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찰싹!

차진 마찰음과 함께 진아의 뺨이 붉게 달아올랐다. 앙다문 입술은 한쪽이 터져 핏방울이 맺혔고, 단정했던 단발머리는 산발이 되어 있었다.

찰싹!

“네가 그러고도 사람이야? 어떻게 친구 약혼자를 뺏을 수가 있어?”

“……뺏은 거 아니에요. 그 사람이 나한테 온 거지.”

“뭐어?”

“그리고 진짜 약혼한 것도 아니잖아요.”

혜윤이 그와 약혼을 했다면 제 마음은 달라졌을까? 진아는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건 알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긴, 이제 와 그게 무슨 상관일까? 저는 이미 친구의 연인을 뺏은 양심 없는 년이 됐는데. 억울한 마음에 한마디 하긴 했지만 혜림의 뒤에서 바들바들 떨고 있는 혜윤을 보니 괜히 입을 열었다 싶다.

“이년이? 혜윤이가 너한테 얼마나 잘해 줬는데, 은혜를 원수로 갚아?”

“언니가 상관하실 일 아니에요.”

“뭐? 내가 상관할 일이 아니라고? 야! 너 오늘 나한테 죽어 보자. 이 나쁜 년아!”

연거푸 뺨을 때려 놓고도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혜림이 결국 진아의 머리카락을 휘어잡았다. 그 모습을 보고도 눈물만 글썽이며 꼼짝도 않는 혜윤을 보자 진아의 입에선 비릿한 비소가 흘렀다.

그래, 넌 늘 그런 식이지. 가련한 피해자의 모습을 한 채, 주변에서 안쓰럽다 떠받들어 주고 대신 싸워 주길 바라지. 네 입에선 욕 한마디 안 나오고, 네 손 한번 더럽히지 않고 늘 그렇게…….

머리통의 가죽이 통째로 뜯겨 나갈 것 같은 고통에도 진아는 비명 한번 지르지 않았다. 그렇다고 혜림의 손을 뿌리치거나 하는 반항도 하지 않았다. 대신 혜윤을 살기 어린 눈으로 노려보고 있을 뿐이었다.

“네가 지금 누굴 노려보는 거야?”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진아의 눈앞이 잠시 깜깜해졌으나 그녀는 고스란히 혜림의 패악을 받아들였다. 그것만이 이 상황을 빠르게 마무리 짓는 방법이었다. 어쩌면 마음 깊은 곳에 남은 일말의 죄책감을 다스리는 방법이기도 했다.

그때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누군가 혜림의 팔을 잡았다.

“누나! 아, 혜림이 누나. 그만해요, 네? 이러다가 사람 죽겠네.”

“너 저리 안 꺼져?”

“우리 누나는 제가 잘 타이를게요. 네?”

“언니, 그만해.”

마침 집으로 들어선 진아의 동생 준원이 혜림을 뜯어말리자 혜윤도 자신의 언니를 말리기 시작했다. 두 사람이 말리니, 아직 분이 풀리지 않은 혜림도 어쩔 수 없이 잡고 있던 진아의 머리카락을 놔주었다.

“야, 윤준원! 네 누나 간수 잘해. 어?”

“네. 죄송해요, 누나. 혜윤이 누나도 미안해요.”

“아, 아니야. 흑.”

“에이 씨, 이놈의 집구석! 에이 씨, 저 못된 년!”

혜림이 머리카락이 엉킨 손을 털며 혜윤을 끌고 집을 나가자 준원이 기가 막힌단 표정으로 진아의 앞에 앉았다.

“결국 선우 형이랑 사귀기로 한 거냐?”

“넌 신경 꺼!”

“어떻게 신경을 꺼? 누나가 그러고도 사람이야?”

“시끄러워!”

“아, 진짜. 사람들 보기 부끄럽지도 않아? 다른 사람도 아니고 혜윤이 누나 애인이잖아!”

“그게 뭐?”

“혜윤이 누나랑 3년이나 사귄 사람이라고. 어떻게 그런 사람을…….”

준원의 말에 머리카락을 정돈하던 진아가 그를 노려봤다. 그러고는 더는 말하기 싫다는 듯 방으로 쌩하니 들어가자 준원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엄마가 퍽이나 좋다고 하시겠다. 어? 친구 남자나 뺏고 말이야. 누나 너는 정말 못돼 처먹었어.”

준원의 잔소리가 듣기 싫었던 진아는 방으로 들어와 문을 잠그고 이불을 뒤집어썼다.

내가 먼저 만난 거라고, 뺏겼던 걸 이제야 찾은 거라고 말을 한들 누가 믿어 줄까?

