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우 치던 밤에
폭풍우 치던 밤에
폭풍우 치던 밤에 [2권]

지은이 뽕시꽁시
발행일 2025년 5월 17일

펴낸곳 (주) 테라핀
홈페이지 http://www.copinnovel.com
전자우편 easycontents@terapinstudios.co.kr
등록번호 제 25100-2019-000007호

ⓒ 뽕시꽁시,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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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가 3,000원
ISBN 979-11-7314-854-5 [05810]
폭풍우 치던 밤에
11.
오늘은 카탈로그 촬영 때문에 아침부터 부산했다. 곧 있을 품평 때문에 박 부장과 차 팀장 그리고 막내 하영은 디자인실에 남기기로 하고 신 실장과 그녀가 촬영장으로 향했다.
촬영 장소가 경기도 외곽이라 연수가 운전하겠다고 했지만 자신의 차를 다른 사람에게 맡기는 게 불안했는지 신 실장은 괜찮다며 거절했다.
주차장을 빠져나온 차가 대로변으로 접어들자 신 실장이 그녀를 힐끗 돌아보며 물었다.
“일은 할 만해?”
“네.”
“듣기로는 전에 다녔던 곳에서 디자인한 연필 컬렉션이 히트 쳤다던데.”
“운이 좋았습니다.”
우연히 아버지가 사용하던 몽당연필을 보고 영감을 얻어 만든 목걸이를 유명 배우가 하고 나오면서 제품 품귀 현상까지 났었다. 그로 인해 받은 보너스로 통장은 두둑해졌지만 다른 디자이너들의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 되었고, 디자인 도용도 심심찮게 일어났다.
연수는 마냥 행복하지 않았던 그때의 기억을 지우듯 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그래서 부장님도 자기한테 거는 기대가 커. 나도 그렇고.”
“열심히 하겠습니다.”
부담감에 마음이 무거웠지만 연수는 옅은 미소 뒤로 감췄다.
신나게 떠들어 대는 신 실장의 수다를 들으면서 가니 어느새 촬영장에 도착했다.
주차하고 스튜디오 안으로 들어서자 촬영 스태프들이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안을 둘러보다 누군가를 발견한 신 실장은 올백 머리에 덥수룩한 수염을 기른 남자에게 다가갔다.
“작가님, 안녕하세요.”
“아, 예.”
반갑게 인사하는 신 실장과 달리 콘티를 훑던 남자는 콧등으로 내려온 검은색 뿔테 안경을 추어올리더니 대충 눈썹만 까닥했다. 고개조차 숙이지 않는 건방진 인사에 신 실장은 기분이 나쁠 만도 한데 생긋 웃으며 옆에 있는 그녀를 소개했다.
“연수 씨, 인사해. 이철민 작가님이셔. 작가님, 이번에 새로 들어온 서연수 디자이너입니다.”
“안녕하세요. 서연수입니다.”
귀찮은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인사를 받던 이철민은 그녀의 얼굴을 보고 눈썹을 들어 올렸다.
“연서대 서연수?”
“저를, 아세요?”
이철민이 저를 아는 척하자 전혀 기억이 없는 연수는 의아한 눈빛으로 되물었다.
“나 몰라? 시네문 동아리 회장이었잖아.”
“아, 안녕하셨어요.”
연수는 어렴풋이 떠오르는 얼굴에 어색하게 인사했다.
이철민은 승아 때문에 들어간 동아리의 학생회장이었는데, 동아리 운영보다 여자나 밝히고 술을 좋아해서 꺼리던 선배였다. 매번 핑계를 대며 회식에 빠지는 그녀에게 대놓고 면박을 주거나, 억지로 술을 권해 피해 다녔었다.
하고많은 사람 중 하필 이철민을 만날 게 뭐람.
좋지 않은 기억이 함께 떠오르자 그녀의 얼굴에 옅은 실금이 갔다.
“너 말도 없이 미국 갔다는 얘기 듣고 얼마나 서운했는지 알아?”
“경황이 없었습니다.”
“경황이 없었다면서 석현이는 알고 있더라?”
“서운하셨다면 죄송합니다.”
당신과 석현이 같냐고 되묻고 싶었지만 옆에 있는 신 팀장을 의식한 연수는 따지는 대신 사과했다.
“여전하네. 서연수.”
그녀의 딱딱한 인사에 철민은 비릿하게 뇌까렸다. 연수는 뭐가 여전하다는 건지 궁금했지만 말투로 보아 좋은 뜻은 아닐 것 같아 되묻지 않았다.
