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lolgue

명성 병원 VIP 병실에는 명성 그룹 오너 가족들이 낯빛을 붉히며 모여 있었다. 그중 정희는 앉지도 그렇다고 서 있지도 못한 채 복자의 눈치를 보느라 안절부절못했다. 아들 인하가 백혈병이라는 진단을 받고 치료 중 갑자기 악화되어 모두가 근심 가득한 표정으로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병실 문이 열리고 가운을 입은 병원장 정석이 어두운 표정으로 들어왔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향하자 긴장한 빛이 역력했다.

정석도 그들에게 좋은 소식을 전해야 하는 부담감 때문에 무거운 돌덩이가 어깨를 짓눌렀다.

그는 근엄한 얼굴의 복자를 향해 허리를 굽혔다.

“이게 무슨 일입니까? 치료 잘 받고 있던 아이가 갑자기 안 좋아질 일이 뭐가 있느냐 말입니다. 속 시원하게 말씀 좀 해보세요!”

복자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병실에 울려 퍼졌다. 정석은 고개를 숙이고 마른 입술을 혀로 축이며 숨을 깊이 쉬어 긴장감을 늦췄다.

“…일종의 쇼크입니다. 약물을 투여하다 보면 간혹 일어나는 일입니다. 지금은 안정을 되찾아 고비는 넘겼습니다. 걱정 끼쳐 드려 죄송합니다.”

“도대체 뭣들 하는 거야! 만에 하나 인하가 잘못되는 일이 일어나면 내 가만히 있지 않을 테니 정신 똑바로 차려!”

대쪽 같은 목소리가 그곳에 있는 사람들의 귓속을 파고들었다. 서슬 퍼런 눈빛이 아들인 태식에게 향했다가 새파랗게 질려 있는 며느리 정희에게 향했다. 가뜩이나 마음에 들지 않는 며느리인데 아들 하나 제대로 키우지 못했다는 원망이 그녀에게 향했다.

당분간 무균실에 있어야 한다는 말에 창문 밖에서 안타깝게 인하를 쳐다보던 복자가 집으로 돌아가고 정희는 그제야 소파에 앉아 아픈 다리를 주물렀다.

“당신은 들어가요. 나는 여기에 있을게요.”

“어차피 인하를 볼 수 있는 것도 아닌데….”

“그래도 여기 있어야죠. 인하는 힘겹게 버티는데, 편하게 집에 있을 수는 없잖아요. 인하가 병실로 돌아올 때까지 간절하게 기도해야죠.”

태식의 안타까움이 인하에게 향했다. 인하는 삼대독자로 명성 그룹의 후계자였다. 그러니 모두가 인하의 안위에 전전긍긍했다. 그저 무사히 일어나기만을 간절히 바랄 뿐이지 아들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겨우 숨만 쉬고 있는 아들을 눈에 담고 태식이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움직여 돌아가자 정희는 바로 병원장실로 향했다. 아무래도 정석의 표정이 불안을 더 키웠다. 처음에는 빈혈인 줄 알았는데 백혈병이라는 진단을 받고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처럼 눈앞에 캄캄했다.

인하는 정희의 생명줄이었다. 이대로 무너지고 싶지는 않았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가슴을 관통하더라도 살아야 했다. 인하의 생명은 여러 사람 목숨줄이었다.

“오빠!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휴우.”

선뜩 말을 꺼내지 않는 정석의 낯빛이 더욱 어두워졌다. 정희는 정석 옆에 바짝 붙어 앉아 나지막이 으르렁거렸다.

“어떻게 된 거냐고 묻잖아?”

“…아무래도…!”

정희의 눈동자가 크기를 키웠다. 이번 치료에 희망을 걸었는데 복자나 태식에게 희망을 잔뜩 안겨 주었는데, 분명히 일종의 쇼크라는 말을 복자에게 서슴없이 말했는데, 불안감이 정희의 가슴을 후벼팠다.

“똑바로 정확히 말해!”

“…어려울 거 같아.”

“…지금…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어머님께 일종의 쇼크라고 했잖아. 어떡하라고. 나보고 어떻게 하라고 그래!”

