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날 이렇게 대한 건 네가 처음이야

“비상이다.”

유승현 대표가 잔뜩 굳은 표정으로 직원 한 명, 한 명과 얼굴을 마주했다.

직원이라고 해봤자 고작 달랑 두 명뿐인 소규모 광고 대행사이지만.

“어떻게 된 게, 여긴 맨날 비상이야.”

해인이 다 들리도록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며칠 전 뽑은 신입 사원 주원이 고개를 푹 숙이며 양쪽의 눈치를 살폈다.

“이번엔 진짜 비상이다.”

승현이 자못 심각하게 얼굴을 구겼다.

“아, 그래요? 이번엔 또 무슨 일인지 들어나 봅시다.”

해인이 심드렁하게 왼쪽 턱을 괴고 앉아 펜대를 굴렸다.

벌써 입사 1년 차. 어떻게 된 게 이놈의 광고 대행사는 하루가 멀다 하고 매일 위기에 또 위기란다.

대학 선배인 승현이 잘 다니던 대기업을 때려치우고 처음 창업을 한다고 했을 때, 뜯어말렸어야 했다.

마케팅 5년 경력을 살린다기에 뭐 대단한 일을 벌일 줄 알았더니만, 이건 뭐.

사실 더 큰 문제는 민해인 자기 자신이었다.

본인이야말로 왜 잘 다닐 뻔하던 회사를 입사하자마자 때려치우고, 이 선배를 뭘 믿고 따라나섰던 것인지.

저 멀쩡한 허우대와 화려한 말발에 속지 말았어야 했다.

나중에 회사가 커지면 수십 배로 돌려받을 수 있다는 스톡옵션을 행사하기는커녕, 월급이나 제대로 나오면 다행이다 싶다니까.

“칸이 사라졌어.”

“예에?”

해인이 크게 놀라 턱을 괴고 있던 손을 놓쳤다.

워낙 크게 소리를 지른 탓에, 해인의 반응만 살피고 있던 주원이 덩달아 놀랐다.

대기업 중에서도 갑질로 유명한 퍼스트 커피. 모든 광고 대행사들이 두 손 두 발을 들고 나가떨어지는 바람에, 신생사인 애드 퀸이 겨우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자리를 잡는 건가 싶었는데, 칸이 사라졌다니!

“내가 아는 칸, 그 칸이 맞아요? 그 칸이 정말로 사라졌단 말이에요?”

해인이 승현의 멱살이라도 잡을 기세로 달려갔다.

“네가 아는 그 칸이 맞겠지. 내일 커피 광고를 찍기로 했었으니까.”

“지금 남 말하듯 할 때예요? 그래, 그 계약! 당장 커피 광고는 어떻게 하느냔 말이에요!”

해인이 부랴부랴 책상 서랍에서 광고 촬영 계약서를 찾아 들고 왔다. 칸이 사라지면서 무단으로 계약이 해지됨에 따른 위약금이야 받을 수 있다지만, 문제는 퍼스트 커피였다.

광고 모델이 사라져서 일정에 차질이 생겼다고 보고하기엔, 훗날이 너무 두려웠다. 퍼스트 커피라면 마치 모기 한 마리 치우듯, 애드 퀸을 이 바닥에서 없애고도 남을 것이다.

“지금 칸 소속사도 난리야. 어제 새벽까지 드라마를 찍고선 갑자기 잠적했다는데 기사 막아야지, 남은 일정 조율해야지, 아무튼 엄청 정신없더라니까.”

“저기요, 대표님? 지금 칸 소속사 걱정할 때예요? 우리가 더 큰일이거든요? 이번 일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면, 애드 퀸은 문 닫을 각오를 해야 한다고요!”

“그래서 내가 비상이라고 하지 않았냐. 네가 안 믿어 놓고선, 뭘.”

“지금 이럴 때가 아니잖아요. 칸이 어디로 숨었는지 찾아봐야 하는 거 아니에요?”

“소속사도 못 찾는 걸, 우리가 무슨 수로.”

“그럼 그냥 손 놓고 있자는 거예요?”

해인은 울화통을 터뜨렸다.

이런 사람을 대표라고 믿고, 이 회사에 들어온 내가 멍청이지. 대체 이런 후회를 앞으로 몇 번이나 더 반복하게 될까.

아니다, 의외로 얼마 남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왜냐고? 애드 퀸은 곧 문을 닫게 될지도 모르니까.

아하하하.

순식간에 눈앞으로 카드 청구서와 학자금 대출, 각종 고지서가 날라왔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지금 입고 있는 스커트는 무이자 3개월 할부로 사지 않았을 거 아냐.

“칸은 소속사가 책임지고 촬영 현장으로 데려오겠다고 하니까 일단 기다려 보자고.”

“책임지고 데려온대요? 만약… 안 오면요?”

“그럼….”

유 대표는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만약 칸이 오지 않는다면 정말 끝장이란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테니까.

* * *

다음 날.

해인은 새벽 6시부터 광고 촬영장에 도착해 있었다.

