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어긋난 운명

바위라도 깨부술 듯 거침없이 콸콸 흐르는 개울을 본 보현보살은 할 말을 잃을 만큼 난감했다.

“에구구. 비가 그친 지 언제인데 여기는 아직도 홍수가 난 것 마냥 이런다요, 보살님?”

“어쩐다…….”

“그러게 연문 스님 말씀대로 며칠 더 머물 걸 그랬네요. 다시 돌아갈까요?”

보현보살은 어서 제 말에 호응해 주기 바라며 눈을 반짝이는 동지에게 별 의미를 두지 않고 긴 한숨을 쉬었다.

평소라면 징검다리 열 개 정도를 건너면 되는 좀 넓지만 깊지 않은 흔한 개울이었다. 한데 지금 내뿜는 거친 물소리는 예사롭지 않았다.

기억하지 못하는 어머니 대신 딸처럼 마음 써주었던 진화 스님의 입적 때문에 왔다 가는 길에 아버님 성묘라도 할 작정으로 방향을 잡은 것인데, 낭패였다.

주변을 둘러보니 인적이 없는 곳 오직 세차게 흐르는 물소리만 요란했다.

깊이 눌러쓴 승립(스님이 쓰는 짚으로 엮은 모자)을 벗자, 핏기 없이 바짝 야윈 얼굴이 드러났다. 하지만 백옥 같다는 말처럼 티끌 하나 없이 단아한 인상은 남달랐다.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대번에 뭇 사내들의 시선을 끌 외양이었다. 그러하니 여름에도 승립을 깊게 눌러쓴 모양이었다.

보현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티끌 하나 없이 푸른 하늘은 만지면 파란 물이 뚝뚝 떨어질 것 같아 보는 눈이 시렸다.

개울은 반 시진쯤(1시간) 지나면 징검다리가 고개를 내밀 것 같았다.

결국 잠시 기다리기로 작정하고 물가 바위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았다.

“동지야, 물은 더 이상 늘지 않을 것 같다. 잠시 쉬어가자.”

동짓날 출산한 어미가 동지라 이름 지은 아이는 대체로 무던한 성품이라 함께 다니기 좋은 아이였다.

“예에. 보살님. 소녀는 주변을 좀 살펴보지요.”

그렇게 말한 동지는 벌써 저쪽으로 내달리고 있었다.

“참 기운차구나.”

내게도 저런 시절이 있었을까 되짚으며 쓴웃음을 지었다.

고개를 들자 다시 보이는 구름 한 점 없이 새파란 하늘조차 제 서러움을 드러내는 것 같았다.

“다 부질없는 일을 어이해 아직 떨치지 못하는 건지……. 어리석다. 참으로 어리석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보현은 마른 가슴을 주먹으로 퍽퍽 두드렸다.

“이렇게라도 목숨을 부지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요 며칠 계속 꿈자리를 어지럽히는 악몽 때문에 보현은 두통에 시달렸다.

-공주마마라니, 무슨 헛소리야. 이젠 집안의 걸림돌일 뿐이지.

-내 아들이지 네 서방이 아니다. 그러니 미련 두지 말고 떠나라.

-딸이라고 낳으면 뭘 해. 부실한 탓에 이미 세상을 버렸는데 무슨 낯으로 딸을 찾아.

양손으로 귀를 막고 머리를 감싼 보현의 감은 눈에 흰 무명 타래를 던지고 돌아나가던 시어머니의 자주색 치맛자락과 새하얀 버선이 선명히 떠올랐다.

셀 수 없이 마음에서 지웠다, 놓았다, 다짐했던 과거가 꿈에서는 어찌 그대로인지.

다시금 가슴에서 치솟는 불길을 견딜 수 없던 보현은 벌떡 일어섰다. 몸부림을 친들 한번 들어온 생각은 쉬이 빠져나가지 않았다.

눈앞에 흘러가는 거친 물살은 세찬 소리를 내어 저를 부르고 있었다.

“너를 따라가면 넓고 넓은 바다로, 아바마마께, 내 딸에게 데려갈 테냐?”

넘실대는 개울이 어서 오라며 물방울을 튕겨 화답했다.

“대체 무슨 미련이 남았다고, 미련스레 아직도 밥을 먹고 살아가는가. 내 딸아. 우연아…. 어미가 미안하다. 젖도 한번 물리지 못하고 보낸 널 무슨 낯으로 다시 볼 수 있으랴. 우연아. 우연아.”

막 낳은 핏덩이를 품에 안고 딱 한. 번. 이름을 불러주었다.

-우연아, 네가 내 딸이구나.

따뜻했던 그 여린 몸이 아직도 생생히 떠올랐다. 한데 출산한 바로 그날, 역모가 있었고, 그 와중에 부왕의 비보를 접했다.

혼절한 사이 아이는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우연아. 우연아……. 미안하다. 못난 어미를 용서해다오. 우연아!”

