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 나의 낯선 소울메이트

#1.

“…멍청이 같으니라고.”

멍청이가 누구냐고? 나… 바로 나! 나라고! 늘 똑같은 고민, 똑같은 길에 서서 어디로 갈지 고민하는 방향치. 리얼 길 못 찾는 현실 방향치도 맞고 내 인생도 늘 방향치고.

“그러길래. 혼자서 쪽팔리게 여긴 왜 와 가지고….”

그렇다. 나는. 지금. 또 길을 잃었다. 심지어 대낮인데, 뭐 하냐 정신 줄 놓고.

극심한 빠순이까지는 아니지만(아니라고 하고 싶다) 내가 좋아하는 아이돌이 온다 해서 용기 내서 혼자 와봤는데, 이런 한심한 꼬락서니다. 티브이에서만 보던 내 아이돌 한번 구경이라도 해볼까 해서 집을 나섰는데 생각보다 너무 많은 사람에 치였다. 그러곤 잠시 자리를 이탈하자마자 길을 잃어버렸다. 한적한 곳에서 친구한테 연락이나 해볼까 하고 오게 된 게 동네 뒷산인 거 같은데….

결론은 망했다.

팀을 짜서 운동하는 프로그램이라 방청 신청을 따로 안 해도 돼서 만만하게 구경만이라도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온 건데, 쓰읍. 까치발 들고 먼발치에서 보다가 밀려 밀려 여기까지 오게 되었네? 여기 대체 어디야. 뭔가 공원 뒷산 같은데? 다시 왔던 길을 따라 돌아가 봤지만 이상하게 우거진 풀숲이 나와서 결국 헤매던 자리로 돌아왔다.

무슨 여기가 지리산, 설악산도 아니고 동네 뒷산인데도 방향을 못 잡고 이러고 있냐. 한심한 방향치가 여기서도 나오네.

“저쪽으로 가면 다시 그 운동장이 나올 거 같긴 한데.”

선뜻 발이 안 떨어졌다. 이러다 스피커 소리마저 멀어질까 봐 너무 무서웠다. 그래도 다행인 게, 나무와 언덕 사이에 소리가 서로 부딪쳐서 그런지 멀리 작게나마 함성 소리가 들렸다.

“경기 시작했으려나. 아놔… 우리 강찬이 봐야 되는데!”

요즘 눈독 들이고 있는 가수가 있는데 강찬은 그룹의 멤버였다. ‘민트’라는 그룹인데 사실 내 최애는 따로 있고 강찬은 운동하는 친구라 이런 프로그램에 유독 잘 불려 다닌다. 좋아하는 그룹이니 애착이 가지만 왠지 창피한 구석이 있어 아무한테도 얘기 안 하고 혼자 몰래 왔건만, 쯧쯧 역시나 잘못된 선택이었다. 체육 예능은 역시 집에서 보는 게 젤 편한 게 맞네.

또록.

“학, 깜짝이야.”

갑자기 한적한 곳에서 들리는 핸드폰 메시지 소리에 혼자 기겁했다. ‘김재훈’이라고 저장된 이름이 뜨자 이영은 갑자기 안절부절못하기 시작했다.

그렇다. 나 하이영. 갓 스무 살 된 내가 유일하게 아직까지 잘하는 게 하나 있다면 바로 한곳에 꽂히면 길게 좋아한다는 것. 짝사랑 세계 챔피언… 이라는 게 있으면 메달 하나는 받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대학 OT에서 너무 친절하게 말 걸어 준 그가 결국 이영의 눈에 꽂혀 버렸다. 대학을 들어갔는데도 왜 내 전공은 늘 짝사랑이지? 하면서도 역시 짝사랑이 체질이다.

[오늘 뭐 해?]

재훈의 문자에 그대로 굳어 버린 지 시간이 꽤 지난 거 같다. 핸드폰만 노려보고 답장을 뭐라고 하지에 고민고민하고 있는데 옆에 웬 검은 그림자가 이영의 얼굴을 쓰윽 덮었다.

“오늘 뭐 해? 뭐 하긴….”

“누… 누… 구… 뭐… 뭐 하시는…?”

갑자기 웬 지나가던 남자가 자신의 핸드폰을 보고는 따라 읽는 이상한 일이 생기자 이영이 용수철처럼 튀어나와 피해 버렸다.

와 씨… 간 떨어질 뻔했네. 이렇게 뒷산에서 모르는 남자가 다가오는데 안 놀랠 사람 있음?

