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ction00002.html
세상을 치료할 약사 허신 3권
구호선







Section00003.html
세상을 치료할 약사 허신 3권
지은이/ 구호선
발행인/ 박성인
책임편집/ 편집부
펴낸 곳/ (주) 삼양씨앤씨 - 드림북스
주소/ 서울시 강북구 도봉로 180, 광희빌딩 4층
대표전화/ 02-980-2116
블로그/ blog.naver.com/dreambookss
신고번호/ 제2017-000030호 신고일자/ 2017년 12월 19일
등록번호/ 831-88-01041 등록일자/ 2017년 12월 20일
ISBN 979-11-6959-090-7 (05810)
(주) 삼양씨앤씨 - 드림북스의 서면 허락없이는 어떠한 형태나 수단으로도 이 책의 내용을 이용하지 못합니다.
Section00004.html
목차
다시 찾아온 기회
사탕은 하나씩
전화 테러
곰팡이 박멸
거래 (1)
Section00008.html
다시 찾아온 기회
“아무리 요새 카테터를 많이 사용하면서 종종 보고되는 병이라곤 해도, 소아 폐 색전증은 되게 드문데 말이죠. 우리 병원에도 그 일 있고서 처음 아닌가요?”
“…맞아.”
고예린의 말에 최준수는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였다.
폐 색전증은 소아에게서 드물게 나타나는 증세. 실제로 몇 년 전 사고 이후로 한국대병원에서 처음 나온 환자였다.
당연히 의도한 건 아니겠지만, 굉장히 얄궂은 타이밍이었다.
허신이 물었다.
“…이거 노약키 자연 치유랑 관련이 있을까요?”
“글쎄. 의국에서 검사하고 보호자랑 얘기해 보지 않을까? 마침 혈관외과 교수님은 또 보호자랑 말도 잘 통하시니까 말이야.”
비록 최준수는 얼이 빠진 상태였지만 묻는 족족 대답은 잘해 주고 있었다.
언젠가 한 번은 각오한 일이라서? 아니면 그냥 아직 현실감이 없어서일까.
교수나 환자와 직접 대면을 하고 나서야 조금 실감이 날 것만 같았다.
띠링―!
그 생각을 하자마자 마침 혈관외과 교수 쪽에서 연락이 왔다.
“타이밍도 좋으시지.”
“혈관외과 콜이에요? 뭐라는데요?”
“…일해달라는 콜이지.”
대충 소아에게서 원인 불명의 VTE PE(정맥혈전색전증 폐 색전증)가 발병했는데, 최준수가 소아 조제 파트이기도 하고 외래에도 오래 있었으니 ACS를 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그리고 교수는 약국에서 올린 노약키 관련 메모를 참고해 보호자를 추궁해 보았지만, 아무래도 입을 열지 않는다는 말까지 덧붙였다.
[병원 거부감이 생각보다 심해 보였네. 안 통하던데?]
모든 상황을 설명해 주는 짧은 메시지였다.
덕분에 복약 상담할 때 대체 무슨 치료를 시도했던 건지 제대로 캐보라는 퀘스트까지 받았다. 그때 그 부모의 성질머리를 떠올리면 명백한 하드 난이도였다.
“…망할.”
최준수의 머리가 급속도로 지끈거렸다. 소독제로 건조해진 손가락이 차갑게 식었다.
고예린이 그의 창백해진 안색을 살피며 걱정했다.
“괜찮으세요, 최 팀장님?”
“아니, 별로 안 괜찮아.”
“이거 다른 당직 선생님한테 부탁해도 돼요. 무리하실 필요 없어요. 소아과 담당하는 약사가 팀장님만 있는 것도 아니고, ACS 파트 담당하는 다른 후배들한테 부탁하면….”
“…….”
최준수는 말없이 신경질적으로 입술을 씹었다.
사실 그도 어지간한 다른 업무라면 그냥 무시하고 싶었다.