갓 태어난 핏덩이가 울부짖으며 저승길에서 어미를 찾아 헤맬 걸 생각하면 가슴이 불에 달군 인두로 지져지는 것 같았다.

보현은 눈을 감고 개울에 발을 들였다. 차가운 물에 정신이 번쩍 들었지만, 물러서지 않았다.

한사코 머리 깎는 것을 반대하던 진화 스님도 이제는 없었다.

“진화 스님, 제 아이를 만나셨습니까? 아바마마를 뵈었습니까?”

보현은 허리가 휠 만큼 허공에 대고 목이 터지라 소리쳤다. 세찬 물소리는 어림없다는 듯 제 목소리를 삼켜버렸다. 더 크게 외쳤다.

그때 난데없는 비명 소리가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고개를 돌리니 저 위로 달려갔던 동지가 보였다. 무슨 까닭인지 손을 허우적거리며 무언가를 가리키고 있었다.

무심히 고개를 돌린 보현은 물에 떠내려오는 생뚱맞게 활짝 핀 커다란 진달래꽃이 들어왔다.

‘웬 꽃? 나를 부르는 천상의…?’

순간 보현은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아이구나. 계집아이로구나.’

보현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앞뒤 가리지 않고 차가운 물길로 뛰어들었다. 종아리를 넘고 허벅지까지 찰랑대는 물에 힘없는 몸이 휘청였다.

한 걸음 더 내딛자, 바닥이 움푹 파여 허리를 넘었다. 급히 숨을 들이마셨다. 하지만 물러설 수 없었다.

누군가의 눈에서 저와 같은 피눈물이 흘러서는 안 되었다. 아니, 아니다. 오직 아이를 살려야 했다.

“아가! 아가.”

정신없는 중에 허리를 치는 물살에 몸이 기우뚱거렸다. 점점 깊어진 물은 강력한 힘으로 보현을 흔들었다.

천만다행으로 뻗은 손끝에 간신히 잡힌 진달래색 치맛자락을 맹목적으로 끌어당겼다. 작은 몸을 품에 안았다. 아이는 벌써 축 늘어져 있었다.

“다행이다. 아가.”

잠시 마음을 놓았다 싶은 순간 보현의 발이 거센 물에 미끄러지며 아이를 안고 넘어졌다.

보현은 한 손으로는 아이를 안고, 다른 손은 허우적거리며 뭔가를 잡으려 손을 뻗었다.

‘아이에게 어미를 찾아줘야 해. 부처님. 부처님. 아이는 살려주세요.’

물살은 보기보다 힘차게 보현을 밀어붙였다.

보현의 입속으로 찬물이 밀어닥쳤다. 고개를 들어 물 밖으로 내밀고자 했지만, 힘에 부쳤다. 아이를 물 밖으로 밀어 올렸다.

“어푸, 어푸. 부처…. 아….”

그때 무언가가 보현을 잡아끌었다.

‘아이고, 물귀신에게 잡혔구나. 이를 어째, 아가, 아가, 너를 어떡하니.’

보현은 필사적으로 발버둥 쳤다.

보현은 제 입으로 들어오는 물을 뱉어내려 했으나 물은 목구멍으로 연신 들이쳤다. 몸은 점점 늘어지고 힘이 빠졌다.

그때 몸이 쑥 들렸다. 사력을 다해 아이를 품었다.

“안 돼!”

“이제 되었소.”

굵은 사내의 음성이 머리에 파고들었다.

‘저승차사로다. 아이가 나 때문에 저승길을 가게 되었구나.’

기력이 빠진 보현은 절망했다.

“아이만은 놓아주시오. 차사님.”

***

놓친 손수건을 집으려던 딸아이가 순식간에 미끄러지며 개울물에 휩쓸렸다.

조금 떨어져 있던 아비는 혼비백산해서 급히 말을 타고 쫓았지만, 벌써 저 멀리 떠내려가는 붉은 치마만 보였다.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그때 저 아래 회색 옷을 입은 여인이 물에 들어왔다.

“아이를 잡아주시오! 잡아주오!”

목이 터져라, 외쳤다.

여인도 두리번거리다 떠내려가는 아이를 발견했다. 여인이 조심스레 개울 가운데로 나왔다. 그러다 아이를 잡았다.

‘잡았구나. 다행이다.’

순간 둘 다 함께 거센 물살에 휩쓸렸다. 다행히 여인은 필사적으로 아이를 잡고 있었다.

사력을 다해 말을 몰아 개울에 뛰어들었다. 간신히 회색 옷자락을 잡고 끌었지만, 여인은 빠져나가려 바둥거렸다.

“되었소. 되었소. 고맙소.”

무슨 말을 하는 줄 모른 채 오직 딸아이를 구했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러기에 버둥거리는 여인을 무거운 줄도 모르고 아이와 함께 잡아 올리던 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