정희는 소리를 버럭 지르며 정석의 팔을 잡아 흔들었다. 모두 같이 죽자는 말과 같은 소리였다. 인하가 잘못된다면 정희는 살 희망이 없었다. 인하가 없는 세상은 명성 그룹에 정희의 자리는 없었다. 복자가 정희를 받아들인 거는 삼대독자인 인하 때문이었다. 간신히 버티고 있던 불빛이 꺼지고 순식간에 사방을 어둠 속으로 몰아넣었다.

“처음부터 어려운 치료라고 했잖아! 치료될 확률이 50%도 안 된다는 얘기도 했었고. 그래서 항상 마음의 준비는 하고 있으라고 했는데 가족에게 희망을 안겨 준 건 너였어. 거짓말이 거짓말을 낳는다고 눈덩이처럼 불어나서 어떤 것이 진실이고 거짓인지 나도 모르겠다.”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 거야!”

“나도 더는 못 하겠어. 아무리 직위와 명예가 좋다고 하지만, 더는 못 하겠어. 사람이 할 짓이 아니야! 진실을 말씀드리고 용서를 구하는 편이 죽어서라도 눈을 감을 수 있어. 너도 욕심 버려!”

“…욕심을 부리는 게 아니야! 어느 엄마가 자식의 목숨을 가지고 욕심을 부려! 살려내! 살려내라고!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 오빠가 더 잘 알잖아. 오빠 그 자리에 있는 게 누구 덕인데 이제와서 발뺌이야! 살려…내! 살려… 내라고….”

정희는 지쳐서 말소리가 늘어졌다. 희망이 없는 세상은 너무 빨리 찾아왔다. 그녀의 인생에 좋은 날보다 나쁜 날이 더 많았다. 인하가 태어나서 사람처럼 사는가 했는데 욕심을 너무 부렸나 보다. 하늘도 무심하시지. 어린것 목숨이 아니라 차라리 어미 목숨을 가져가지 그 어린게 무슨 잘못을 했다고 몹쓸 병에 걸렸는지 하늘이 원망스러웠다.

매일 기도를 했다. 인하가 아닌 나를 데려가 달라고. 그렇게만 해준다면 악마와도 손을 잡겠다고 간절히 빌고 빌었다.

Rrrrr.

정희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그녀는 전화를 받을 힘도 말할 기운도 없어 넋 놓고 있었다. 정석이 대신 정희의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액정에 뜬 이름을 확인하고는 바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상기된 정석의 목소리에 널브러져 있던 정희의 몸이 스프링처럼 튀어 올랐다.

* * *

우석은 학교에 다녀와 가방을 방에다 두고는 복도를 지나 여자아이들 방을 기웃거렸다. 봉사하시는 선생님이 우석의 행동을 보고 빙그레 웃었다.

“누구 찾아?”

“…아름이요.”

“아름이 조금 전에 다른 선생님과 같이 밖에 나갔는데, 아마도 뒷마당에 있을 거 같은데.”

“감사합니다.”

우석은 꾸벅 인사하고는 뒤돌아 다급하게 신발을 신고는 뒷마당으로 향했다. 그 모습에 그를 몇 달째 봐온 선생님들은 하나같이 미소를 지었다.

“꼭 친남매 같죠?”

“친남매 아니에요?”

봉사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선생님이 놀란 표정으로 우석이 나간 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너무 사이가 좋아서 다들 그렇게 생각하는데 친남매는 아니에요. 우석이 2년 먼저 이곳에 들어왔어요. 아름이가 들어와 한동안 적응 못 했는데 우석이 때문에 많이 좋아졌다는 소리 들었어요. 어린것이 엄마와 떨어져 많이 불안했던 모양이에요. 몇 날 며칠 밥을 못 먹는 걸 우석이 어르고 달래고 해서 겨우 먹기 시작했대요. 친동생이라도 그렇게 돌보지는 못할 거예요.”

보육원에서 봉사하시는 선생님들의 마음은 모두 한결같았다. 마음이 짠하고 가슴이 아리고 어떤 날은 눈물을 한 바가지 흘리고 돌아가기 일쑤였다.

뒷마당으로 나온 우석의 눈에 떨어지는 꽃잎을 잡으려고 토끼처럼 껑충껑충 뛰는 아름이 보였다.

‘저러다 넘어지면 어쩌려고 뛰어!’

우석은 발걸음을 빨리했다. 아니라 다를까 우석이 우려한 대로 아름이 발목이 겹질려 주저앉으며 눈물을 흘렸다.