최준수는 트라우마를 굳이 맞서 싸우는 타입은 아니었다.
오히려 자기에겐 어울리지 않는 일이라며 그냥 회피하는 스타일이었지.
허신에게 오지랖 부리지 말라면서 약사의 역할을 제한하는 것도 다 그런 성격에서 나온 결과였다.
그래서 최준수도 다른 일이었다면 마음 편히 고예린이나 주호열에게 넘겼을 거다.
환자가 과거 사건과 이렇게까지 똑같지만 않았어도 말이다.
“…혈관외과 교수님이 완전 콕 집어 지목하셨는데.”
게다가 혈관외과에서 특별히 최준수에게 부탁한 환자다.
ACS는 업무 담당이 따로 있을 정도로 골치 아프고 예민한 작업이었다.
과거에도 약 몇 알 잘못 복용해서 사망 사고가 일어나지 않았는가.
그만큼 항응고제는 고주의를 요하는 약품이었다.
소아의 경우 성인 ACS 복용과는 달리 역학 연구가 많지 않아서 이렇다 할 정해진 복용량이 없고, 면역 수치가 성인과는 확연히 달라서 특히 용량에 주의해야 했다.
때문에 임상을 계속해서 모니터링하며 수정하고 또 수정이 필수인 만큼, 소아 조제에 능숙하며 ACS에 지식이 있는 경력자가 담당해야만 했다.
두 업무 파트가 모두 출중한 약사.
그게 바로 최준수였다.
“그래도 교수님도 팀장님이 안 된다 그러면 이해해 주실 겁니다.”
“…그렇기야 하겠지. 병원에서 약사를 존중해 주시는 몇 안 되는 의사들 중 한 분이시니까.”
하지만 최준수는 선뜻 안 한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속죄를 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되자 쉽게 포기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너무 큰 죄책감과 후회를 남긴 사고였던 만큼, 최준수는 이번엔 정말 제 손으로 아이를 살리고 싶었다.
절박하고 간절하도록 매달려보고 싶었다.
이번엔 반드시 살려보겠다고. 내가 조제한 약으로 반드시 치료를 해내보이겠다고.
하지만 그러다가 또 같은 실수를 반복하게 될까봐 두려움이 앞섰다.
이번에도 강우가 죽는다면? 이번에도 강우의 뱃속에서 물 같은 피가 팍― 터져 버린다면?
이런 생각을 하는 시점에서 이미 약사 실격이라는 걸 알고 있지만 무서운 건 어쩔 수 없었다.
자신이 환자를 맡겠다고 하는 건 더 이상 책임이 아니라 욕심처럼 느껴졌다.
그만큼 무서웠다.
“…내가 할 수 있을까.”
최준수가 두 주먹을 꽉 쥐며 눈을 감았다.
구두를 탁탁 과격하게 털어보아도 이렇다 할 결심이 서질 않았다.
차라리 누가 대신 결정을 내려줬으면.
마음속으론 수백 번 수천 번 총알을 장전했는데, 방아쇠를 당기기가 힘들었다.
그렇게 창백한 침묵이 영원히 이어질 것만 같던 그때, 허신이 갑자기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최준수 팀장님.”
“…갑자기 뭐야?”
“부탁이 있어서요. 팀장님이 강우 ACS 자문 상담 진행할 때 저도 참가해도 될까요?”
“뭐?”
최준수가 고막을 의심했다.
잘못 들은 건가 싶었지만, 저 뻔뻔한 목소리와 철면피는 지옥에서도 잘못 들을 만한 게 아니었다.
그리고 그건 정답이었다.
“저도 ACS 팔로우 업에 참가해도 되냐고 물었습니다. 실습생은 함부로 참가할 수 없을까요?”
“…아니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지 않나? 대체 내가 한다는 전제는 언제부터 깔려 있던 거야? 나는 아직 강우 와파린 복용 상담한다고 말 안 한 것 같은데. 허신 실습생 눈치가 그렇게 없었나?”
