자고 하니까 의심했습니다.”
“무슨 의심?”
“저와 성관계를 하고 싶으신 건가 하고.”
물을 마시려던 주한이 그대로 액체가 목에 걸려 콜록거렸다. 표정 하나 안 변하고 말하는데, 건일은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알고 있기는 한 걸까.
그는 오히려 이렇게 반응하는 주한이 이상하다는 듯이 눈을 가늘게 뜨고 있었다. 그런 식으로 행동하면 오히려 더 수상함만 커진다는 것처럼.
“되게 자연스럽게 별것도 아닌 듯이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네…….”
“이 이야기가 어디 숨어서 할 이야기까지는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만. 만약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했다면 그건 제 사회성 문제지만 저희 둘만 있으니 상관없지 않을까요.”
건일은 이상한 주장을 설득력 있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그런가, 하고 넘어갈 뻔했던 주한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애초에 사고가 그쪽으로 흐르는 것이 문제가 아니냐는 질문을 하기에 건일은 너무 유순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남들이 보면 저게 어딜 봐서 순한 표정이라고 하겠지만, 주한에겐 그렇게 보였다.
“그런 의도는 전혀 없었지만 애초에 내가 그걸 원한다고 했으면 어떻게 반응하려고 아무렇지 않게 그런 대답을 한 거야…….”
“만약 진심으로 원하시는 거라면 상황을 고려해서 받아들일 수 있는 선까지 수용했을 거 같습니다. 혹시 성향자라고 불리는 식의 성적 취향이 있습니까? 아니면 남성과는 하기 싫다거나.”
“아니, 그게 아니라.”
건일은 건일대로 의아했다.
보통 사람들이 오늘 밤 함께 보내도 되겠냐고 질문하면 열 중 여덟은 그런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그것에는 굳이 사적인 감정 같은 게 존재하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건일은 그런 점에 다소 우둔한 편이었다. 그래서 옛 연인에게 몇 번 혼이 난 적도 있었다. 너는 내가 그렇게 신호를 주었는데도 못 알아듣고 하려고 할 때마다 당황하냐고.
물론 그와의 관계가 싫었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다만 섹스를 하기 전에 제 딴에는 준비를 해야 하는데, 그게 안 되어서 당황했을 뿐이다.
“이상한 취향도 없고 남자랑 하는 거에 거부감이 있는 것도 아니고 나는 지극히 정상적인……. 아니, 그런데 내가 왜 건일 씨한테 이걸 설명하고 있지.”
“제가 물어봤기 때문에요.”
“……그래, 건일 씨가 맞아.”
이쯤 되니 주한은 어딘가 자포자기한 표정이었다. 그제야 건일은 자신이 또 뭔가 실수했음을 어렴풋이 깨달았다. 말을 하면 그 문맥 그대로 파악하고 반응하는 행동을 고쳐야 하는데 마음처럼 쉽게 되지 않았다.
눈을 한 번 굴린 그가 괜히 손을 꼼지락거렸다. 진심으로 그는 주한이 그런 식으로 성적인 관계를 원한다면 한두 번 정도는 응해 줄 생각이 있었다. 그 전에 합의해야 할 사항들이 있긴 하겠지만.
일하면서 볼꼴 못 볼 꼴 다 봤더니, 성욕에 미쳐서 눈 뒤집히는 이들도 한둘이 아니었다.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아야 마땅한 것들 말이다. 그런 놈들로 전락하느니 그냥 상호 적당히 합의하여서 관계를 맺는 게 건전하지 않나.
“건일 씨 이번엔 내가 물어봐도 돼?”
“예.”
“건일 씨는 그럼 나랑 그런 걸 하고 싶다고 생각한 적 있나? 너무 자연스럽게 그 말이 나오길래 물어보는 거야. 건일 씨한테 흑심이 있는 건 아니고.”
주한은 이제 얼추 건일을 다루는 법을 배운 듯했다. 그가 의심할 수도 있을 법한 말들을 선수 쳐서 설명한 뒤에 답을 기다리는 식이었다.
그 질문은 건일에게 고민할 여지도 없었다.
“하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없지만 성욕이 들 때 주한 씨 얼굴이 떠오른 적은 있습니다. 미남이시니까요.”
“……솔직한 대답 고마워.”
