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감기

“강 과장! 어서 와봐요. 새로 오신 팀장님이에요. 지하준 팀장님! 인사해요.”

점심시간 막바지, 양치하고 의자에 앉으려는 찰나에 회의실 문을 빼꼼 열고서 윤 차장이 정아를 부른다.

‘아…, 오늘이었나…. 그 소문의 팀장.’

얼마 전부터 사내 메신저엔 새로운 팀장의 이야기로 도배가 되었다. 36살 미혼으로 젊은 나이에 팀장이 된 건 둘째 치고 훤칠한 외모가 여직원 사이에서 이슈가 되었다. 하지만 유연근무를 하는 정아는 서둘러 오후 업무를 마무리해야 하므로 마음이 급하기만 하다.

“네, 안녕하세요.”

건성건성 대답하고 회의실 문틈 너머로 보이는 팀장에게 고개만 살짝 숙여서 인사한 뒤 서둘러 자리에 앉는다.

계속 울리는 메신저 알람은 우선 꺼두고, 회사 아웃룩으로 눈을 돌려 서둘러 업무에 복귀한다. 구매팀에서는 오늘 오전에 컨펌을 낸 발주 건에 대해서 오후 중으로 PO 서류를 작성하라고 한다.

‘빌어먹을. 구매팀 저 인간들은 요청만 하면 서류가 하늘에서 갑자기 뚝 떨어지나.’

정아는 속으로만 중얼거린다.

얼마나 지났을까. 회의실에서 문이 열리고 새로 온 팀장과 윤 차장, 그리고 김 과장의 목소리가 들린다.

‘회의실에 김 과장도 있었구나.’

정아는 성의 없이 인사할 땐 못 봤던 김 과장도 회의실에 있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사무실에서 아부를 잘하기로 소문이 난 김 과장이 빠질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얼마 전 회사 연례행사에서 사장님을 직접 뵌 적이 있는 김 과장은, ‘여기에만 달이 떴나 봐요! 사장님 주변만 환합니다.’라는 멘트로 주변 사람을 경악하게 했다고 한다. 달이라니. 저녁 행사라서 달이라고 했나.

“팀장님 자리는 여깁니다.”

씩 웃으면서 김 과장이 팀장에게 말을 건네면서 정아가 있는 자리로 다가온다.

T자 모양으로 맨 중앙이 팀장 자리이고 그의 오른편이 김 과장 자리, 정아는 팀장의 왼편으로 김 과장과 마주 보고 있다. 정아는 구매팀에서 요청한 발주 건과 거래처에서 요청한 공문을 서둘러 동시에 작성하며 파티션 너머로 팀장 얼굴과 마주한다.

‘잘생겼네…. 키도 크고 훤칠해. 젊은 여직원들 사이에서 이슈가 될 만하다.’

이 와중에 성남지사에서 근무하고 있는 민경의 메신저까지 가세한다. 정아가 입사 때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고 그녀가 의지하고 있는 몇 안 되는 회사 사람이라 민경의 메신저는 꺼둘 수가 없었다. 정아는 하는 수 없이 사내 메신저로 눈을 돌린다. 어느새 경기본부 여직원 사내 메신저 단톡방엔 100개가 넘는 톡이 쌓여 있다.

- 강 과장~ 어때?

- 지난주에 새로 온 팀장을 본 협력사 직원 말로는… 유명한 배우랑 닮았다고 하던데! 맞아?

- 여이~ 강 과장 바빠?

- 어서 소감을 알려줘.

정아는 한숨을 내쉰 뒤 메신저에 답을 한다.

- 저기…. 경기본부 여러분들. 팀장님 지금 막 오셨어요. 네 맞아요. 너무 잘생겼어요. 배우까진 아니고…, 20대 후반처럼 보여요. 그리고 몇 주 동안은 지역 사무실을 방문할 거 같은데요. 앗. 잠시만요. 저 거래처에서 전화가 와요. 거기다가 구매팀에서도 막 쪼네요. 오늘따라 왜 이렇게 전화까지 많이 오는지 모르겠어요.

정아는 마지막으로 우는 표시의 이모티콘을 날린 뒤 메신저 알람은 다시 꺼두고 작성하던 공문을 마저 마무리한다.

정아가 여유 없이 사무실에서 일만 하는걸, 같은 팀 직원들은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주말 모임이나 퇴근 후 간단하게 모이는 회식에도 참석하지 못한 지 1년이 넘었다. 또한 직원들 사이에서 칼퇴근하기로 소문이 난 정아는 최소한이라도 팀 내 여직원들과 대화는 해두려고 한다.

