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거슬려

내일 발표를 앞두고 조별 모임을 가졌다.

이번 발표는 학점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므로 마지막까지 놓치는 것 없이 완벽해야 했다.

늦도록 점검하고 시뮬레이션을 돌리며 서로 예상 질문을 주고받자 밖은 이미 캄캄했다.

“이 정도면 완벽한 거 아냐? 우리 저녁 먹으러 가자.”

원석 선배가 정리를 하자 주연이 죽는소리를 했다.

“선배, 오늘은 고기 먹자. 기운을 너무 빼서 내일 발표 못 할 거 같아.”

“맞아. 나도 오늘은 고기 먹어야겠어.”

그들은 고기로 의기투합을 하고 학교 근처의 연탄불고기 집으로 모였다.

지글지글 불타는 돼지갈비는 채 익기도 전에 사람들의 입 속으로 사라졌다.

이에 질세라 시아도 다 익어가는 갈비에 젓가락을 댔다.

그때, 또 다른 젓가락이 그녀의 젓가락을 치고 들어왔다.

“에이, 이 선배도 입도 못 댔다. 이번에는 네가 양보해라.”

“나도 고기 먹고 싶어.”

시아가 우는소리를 하자 원석이 과장되게 찡그리며 그녀에게 고기를 양보했다.

“네 부자 남친은 고기도 안 사주니?”

제 앞에 바쳐진 고기를 날름 집어 먹으며 시아가 좋다고 웃었다.

“우리 오빠는 이런 돼지고기 안 먹어. 입이 고급져서.”

“그럼, 너는?”

“아쉽게도 내 입맛은 서민 입맛이라 이탈리안 레스토랑보다는 연탄집이 더 좋아.”

헤헤거리는 시아의 얼굴을 보며 주연은 알만하다는 눈짓을 했다.

“너희 오빠한테 이런 데 오자고 말도 못 하지?”

또 한 점의 고기를 입에 쏙 넣고 시아가 말했다.

“알면서.”

열심히 고기를 먹던 동훈이 한마디 거들었다.

“근데 그 오빠라는 사람 너한테 잘해주기는 하냐?”

“어머, 당연한 거 아냐? 나한테는 껌뻑 죽어.”

주연이 캑캑거리며 제 가슴을 쳤다.

“웃기네.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거 같은 진헌 오빠가 너한테 잘한다고? 다 네가 맞춰주는 거지.”

“무슨 소리야? 우리 오빠가 얼마나 다정한데.”

“다정이 다 얼어 죽었냐?”

주연이 또 인상을 쓰며 면박을 주었다.

“진헌 오빨 내가 근 몇 년을 봤냐? 그동안 단 한 번 웃는 걸 못 봤어. 맨날 이렇게 이마에 내 천자를 그리고 있더라.”

“그건!”

네가 나한테 소개팅을 시켜줘서 그래.

그렇지만 이런 말을 하면 주연은 진헌을 더 이상한 사람 취급할 것 같아 시아는 입을 닫았다.

“원래 오빠가 과묵해서 그래. 가끔 보는 사람들은 그런 오해를 할 수 있는데, 오래 본 사람들은 안 그래.”

“난 거의 칠 년을 봤는데? 그럼, 진헌 오빠가 인상 안 쓰는 모습을 보려면 몇 년을 더 기다려야 하냐?”

이야기를 해 봤자 자기만 불리할 것 같자 시아는 주연 앞으로 고기를 마구 쌓았다.

“주연아, 고기 많이 먹고 힘내서 내일 발표 잘해. 에고에고, 어여 먹어.”

“치, 입 닫으라는 소리 다 알아들었으니 그만 줘.”

제 앞에 놓인 고기를 마구마구 입에 집어넣던 주연을 보면서 원석이 쯧쯧 혀를 찼다.

“그렇게 먹다가는 체한다. 좀 쉬면서 먹어라.”

그러면서 그녀 앞의 잔에 소주를 채웠다.

“선배는 이번에 어디 어디 원서 넣을 거야?”

“나? 일단 CH엔 넣고. 음 그다음에는…….”

“역시 CH군. 거기 빡셀 텐데.”

원석이 골몰하자 동훈도 함께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런 그들을 바라보며 주연이 시아에게 물었다.

“넌 원서 안 넣을 거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들었다는 듯 시아가 깜짝 놀라 주연을 쳐다보며 말했다.

“왜 안 넣어?”

“피, 너 취집할 거 아냐?”

“뭐… 취집이라니? 나도 원서 넣을 거야.”

“야, 진헌 오빠가 잘도 취직하라고 하겠다.”

절대 그렇지 않을 거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생각해보면 그는 졸업 후 집에 콕 박혀 있으라고 할 것 같았다.

어쩌면 바로 결혼하자고 할지도 몰랐다.

맨날 저만 보면 물고 빠니 이렇게 학교를 다니게 하는 것만도 놀라울 정도다.

“하지만… 나도 사회생활 하고 싶어.”

“너 이번에도 최소 A 받을 텐데. 네 학점으로 집에서 살림하기는 아깝지.”

원석이 안타깝다며 시아의 어깨에 손을 얹을 때였다.

툭!

그의 손이 세차게 밀어졌다.

놀란 것은 원석뿐만이 아니었다.

“뭐야?”

취객이 시비를 걸어오는 것이 아닌가 하여 모두 눈에 쌍심지를 켜고 동시에 시아 뒤를 쳐다봤다.