“아름아!”

우석의 목소리가 들리자 아름이는 눈물을 참았다가 소리 내어 울었다. 우석이 아니었으면 속으로 울음을 삼켰을 텐데, 그녀의 편인 우석이 있으니 눈물이 솟구쳤다.

“…오빠!”

“다쳤어?”

“…응.”

“어디 봐봐!”

우석은 작은 손에 잡혀 있는 아름의 발목을 잡았다.

“많이 아파?”

“…조금.”

“일어설 수 있겠어?”

아름은 자신이 없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우석은 허리를 굽혀 아름의 팔을 어깨에 감고 한 손은 허리를 감았다.

“천천히 일어서 봐.”

아름은 한쪽 발을 딛고 일어서기는 했지만, 아픈 다리는 바닥에 닿지 않고 들고 있었다.

“아름아, 아픈 다리 바닥으로 내려야지. 그래야 얼마나 다쳤는지 알지.”

“아플 거 같아.”

“그러니까 아주 천천히 바닥에 대봐.”

아름은 우석이 하라는 대로 아주 천천히 발을 땅에 디뎠다. 발목이 욱신거렸지만 그렇다고 못 견디게 아픈 건 아니었다.

“어때?”

“아픈데 병원에 안 가도 될 거 같아.”

“병원에 가기 싫어서 아픈데 안 아프다고 하면 안 돼.”

“정말이야. 안 움직이면 괜찮아.”

“이 바보야! 당연히 안 움직이면 안 아프지. 움직여도 안 아파야 하는 거잖아!”

“오빠!”

아름은 보육원 문이 열리자 얼른 우석의 입을 막았다. 다른 손 검지를 입술에 길게 가져다 대며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었다.

우석은 얼른 아름을 업어 가까운 벤치에 앉혔다.

“여기 잠깐만 있어.”

일어서는 우석의 팔을 아름이 움켜쥐었다.

“오빠! 원장님께 말하면 안 돼.”

“알았어. 말 안 해.”

우석은 보육원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상비약을 넣어 둔 서랍을 열고는 언젠가 다쳤을 때 발랐던 빨간약과 함께 붕대를 가지고 나왔다. 눈이 빠지게 문만 쳐다보던 아름의 불안했던 눈빛이 우석을 발견하자 환해졌다.

“일단 약 발라 보자.”

“응, 오빠 사랑해.”

아름은 우석을 향해 배시시 웃었다. ‘사랑해’라는 단어는 아름이 우석에게만 하는 말이었다. 겁이 많았던 검은 눈동자는 오직 오빠 우석을 향해서만 반짝였다.

아름의 ‘사랑해’라는 말이 처음에는 낯설었다. 언젠가 엄마가 너를 많이 사랑한다며 당분간만 있으라고 보육원에 맡기면서 했던 말이었다. 그래서 우석은 사랑을 믿지 않는다. 기다리다 지쳐 이제는 엄마를 기다리지도 않았다. 서서히 엄마의 목소리와 얼굴이 가물가물해졌다.

“나도 너 사랑해.”

우석은 처음으로 사랑이라는 단어를 뱉어냈다. 아름을 통해 우석의 삶이 행복해졌다. 엄마와 떨어져 이곳에서 생활하며 불안했던 마음이 자신과 똑같은 모습으로 들어온 아름을 보며 연민을 느꼈다. 처음으로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게 했다. 간혹 형들이 시비를 걸어 상처가 났어도 아름이 엉엉 울며 가슴을 파고들 때면 고통도 사라지고 아픈 마음도 치유되곤 했다.

약을 바르는 손이 조심스러웠다. 혹시라도 아플까 봐 입으로 호호 불며 발목이 빨개지도록 약을 바르고 어설프게 붕대를 감고 양말을 끌어 올렸다.

“혹시라도 아파지면 꼭 오빠에게 말해야 돼?”

“응.”

“약속!”

우석이 새끼손가락을 내밀자 고사리 같은 작은 손가락이 우석의 손가락에 감겨 왔다.

“약속!”

우석은 벤치에 등을 기대고 앉아 눈처럼 떨어지는 꽃잎을 쳐다보았다. 한 잎, 두 잎 떨어지던 꽃잎이 바람이 불며 마치 하늘에서 눈이 내리듯 우수수 떨어졌다.