“아, 미안. 너무 고민하는 거 같아서 대체 뭔가 하고….”

멋쩍게 서 있던 그는, 혼비백산한 이영의 모습이 웃긴지 소리 안 나게 입을 꽉 다물고 웃고 있었다.

…뭐지, 얘는…?

*

역시 야외 촬영은 늘 딜레이의 연속이다. 방송이 그렇긴 하다. 빡빡할 땐 미친 듯이 바쁘고 널널할 땐 한없이 시간이 남아도는 아이러니의 세계.

세트 문제로 다시 시간이 딜레이 되어 담배 피우러 몰래 도망 나왔다가 다시 담배를 도로 집어넣었다. 운동장에서 몇 발자국 걸어 나온 거 같지도 않은데 주변에 나무들이 많은 뒷산이 보여 산불이라도 나면 큰일 날까 싶어 아쉽게 담배를 접었다. 누가 보는 건 상관없지만 이상한 데서 준법정신이 투철하다.

한적한 길이 나 있는 곳까지 오다 보니 웬 학생이 핸드폰만 주야장천 노려보며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 걸 한참이나 쳐다봤다. 옆에 사람이 있는지도 모르게 뭘 그렇게 몰두하고 있나 봤더니, 딱 봐도 좋아하는 남자에게 온 문자인 거 같다. 모르는 여자애지만 슬슬 본능적인 장난기가 올라왔다.

남자의 눈에 비친 여자는 자기보다 한참이나 어려 보이는 얼굴이었고, 고등학생 느낌을 지우려 교복을 갓 바꿔 입고 나온 것 같았다. 평일 이 시간에 여기서 서 있는 걸 보아하니 수업을 째고 온 것 같았지만 불량한 티는 나지 않았다. 엔간한 연예인보다 큰 눈을 자랑하는 소녀였기에 눈에서 레이저가 나올 거같이 핸드폰을 노려보는 모습에 누구라도 발걸음을 멈출만 하다고 생각했다. 저러다 정말 눈이 튀어나오는 거 아냐? 눈을 받쳐 줘야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대답이 너무 늦으면 곤란하지 않을까?”

“아, 맞다. 대답… 아!”

해괴하고도 이상한 낯선 자를 경계의 눈길로 훑어보던 여자는 그의 조언에 다시 정신을 차리고 핸드폰을 쳐다보았다. 근데 진짜 뭐라고 답장하지. 아아아, 그러곤 다시 머리를 쥐어뜯는다.

“아니, 이게 그렇게 머리를 쥐어뜯을 정도야? 줘봐, 내가 써줄까.”

…이 인간이 뭐라는 거야. 진짜.

차마 육성으로 뱉을 수 없었지만 이영은 최대한의 어이없는 눈빛을 그에게 쏘아 주었다. 갑툭튀해서 간 떨어지게 해놓고 이 중요한 문자에 지가 대신 답장이라니! 하아… 근데 진짜 뭐라고 보내야 될지 머릿속이 하얗게 되긴 했다. 이런 쪽으로는 순발력이나 말솜씨가 제로다.

“우선 여기 앉아 봐요. 서서 안절부절못하니까 나까지 정신없네.”

벤치 앞에 우두커니 서 있던 남자는 털썩 앉고는 이영에게 앉으라며 손짓을 했다.

“아아, 내가 왜 다리가 아픈가 했네… 의자를 옆에 두고 계속 서 있었네.”

의자에 앉지도 못하고 이러고 서 있으니 지나가던 사람이 아주 꼴불견으로 봤겠구나 싶었다. 그나저나 이 인간은 언제부터 여기 있던 거지? 무섭. 아직도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못한 채 이영은 아직도 남자를 곁눈질했다. 그제야 남자의 상의에 걸쳐진 숫자 띠가 보였다.

“어? 프로그램 참가자세요?”

우와, 우리 강찬이 가까이서 볼 수 있겠다. 개부럽!

연예인 팀이랑 일반인 팀이 붙어서 경쟁하는 프로그램이던데 일반인 팀이신가….

“아, 이거 보러 왔어요?”

본인의 옷을 슬쩍 올려 보이며 묻자, 이영은 부러운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민트의 강찬 보러 와서….”

“전 홍송이에요.”

“네?”

“홍송이요. 제 이름.”

팀 이름이 홍송인가? 중국집 같은 네이밍에 당연히 모른다는 듯 눈을 똥그랗게 뜬 이영을 보고 홍송은 씁쓸 묘한 표정을 지었다.