세상에 제 편은 하나도 없다. 가족마저 저보다는 혜윤을 걱정하고 있으니.

천사 같은 혜윤, 못된 망아지 진아. 두 사람을 비교하는 자들이 흔히 하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모른다. 진아가 얼마나 속앓이를 하며 견뎌 왔는지를. 남들은 혜윤과 진아가 절친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실상은 달랐다.

공주님과 시녀. 진아가 생각하기엔 두 사람의 관계가 그랬다.

교묘하게 사람을 부리고 상황을 이용해 철저하게 진아를 고립시켰고, 그런 진아를 감싸며 곁에 있던 사람이 혜윤이었다.

초등학교를 입학하며 이어진 인연이니 벌써 18년째다. 다른 학교를 가면 나아질까 했지만 그것도 뜻대로 되질 않았다. 부모님들끼리의 친분은 무시 못 했고, 성인이 되어서도 이렇게 같은 동네에 살며 마주칠 수밖에 없다.

‘누가 울 줄 알고?’

아무리 억울해도 울지 말아야 한다는 걸 일찌감치 깨달은 진아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터진 부위가 아파 왔지만, 그녀의 마음에 비하면 새 발의 피였다.

#1.

두 사람이 처음부터 악연이었던 건 아니었다. 한때는 가장 친했고, 그래서 늘 붙어 다닐 정도로 사이가 좋았던 때도 있었다. 하지만 자꾸 비교를 당하다 보니 자연스레 라이벌 구도가 되어 버렸고 때로는 혜윤이 이기기도 하고, 때로는 진아가 이기기도 하며 엎치락뒤치락했다.

대부분의 어른들은 얌전한 혜윤을 좋아했으나 또래 친구들에게 인기가 많은 것은 장난기 많은 진아였다. 친구들의 인기 덕분에 학급 임원을 도맡아 하는 진아를 혜윤은 늘 부러워했다. 혜윤은 얌전하면서도 소심한 성격인지라 무얼 나서서 하질 못했다. 그런 혜윤을 보며 그녀의 모친인 장주희 여사는 혜윤이 진아의 반만 닮았으면 좋겠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곤 했었다.

그래서였을까? 두 사람의 관계는 어느 날부턴가 조금씩 변해 갔다.

처음 진아가 이상하다고 느낀 것은 초등학교 4학년 때쯤이었다. 당시 진아에겐 좋아하던 남자애가 있었는데 서로 눈치만 보며 눈빛만 주고받던 때였다. 어린 마음에 부끄럽기도 해서 고백도 못 하고 있을 때였는데 어느 날 진아가 그 남자애를 좋아한다는 소문이 쫙 나버린 것이다.

당연히 친구들의 놀림이 이어졌고, 솔직한 성격인 진아는 그 기회에 아예 남자애에게 고백을 했다. 그것도 친구들이 많은 자리에서.

그런데 남자애의 반응은 상상 밖이었다. 같이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진아의 고백에 남자애는 벌레 씹은 표정을 지었고, 옆에 있던 혜윤은 울어 버린 것이다. 나중에 듣자 하니 혜윤이 먼저 그 남자애에게 고백을 했다나 어쨌다나.

그때까지만 해도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혜윤이나 저나 늘 붙어 다녔으니 어느 정도 취향이 비슷한 구석이 있었으니까. 그런데 그 일 이후로 친구들 사이에 진아는 친구가 좋아하는 남자애를 알고도 뺏은 나쁜 년이 된 것이다. 소문이 퍼지자 진아는 왕따 비슷한 처지가 되어 버렸고 다음 학기 임원은 진아가 아닌 혜윤이 차지했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그 뒤로 지난 18년간 진아에게 벌어진 수많은 일들에 크건 작건 늘 혜윤이 연관되어 있었다. 그래서 진아는 어지간하면 혜윤과 거리를 두고 얽히지 않으려 했으나 이번은 정말이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선우와 혜윤이 3년을 사귀었다면 진아는 그를 6년이나 알았다. 정확히는 6년이나 마음속에 선우의 존재를 품고 살았다.

고등학교 3학년, 시 단위 백일장에서 진아와 선우는 각자의 학교 대표로 나가 만나게 되었다. 처음엔 친구로, 꾸준한 연락을 주고받으며 풋풋한 기류가 오갔다. 하지만 반듯한 성격의 선우는 좋은 대학이 목표였기에 늘 입버릇처럼 대학 가면 할 얘기가 있다며 사귀자는 말을 꺼렸다. 진아는 멍청이가 아니었기에 그의 마음을 알았고 그래서 기다렸다.

