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우 치던 밤에
폭풍우 치던 밤에
폭풍우 치던 밤에 [3권]

지은이 뽕시꽁시
발행일 2025년 5월 17일

펴낸곳 (주) 테라핀
홈페이지 http://www.copinnovel.com
전자우편 easycontents@terapinstudios.co.kr
등록번호 제 25100-2019-000007호

ⓒ 뽕시꽁시,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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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가 3,000원
ISBN 979-11-7314-855-2 [05810]
폭풍우 치던 밤에
21.
의아해하며 고개를 들자 뜻밖에도 최정근이 서 있었다.
“어, 안녕하세요. 변호사님.”
“여기서 다 보네요?”
“그러게요.”
반갑게 인사를 건네는 최정근에게 연수는 마주 인사했다.
“이 동네까지 어쩐 일이세요?”
그녀가 사는 곳하고 한참 떨어진 곳이라서 물어보는 듯했다.
“동네 서점이 있긴 한데, 제가 읽고 싶은 책이 안 들어와서요.”
최정근은 고개를 끄덕였다. 대화가 끊기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더는 할 말이 없던 연수는 ‘그럼.’ 하며 자리를 벗어나려는데 최정근이 덧붙였다.
“바쁘신 거 아니면 차라도 한잔하죠.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커피요?”
“근처에 커피 맛 괜찮은 곳이 있거든요.”
“…….”
“안 됩니까?”
최정근의 뜻밖의 제안에 연수는 의아했다. 2주에 한 번씩 집에서 만나긴 하지만 밖에서 만난 적은 처음이라 얼떨떨했다. 무엇보다 늘 업무적으로 대하던 그가 적극적으로 나오자 당황스럽기도 했다.
“시간 오래 안 빼앗을 테니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읽을 책도 다 골랐고, 카페에서 차 한 잔 시킨 뒤 고른 책을 읽을 예정이었던 연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누구는 다른 여자와 맞선 보는데 저만 가만히 있을 이유가 없었다.
고른 책을 계산한 뒤 최정근을 따라 카페로 향했다. 골목 안쪽에 자리한 카페는 창문과 문을 제외하고 푸르른 담쟁이로 뒤덮여 있었다.
“의외네요.”
“뭐가 말입니까?”
“이렇게 아기자기한 곳보다 크고 넓은 대형 카페를 좋아할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그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그녀와 자신 앞에 놓으며 피식 웃었다.
“인간미 없다는 말처럼 들리는데 맞습니까?”
“눈치 빠르시네요.”
솔직한 그녀의 대꾸에도 그는 기분 나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착각인지 몰라도 되레 즐거워 보였다.
“그런 소리를 자주 듣는 편이긴 하지만 제 사람 앞에서는 다정합니다.”
연수는 전혀 예상 밖의 얘기에 눈썹을 들어 올렸다.
“안 믿기나 보네요? 서연수 씨 머릿속에 내가 어떤 사람인지 대충 감이 오네요.”
연수는 대답 대신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물기가 맺힌 아이스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커피 맛 어떻습니까?”
“고소하고 좋네요. 너무 진하지도 않고.”
그녀의 평가가 마음에 드는지 그의 얼굴에 흡족한 미소가 드리워졌다.
이렇게 웃음이 헤픈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일로만 봐서 그런가?
확실히 정장이 아닌 평상복을 입고 있어서 그런지 표정도 전처럼 딱딱해 보이지 않았다.
“저번에는 별일 없으셨습니까?”
“네?”
“옆집 남자분, 좀 무례해 보이던데.”
그제야 지난번에 왔을 때 멋대로 그녀의 집을 활보하는 그를 경계하던 게 떠올랐다.
“아, 별일 없었어요.”
“큰 집에 혼자 살기 무섭지는 않습니까? 다른 집과는 좀 떨어져 있던데.”
“처음에는 그랬는데, 지금은 적응해서 괜찮아요. CCTV도 있고.”
“그건 잘하셨네요.”
연수는 변호사님이 걱정하는 옆집 남자가 달아 준 거라고 굳이 덧붙이지 않았다.
저번에 식사하면서도 느꼈지만 최정근과의 대화는 생각보다 지루하거나 어색하지 않았다.
몇 차례 만나며 내적 친밀감이 쌓이기라도 했는지 자연스럽게 대화를 잘 이어 나갔다. 그러다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새 두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그사이 창밖에는 어스름이 깔려 있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요. 그만 가 봐야겠어요.”
“저녁 같이 먹자고 하면 부담스럽습니까?”
“네.”
연수는 책이 든 종이 가방과 핸드백을 챙기며 말했다. 집에 혼자 있을 체다가 걱정되기도 했고, 저녁까지 함께 먹기엔 왠지 데이트 같아 신경이 쓰였다.
“연수 씨 매력이 솔직함이긴 하지만 오늘은 상처네요.”
“푸훗. 집에 가서 연고 바르시면 금방 나으실 거예요.”
