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우 치던 밤에
폭풍우 치던 밤에
폭풍우 치던 밤에 [1권]

지은이 뽕시꽁시
발행일 2025년 5월 17일

펴낸곳 (주) 테라핀
홈페이지 http://www.copinnove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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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번호 제 25100-2019-000007호

ⓒ 뽕시꽁시,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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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가 3,000원
ISBN 979-11-7314-853-8 [05810]
폭풍우 치던 밤에
1.
밤늦게까지 고스톱을 치며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를 피해 나온 연수는 펄럭이는 검은 치마폭 안으로 서늘한 밤바람이 들이치자 가늘게 몸을 떨었다.
카디건이라도 걸치고 나올걸.
뒤늦은 후회가 들었지만 떠들썩한 곳으로 다시 들어가고 싶지 않아 연수는 닭살이 돋은 제 팔을 감싸며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아.
새하얀 입김이 까만 하늘에 흩어지면서 그 사이로 드문드문 별이 보였다.
사람이 죽으면 별이 된다던데, 저 별 중에 오빠와 할머니가 있을까.
연수는 두 사람의 얼굴이 떠오르자 울컥 눈물이 차올랐다.
너무 많이 울어 퉁퉁 부어오른 눈두덩이 파르르 떨렸다.
할머니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가족 모두에게 충격이었다.
오빠가 죽고 한국을 떠나기 싫다던 할머니를 두고 가족 모두가 도망치듯 미국으로 떠난 게 9년 전이었다.
그동안 할머니를 만나기 위해 한국에 들어온 건 고작 세 번이었다.
미국으로 건너간 후 처음에는 대학을 다니느라 바빴고, 졸업 후에는 직장 다니느라 시간 내기가 어려웠다.
할머니 혼자 외로우실 거라는 걸 알면서도 제 눈앞의 일을 처리하느라 바빠 뒷전으로 미뤘다.
시간이 많이 남은 줄 알았다.
안일하고, 바보 같은 생각이었다는 걸 할머니가 돌아가시고서야 깨달았다.
제 하루가 할머니에겐 한 달처럼 느리게 흘러갔을 거란 걸.
사실 할머니와의 사이가 그다지 좋지 못했다.
하지만 긴 시간 떨어져 있다 보니 그렇게 싫던 무뚝뚝한 할머니의 말투와 잔소리가 그리웠다.
그래서 그동안 쓰지 못했던 휴가를 몰아서 처음으로 할머니와 함께 보낼 계획을 세웠다.
그랬는데…….
투명한 물줄기가 그녀의 볼을 적시며 흘러내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자주 찾아뵐 걸 하는 뒤늦은 후회가 가슴을 할퀴었다.
죄책감과 그리움에 연수는 연신 눈물을 훔쳤다.
그때 그녀의 시선 끝에 검은 인영이 어른거렸다.
장례식에서, 그것도 상복을 입은 사람이 우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지만 생판 모르는 남 앞에서 울고 싶지는 않았던 연수는 황급히 눈물을 훔치며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서연수.”
기척이 멀어지길 기다리는데 나직한 음성이 귓속을 파고들었다.
머릿속으로 누군지 떠올리기도 전에 몸이 본능적으로 돌아갔다.
쿵.
절벽에서 떨어지면 이런 느낌일까.
깊이를 알 수 없는 검은 눈동자와 마주치자 연수는 심장이 멎은 것처럼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온통 검은색인 도건우가 서 있었다.
“오랜만이다.”
담담한 그의 인사에 연수는 목이 졸린 것처럼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와 헤어진 지 9년.
수십, 수백 번 그와 재회하는 모습을 상상했었다.
세월에 깎이고 굴려 감정을 지우고, 능숙하게 표정을 감추며, 그와 성숙하게 대처하는 모습을 머릿속에 그렸었다.