“기분 나쁘셨습니까? 몸을 섞는 상상을 하거나 음란한 대상으로 전락하진 않았고, 그냥 얼굴만 조금 떠올렸는데요.”
만약 기분이 나빴다면 사과할 생각이었다. 한동안 안 느껴지던 성욕이 불현듯 든 순간은 이곳에서 지내는 상황이 점점 익숙해진 뒤였다. 그러니까 따뜻한 잠자리, 자고 일어나도 감염자가 주변에 없는 지극히 조용한 아파트의 풍경이 익숙해졌을 때.
인간의 기본 욕구에 성욕이 있다고 하는 놈들은 다 멍청이들이다. 생명이 정말 위험하다고 느껴지게 되는 순간부터는 그 짓이 떠오르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떠오를 때는 자위의 대상이 전 애인이었는데 이번엔 주한이었다.
‘아마 갑자기 거리가 가까워졌을 때였지.’
금방이라도 입술이 닿을 것처럼 가까워졌던 그날 밤이었다. 자신에게 완전히 거세되었다고 생각했었던 성욕이 갑자기 치고 올라왔다.
간지럼을 태우는 것처럼 발끝부터 기어오르는 그 감각을 외면하기가 어려워서, 결국 그날 밤은 수음을 했다. 단순히 그날의 거리, 그리고 미묘한 표정을 짓고 있는 주한의 얼굴을 떠올리면서.
하늘에 맹세코 그와 몸을 섞는다는 생각은 한 적이 없다. 그러나 수음할 때 떠올린 것은 맞으니까.
오히려 자신이 그때 떠올렸기 때문에 주한과 몸을 섞게 된다면 거부감 없이, 조금은 기껍게 받아들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것일지도 몰랐다. 그는 결국 자신의 감정을 이해하고 결론을 내렸다.
“기분이 나쁜 건 아냐. 그냥 좀 놀란 건 사실인데……. 오히려 그렇게 생각해 줘서 좋다고 해야 하나.”
주한이 말을 뱉고 잠시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생각해 줘서 고맙다는 말은 영 이상하지 않나. 방금까지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없다고 우겨댔는데, 방금 대답으로 진심으로 건일과 몸을 섞는 상상 같은 걸 한 사람처럼 되게 생겼다.
하지만 건일은 그 말에 별로 의미를 두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표정이 다시 무심하게 돌아갔다.
“그럼 오늘은 그런 관계 없이 그냥 대화만 하는 거라고 생각하고 기다리겠습니다. 아니면 같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건가요.”
“같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거로.”
“예.”
* * *
오늘은 라면에다가 즉석밥까지 있었다. 불과 한 달 전만 하더라도 이렇게 식사를 한다고 하면 그때의 건일이 믿지 않을 정도로 호화로운 밥상이었다.
거기다가 어디서 구해 왔는지 모를 김치까지 있으니. 이 순간은 한 끼에 몇십씩 한다고 하던 고깃집도 부럽지 않았다. 어차피 그 고깃집 사장도 죽었거나 감염자가 되었을 테니까.
“많이 있으니까 그냥 많이 먹어. 오늘은 굳이 말 안 해도 건일 씨 거 두 개 끓였어.”
“감사합니다.”
각각 두 봉지. 남자 둘이 앉아서 라면 5개들이는 두 끼 식사도 되지 않았다. 혹시 내일은 밥을 구하지 못할까 봐, 라면 하나를 이틀 동안 나누어서 부수어 먹던 시절을 떠올리던 건일이 말없이 식사를 시작했다.
자신이 이렇게 한 끼 한 끼에 신경을 쓰는 사람이 아니었는데 웃긴 일이었다. 강산이 변하는 것에는 10년이 걸린다지만 사람의 삶이 변하기에는 4년만 있으면 됐다.
자신이 직접 담근 술이라면서 매실 향이 가득 나는 담금주를 꺼낸 주한이 건일의 잔을 채워 주었다.
술은 별로 자신이 없었지만 그는 잠자코 잔을 받았다. 눈앞의 남자는 자신이 마시다가 내용물을 남겨도 별로 책망할 것 같지 않았다.
“술까지 있어야 하는 거라면 하실 말씀이 좀 무거운 내용입니까. 술 없이는 할 수 없는 말.”
어두운 과거사 같은 걸 이야기하면 자신이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할지 머리로 생각하고 있는데, 주한이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 순간 건일은 그런 생각을 할 타이밍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의 목소리가 듣기 좋다고 느꼈다. 참 뜬금없는 사고였다.
