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위자료 깎아 달라고요

“결혼 계약을 정말 파기하시겠습니까?”

“네.”

유혜나는 새어 나오는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결혼 생활 3년 내내 바라고 바랐던, 자유와 해방의 날이었다.

계약 결혼을 한 상대방이 딱히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건 아니었다.

서류상으로 남편인 구윤환은 187cm가 넘는 훤칠한 키에 뚜렷한 이목구비, 다부진 몸매를 갖고 있었다.

아주 가끔이지만 그와 함께 고급 레스토랑을 가거나 백화점 명품관을 갈 때면, 여자들의 질투와 부러움이 섞인 시선을 한 몸에 받곤 했다.

우위 그룹 막내아들인 그는 미국 아이비리그 대학을 졸업한 후, 그의 할아버지가 만들고 아버지가 일군 회사로 돌아왔다.

본부장으로 취임한 후 유통 사업 부문을 단숨에 선두로 만들었으니, 그의 실력은 의심할 것조차 없었다.

부부 관계가 나빴느냐 하면, 꼭 그런 것도 아니었다.

윤환은 1년에 몇 번 있을까 말까 한 야근하는 날 빼고는, 저녁 8시에 꼬박꼬박 귀가했고 주말에는 온종일 집에 머물렀다.

다른 재벌가 망나니 아들들과 달리, 그 흔한 스캔들조차 없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

“그렇다면 계약서대로 협의 이혼으로 처리하면 되겠습니다.”

“네, 좋아요.”

“문제는 열 번째 조항인데요.”

그의 변호사가 안경을 치켜올리며 계약서를 다시 빠르게 훑었다.

바로 옆에 있는 계산기를 두들긴 후엔 혜나를 향해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이혼 귀책 사유가 본인에게 있다는 점, 동의하십니까?”

“네, 제가 원하는 거니까요.”

“그렇다면 이혼 위자료 100억 원을 현금으로 지불하시면 됩니다.”

“네? 100억이요? 아무리 재벌 집이라도 100억이 옆집 개 이름인가요?”

그녀는 순간 들은 귀를 의심했다.

“물론 현재 살고 있는 한남동 빌라와 고급 승용차 두 대 모두 구윤환 본부장님 소유가 되는 거고요.”

혜나가 잔뜩 의심하는 눈으로 쳐다보자, 변호사가 계약서에 쓰인 열 번째 조항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여기를 보십시오.”

[ 제10조 (계약의 해제). 이혼 시 부부 쌍방의 협력으로 이룩한 실질적인 공동 재산은 절반씩 분할하며, 위자료는 유책 배우자가 전액을 지불한다. ]

“네, 그러니까요. 집하고 차 모두 공동 재산인데, 제가 왜 맨몸으로 쫓겨나야 하죠?”

“현재 거주하시는 한남동 집은 구 본부장님께서 결혼 전부터 갖고 있었던 재산이고, 지금 타고 오신 차 또한 구 본부장님께서 사주신 것 아닙니까. 부부가 공동으로 이룩한 재산이 아닙니다.”

혜나가 입꼬리를 씰룩거리자 변호사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모님께서 결혼 후 재산 형성에 얼마나 기여했는지는 따져 봐야 하겠지만, 우위 그룹 광고로 번 3억 정도 될까요? 그 역시 구 본부장님께서 지원해 주신 거니 다툼의 여지가….”

큰일이었다. 졸지에 맨몸으로 쫓겨나게 생겼다.

“100억은요? 위자료 100억은 대체 어디서 나온 숫자죠?”

그녀가 급하게 소리 질렀다.

변호사가 계약서 열 번째 조항 밑에 단서를 차분하게 가리켰다.

[ 단, 위자료는 결혼 기간을 1할 계산해서 지급하며, 일 1천만 원으로 한다. ]

“두 분이 결혼 생활을 하신 지가 정확히 2년하고도 270일입니다. 하루 1천만 원씩 천 일을 계산하면, 정확히 1백억 원입니다.”

아, 위자료는 그냥 천만 원인 줄 알았다. 일 1천만 원은 오타인 줄 알았는데, 하루에 천만 원이었을 줄이야.

이 결혼 생활이 비싼 만큼 제 값어치를 했던가.

어쩐지 재벌 집에서 천만 원을 이혼 위자료로 요구하는 것이, 겉보기와 다르게 겸손하다 생각했었다.

그녀는 자신이 좋게 말하면 순진했고, 나쁘게 말하면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리숙한 여자였음을 깨닫고 절망했다.

“혹시… 깎아 주실 수 있나요?”

혜나가 변호사에게 사정했다. 근본 없이 당당했던 좀 전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저는 계약서에 쓰인 대로 이행할 뿐입니다.”

역시 통하지 않는군.

그의 변호사다운 답변이었다.

불현듯 그녀의 머릿속에 TV 주부 마당 ‘알아 두면 쓸모 있을 걸 법률 지식’에서 이름 모를 변호사가 했던 얘기가 생각났다.