그러나 대학에 들어간 후, 선우가 사귀게 된 것은 진아가 아닌 혜윤이었다.

“하아.”

한숨을 내쉬던 진아의 눈에 휴대전화가 반짝거렸다.

“선우인가?”

메시지가 들어온 것을 확인하자 그녀의 남자 친구인 선우로부터 뭐 하냐는 문자가 들어와 있었다.

“내가 뭐 하겠니, 에휴.”

혜윤이 왔다 간 걸 알면 뭐라고 할까? 혜윤의 언니인 혜림이 저를 쥐 잡듯이 잡았단 걸 알면 선우는 화를 낼까? 안쓰러워할까?

하지만 구질구질한 모습은 보이고 싶지 않은 진아였다. 그렇지 않아도 혜윤과 헤어지고 저에게 오는 일로 마음고생이 심했던 선우에게 더 이상의 짐도 지우기 싫었다.

“책 읽고 있다고 해야겠다.”

대충 거짓 답장을 정해 써 내려가던 진아는 방 밖에서 들리는 모친 홍은심 여사의 목소리에 숨을 멈춘 채 귀를 기울였다.

“누가 왔다 갔니? 집안 꼴이 왜 이래?”

“엄마, 누나 좀 말려 봐. 진짜 미친 거 같아.”

“네 누나가 왜?”

“글쎄, 혜윤이 누나 남자 친구 있잖아. 선우 형, 그 형을 누나가 뺏었다잖아.”

“뭐어?”

“혜림이 누나가 그 사실 알고 찾아와서 난리도 아니었어.”

“……젊은 애들이 사귀다 헤어지고 그럴 수도 있는 거지.”

“아, 엄마!”

준원이 뭐라 투덜거리자 홍 여사가 아들을 타박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엄마 나이스!

적어도 엄마만큼은 제 편이란 사실에 안도가 된 진아가 메시지를 마저 써서 전송 버튼을 눌렀다.

가만히 있지 말고 일자리라도 알아봐야겠다.

작심을 하고 컴퓨터 앞에 앉아 구직란을 뒤적거리는데 홍 여사가 그녀의 방으로 들어왔다.

“뭐 해?”

“어, 일자리라도 좀 알아보려고.”

“에휴.”

“왜?”

“너 이놈의 지지배. 뭘 하고 다니는 거야?”

“뭐?”

“준원이 말이 무슨 뜻이야? 혜윤이 남자 친구를 뭐 어쩌고 어째?”

진아를 못마땅한 눈으로 바라보던 홍 여사가 그녀의 등짝을 세게 내려쳤다.

“아, 아파!”

“아파? 아파? 네가 제정신이야? 취직을 해도 모자랄 판국에 뭐어? 혜윤이 남자 친구를 어쨌다고?”

“사귀다 헤어지고 다시 만날 수도 있는 거지. 뭐 그게 어쨌다고.”

“다른 사람도 아니고 혜윤이한테 왜 그러니? 어어?”

“내가 뭘? 혜윤이가 먼저 시작했거든?”

“혜윤이 같이 착한 애가 어디 있다고, 다 네가 시작한 거겠지.”

다른 사람 앞에서야 엄마로서 진아의 편을 들긴 했어도 진아의 행동이 바르다고 생각하진 않는 홍 여사였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혜윤의 남자 친구를 뺏다니.

혜윤의 남자 친구 얘기는 제 상사이자 사장인 장주희로부터 몇 번 들어 알고 있었다. 집안이며 외모며 학벌까지 어디 하나 빠지는 구석이 없는 애라며 입이 닳도록 칭찬을 했었다. 이대로 잘 사귀다 혜윤이 임용이 되고 그 남자애가 졸업하고 취직만 하면 바로 결혼시킬 거라는 것도 들어 알고 있었다. 그런 사이를 제 딸이 훼방을 놨다니, 무척 충격이긴 하다.

“아, 내가 먼저 만났단 말이야. 혜윤이 그게 뺏어 간 거고! 난 돌려받은 죄밖에 없거든?”

엄마마저 제 편이 아니란 사실에 서운해진 진아가 소리를 지르며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그렇지 않아도 혜윤이처럼 얌전할 순 없냐, 성실할 순 없냐는 잔소리를 곧잘 하던 엄마였다. 그렇게 혜윤이가 좋으면 딸로 입양하라고 구시렁거리며 진아가 아예 집 밖으로 나가자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은심이 한숨을 내쉬었다.