칸이 안 오지는 않겠지. 설마설마하면서도 거의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다행히도 아직 뉴스는 조용했다. 슈퍼스타의 소속사답게 일 처리는 제대로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하긴 소속사야말로 칸이 사라짐에 따른 피해 금액이 천문학적일 텐데, 필히 책임지고 데리고 오리라.

칸이 사라졌다는 걸 모르는 스태프들은 분주하게 세트장을 만들고, 조명을 설치하고 있었다.

“아직입니까? 광고 콘셉트를 미리 설명해 드려야 하는데요.”

급기야 촬영 감독이 칸을 찾기 시작하자, 해인의 입술이 바짝바짝 메말랐다. 약속된 촬영 시간은 이미 15분이나 지나 있었다.

종종 스타들이 일부러 촬영장에 늦는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칸은 아니길 빌고, 또 빌었는데….

“많이 기다리셨죠? 제가 조금 늦었습니다.”

그때 웬 멀끔하게 생긴 남자가 반들반들한 슈트를 입고 나타났다.

해인은 잘생겼지만 처음 보는 낯선 남자를 무표정하게 바라봤다.

늦긴 뭘 늦어, 기다린 적이 없는데.

설마 나한테 한 얘기가 맞나 싶어 딴청을 피우려는데, 잘생겼지만 낯선 남자가 또다시 말을 걸어왔다.

“광고 찍으러 왔습니다.”

불길하다.

“뭘 하러 오셨다고요?”

“퍼스트 커피 광고 찍으러요. 칸 형한테 일이 생겨서 제가 대신하기로 했는데, 아직 얘기 못 들으셨나 봐요?”

짧은 순간이었지만 오뚝한 콧날과 베일 듯 날렵한 턱 선이 눈에 들어왔다. 다소 무표정했던 얼굴이 이내 반달눈을 하곤 해인을 향해 배시시 웃었다.

평소 같았으면 심장이 뚝 떨어지고도 남았을 법한 치명적인 미소. 하지만 지금은 매우 위급하고 다급한 상황이었다.

“못 들었는데요. 지금 칸 엔터에서 보낸다는 칸은 안 보내고, 그쪽을 대신 보냈단 얘긴가요?”

“뭐, 그렇게 됐습니다.”

남자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뭐… 뭐가 그렇게 됐어?

지금 남의 생명줄을 쥐고 흔드는 줄도 모르고, 뭐가 그렇게 됐어어어?

해인은 하마터면 버럭 소리를 지를 뻔했으나, 겨우 놀란 가슴을 진정시켰다.

그래도 칸을 대신해 보냈다는 건, 그 정도의 슈퍼스타란 얘기잖아?

최근에 빵 뜬, 누구나 다 알지만 나만 모르는 벼락스타가 있었던가.

“실례지만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신이준입니다.”

“누구요?”

“신이준이요.”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의 뇌 속 데이터에는 없는 이름이다.

“가수이신가요?”

“배우입니다.”

“혹시 출연 드라마가…? 아니면, 영화?”

“곧 생기겠죠.”

곧 생기겠죠오오? 그 말인즉슨, 아직 마땅한 출연작도 없다는 얘기잖아.

게다가 무슨 그런 대수로운 질문을 하냐는 듯, 뻔뻔하게 짓고 있는 이 표정은 뭐지?

“칸 엔터 소속 신인 배우란 말이에요?”

“칸 엔터에 들어간 지는 햇수로 2년째입니다. 제 호구 조사는 이쯤에서 하시고. 오늘 뭣부터 찍으면 됩니까?”

남자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능글맞은 처세에 하마터면 해인은 그를 촬영장을 안내할 뻔했다.

‘아니, 대표작 하나 없는 2년 차 무명 배우가 감히 칸 대신에 퍼스트 커피 광고를 찍겠다는 거야!’

해인은 치밀어 오르는 화를 꾹꾹 눌러 담으면서 그에게 바짝 다가갔다.

“저기요. 초면에 실례지만, 칸 대신에 그쪽이 광고를 찍는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요?”

“왜 안 됩니까?”

“왜 안 되냐고요? 그걸 꼭 말로 설명해야 아나요? 오늘 촬영할 광고는 무려 퍼스트 커피라고요!”

“그래서요?”

“네?”

그래서요, 라니.

남자가 광고 모델로 적합하지 않은 이유는 수십 개도 더 들 수 있었지만 그걸 일일이 설명하는 게 맞는 걸까 싶을 때쯤, 그가 천연덕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내 외모가 부족합니까? 어디서도 꿀리지 않는단 소리는 종종 듣는데요.”

“그… 그런 건 아니지만.”

“내 목소리가 별로입니까? 어디 가도 목소리에 꿀 발랐냐는 얘기를 종종 듣곤 했는데.”

“그… 그게 아니라요!”

잠깐만. 지금 이럴 시간이 없는데, 왜 이 사람에게 휘둘리고 있는 거지.

오늘 광고를 찍기로 한 칸은 사라졌고, 분명 퍼스트 커피는 이번 일에 대한 책임을 물어 올 거다.