“아… 모를 거라 생각은 했어요. 신인이라.”

말하는 뉘앙스를 보아하니, 이쪽도 연예인? 아차차 완전 실수했다.

민망함에 얼굴이 갑자기 화르르 달아오른 이영의 볼과 눈을 봤다. 홍송은 익숙한 상황인 듯 별거 아닌 척을 했다.

“아아… 어. 완전히? 낯설지… 는 않아요. 이렇게 보니까! 최근에 뭐 드라마 봤는데 거기서 남주 친구의… 친구로 나오셨죠, 친구의 동생인가?”

거의 쥐어짜듯 생각한 머릿속에 콩알만 하게 남은 그의 잔상에 이영은 신나서 소리 질렀다.

“어 맞다, 맞다. 그 사람이네 오오, 연예인을 실제로 보다니.”

“민트 좋아하면 아까 연예인 많이 봤을 텐데? 연예인 실제로 보는 거 처음도 아니잖아요? 괜히 오버하는 거 지금 너무 어색하거든요.”

“아… 죄송합니다… 아….”

이영의 발 연기에 홍송은 피식하고 웃으며 고개를 떨구었다.

“이제 확실히! 알 것 같아요. 진짜! 나오시는 거 다 챙겨 볼게요! 이름이 하송? 이였죠! 오케이 접수.”

“홍. 송! 하송 아니고 홍송!”

연달은 실수에 그냥 입을 꿰매 버리고 싶은 이영이었다. 눈치 보며 슬슬 웃자 홍송도 쿨하게 눈썹을 올렸다가 내렸다.

위잉잉, 경기를 재개하려는지 사이렌 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아차차, 가봐야겠다. 휴식 끝.”

앉고 있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홍송은 옆에 두었던 본인의 핸드폰을 집어 들고 뛰기 시작했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고는 뭘 두고 왔는지 다시 급하게 돌아왔다.

“이봐, 학생. 거기도 경기 보러 온 거 아니었어? 안 가?”

“아, 맞다. 나도 가야죠!”

순식간에 뭔 일이 벌어졌나 싶을 정도로 번개같이 지나간 시간이었다. 그 덕에 정신도 혼도 쏙 빠져 버린 상태였다.

“난 먼저 뛰어갈 테니 천천히 와! 경기 잘 보고!”

“네. 먼저 가세요.”

그래도 말이라도 섞었다고 뒤 한번 돌아보고 쿨하게 인사하는 그를 보고 이영도 정신을 차려 뛰기 시작했다. 눈앞에서 금세 사라졌지만 그가 어느 방향으로 갔는지는 눈여겨보았다. 아하, 여기가 다시 내려가는 길이었구나. 생각지도 못한 인연에 이영은 이 상황이 좀 웃기다고 생각했다.

“내 연예인 보러 왔다가, 남의 연예인을 만나고 가네. 허?”

역시 늦게 합류한 탓인지 아까보다도 더 뒤로 밀린 자리밖에 남지 않았다. 설치된 전광판으로 봐야 하는 신세가 되긴 했지만 그마저도 서로 좋아하고 응원하는 멤버를 보려고 다들 까치발 전쟁이었다.

“까악, 강찬! 강찬!”

누가 시키지도 않아도, 내가 좋아라하는 멤버를 보니 내적 깊은 곳에서 함성이 올라왔다. 끄아아 단전에서부터 끌어올리는 본인의 모습이 순간 부끄러웠지만, 뭐 어때, 여기 아는 사람도 없는데.

“어? 저 사람이구나! 송! 송!”

아직 신인이라 그런지 팬덤이 없어서 그를 응원하는 사람은 없었다. 차마 부끄러워서 소리는 못 내고 호우, 정도의 하이 톤의 음성과 열과 성을 다해 손뼉을 쳤다. 아, 저렇게 또 전광판으로 보니 연예인 맞네. 아까는 정신이 없어서 못 봤는데 심지어 잘생기기까지 했다. 아까비. 사인이라도 받아 놓을걸.

“자, 모두 안전히 귀가해 주시고, 다음 회차에 또 찾아뵙겠습니다.”

사회자의 말을 끝으로 사람들은 우다다다 썰물처럼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꽉 찬 운동장은 이제 듬성듬성 스태프만 남았다. 완전 밤은 아니었지만 해가 넘어가 점점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지금 가면 지하철에 사람 많을 텐데… 뭐 집도 별로 안 머니까 쉬엄쉬엄 가야겠다.”