어릴 때는 그렇게 어울리더니 사춘기가 시작되면서 혜윤이라면 질색을 하는 딸을 이해할 수가 없다. 그땐 그래도 사춘기니까, 더구나 혜윤네 집과 비교하면 모자란 집안 환경에 자격지심을 느낀다고 생각했었다. 나이가 들면 나아지려니 했건만 나이가 들수록 더욱 혜윤을 끔찍해하니 어쩌면 좋을까?

차라리 제가 회사를 그만두면 조금 나아지려나? 혜윤의 엄마 밑에서 일하는 자신 때문에 딸이 더욱 기가 죽고 자격지심을 느끼는 것 같아 홍 여사의 마음도 아팠다.

하지만 오십이 넘은 이 나이에 그만한 조건의 회사를 들어갈 수 있을 리 없다. 아직은 준원이 학교도 마쳐야 하고, 진아 뒷바라지도 더 해줘야 할 텐데. 남편의 장사도 신통치 않으니 결단을 내릴 수 없는 은심은 한숨만 연거푸 내쉬었다.

서러운 마음에 무작정 집을 나온 진아가 찔끔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터덜터덜 걸음을 옮겼다.

세상에 진짜 제 편은 하나도 없는 것 같다. 제 주변 모두가 혜윤을 칭찬하고 진아만을 탓한다. 실상은 아무것도 모르면서. 혜윤이 얼마나 못됐는지는 당한 당사자인 진아가 제일 잘 알고 있다. 겉으로는 천사표인 듯 모두에게 친절하지만 제 마음에 들지 않으면 교묘하게 구실을 만들어 사람을 나쁘게 몰아간다. 그게 혜윤의 특기였다는 걸 사람은 왜 모르지?

힘없이 걸음을 옮기던 진아가 집 앞 공원 벤치에 쪼그려 앉았다.

할 수만 있다면 고혜윤 그 계집애의 이중성을 낱낱이 까발리고 싶다. 그렇지만 그럴 재주가 진아에겐 없었다. 좋으면 좋은 거고, 싫으면 그만인 단순한 성격에 사람을 이용하고 상황을 몰아가는 그런 일은 별로 내키지도 않았다. 차라리 당했으면 당하고 말지.

“에휴우.”

세상에 제 편 하나 없다는 사실이 서글퍼진 진아가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렸다.

그러고 보면 편이 하나 있긴 하다. 아니, 둘인가? 어찌 됐건 제 편을 들어줄 사람들을 떠올리며 통화 목록을 뒤적이자 마침 선우에게서 전화가 왔다.

“어, 선우야.”

-어디야?

“그냥, 집 앞에.”

-그럼 우리 술이나 한잔할까?

“술?”

-너 오늘 기분 안 좋을 것 같아서.

선우도 오늘 혜윤과의 만남을 알고 있는 듯 진아의 기색을 살피는 눈치가 역력했다.

하지만 눈치를 보는 선우를 보는 것이 진아에게 마음 편한 일은 아니었다.

“내가 왜?”

-……혜윤이 만났다며?

“그걸 어떻게 알았어?”

-미안하다.

선우는 절대 혜윤과 있었던 일을 입 밖으로 낸 적이 없었다. 그저 사과를 하며 진아의 마음을 달래 주려 애를 쓸 뿐. 고맙긴 하지만 가끔은 그런 그가 답답했던 진아였다.

“됐어. 나중에 보자.”

-하지만…….

“오늘은 너 별로 보고 싶지가 않네.”

-진아야. 미안해.

반복된 사과는 진정성이 떨어진다는 걸 모르는 걸까? 선우가 밉고 서운하지만 그런 그를 놓을 수 없는 자신도 마음에 들지 않는 진아였다.

선우와의 통화를 마친 진아는 결국 갈 곳이 떠오르지 않자 습관처럼 동네 어귀에 있는 카페로 향했다.

그곳엔 진아가 가장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하지만 절대 친하다고 볼 수 없는 유일한 친구 문정이 언니와 함께 카페를 운영하고 있었다.

문정은 중학교 때 같은 반으로 개인주의 성향이 강한 아웃사이더였다. 진아가 어쩔 수 없이 왕따가 되었다면 문정은 스스로 사람들과 거리를 두는 자발적 왕따였다. 다른 친구들이 기피하는 두 사람이니 우연히 엮이는 일이 많아졌고 고등학교 올라가서도 유일하게 혜윤에게 휘둘리지 않는 사람이 문정이었다.

그래서 진아는 문정에게 아주 가끔 아쉬운 소리를 해가며 혜윤과의 이야기를 털어놓고는 했었다. 딱히 편을 들어주진 않았으나 촌철살인 같은 충고로 진아를 일깨워 주는 고마운 친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