지금 완전 심란하게 고민하던 거 안 보였나?
누가 봐도 약사의 기로에 서서 심각하게 고민하던 찰나 아니었어?
최준수가 당황한 나머지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야 최준수 팀장님이 당연히 하실 거라고 생각해서요. 안 하실 건가요?”
순수한 건지, 영악한 건지.
지금 허신은 최준수의 두려움을 읽고 등을 떠밀어주고 있었다.
자존심까지 툭툭 건드리면서, ‘엥, 당연히 하는 거 아니었어?’라는 가벼운 표정까지 지으면서 말이다.
재수는 없었는데, 이상하게 마음이 놓이는 기묘한 기분이었다.
“그렇게 무서우십니까?”
“뭐? 그걸 지금 말이라고…!”
“최준수 팀장님은 어제 약사는 죽은 사람한테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하셨죠. 그래서 더 후회되고 무섭다고요. 또 그런 무책임한 순간이 찾아올까봐.”
허신이 최준수를 꿰뚫어보듯 응시했다.
“근데 그거 아십니까? 의사나 간호사도 죽은 사람에겐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그들도 20분 30분 CPR이나 심장 마사지를 시도해 보는 게 전부지, 관 뚜껑 열어서 시체한테 할 방법은 없습니다.”
“…하고 싶은 말이 뭐야.”
“그냥 모두 마찬가지란 얘깁니다.”
“…….”
“시프로플록사신 주사액을 미리 준비해놨었던 김수지 간호사님은 약물 사고로 힘줄 파열 났었던 환자를 계속해서 케어 중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파킨슨 환자한테 맥페란을 투여하려고 했던 신경과 전공의도 어제는 제대로 돔페리돈을 투여했고요.”
허신은 김수지가 보충 청구한 주사액들과 신경과 전공의가 처방한 돔페리돈 팝업을 손가락질 하며 말했다.
“병원에서 의료 사고는 어떤 식으로 일어날지 아무도 모릅니다. 결국엔 사람이 하는 일이니까요. 그저 다음엔 이런 일이 없도록 죽을 둥 살 둥 노력하고 또 노력할 뿐이죠. 그들처럼, 그리고 최준수 팀장님처럼.”
어떤 병실의 환자는 기나긴 항암과 싸워 결국 오늘 퇴원했을 거고, 그 옆 병실의 환자는 아침에 10시간이 넘는 대수술을 했을 것이다.
그리고 또 그 옆 호스피스 건물의 할머니 환자는 오늘 검은 상복을 입은 자식들을 봤을 테고.
바로 한 시간 전 어느 수술실에서는 환자를 살리지 못하고 테이블 데스를 봤을 의사도 있었고, 김수지나 최준수처럼 약물 사고를 냈을 보조인도 있었다.
의료진이든 의료진이 아니든.
저마다의 인생이 끝나고 이어지는 병원에서, 약사들 또한 저마다의 성과와 후회가 있었다.
“그냥 각자 저마다의 과거를 이고 지고서 더 나은 삶을 위해 애쓰는 거죠. 그런데 거기에 너무 오랫동안 얽매이셔서 다른 생명을 구하지 못한다면, 그거야말로 최준수 팀장님이 무서워하실 일이 아닙니까? 사람을 살리고 싶어서 계속 약국에 있는 거라면서요.”
허신이 최준수의 말을 그대로 인용하며 말했다.
당근보단 채찍에 가까운 말투.
그러나 허신의 분위기는 부드럽고 따뜻했다.
최준수는 과거의 책임을 지기 위해 움츠러들면서도 자신의 하얀 가운과 명찰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모순적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사실 환자를 살리려는 약사라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렇게 한 번의 사고로 포기하고 싶은 마음보단, 더 나은 약으로 더 나은 치료를 해 주고 싶은 마음이 컸을 테니까.
허신은 바로 그 마음을 꿰뚫어 보고 등을 떠밀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