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라스베이거스 카이제 병원 VIP 병동 입원실.

미 최대 주류 유통회사 SA 인터내셔널 사종우 회장은 회사 법률고문, 이필립 변호사와 얘기 나누고 있다.

“나한테 동생이 있었단 말인가?”

“한국 보훈처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회장님의 선친 사종대 어른이 이번에 해외 독립지사로 판정받았고, 그 과정에서 밝혀진 바로는 선친이 하와이로 이민 오기 전에 친척 집에 맡겨진 동생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벌써 고인이 됐고….”

“그렇습니다. 동생분의 아드님도 사고로 돌아가시고, 그 슬하에 딸이 있다고 합니다. 사은채 양이라고.”

“그러면 내 유일한 조카손녀란 소린데….”

“은채 양의 어머니는 10년 전 재혼해서 분가한 상태라고 합니다.”

“이 고문, 지난번에 내가 유산상속과 관련해서 정리해 놓은 거 있지? 그걸 좀 수정해야겠네.”

“네,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

세계 최대 커피 원두 회사 ‘칼디’의 아시아 지부. 김이안 대표는 아침부터 잔뜩 화가 나서 정 비서를 부른다.

“이 칼럼니스트 누군지 아직 파악 안 된 겁니까?”

“지금 찾아보고 있는데, 필명으로 칼럼을 올려서 파악하는 데 시간이 좀 걸린다고 합니다.”

“칼럼니스트 ‘빈스톡’이라…. 이런 이름을 가진 커피숍이나 온라인 원두 판매처, 뭐든 좋으니까 반드시 찾아내라고 하세요.”

“네, 알겠습니다.”

커피 관련 잡지로써는 이단아라고 평가받는 ‘커피 이야기’에 필명 빈스톡으로 기고하는 칼럼이 몇 달 전부터 김 대표의 심기를 박박 긁고 있다.

지난달에 이어 이번 달에도 빈스톡이라는 칼럼니스트는 신랄하게 칼디에서 판매되는 ‘예멘 모카 마타리’에 대해 비판했다.

“내 커피가 쉰 행주 맛이라고?”

이번에 새롭게 내놓은 예멘 모카 원두는 칼디 본사에서도 심혈을 기울여 산지를 정하고, 재배부터 생산, 운반까지 모든 공정에 정성을 다했다. 커피나무에서 원두로 수입하기까지 4년을 공들인 작품을 쉰 행주 맛이라니.

“정 비서! 돈을 두 배, 세 배 줘서라도 무조건 이번 주 안으로 그 빈스톡 어쩌고를 반드시 찾아내라고 하세요!”

김 대표는 도저히 화가 가라앉지 않아 인터폰에 대고 다시 한 번 소리친다.

“아! 그리고 지금 마시는 예가체프 물 온도를 평소보다 5도만 높여서 한잔 더 부탁해요.”

***

“사은채, 그걸 왜 손으로 볶고 있냐? 지금 할 일도 많은데. 에구, 너도 참.”

“아저씨, 아니, 사장님, 잠깐이면 돼요. 이 예멘 모카는 제가 최고의 원두로 로스팅해 볼게요.”

“고집 좀 그만 부려라. 그러다 팔 다 나가지. 요즘 누가 로스팅을 손으로 하냐.”

“제가 좀 확인할 게 있어서 그래요.”

“네 고집을 누가 말리냐. 알아서 잘 볶아 봐.”

은채는 지금 30분째 프라이팬에 생두를 볶고 있다. 푸르스름 노랗던 원두는 어느새 짙은 흑갈색으로 변해갔다. 은채는 강배전으로 로스팅해서 융 드립으로 커피를 내릴 생각이다.

강배전은 흔히 말하는 프렌치 로스팅으로 원두가 검은색에 가까워지면서 캐러멜이 나와서 기름기가 도는 상태를 말한다. 진하고 중후한 맛을 좋아하는 사람은 대부분 강배전 원두를 선호한다.

“하. 남자도 딱 이런 프렌치 로스팅 같은 사람을 만나야 해. 이게 바로 진국이지. 암.”

은채는 커피를 볶으면서 혼자 남자 어쩌고 중얼거린다. 사장은 또 시작했다는 얼굴로 은채를 보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그런 남자 만나고 있잖아. 나 피디.”

“아저씨, 저 조만간 나 피디랑 헤어질 거예요.”

“당장 헤어지지 조만간은 또 뭐야? 그리고, 헤어진다고 한 게 벌써 5년이다.”