“어머! 연수 씨, 작가님하고 대학 선후배 사이였어?”
그때 옆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가만히 엿듣고 있던 신 실장이 불쑥 끼어들었다. 그렇다는 그녀의 말에 지금이 이철민과 관계를 좁힐 기회라고 생각했는지 신 실장은 호들갑을 떨었다.
“어쩜 이런 인연이!”
인연은 무슨. 그녀에겐 악연이었다.
속으로 투덜거리는데 어시스트가 다가왔다.
“작가님, 촬영 준비 끝났습니다.”
“이따 보자.”
이철민이 자리를 뜨다 말고 한쪽 눈을 찡긋하며 자리를 뜨자 신 실장은 진저리를 치는 연수를 보며 귓속말했다.
“성격은 뭐 같아도 일은 잘해. 그러니 아니꼬워도 비위 맞춰.”
“네.”
신 실장의 말에 연수는 터져 나오려는 한숨을 꾹 눌러 삼켰다.
그래. 하루만 참자. 어차피 오늘 이후로 볼일 없을 테니까.
그렇게 자신을 달래며 찝찝한 기분을 억지로 떨쳐 냈다.
걱정했던 것과 달리 촬영은 순조로웠다. 신 실장의 말처럼 사진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찍었다. 하지만 문제는 촬영이 끝나고 가려는 그녀를 이철민이 붙잡았다.
“오랜만인데 한잔해야지.”
“죄송해요. 회사 들어가 봐야 해서요.”
“실장님, 여기 회사는 일 다 끝났는데 퇴근도 안 시킵니까?”
“아, 잠시만요.”
연수의 거절에 이철민은 신 실장을 돌아보았다. 그러자 이철민의 의중을 눈치챈 신 실장은 서둘러 부장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설명하고 퇴근을 허락받았다.
연수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억지로 이철민의 차에 올라탔다.
뒷좌석에 나란히 앉은 신 실장은 ‘이 작가는 자신이 상대할 테니 적당히 비위만 맞추면 돼’라고 했지만 그녀가 기억하는 이철민은 술만 마셨다 하면 끝까지 가는 스타일이라 긴 하루가 예상됐다.
이철민이 좋아하는 일식집에 자리를 잡은 신 실장은 어색한 적막을 깨려는 듯 먼저 입을 열었다.
“작가님, 연수 씨 대학 때 어땠어요? 인기 많았죠?”
“남자들 환장했죠.”
이철민은 히죽 웃으며 그녀의 얼굴부터 발목까지 느리게 훑어 내렸다. 연수는 벌레가 기어 다니는 것 같아 소름이 끼쳤지만 비위를 맞춰야 하는 사진작가한테 그딴 눈으로 쳐다보지 말라고 말할 수 없어 꽉 다문 입술에 힘을 주며 억지 미소를 지었다.
“연수 씨 그게 정말이야?”
“아니에요. 인기 없었어요.”
“내숭은. 너 좋아하는 애가 한두 명이 아니었는데 몰랐다는 게 말이 돼?”
그녀가 부정하자 이철민은 콧방귀를 뀌었다.
정말 몰랐다. 직접적인 고백을 받은 적도 없었고, 자꾸만 치근덕대는 이철민 때문에 동아리에 잘 참석하지도 않아 솔직히 누가 누구인지도 잘 몰랐다. 무엇보다 그때 당시 그녀의 눈엔 도건우밖에 보이지 않아 다른 남자에겐 관심이 전혀 없었다.
“작가님, 오랜만에 한 잔 받으세요.”
그녀가 굳은 표정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신 실장은 어색해진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이철민의 잔에 술을 따라 주었다.
“자, 건배할까요?”
연수는 내키지 않았지만 고생하는 신 실장을 보니 거절할 수가 없었다. 첫 잔은 원샷이라는 암묵적인 룰에 따라 잔을 비우자 소주가 식도를 할퀴고 내려갔다.
곧이어 주문한 회가 나오고 술잔은 더욱 빠르게 돌아갔다. 둘의 속도를 따라가기 버거웠던 연수는 마시는 척하며 재빨리 테이블 아래 빈 그릇에 술을 버렸다.
소주가 다섯 병을 넘어갈 무렵, 걸려 온 전화를 받기 위해 신 실장이 양해를 구하며 잠깐 자리를 비우자 이철민은 반쯤 풀려 게슴츠레한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석현이는 아냐? 너 들어온 거?”
“네. 만났어요.”
혀가 꼬인 걸 보니 신 실장이 돌아오면 그만 일어나자고 해야겠다고 생각하는데 이철민이 덧붙였다.