“혼전 계약서는 무효예요!”

“무효라니요?”

“아무리 부부가 혼전 계약서를 작성했다고 하더라도, 우리나라에서는 법적 효력이 없대요. 그러니까 이 말도 안 되는 혼전 계약서는 원천 무효입니다.”

어제 아침 무심결에 TV를 틀어 놓길 잘했지. 덕분에 꽤나 그럴듯한 법률 용어까지 섞어 가며 기세등등하게 굴 수 있었다.

“정 그렇게 주장하신다면 이혼 소송으로 갈 수밖에 없는데요.”

변호사가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니, 다행히도 혼전 계약서가 무효란 말은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는 것 같았다.

“그렇죠? 그럼 저는 위자료 없이 이혼할 수 있는 걸로 알고 갈게요.”

혜나가 엊그제 카드로 긁은 명품 가방을 둘러메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만….”

“다만…?”

다만, 이라는 부사는 싸했다. 앞에 했던 모든 말들을 부정하는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혼 소송을 진행하신다면, 두 분이 계약 결혼을 했었단 사실이 드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건 알아서 잘 막아 주시면 되죠.”

“언론은 저희 쪽에서 어떻게 통제한다고 하더라도, 구씨 집안 어른들께서는 아시게 되겠지요. 또한….”

또한, 이라는 부사는 더 싸했다. 앞에 했던 모든 부정적인 말에 이어 아직 더 안 좋은 말이 남아 있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변호사가 말없이 또 다른 계약서를 내밀었다.

우위 그룹 전속 모델 계약서.

“이건 또 왜요?”

“사모님은 우위 그룹의 전속 모델 아니십니까. 계약서에는 계약 기간 동안 광고 효과를 감소시키거나 광고주의 기업 이미지를 훼손하면 안 된다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두 분의 이혼은 아무래도 기업 이미지에 안 좋은 영향을 미칠 테니까요.”

“이혼을 하면 더 이상 우위 그룹 전속 모델을 할 수 없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어요.”

혜나가 이 정도는 예상했단 듯이 여유롭게 대답했다.

“100억 원입니다.”

“네?”

“사모님께서 만약 이혼 소송을 하신다면, 저희 측에서는 이혼 귀책 사유가 사모님께 있다고 주장할 것입니다.”

“뭐라고요?”

“모델 전속 계약 위반에 따른 위약금 및 손해배상을 포함해 총 100억 원을 청구할 계획이고요.”

아, 이 사람이 자꾸 100억, 100억 하는데 100억이 무슨 장난감 수표인 줄 아나.

혜나가 엉거주춤 소파에 다시 앉으면서 진지하게 물었다.

“…만약 100억이 없다면요?”

“그렇다면 할 수 없지요. 이혼 못 하시는 겁니다.”

변호사가 먼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이런.

제길.

어떻게든 이혼을 꼭 하고야 말겠어.

그녀의 눈이 이글이글 불타올랐다.

* * *

“이혼, 실패했나 보지?”

저녁 8시에서 단 1분도 늦지 않은 시각. 오늘도 정시에 퇴근한 윤환이 고급 와이셔츠의 소매 커프스단추를 풀며 무심하게 말했다.

자신의 이혼을 제삼자 얘기하듯 하는 것을 보니, 그 역시 이 결혼에 별다른 애정도 미련도 없는 게 분명했다.

그런데도 이혼 위자료를 왜 그렇게 높이 책정해 놓았던 것인지,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었다.

“위자료… 좀 깎아 줘요.”

혜나가 드레스 룸까지 따라와 부탁했다.

조금 구차해 보이겠지만 어쩔 수 없다. 100억 원이 뉘 집 개 이름도 아니고, 일단 이혼을 하고 볼 일이니까.

“내가 왜 그래야 하지? 우리 결혼 생활은 무조건 계약서에 따르기로 하지 않았나?”

“알다시피 내가 지금 위자료를 지불할 능력이 안 돼요.”

“능력이 안 되면 어쩔 수 없지.”

“그러니 조금만 깎아 주면 고맙겠어요.”

“얼마를 깎아 줘야 하는 거지? 10%? 20%? 그럼 지불할 수 있긴 한 거야?”

윤환이 정곡을 찔렀다. 아무리 위자료를 깎아 준다고 한들 혜나가 결코 지불할 수 있는 금액대가 아니었다.

“그러길래 계약서에 왜 이런 조항을 넣어 둔 거죠? 당신도 이혼을 원하잖아요. 합의 이혼이면 위자료 없이도 될 거예요.”

“내가 이혼을 원한다고, 누가 그래?”

혜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윤환은 매일 저녁 8시에 꼬박꼬박 귀가하긴 했지만 주로 한남동 빌라 1층, 그녀는 2층에서 각자 생활했다.

주말에 온종일 집에 머물렀다고 해도 서재나 홈짐에 틀어박혀서 통 나오질 않았으니, 서로 마주치는 일이 드물었다.

성실한 남편인 척한 것은, 계약 결혼임을 모르는 시댁과 대중을 속이려고 했던 것뿐.