“이번엔 진짜라고요! 혼자서 무슨 디스커버리 채널을 만드시는지, 해외 촬영가면 죽었는지 살았는지 연락이 없어요.”

“나 피디 이번에는 무슨 다큐지?”

“전 세계 차란 차는 다 마시고 올 모양인가 봐요. 지금 어느 나라에 처박혀 있는지도 몰라요.”

“로스팅 이제 다 된 거 아냐? 와! 오늘 네 핸드 로스팅 덕분에 우리 가게 안에 연기 장난 아닌데?”

“커피 볶는 연기도 좀 나고 그래야, 정통 로스팅 커피 하우스 아닐까요? 사장님?”

“한 번만 더 정통 로스팅 찾다가는 소방차 출동하겠는데. 하하.”

“이제 끝!”

은채는 프라이팬을 들고 옥상으로 올라가려고 커피숍 입구로 뛰어간다.

-어어!

지금 빨리 열기를 빼주지 않으면 원두가 더 타서 쓴맛이 너무 강해진다. 은채는 옥상으로 가서 강풍기를 틀고 원두 열기를 빼주려고 프라이팬을 들고 뛰다가 커피숍을 들어오는 남자와 부딪힐 뻔 한다.

-쓰윽, 토도독, 토도독.

은채는 남자를 피하기 위해 프라이팬을 몸 옆으로 돌린다. 그 바람에 원두 절반이 프라이팬 밖으로 쓱 밀리더니 바닥에 타다닥 쏟아진다.

“악! 내 원두!”

일단은 남은 반이라도 건져야 한다는 생각에 은채는 프라이팬을 다부지게 잡고 계단을 후다닥 뛰어오른다.

김 대표는 순간적으로 몸을 돌려 여자가 들고 있는 프라이팬을 피했지만, 원두 몇 개가 구두 장식 위로 떨어진다.

옆에 있던 정 비서가 반사적으로 김 대표의 구두에 떨어진 원두를 손으로 털고, 신발 옆에 떨어진 원두도 한쪽으로 치우면서 길을 만든다.

“음, 음.”

커피숍 입구에서부터 가득 찬 연기에 김 대표는 헛기침을 하고, 정 비서는 그런 김 대표를 걱정하며 묻는다.

“대표님, 괜찮으십니까? 연기가…. 음음.”

“저는 괜찮습니다. 그런데, 여기가 그 칼럼니스트랑 연관 있는 곳이 맞습니까?”

“예. 확실합니다. 이 가게 이름이 빈스톡인 것뿐만 아니라, 이곳이 로스팅이라는 이름이 생소한 30년 전부터 커피를 볶은 가게라고 합니다. 알아보니 한국 3대 커피 명가 중 하나라고 합니다.”

“아직 누가 칼럼을 썼는지는 모른단 말이죠?”

“네…. 그건 아직….”

“일단 앉읍시다.”

김 대표는 성큼성큼 걸어가서 창가 자리가 아니라 가게 주방이 보이는 가운데 테이블에 앉는다. 로스팅 연기가 좀 빠지고 나니, 가게가 한눈에 들어온다.

테이블이라고 해봐야 창가 쪽에 5개, 가운데에 5개가 전부인 작은 가게다. 핸드 드립을 주로 하는지, 카운터에는 핸드 드립 장비들이 쭉 놓여있다. 그리고 한편에는 판매하는 원두가 진열돼 있고, 커피숍과 어울리지 않게 소품으로 사용할 수 있는 작은 나무 소반이 전시돼 있다.

커피숍 들어오는 입구에 커피나무가 2그루 있고, 주방 옆에는 커피생두 포대가 몇 개 쌓여있다. 60이 다 돼 보이는 남자는 핸드 드립을 하고 있고, 아르바이트생은 따로 보이지 않는다.

아까부터 다른 커피숍하고는 뭔가 다르다고 느끼고 있었는데, 이 커피숍에는 디저트 진열장이 없다. 카운터에 흔히 두는 쿠키나 바나나조차도 없다.

디저트를 안 파는 커피숍이라…. 김 대표는 가게를 들어올 때부터 느낀 생경함이 무엇 때문이지 이제 알 것 같다.

“저 남자분이 칼럼니스트인가?”

김 대표가 속삭이듯 정 비서에게 물어본다.

“그건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저분이 이 빈스톡 사장님인 것 같죠?”

정 비서도 김 대표 귀에 대고 속삭이다 김 대표 얼굴이 너무 가까이 있어서 흠칫 놀란다.