팀원들이 속으로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정아에겐 생명줄과도 같은 직장이라 출근하는 순간은 최선을 다해 보려고 한다. 사람들 사이에 최소한 잡음도 없어야 하고 일도 깔끔하게 마무리하여 정시에 퇴근해야 한다. 그녀가 다니고 있는 회사는 중소기업이지만 직원 복지가 좋은 편으로 특히 유연근무에 관대하여 우울증을 겪고 있는 정아에겐 안성맞춤이다.

“강 과장님!”

정아가 대답이 없자 하준이 한 번 더 부른다.

“강정아 과장님!”

팀장이 부르는 소리를 미처 듣지 못한 정아는 키보드에서 정신없이 누르는 손을 멈추고 파티션 너머로 팀장을 쳐다본다.

“아…. 네, 팀장님!”

이제야 팀장 얼굴을 제대로 마주한 정아는 쌍꺼풀이 없는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본다.

“바쁘신가요?”

“아닙니다. 뭐 필요하신 거라도…?”

“잠깐 커피 한잔할까요?”

“네….”

안경 너머로 호기심이 가득한 눈빛을 보내는 김 과장을 뒤로하고 정아는 팀장과 함께 회의실에서 마주 앉는다. 팀장은 온종일 커피를 마셨다며 커피 대신 가져온 녹차는 입에 대지 않는다. 며칠째 피로가 누적된 정아만이 종이컵에 커피믹스를 타서 또 마신다. 벌써 석 잔째다.

‘커피는 하루에 한 잔만 마시기로 했는데….’

정아는 별다른 말이 떠오르지 않아 입술 끝을 올려 살포시 웃고 종이컵만 만지작거린다.

‘오늘 또 잠을 못 자려나…. 휴. 불렀으면 뭐라 말을 해야지…, 왜 아무 말도 안 하지?’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뚫어지라 정아를 바라보는 팀장 앞에서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정아가 어색한 만큼 같이 있는 사람도 어색한 법이다.

“과장님은 유연근무를 하고 있다고요?”

“네….”

“음…, 그럼 몇 시 퇴근인가요?”

“5시에 퇴근하고 있습니다. 한… 6개월 정도 됐고요. 개인적인 사정으로….”

정아가 유연근무를 하게 된 사연은 윤 차장과 이전 팀장만이 알고 있다. 우울증으로 진단서만 제출했고 그 당시에 팀장도 먼저 자세히 묻지 않아서 정아도 굳이 세세하게 말하지 않았다.

“그렇군요. 일하면서 어려운 점은 없고요?”

“네, 없습니다.”

정아는 현재 하는 업무와 근무조건에 만족한다. 일주일째 감기가 떨어지지 않기 때문에 지금은 어서 일을 마무리하고 집에 가서 눕고만 싶은 마음뿐이다.

“결혼한 진 얼마나…?”

“네? 3년 정도요….”

“그렇군요. 앞으로 잘해 봐요. 가서 일 보세요.”

“네, 팀장님.”

회의실 문을 닫고 서둘러 나가는 정아를 유심히 바라보던 하준은 실망하는 기색을 애써 감추고자 한다.

결혼부터 물어보다니, 하준도 처음 느끼는 생경한 기분이다.

하준의 나이는 30대 후반을 달리고 있지만 지금까지 이 여자다, 싶거나 한번 만나고 싶다는 여자는 없었다. 항상 여자 쪽에서 먼저 다가와서 만나게 되었고 어느 순간 지루해져서 헤어지기를 반복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정아를 처음 본 순간, 자기도 모르게 단둘이 이야기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껏 만난 여자보다 특별히 뛰어난 외모는 아니다. 다만 자리에 앉자마자 맞은편 사각지대에서 모니터만 바라보고 있는 정아에게 눈을 떼기 힘들었다. 다부진 입매와 주변엔 관심이 없어 보이는 눈빛 때문이었나. 아니면 뽀얀 피부와 잘 어울리는 새까만 머리칼이 계속 눈에 들어왔던가.

그러나 어쩔 수 없다. 이미 결혼한 여자였다니.

하준은 한숨을 내쉬며 얼마 전 친한 형 소개로 만난 예원에게서 계속 들어오는 톡은 미뤄두고, 주말엔 본가에 올라오라는 어머니 문자에 답을 한다. 서른 중반에 팀장 자리까지 오르고 나니 본가에서는 결혼을 서두르고 있다. 그도 이제 결혼하고 싶은 마음은 차고 넘치나 여자를 만나지 못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