“저희 집에 연고 없는데 빌려줄 생각 없습니까?”
“이참에 하나 장만하세요. 또 필요할지 모르잖아요.”
“하, 역시 연수 씨는 못 당하겠네요.”
그녀의 농담에 최정근은 이마를 짚으며 웃었다.
그때 투두둑, 창문을 때리는 빗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처음에 간헐적으로 내리던 비는 순식간에 창문을 적셨다.
오늘 비 온다고 했던가?
정신없어서 일기 예보도 안 보고 나왔다.
“우산 안 가져왔습니까?”
“네.”
“제가 댁까지 모셔다드리겠습니다.”
“아니에요. 근처 편의점에서 우산 사면 돼요.”
“짐도 많은데 그냥 타고 가시죠. 저 같은 사람도 하루에 두 번 거절당하면 진짜 상처받습니다.”
연수는 묵직한 종이 가방을 내려다보았다. 이중으로 포장되긴 했지만 종이라 비에 젖으면 쉽게 찢어졌다. 전에도 버스 탔다가 종이 가방이 찢어져 곤란을 겪은 적이 있던 터라 연수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최정근은 그녀에게 기다리라고 말한 뒤 카페 사장에게 우산을 빌려 차를 가져왔다.
그녀의 집으로 가는 동안 비는 점차 더 굵어져 장대비로 변했다. 고집을 부리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었다.
잠시 후 집 앞에 차를 세웠을 때 그의 차가 주차된 게 눈에 들어왔다.
저녁까지 먹고 올 줄 알았는데 그냥 온 건가?
아니면 빨리 먹고 헤어진 걸까?
그의 생각에 빠져 있는데 최정근이 작게 헛기침을 했다. 그녀가 고개를 돌리자 기다렸다는 듯이 시선을 맞춰 왔다.
“연수 씨, 뭐 하나 물어봐도 됩니까?”
“네. 뭔데요?”
“옆집 남자와 무슨 사입니까?”
“가, 갑자기 그건 왜 물으시는데요?”
당황한 연수는 말까지 버벅거렸다.
“일과 얽힌 사람과 사적으로 엮이지 말자는 게 제 지론인데, 연수 씨를 만나면서 바뀌었습니다.”
“그게 무슨…….”
“저 연수 씨에게 관심 있습니다.”
“네에?”
최정근의 당당한 돌직구에 당황한 연수는 빠르게 두 눈을 깜빡였다. 다른 사람도 아닌 최정근에게 고백받을 줄은 몰랐다. 저를 보는 시선도 담백했을뿐더러, 일정한 선 이상은 절대 넘어오지 않았다.
“첫눈에 반했습니다. 사실 보자마자 고백하고 싶었지만 만약 차여서 어색해지면 일할 때 서로 불편할 것 같아서 신뢰부터 쌓고 고백할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누구 때문에 여유 부릴 때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그가 옆집을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
“저기 변호사님…….”
“당장 대답해 달라는 거 아닙니다. 생각할 시간 충분히 드릴 테니 천천히 대답해 주세요.”
“아뇨. 이런 거로 시간 끌면 더 안 좋을 것 같아요. 죄송하지만 변호사님 마음 받을 수 없습니다.”
이렇게 바로 거절할 줄은 몰랐는지 최정근은 조금 당황한 듯 은테 안경을 추어올렸다.
“역시 옆집 남자 때문입니까?”
이미 눈치챈 마당에 연수는 숨기지 않기로 했다.
“옆집 남자에게 마음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사귈 생각은 없어요. 1년 후면 미국으로 돌아갈 거라 괜히 엮여서 감정 소모하고 싶지 않거든요. 그러니 속상해하지 마세요.”
내심 그녀에게 고백했다가 불편해지면 어쩌나 고민했던 최정근은 그녀의 시원시원한 태도에 괜한 걱정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더 아쉬웠다. 이렇게 멋진 여자를 바라만 볼 수밖에 없다는 게.
“오늘 데려다줘서 고맙습니다.”
연수가 안전벨트를 풀며 인사했다.
“현관문 앞까지 데려다주는 건 오버겠죠?”
“네.”
“그럴 줄 알았습니다. 이거 쓰고 가세요.”
그녀의 거절에도 최정근은 기분 나빠 하는 기색 없이 뒷좌석에서 우산을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 연수는 우산을 거절하지 않았다. 바로 집 앞이긴 했지만 책이 젖으면 곤란했다.
“감사합니다. 잘 쓰고 다음에 돌려 드릴게요.”
연수는 꾸벅 인사한 뒤, 차에서 내려 우산을 펼쳤다. 먼저 가라는 그녀의 손짓에 최정근의 차는 서서히 골목길을 빠져나갔다.
참 군더더기 없는 남자였다. 과하지도 않고, 질척거리지도 않았으며, 물러날 때 물러나는.
차라리 저런 남자를 좋아했다면 나았을까.
적어도 속앓이는 하지 않았을 것 같다.
왜 최정근에겐 감정이 일지 않는 걸까.
나직한 한숨을 내쉰 연수는 몸을 돌려 대문을 열고 마당을 가로질렀다. 그때 옆집 현관문이 벌컥 열리더니 그가 우산도 없이 성큼 걸어왔다. 그녀를 쳐다보는 눈빛이 살벌한 걸 보니 기분이 썩 좋아 보이지 않았다.
“어딜 다녀와?”
“서점에요.”
“누구랑?”
그녀가 누구 차를 타고 온 건지 다 봤을 거면서 묻는 의도를 모르겠다.
“서점에서 우연히 최 변호사님을 만났어요.”
“우연히?”
그가 의심에 찬 눈빛으로 되물었다.
“네. 우연히요.”
“지금 그 말을 믿으라는 거야?”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본인은 다른 여자와 맞선까지 보러 갔으면서 되레 저와 최정근에 대해서 꼬치꼬치 캐묻는 건 무슨 경우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