커피를 내려서 다른 테이블에 가져다준 남자가 주문받으러 온다.

“지금 로스팅한 원두가…?”

“아. 방금 로스팅한 것은 저희 알바가 자기 마신다고 로스팅한 거라 파는 게 아닙니다.”

“예멘 모카 마타리, 맞습니까?”

“아니, 원두 향만 맡고도 어떤 종류인지 아세요?”

“사장님, 방금 로스팅한 거 식히러 간 거 같은데, 그걸로 한잔 안 될까요?”

정 비서가 남자의 말이 길어질 것 같아 대화의 흐름 가운데를 툭 자르며 남자에게 부탁한다.

“그건 파는 게 아닌데….”

사장이 난처해하고 있는데, 은채가 식힌 원두를 체에 받치고 들어왔다.

은채는 자칫 잘못하면 팔 떨어지도록 볶은 원두를 저 남자 때문에 다 버릴 뻔했다는 생각에, 가운데에 앉은 남자를 흘깃 쳐다본다. 속으로는 그것보다 더하게 째려보았다.

“은채야, 이 손님들 네가 볶은 커피를 한 잔 마셔보고 싶다는데….”

“네? 아까 절반이나 쏟아서 이거 몇 잔 안 나온다고요.”

“손님, 어떡하죠? 저희 다른 커피도 좋은 게 많아요. 이번에 에티오피아 예가체프 원두가 정말 로스팅이 잘 됐는데, 그건 어떠세요?”

“아뇨. 저는 꼭 저 예멘 모카를 꼭 맛보고 싶습니다.”

김 대표는 남 눈치 보지 않고, 자신의 요구사항을 또박또박 말한다.

정 비서가 난처해하며, 어떻게 안 될까요 하는 표정으로 사장을 올려다본다. 사장도 그냥 한 잔 드려라 하는 표정으로 은채를 바라본다.

세 남자는 일제히 은채가 들고 있는 원두로 시선을 고정하고 있다.

“아우! 알았어요. 석 잔은 나오니까.”

은채는 원두를 그라인더에 갈아서 저울에 정확한 양을 잰다.

“저는 융 드립으로 내릴 생각인데, 두 분은 어떠세요? 종이필터에 내릴까요? 융 드립으로 하실래요?”

정 비서는 김 대표를 쳐다본다.

“융 드립으로 부탁합니다.”

“예, 저도 융 드립으로.”

융 드립은 종이필터에 비해 손이 많이 간다. 보통 스페셜티 커피숍에 가도 융 드립 커피를 맛보기는 어렵다. 핸드드립만을 전문적으로 하는 곳도 융 드립을 하는 곳은 손에 꼽힐 정도다.

은채는 융 드립 필터 위에 주전자를 빙빙 돌려 원을 그린다. 참을성 있게 40초 동안 원두를 불리고, 아주 얇은 물줄기로 1차 드립 한다. 융 필터에 물이 고이지 않도록 아주 천천히 물을 부어야 한다.

좀 전까지 로스팅하느라 팔이 조금 후들거린다. 하지만 은채는 후 숨을 내쉬고 다시 집중해서 2차 드립을 한다. 융 드립은 천천히 커피를 내려서 커피가 좀 식지만, 촘촘한 종이필터와는 달리 원두의 모든 맛이 풍부하게 우러난다.

“예멘 마타리는 로스팅도 정말 까다롭지만, 드립에 더 신경 써야 해요.”

은채는 커피잔을 두 남자 앞에 내려놓으면서 말한다.

“이렇게 융 드립을 하면 캐러멜 기름이 다 내려와서 와인같이 끈적하면서 초코 향이 진하게 나죠.”

김 대표와 정 비서는 은채 설명을 들으면서 먼저 커피 향을 음하고 맡는다. 진한 캐러멜 향과 기분 좋은 탄 맛이 코를 자극한다. 예멘 마타리를 제대로 로스팅해야 나는 향이다.

김 대표는 맛이 궁금해서 얼른 커피잔에 입을 댄다.

융 드립으로 뽑은 예멘 마타리라…. 커피를 공부할 때 말고는 융 드립 커피를 마셔본 지도 꽤 오래됐다.

“그리고 원두 크기, 물 양도 정말 중요해요. 원두가 너무 곱게 갈리면 진흙 맛이 나고, 물을 너무 흥건하게 드립 하면 쉰 행주 맛이 나거든요.”

-풉!

-켁켁!

김 대표는 마시고 있던 커피를 뿜을 뻔했다. 정 비서는 사레가 들려서 콜록거린다.