그러나 현실은 상상과 전혀 달랐다. 몸이 얼어붙어 꼼짝도 하지 못했고, 당황한 눈동자는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렸으며, 말문이 막힌 입술은 붕어처럼 달싹일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세월이 많이 지났으니 그와 대등한 관계로 설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자신이 어른이 되어 가는 동안 그는 더욱 성숙해졌고, 범접할 수 없는 분위기까지 뿜어져 나와 눈길 한 번 마주치는 것조차 버거웠다.
연수는 다시 어리숙한 스무 살로 돌아간 듯한 제 모습에 속상하고 화가 나 애꿎은 아랫입술을 잘근 씹었다. 그러자 그의 시선이 날아와 박혔다.
그러지 말라는 듯 집요한 시선에 짓씹고 있던 입술을 떼자 아교로 붙인 양 달라붙었던 그의 시선이 툭 떨어져 나갔다. 그제야 연수는 삼킨 줄도 몰랐던 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때 묵직한 공기를 가르며 그가 입을 열었다.
“할머니 일은, 유감이다. 암이셨을 줄은 몰랐어.”
할머니의 사망 원인은 췌장암이었다. 어느 날 복통이 심해 병원을 찾으셨을 때는 이미 온몸에 암세포가 전이된 상태라 수술이 어렵다고 했다.
할머니는 그 사실을 알고도 가족들에게 바로 알리지 않으셨다.
요리사이셨던 아빠가 마침 TV에서 하는 요리 경연 대회에 출연 중이셨기 때문이다. 혹여나 자신의 소식을 듣고 어렵게 얻은 기회를 포기하고 들어올까 봐 프로그램이 끝날 때까지 숨기셨다.
두 달 뒤 아빠는 최종 우승자로 뽑혔고 식당은 더욱 유명해졌다.
그사이 할머니의 병색은 급격히 나빠졌다.
더는 미룰 수 없다고 판단한 병원은 가족에게 연락했고, 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아빠는 바닥에 주저앉으셨고, 엄마는 울음을 터트리셨다.
가족들은 그길로 한국으로 들어왔고, 그들의 얼굴을 본 뒤 할머니는 이틀 뒤 먼 길을 떠나셨다. 허망하게 할머니를 떠나보낸 그녀와 부모님은 깊은 죄책감과 슬픔에 빠졌다.
“……어떻게, 알고 왔어요?”
한참 뒤 그녀의 입에서 목소리가 형편없이 갈라져 나왔다.
“한마음 원장님께 들었어.”
한마음 한의원은 할머니의 친구분이 운영하는 병원으로 어렸을 때부터 다녔던 곳이다. 연수는 그가 아직도 그 병원에 다니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고, 할머니의 임종 소식을 듣고 장례식장까지 찾아올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
“들어가 볼게.”
그녀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까만 눈만 깜빡거리자 더는 할 말이 없다고 판단했는지 그가 몸을 돌렸다.
“무슨 생각인 거예요?”
연수가 발목을 잡자 그가 걸음을 멈추고 돌아섰다.
“뭐가.”
“가도 오빠 반길 사람 아무도 없다는 거 알잖아요.”
반기기는커녕 쫓겨날 게 분명했다. 아니면 물세례를 맞거나.
“돌아가요.”
“가지 말라고 해도 갈 거야. 할머니께 인사만 드리고.”
연수는 수모당할 걸 뻔히 알면서 굳이 가려는 그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녀의 문전 박대에도 그가 뜻을 꺾지 않자 감정이 불쑥 목울대를 치고 올라왔다.
“벌써 잊었어요? 9년 전 일?”
그녀의 가족이 왜 모든 걸 버리고 도망치듯 미국으로 떠나야 했는지.
그는 정말 다 잊은 걸까.
그래서 이렇게 뻔뻔하게 나오는 걸까.
분노로 뒤덮인 그녀의 눈동자가 위태롭게 일렁였다.
그 순간 그의 얼굴에 짙은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걱정하지 마. 단 하루도 잊은 적 없으니까.”