이 계약 결혼엔 두 사람 다 애정과 미련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야 당신도 이 결혼에 큰 의미를 두지 않으니까요.”

“내가 계약서에 무리한 위자료 조항을 넣은 것은, 처음부터 아예 이혼할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야.”

그의 말투에는 쓸데없는 단호함이 배어 있었다.

혜나는 이번엔 조금 더 감성적인 전략을 취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러지 말고 이제라도 이혼하고, 진정한 사랑을 찾아보면 어때요?”

“사랑?”

윤환은 미간을 찌푸렸다.

“진짜 사랑하는 사람과 하는 행복한 결혼 생활 말이에요.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까, 우리….”

“고작 사랑 타령이나 하려고, 나랑 이혼을 하겠다는 건가?”

그가 피식 웃었다. 비웃고 있는 게 분명했다.

“고작 사랑 타령이라니. 이것 봐요. 이렇게 우리는 안 맞는다니까요. 그러니까 위자료 좀…?”

“당신이 사랑을 원하는 여자인 줄은 몰랐네. 우리가 이혼을 할 수 있는 방법은 단 한 가지야.”

“그게 뭐예요? 위자료 달라는 것만 아니면, 뭐든 다 할게요.”

비굴해 보여도 어쩔 수 없었다. 이혼만 할 수 있다면 그까짓 자존심은 얼마든지 버리겠다 이거야.

“결혼 전에 작성한 계약서에 따르는 것.”

윤환이 보란 듯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쳇.”

그 말이 그 말이었다. 하여간 부자들이 더한다니까.

아무리 그래도 국내 30대 그룹에 손꼽히는 우위 그룹의 막내아들 아닌가.

그룹 승계자인 형이 따로 있다고 해도, 그 또한 그룹 내 입지가 탄탄한 편이었다.

그런 사람이 하필이면 위자료에 목숨을 걸다니!

“아니면, 또 다른 방법이 있긴 한데….”

실망한 혜나가 방문을 열고 막 나가려는데, 윤환이 숨소리가 다 들릴 정도로 가깝게 다가왔다.

“이번엔 진짜 방법이 맞는 거죠?”

혜나가 반색하며 뒤를 돌아봤을 때였다.

쿵.

그가 한쪽 손을 뻗어 반쯤 열린 문을 거칠게 닫았다. 다른 한 손으로는 바삐 와이셔츠 단추를 풀어 헤치고 있었다.

벌어진 하얀 와이셔츠 사이로, 그가 매일 저녁마다 지하 홈짐에서 만든 선명한 복근이 내비쳤다.

“지금부터 하면 되지.”

“뭐… 뭘요?”

“고깟 사랑.”

“…자, 장난하지 마요.”

혜나가 두 손을 뻗어 밀쳐내려고 애썼지만, 탄탄한 그의 가슴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윤환이 고개를 숙여 혜나를 지긋이 내려다봤다.

“원하면 해주겠다고. 지금부터 하면 되나? 여기서?”

“뭐…? 지금 뭐 하는 거예요!”

다시 한번 온 힘을 다해 밀쳐냈지만, 그는 요지부동이었다.

혜나는 어쩔 수 없이 그가 뻗은 팔 밑으로, 림보를 하듯 빠져나왔다.

“왜? 아까 분명 이런 걸 원한다고 하지 않았었나?”

슬슬 뒷걸음치는 그녀를 향해 윤환이 허리띠를 풀며 더욱 압박해 왔다.

결혼 3년 만에 보는 그의 모습은 심히 낯설었다. 원래 이토록 저돌적인 남자였던가.

“아니, 내가 언제… 나… 나는 진정한 사랑을 말한 거라고요. 이를테면… 그래요, 플라토닉 러브 같은 거요. 이런 육체적인 게 아니라!”

“육체적?”

혜나가 다시 한번 한쪽 벽면으로 몰렸다.

이대로 가다간 위험해.

그녀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때, 은근히 풍겨 오는 그의 살갗 냄새.

언젠가 좋아하는 남자가 생기면 사주리라 마음먹었던 비누 향수. 그 향기가 묘하게 섞여 있었다.

혜나는 결혼 초기에만 해도, 그에게 종종 그런 선물들을 했었다. 비록 계약 결혼이지만, 그래도 남편이었으니까.

“뭐 해? 나 옷 갈아입는 거 다 볼 거야?”

“이 비누 향수… 혹시 내가 예전에 선물했던 거예요?”

“어? 아니 뭐….”

그의 얼굴이 순결한 비누 향수 질문을 받은 후 발갛게 달아올랐다.

“안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지금 나가지 않으면, 다 벗을 거야.”

윤환이 벌게진 얼굴을 한 손으로 감쌌다.

“나, 나가요! 지금 나간다고요.”

혜나는 서둘러 드레스 룸을 빠져나왔다. 그 뒷모습을 보며 윤환이 혼잣말을 하듯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100억 아니면 이혼 안 해. 절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