“두 분, 괜찮으세요? 물 좀 드세요.”

김 대표가 몇 달 동안 그토록 찾던 빈스톡은 분명 이 여자가 맞다. 이 여자는 그냥 이 가게 알바 같은데…. 뭐야? 커피 전문가도 아니잖아?

이런 여자가 필명 뒤에 숨어서 우리 커피를 그렇게 잘근잘근 씹어댔단 말이야?

김 대표는 당장 칼럼에 대해 따져 묻고 싶지만, 일단 참는다.

정 비서도 뭔가 이 여자에게 할 말이 있는 듯 입을 오물거리고 있지만, 김 대표는 눈짓으로 입 다물라는 신호를 보내면서 평소보다 10배는 점잖은 말투로 물어본다.

“그 썩은 행주 같은 맛이 어떤 맛을 말하는 거죠?”

“썩은 행주가 아니라, 쉰 행주요.”

“썩었든! 쉬었든! 음음…. 계속하세요.”

“아! 물을 너무 많이 부어서 커피 고유의 맛만 추출되는 게 아니라 융드립의 천 냄새, 필터의 펄프 냄새, 그리고 커피의 온갖 잡내가 같이 추출되는 걸 말합니다.”

“그래도 세계 3대 커피라는 예멘 모카 마타리를 쉰 행주에 비유하는 건 커피에 대한 예의가 아니지 않습니까?”

“제가 좀 말이 거칠었나요? 하하. 딱 떠오르는 맛 표현이 그거거든요. 몇 년을 정성 들여 가꾼 커피를 로스팅이나 드립 과정에서 망쳐버리는 거, 전 그게 더 커피콩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해서. 하하.”

남의 회사 원두를 썩은 행주…. 아니, 쉰 행주라고 해 놓고 이 여자 뭐가 이렇게 유쾌해?

김 대표는 예의 차리는 인간이 남의 회사 원두에 대해 그따위 표현밖에 못 쓰냐고 지금 당장 쏘아주고 싶다.

하지만….

마음과 달리 김 대표의 미각은 다른 말을 하고 있었다. 방금 융 드립으로 내려 준 예멘 모카는 지금까지 마셔본 커피 중 최고였기 때문이다.

저 여자 뭐지? 이런 로스팅에 이런 융 드립을 하는 걸 보면 분명 전문가는 맞는데, 저게 지금 전문가 포스냔 말이지….

은채는 카운터로 돌아가고, 정 비서는 김 대표 눈치만 살피고 있다. 김 대표는 눈을 은채에게 고정한 채 일단 남은 커피를 한 모금씩 음미하면서 마신다.

‘빈스톡이라는 필명은 이 가게 이름에서 따온 것 같군. 그러고 보니 저 사장님이 아버지인가? 아까 은채라고 이름을 편안하게 부르던데….’

김 대표는 주방에서 카운터로, 계산대로 움직이는 은채를 눈으로 좇고 있다.

“대표님, 어떡할까요?”

정 비서가 속삭이듯 묻는다. 김 대표는 여전히 커피를 마시면서 말이 없다.

“대표님?”

“음. 일단은 제가 커피를 한잔 더 마시고 싶은데….”

정 비서는 대체 대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일어나서 은채에게 간다.

“진짜 죄송하지만, 방금 마신 커피 한 잔 더 할 수 있을까요?”

“하하. 제 로스팅이 맘에 드셨나 봐요. 한잔은 더 나오니까, 바로 내려 드릴게요.”

은채는 연달아 두 잔을 달라는 손님 덕분에 기분이 한껏 좋다.

10년 가까이 이곳에서 알바하면서 터득한 것 중 하나, 손님이 연달아 커피를 두 잔 마신다는 건 자신이 만든 커피에 대한 최고의 칭찬이라는 것이다.

앗싸! 은채는 속으로 외치면서 더 정성을 다해 융 드립으로 커피를 내린다.

역시 내 로스팅 감은 죽지 않았어! 가는 물줄기로 아주 천천히 원을 그리면서 어느새 은채는 팔 아픈 것도 잊어버렸다.

김 대표는 여전히 은채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다.

강단 있는 말투와는 달리 가녀린 몸. 안경을 쓰고 있지만, 안경 너머로 살짝 보이는 눈은 쌍꺼풀이 크고 밝은 눈빛이다.

머리는 느슨한 포니테일로 묶고 있지만, 옆으로 잔머리가 삐져나와 있다. 묶은 머리 아래로 살짝 보이는 목선이 유난히 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