혹시나 강찬의 퇴근길을 볼 수 있으려나? 지금 몇 시지?

가방에서 핸드폰을 집어 시계를 보려는데, 어? 어? 뭐야?

“헐….”

내 바탕 화면이 아닌, 이 낯선 핸드폰은 뭐지?

방금 내 가방에서 꺼낸 거 맞는데?

…다시 봐도 내 건 아닌데? 아니, 누구랑 바뀌었나? 아니 바뀔 만한 상황이 없는데?

머릿속에 물음표 100만 개와 함께 이영의 표정이 썩어 가고 있는 찰나, 손에 들고 있는 핸드폰에 벨 소리가 울렸다.

“헐….”

벨 소리가 너무 내 것이 아니라는 팩트까지 찍어 주시고, 망연자실하게 손에 있는 폰을 바라보는 이영이 급하게 전화를 받았다.

[어우, 받아서 다행이다.]

상대방의 안도의 숨소리가 들리자 이영도 혹시나 해서 물어봤다.

“혹시 제 핸드폰 가지고 있는 분인가요?”

[미안, 이름도 몰라서 못 부르겠네. 나 기억하려나? 홍송?]

“헉? 왜 제 폰이 거기에….”

[아까 급하게 뛰어가면서 바뀌었나 봐. 내가 잘못 집어 온 거 같네. 혹시 집에 갔어? 나도 이제야 확인해서.]

“아직 촬영장이긴 해요. 어디 계세요? 제가 그쪽으로 갈게요.”

[근데 이름이 뭐야?]

“하이영.”

[이름이 뭐냐고?]

“하. 이. 영.”

[지금 장난칠 때는 아닌 거 같고. 나 바쁘거든?]

“이영이라고. 하이영! 하씨 하씨!”

[엥? 그게 이름이라고? 근데 나한테 방금 욕한 거야?]

하, 평생 들어온 놀림을 초면의 연예인에게 또 들어야 하는 거야? 빠득빠득 이를 갈며 이영은 가방을 주섬주섬 챙기고 뛰기 시작했다. 어둑해지는 시간 카메라 조명들도 다 철수하니, 원래 있던 은은한 조명만이 남아 운동장을 비추고 있었다.

이영은 긴 머리를 찰랑이며 후다닥 약속 장소로 뛰어갔다. 오늘 진짜 운수가 좋은 거야, 나쁜 거야. 내 생전에 연예인을 두 번이나 만나네. 이런 얼토당토않은 이유로.

“송! 송! 여기요. 여기.”

두리번거리는 홍송을 보고 이영이 먼저 알은체했다.

“내 이름 또 까먹었지?”

“아니요. 알죠, 알죠. 송송.”

“이름 말고 성까지.”

“…송.”

신기한 소녀는 말도 웃기게 하지만 요리조리 상황을 피해 가며 얼굴을 구기는 표정이 재미있다. 재미있는 녀석이네, 진짜.

“너도 이름 진짜 특이하다. 안 잊어버리겠어. 강찬이 보러 왔다고 했지?”

오늘 처음 본 낯선 연예인이 갑자기 자신의 앞으로 누군가를 끌고 왔다.

대박! 미쳤다….

강찬이다.

강찬이 눈앞에 있다. 이게 꿈이야 생신이야. 입이 떡하니 벌어진 이영은 입을 다물지 못하고 홍송의 옆에 있는 누군가를 쳐다보았다. 다시 한번 강찬이다. 완전 회로가 정지되어 버린 거 같았다.

“숨 쉬어. 숨!”

그대로 굳어 버린 이영을 보고 홍송은 또 그게 웃겨서 푸하하 하고 크게 소리 내서 웃어 버렸다.

“우와, 완전 나랑 만났을 때랑 다른 반응이네. 너무 비교되네.”

“안… 녕하세요.”

갑자기 강찬을 데려온 홍송이 멋있어 보이는 건 기분 탓이라고 해두자. 우와, 인생에 이런 기회가 다시 있을까. 민트의 멤버가 내 앞에서 말을 하고 있다니!

“아까 만난 학생인데, 니 팬이라고 해서 인사 좀 시켜 주려 했지. 내 이름은 1도 모르더라고.”

장난치는 홍송이 얄미웠지만, 눈앞에 꿈에 그리던 민트의 멤버가 있다고 생각하니 심장이 한도치를 넘어 벌렁벌렁 요동치느라 숨을 못 쉴 지경이었다. 최애가 아니라 별 감흥 없을 줄 알았는데 웬걸. 말이 안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