스스로의 난데없음을 속으로 비웃고 있는데, 주한의 담백한 말이 이어졌다.
“정확히는 주한 씨가 술 없이는 못 들을 이야기인 거지. 지금까지 삭제된 게시글을 보면서 어떤 기분이 들었어?”
건일이 또한 담백하게 대꾸했다.
“정말 나침반은 희망만을 이야기하고 싶어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희망만을 이야기한다는 점이 오히려 사람을 찜찜하게 만들었다. 오히려 절망을 거세하는 방법으로, 그들에게 억지 희망을 주입하고 있다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었다.
이 상황이 절망적이라는 글이 올라오면 나침반은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것처럼 그 글을 지워 버렸다. 이런 글은 규정에 어긋나며, 사람들이 보아서는 안 된다는 듯이.
그리고 그것을 삭제 예정에 모아 두고 하루 이상이 지나면 아예 영구적으로 삭제했다. 건일이 맡은 일은 자살한 이들의 게시글을 백업하는 것 외에도, 이런 삭제 게시글들을 따로 모아 두는 것도 있었다.
“희망만을 이야기하고 싶어 한다고?”
“예, 그러니까 사람들이 스토리언 내에서 절망을 이야기하는 걸 허용하지 않는 기분이었습니다. 생각을 통제할 수는 없지만,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분위기를 조성하려는 것처럼요.”
“눈앞에 감염자들이 저렇게 버젓이 돌아다니고 있는데 그게 가능할까?”
주한은 정말 몰라서 질문하는 게 아니었다. 그는 흥미로운 표정으로 건일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빛에서 미묘하게 그를 기특해하는 것 같은 기색도 보였다.
정답이 이미 정해져 있는 질문에 대답하는 건 조금 어렵다. 뭐라고 이야기하려던 건일이 흘끔 주한의 눈치를 보았다.
“혹시 이거 잘못 대답하면 무슨 문제가 발생하거나 하는 건 아닙니까.”
“전혀. 애초에 맞추라고 낸 문제 같은 게 아니고, 그냥 개인적인 생각이 듣고 싶은 거야. 지금까지 나는 이런 거에 대해서 들을 일이 없었으니까.”
부드럽게 웃는 얼굴이 언뜻 외롭게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주한은 지금까지 일하는 동안 누군가와 대화할 일이 한 번도 없었던 것일까.
스토리언을 관리하고 이 아파트에서 시간을 보내면서 그냥 고독하게, 간혹 생존 키트를 배포하는 정도로 만족하며 모든 시간을 견뎠던 걸까.
수많은 의문이 건일을 괴롭혔다. 마지막으로 DM을 보내기 전에 01486에게는 만 개가 넘는 게시글이 올라와 있었다.
[86525 (1)]: 01486님은진짜하루종일 슨스하시내여 진짜 솔직히 싱기할 정도임
― [01486 (1)]: 시간이 많아서요 ㅎㅎ 솔직히 이런 곳에서 sns 말고 할 게 뭐 있어요
― [86525 (1)]: 것도 글킨 한데 ㅋㅋ그래도 충전가튼거 하는시간도 잇고 하루종일 풀충 가능한 셸터에 잇으싱가보네 셸터관리자는 되시는듯
― [01486 (1)]:개인정보는 노코멘트할게용 ㅎ
[98956 (4)]:01486님 여친잇으세요??
― [01486 (1)]:아뇽
― [98956 (4)]:손 보니 잘생기셧을거 가튼데 셀카는 안올리시구요??
― [01486 (1)]:네ㅎ
― [84441 (2)]:생존자 키트 받을 때 봣는데 진짜 잘생기셨음 생존키트 받은 거 내 스토리에 인증 잇음
‘일도 종일 하고 있는데 그런 댓글에도 하나하나 다 반응하는 거 보고 신기하다고 생각했는데.’
단순히 계산해도 하루에 10개가 넘는 게시글을 올리면서 SNS 생활을 했다는 결론이 나온다. 자신이 이곳에 합류한 이후에도 01486 계정에는 곧잘 생존자를 찾는 글 외에도 잡다한 잡담이 올라가곤 했다.