칸 엔터에 구상권을 청구해 배상금을 두둑하게 챙긴 후, 이 바닥을 확 떠버리는 게 맞을까.

어쨌거나 저쨌거나 다신 이 업계에 발붙이기는 힘들 것 같다.

지금 눈앞에 서 있는 이 남자는 아무래도 명부를 들고 온 것 같았다. 민해인 사회생활에 종지부를 찍어 줄 저승사자의 명부 같은.

“그런데 도대체 나는 왜 안 된다는 겁니까?”

정말 그 이유를 모르겠다는 듯 말간 표정을 짓고 있는 남자와 마주하자니, 해인은 순간적으로 화가 폭발했다.

“아니, 지금 몰라서 물어요? 당신은 삼류 배우잖아요!”

“삼. 류. 배. 우…?”

남자가 미간을 찌푸렸다.

아차차. 내뱉은 말을 주워 담긴 이미 늦은 것 같지만, 이쯤 되면 그냥 이판사판이었다.

지금 누구 마음을 살필 정도로 여유가 없다 이거야. 내 목구멍이 바로 포도청이라고!

“그, 그래요! 삼류 배우요! 난 그쪽이 누군지 전혀 모르겠는걸요. 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당대의 슈퍼스타만 찍는 커피 광고에 욕심을 내는 거예요? 그것도 칸 대신에?”

“신이준입니다. 방금 전에 알려 드렸을 텐데.”

그가 낮은 목소리로, 또박또박 말했다. 그것은 마치 맹수의 으르렁거림과도 비슷했으나, 해인이 눈치챘을 리가 없었다.

“아니, 그러니까 나는 그쪽 이름도 지금 처음 들었다고요. 대한민국 국민 누구나 다 알아도 시원찮을 판국에, 지금 뭐 하자는 거예요? 아니, 칸 엔터는 대체 뭘 믿고 당신을 보낸 거죠? 나는 이럴 시간이 없고, 지금 비상인데…!”

“아이쿠, 신 배우님! 언제 오셨습니까?”

그때 촬영 감독이 허둥지둥 뛰어나오면서 서 있던 해인을 옆으로 밀쳤다. 그러곤 제자리에서 휘청거리는 그녀를 향해 인상을 쓰며 소리쳤다.

“뭐 하고 있습니까? 빨리 안으로 모시지 않고!”

당장 내쳐도 모자랄 판국에 안으로 모시다니요?

…라고 물어볼 틈도 없었다.

촬영 감독이 연신 허리를 조아리며 이준을 촬영장 안으로 모셔 가고 있었으니까.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이람. 해인은 답답한 마음에 승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 어, 해인아.

평상시와 다름없는 평온한 반응이었다. 승현의 태연한 목소리를 듣자마자 역시나 또 화가 치밀어 오른다.

“대표님, 지금 어디예요? 칸이 결국 안 나타났다고요!”

― 아, 아직 얘기 못 들었어?

자꾸 왜 여기저기서 못 들었냐고 하는 거지. 아무도 설명해 준 적이 없는데!

“일이 대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거예요?”

― 칸 엔터에서 다른 배우를 보내줄 거야.

“지금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요? 칸 엔터랑 계약한 이유가 칸 때문인데, 대체 배우를 보낸다는 게?”

심지어 칸 대신 누가 왔는지 알면, 아마 깜짝 놀라 나자빠질걸.

아무도 모르는 삼류 배우.

이름이 뭐랬더라.

― 어쩔 수 없지. 우리가 무슨 힘이 있나.

“선배! 지금 이렇게 태평하게 굴 때예요? 막말로 선배 회사 망하는 거지, 내 회사 망하는 거냐고요! 예?”

― 하여간 저렇게 성질이 불같아서는. 시집은 갈 수 있을지 걱정이다, 참 걱정이야.

휴대폰 너머로 승현이 혀를 끌끌 차는 소리가 들렸다.

“그건 선배가 걱정할 일이 아니고요. 퍼스트 커피는요? 퍼스트 커피가 가만있을 것 같아요? 앞으로 본인 살길이나 알아보시죠? 아무래도 애드 퀸은 망한 것 같으니까.”

― 애드 퀸이 망하긴 왜 망해.

대체 어떤 부분이 재미있는 것인지, 한참을 크게 웃던 승현이 여유롭게 말했다.

― 당연히 퍼스트 커피가 오케이 했으니까, 가능한 거 아니겠냐.

“뭐라고요? 퍼스트 커피가… 오케이를 했다고요? 지금 누가 대타로 왔는지는 알고 말하는 거죠?”

놀란 해인이 되물었다.

― 그래, 신예 배우 신이준.

직접 듣고도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퍼스트 커피가 어떤 퍼스트 커피인가.

직전 광고 대행사는 기획서의 줄 간격과 자간, 행간을 조절하며 스무 번째 버전까지 만들다가 두 손 두 발을 다 들었다고 했다. 또 그전의 광고 대행사는 10분, 30분마다 오는 재촉을 견디지 못하고 나가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