그가 굳은 얼굴로 한껏 딱딱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를 들쑤신 건 그녀였음에도, 삭막한 그의 눈동자를 보자 연수는 명치끝이 쿡 쑤셔 왔다.
“그런데 왜 가려는 거예요?”
“내가 할 도리는 하고 싶어.”
“오빠 보면 우리 엄마 가만히 있지 않을 거예요.”
죽은 오빠의 장례식장에 나타난 그를 보며 엄마 화영은 그의 뺨을 후려치고 온갖 저주를 퍼부은 것도 모자라 그의 얼굴 위로 소금까지 뿌려 쫓아냈다.
그런데 그는 그런 수모를 또 당하려는 걸까.
“걱정돼?”
“그, 그럴 리가요.”
당황한 그녀가 정색하자 그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서리다 이내 사라졌다.
“그럼, 신경 쓰지 마. 내가 무슨 짓을 당하든 너와 상관없잖아.”
서늘하게 내뱉은 그는 그녀가 만류하기도 전에 장례식장 안으로 성큼 걸어 들어갔다.
뭐? 상관하지 말라고?
저 역시 그러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만 보면 눈이 뒤집히는 엄마 때문에 내버려 둘 수가 없었다.
또 사달이 나기 전에 막아야 했다.
몸을 튼 연수는 서둘러 그를 찾았지만, 건우는 보이지 않았다.
* * *
“네, 네가 여길 어디라고 와? 당장 나가!”
장례식장 입구에 들어서자 엄마 화영의 고함이 들렸다.
벌써 사달이 났음을 깨달은 연수는 질끈 눈을 감았다가 뜬 뒤 성큼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분향소 앞에서 그의 옷을 잡아당기며 소리치고 있는 화영이 눈에 들어왔다.
“나가라는 말 안 들려? 나가! 나가라고!”
“여보, 진정해.”
아빠 진욱이 억지로 그에게서 떼어 놓자 이성이 나간 화영은 더욱 몸부림쳤다.
“내가 진정하게 생겼어요? 저 자식 때문에 우리 집이 어떻게 됐는데! 네가 여길 어디라고 찾아와! 어?”
서슬 퍼런 화영의 악다구니에 술잔을 기울이던 문상객이 분향소를 향해 고개를 쭉 빼며 쳐다보았다.
“어머니, 할머니께 인사만 드리고 가겠습니다.”
“어머니라니 누가 네 어머니야? 사람이 뻔뻔해도 유분수지. 네가 무슨 자격으로 우리 어머니한테 인사를 해? 네가 그러고도 사람이니? 사람이야!”
그 소란에도 그가 꿈쩍도 하지 않자 화영의 눈이 뒤집혔다.
“건우야, 미안하지만 나중에 다시 와라.”
화영이 좀처럼 진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자 진욱은 아무래도 안 되겠다고 생각했는지 그를 설득했다.
“뭘 다시 와! 다시는 발도 딛지 마!”
“엄마, 그만해.”
두 사람의 입장이 첨예하게 부딪히자 더는 두고 볼 수 없었던 연수가 앞으로 나섰다.
“뭘 그만해! 저 자식 때문에 우리 진태가 어떻게 됐는데. 흑흐흑.”
“여보, 그러다 당신 또 쓰러지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
“우리 진태 불쌍해서 어떡해. 아흐흑.”
분을 이기지 못한 화영이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더니 가슴을 치며 죽은 진태를 애타게 불렀다. 진욱이 그런 화영을 안으며 소리 없이 눈물을 삼켰다.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던 연수는 붉어진 눈시울을 애써 떨치며 돌처럼 굳어 있는 그의 앞으로 다가갔다.
“나와요.”
엄마가 실신하기 전에 그를 이곳에서 내보내야 했다. 그가 끝까지 가지 않겠다고 버티면 연수는 다른 사람들에게 부탁해서라도 억지로 끌고 나갈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