대개 오늘 날씨가 어떻다거나, 감염자의 근황이 어떻고 식사는 무얼 했는지 등의 시시콜콜한 SNS. 그런 잡담 게시글에 달린 댓글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답글을 달아 주었다. 그는 꼭 사람과의 대화가 정말 많이 고픈 인간처럼 보였다.
건일은 정말 가끔가다가 우연히 그의 계정을 발견한 사람들이 대화를 시도해도 거북함을 느껴서 상대를 차단해 버리곤 했다.
누군가 자신의 생활을 지켜보고 있다는 게 좀 그랬다. 공개된 SNS의 기능이 무엇인지 완전히 잊어버린 사람이 할 법한 생각이었다.
“…….”
“왜 그렇게 빤히 보고 있어? 내가 그렇게 어려운 질문을 했나. 이건 잘못 이야기한다고 해도 아무런 불이익도 없다니까. 놀릴까 봐 걱정되는 거라면 안 놀리고 안 웃기로 약속할게.”
“아뇨, 그냥 갑자기 저의 SNS 생활이 별로 올바르진 않았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정말 갑자기?”
스토리언 이야기를 하고 있기는 했지만 그게 개인의 SNS 습관 같은 것들을 성찰하라는 소리는 아니었는데.
이 남자의 사고방식을 따라가려고 해도 쉽게 따라갈 수가 없다. 아마 상대도 자신을 보면서 비슷한 생각을 하는 것 같기는 했다. 매번 자신이 어떤 질문을 하면 그런 건 생각해 본 적도 없다는 듯이 곤란한 얼굴을 하곤 했으니까.
하지만 이번에는 희망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았을 때, 자신만의 주관이 있긴 할 것이다.
〈나침반은 인위적으로 희망을 심기 위해 만들어진 체제야.〉
그때 자신의 말을 들은 건일은 놀라면서 한편으론 뭔가 이해한 듯했다. 미묘한 표정으로 주한을 바라보던 건일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한 거라고 생각해서 자리를 비켜 주었었다.
“아직 좀 고민할 시간이 필요한 거야?”
“아뇨, 그냥 질문에 대답하면 되는 거 아닙니까. 거기에는 고민이 딱히 필요 없습니다. 그냥…… 문득 주한 씨를 보니까, 주한 씨 생각으로 머리가 가득 차서요.”
“……아무런 인지 없이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도 재주 같긴 한데.”
건일이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한 주한이 일단 알겠다는 듯이 웃어 보였다. 그는 정말 머리가 주한으로 가득해져서 그렇다고 대답했을 뿐이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데.
눈을 깜박이던 건일이 간신히 다시 주한의 질문을 떠올렸다.
“이제야 대답한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지만 저는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4년이라는 시간 동안 익숙해졌거든요.”
저렇게 바깥에서 감염자들이 걸어 다니는 상황도. 그들 사이를 돌아다니면서 하루를 영위하는 나날도. 그리고 셸터들이 서서히 무너지고 사람들이 어쩔 수 없이 죽어 나가는 일에도 익숙해지고 말았다.
과거에 평화로웠던 시간은 그저 지나간 시간이 되고 만 거다. 사람들은 생각보다 빠르게 망해 버린 세계에 길들여졌다. 여기서 뭔가 개선될 수 없다고 무심결에 체념해 버린 것일지도 몰랐다.
여기까지 가면 편해진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이 삶에 적응하고 편안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 주면 해결되죠. 아, 다들 이렇게 살고 있구나. 라고 생각하게 되니까요.”
전화도, 문자도 되지 않는 세상에서 유일하게 통하는 SNS에서 모두가 그렇게 주장한다면 사람은 믿을 수밖에 없다.
의심은 할 수 있다. 이상하게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뿐이다. 그 이상함을 증명할 수 있는 이들은 없으니까.
감염으로 사람이 죽어 나가는 건 이제 일상이다. 사람과 사람의 다툼으로 죽는 것 또한 인간이 존재한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나침반은 최소한 그렇게 판단한 것 같다. 소위 말하는 ‘규정’이 그랬다.
“그래서 이 상황에 절망하고 비관한 이들이 목숨을 끊는 글을 남겼을 때, 그것을 삭제한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
주한은 여전히 웃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건일은 그의 눈이 미묘하게 차가워졌음을 알 수 있었다. 이제 저 얼굴을 보면 알 수 있다. 그가 얼추 정답에 접근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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