유독 뒷마당 너머의 언덕에 벚꽃이 많았다. 우석은 이 모습을 벌써 4년째 보고 있었다. 예쁜 줄 몰랐는데 오늘은 유독 흩날리는 꽃잎에 시선이 머물렀다.

“오빠 예쁘지?”

아름은 손바닥을 펴 여러 장의 꽃잎을 보여주었다.

“네가 더 예뻐. 앞으로 이런 거 잡느라고 넘어지는 거 하지 마.”

“꽃잎 다 떨어지면 못 보잖아.”

“내년이면 다시 펴.”

“내년?”

“응, 너 여덟 살 되면 다시 펴.”

순식간에 아름의 눈동자에 이슬이 가득 차올랐다. 갑자기 일어난 일이라 우석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름아! 왜?”

얼굴이 일그러지며 아름의 얼굴이 눈물범벅이 되었다.

“아파서 그래?”

훌쩍!

“…오빠, 나 여덟 살 되면 엄마가 데리러 온다고 했어. 그러면 오빠 못 보는 거야?”

우석은 팔을 뻗어 우는 아름을 끌어다 안았다. 우석도 2년만 기다리면 데리러 온다고 했는데 벌써 이곳에 온 지 4년이 되었다. 딱! 한 번 찾아왔던 엄마는 그 후로 감감무소식이었다. 이곳에 있는 아이들 대부분이 부모님을 기다렸다. 보육원 대문이 열리면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모두의 시선이 그곳으로 향했다. 우석은 이제 단련이 되었는지 대문을 쳐다보지 않았다. 엄마가 데리러 올 거라 기대하고 있는 아름에게 어떠한 말도 해줄 수가 없었다.

우석이 느끼는 박탈감을 아름이도 느껴야 한다는 사실이 못 견디게 괴로웠다.

* * *

보육원 원장실에 다녀온 후 우석은 하루가 다르게 말수가 줄어들고 눈빛이 시들어 갔다. 아름이 옆에 와 알짱거려도 예전처럼 놀아 줄 힘도 없었다. 그저 안타까운 시선으로 아름을 쳐다볼 뿐이었다.

“오빠! 어디 아파?”

얼굴을 들이밀며 물어보는 아름은 눈썹을 빠르게 깜빡였다. 나름 그녀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애교였다.

“아니, 아름아. 여기 앉아 봐.”

아름은 오빠 옆에 무릎을 세우고 앉았다. 우석은 주변을 훑어 아무도 두 사람에게 관심이 없다는 걸 확인하고 얼굴을 내렸다.

“혹시라도 위험하면 오빠가 어디로 가라고 했지?”

우석은 아름만 들리게 귀 가까이에서 속삭였다. 아름은 대각선으로 손을 뻗었다.

“맞아. 무조건 그곳으로 들어가 있어. 원장님이 화났거나 형들이 싸우거나 해도 그곳에 가 있어. 언니들이 심부름시킨다고 이상한 거 다 하지 말고.”

“이상한 거 뭐?”

하긴 설명을 한다고 일곱 살인 아름이 다 알아들을 수는 없을 거 같은데 한 가지라도 더 가르쳐야 하는데 시간이 많지 않았다.

우석이 불안한 마음을 애써 누르며 팔목에 있는 낡은 매듭의 팔찌를 빼냈다. 엄마가 간직하고 있으라고 했던 건데, 너무 낡아서 끊어질 정도가 되었다.

“이거 가지고 있어.”

항상 우석의 팔목에 있었다는 걸 아름도 알고 있었다. 어린 마음에도 오빠가 소중하게 간직한다는 걸 느꼈다.

“이거 왜?”

“혹시라도 오빠 잊어버리면 안 되잖아. 이거 가지고 있으면 나중에 어른이 되더라도 내가 널 알아볼 거야.”

그 어린 마음에도 우석이 많이 이상했다. 눈만 깜빡이며 우석을 빤히 쳐다보는 눈빛이 잔잔한 파도처럼 일렁였다.

‘아름아! 오빠가 없더라도 밥 잘 먹고, 울지 말고, 엄마가 너 데리러 꼭 왔으면 좋겠다.’

우석은 눈물이 솟구치자 고개를 반대쪽으로 돌렸다. 울음을 참느라 가슴이 들썩였다. 설움을 삼키려 이를 악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