“너희 둘은 아직도 사이가 좋은가 보다?”
“친구니까요.”
그녀의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이철민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걸렸다.
“넌 비위도 좋다? 그딴 자식을 친구로 생각하다니.”
“무슨, 뜻이에요?”
“너 모르지? 9년 전 강의실에서 섹스한 여자가 너라고 소문낸 사람이 최석현인 거.”
“그게 무슨…….”
그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잊고 싶었던 과거의 기억이 해일처럼 덮쳤다.
9년 전, 긴 짝사랑에 마침표를 찍은 어느 날.
승아와 전화 통화를 하며 강의실에 들어서는데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그녀를 향했다.
영문을 알 길이 없는 연수는 의아해하며 늘 앉던 자리에 앉았다. 그런데 오늘따라 항상 먼저 와서 기다리던 석현이 보이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나 싶어 전화하는데 전화기가 꺼져 있다는 안내 음성이 들려 연수는 어디가 아픈가 싶어 걱정됐다.
곧이어 교수님이 들어오자 수업에 집중하려는데, 강의 시간 내내 얼굴이 따가웠다. 그제야 연수는 단순히 제 착각이 아님을 깨달았다.
하지만 사교성이 좋지 않은 연수는 석현 외엔 알고 지낸 사람이 없어 누구에게도 무슨 일인지 물어볼 수 없었다.
고문 같던 강의가 끝나자 연수는 도망치듯 강의실에서 벗어났다. 하지만 얼마 안 가 그녀를 두고 대놓고 수군거리는 소리를 듣고 알게 되었다.
얼마 전 빈 강의실에서 몰래 섹스하다 들킨 커플이 있었는데, 그 주인공이 바로 최석현과 그녀라고 소문이 난 듯했다.
말도 안 되는 소문에 기막혀하는데 승아도 어디서 소문을 듣고 왔는지 헐레벌떡 뛰어왔다.
[서연수, 너 들었어? 최석현하고 네가 강의실에서 섹…….]
[아니야.]
[그렇지? 아니지? 아놔. 어떤 개 또라이 같은 것들이 그딴 말도 안 되는 헛소문을 퍼트린 거야!]
자신의 말을 단호하게 자르는 그녀를 보자 그제야 가슴을 쓸어내린 승아는 뒤늦게 화가 치미는지 거칠게 욕설을 퍼부었다. 그 소리에 지나가는 학생들이 힐끔 쳐다보자 승아가 뭘 보냐며 눈을 부라렸다. 괜히 시비 걸리기 싫었는지 이내 빠른 걸음으로 사라졌다.
[혹시 최석현하고 통화됐어?]
[아니. 그러잖아도 전화해 봤는데 전화기 꺼져 있더라.]
[무슨 일 있는 거 아니겠지?]
[연락 두절할 애가 아닌데……. 혹시 학교에 도는 소문 듣고 안 나오는 건가?]
승아 역시 평소와 다른 석현의 행동에 걱정이 되는지 미간을 찌푸렸다.
[그랬으면 우리한테 먼저 연락했겠지.]
[아무래도 안 되겠다. 나 석현이 집에 좀 다녀올게.]
곰곰이 생각하던 승아는 가방을 챙겨 일어났다.
[나도 같이 가.]
[수업은 어쩌고?]
그녀가 붙잡자 승아가 놀라 되물었다.
어차피 파다하게 퍼졌을 소문 때문에 수업에 집중하긴 글렀다고 생각한 연수는 가시방석에 앉아 있느니 상황부터 확인하는 게 나을 듯했다. 무엇보다 석현도 이 사실을 알고 있는지가 궁금했다.
승아와 그녀는 학교 근처 석현의 자취방으로 향했다. 초인종을 수 번 눌렀을 때야 석현은 술 냄새를 풍기며 문을 열었다.
승아 혼자 온 줄 알았는지 뒤에 서 있는 그녀를 보고 흠칫 놀라는 듯하더니 이내 들어오라는 듯 현관문을 열었다.
[지금 학교에 어떤 소문이 퍼졌는지 알기나 해?]
아파서 결석한 줄 알고 걱정했던 승아는 석현의 모습에 화가 나 쏘아붙였다.
[무슨 소문?]
[너랑 연수가 강의실에서 섹…… 암튼, 이상한 짓 했다고 소문 돌아서 지금 난리 났어!]
자다가 눌린 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기며 되묻는 석현에게 승아는 제 입으로 말하기 민망한지 발음을 뭉그러트리며 말했다.
[그것 때문에 달려온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