서 있는 그를 알아본 것은 주연이 먼저였다.

“아, 진헌 오…빠!”

뒤에 서 있는 사람은 시아의 그 오빠, 차진헌이었다.

이미 몇 번 본 얼굴들이라 일행은 엉거주춤 일어나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그냥 다독이려고 어깨에 손을 얹은 것뿐인데 마치 치한에게 하듯 내쳐진 원석은 기분 나빴지만 진헌이 어떤 인간인 줄 알기에 하는 수 없이 그도 인사했다.

“네, 안녕하세요.”

그리고 당연히 진헌은 아주 차갑게 맞인사했다.

참 볼 때마다 재수 없는 새끼라니까.

원석뿐만 아니라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의 머릿속은 똑같았다.

오직 시아만 반색하며 일어섰다.

“오빠, 나 여기 있는 줄 어떻게 알고 왔어요?”

어디 간다고 말하지도 않았는데 여기까지 찾아오다니 대단한데.

진헌은 대답도 하지 않고 시아의 가방을 찾아들었다.

그의 눈치를 보더니 시아가 앉아 있던 사람들에게 억지웃음을 지었다.

“나 먼저 갈게. 내일 발표니까 다들 조금만 마시고 들어가.”

“알았어. 너나 얼른 들어가라. 진헌 오빠, 우리도 조금만 먹고 들어가려고 했어요.”

주연이 변명 아닌 변명을 했다.

괜히 연락 안 하고 늦었다고 시아를 닦달할까 봐서 해 준 말이었다.

진헌은 들은 척도 안 하고 일행에게 고개만 끄덕였다. 그리고 바로 시아를 데리고 나갔다.

그가 나간 것을 보자 원석이 투덜거렸다.

“야, 진짜 저 인간, 시아한테는 잘하냐?”

“글쎄. 나도 모르겠어요. 시아는 자기한테는 잘한다고 하는데 믿을 수가 있어야지.”

동훈이 술맛 떨어졌다며 잔까지 내려놓았다.

“아무래도 저 인간 미친놈에 가까운 것 같은데 지금이라도 시아한테 정신 차리라고 해야 하지 않아?”

“맞아, 시아가 너무 아까워.”

“치, 사실 냉기가 팍팍 풍기는 거 빼면 진헌 오빠가 빠지는 건 없지. 원석 선배가 그렇게 가고 싶어 하는 CH그룹이 진헌 오빠네 거잖아.”

“집안 좋은 거 빼면 뭐 있냐? 저 인간!”

쓸데없는 소리를 듣는다는 듯 주연은 제 앞에 놓인 고기를 여상히 입에 넣었다.

“생긴 것도 조각이지 키는 또 얼마나 커. 몸도 좋고 대학은 하아~버드에 MBA까지. 원석 선배, 선배가 진헌 오빠보다 나은 거 하나라도 얘기해 봐.”

“야!”

소리는 질러놨지만 원석이 반박할 것이 하나 없었다.

“주연, 너 완전 속물이다. 사람이 심성이 고와야지. 그까짓 집안, 학벌, 외모 그게 그렇게 중요하냐?”

“응, 중요해.”

주연의 심드렁한 대답에 동훈이 할 말을 잃고 헛숨만 내쉬었다.

“여하튼 차진헌이란 인간 정말 아니지 않냐?”

“맞아, 맞아.”

“볼 때마다 쌩쌩 찬 바람 불고 인간미는 눈 씻고 찾아봐도 찾을 수 없다니까.”

동훈이 세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주연을 쳐다봤지만 주연은 그저 소주만 들이켰다.

“이런 얘기 아무 소용없어. 시아는 진헌 오빠 없이는 못 산대. 지 좋다는데 어떡해? 자, 적당히 먹고 일어나자. 낼 발표 잘해야지.”

“그렇지. 마지막 학점이 달린 일이니 오늘은 조금만 먹자.”

“뭐, 윤시아가 있으니까 걱정할 건 없겠지. 우리 시아가 좀 준비를 잘해오겠어?”

모두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

진헌이 차 문을 열자 시아가 눈치를 보며 조수석에 탔다.

나오면서 보니 부재중 통화가 6통이나 있었다. 발표 준비하느라 정신이 빠져 있었나 보다.

게다가 발표 마무리만 하고 집에 갈 생각에 진헌에게 저녁 먹고 간다고 말하지 않았는데 그가 여기까지 찾아와서 깜짝 놀랐다.

고깃집도 그냥 발 닿는 대로 온 것인데 어떻게 알고 왔을까.

예전에 진헌의 부탁으로 위치추적 앱을 깔아놓긴 했지만 그건 건물 정도만 나왔지 정확히 어느 식당이라는 것은 알 수 없었다.

설마 학교 근처 음식점을 다 찾아다닌 것은 아니겠지.

“오빠, 미안해. 조별 발표 준비하느라 핸드폰 진동으로 해놨는데 못 들었나 봐. 걱정했어?”

“…….”

단단히 화가 났나 보다.

“요즘 오빠 회사 일 많다고 해서 오늘도 안 올 거 같아 저녁 먹고 간다고 미리 말하지 않은 거야. 다음에는 저녁 먹고 늦게 가면 꼭 말하고 갈게.”

“그래.”

대답하는 거 보면 아주 화난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어차피 이젠 저녁 먹고 올 일도 없어. 낼 발표가 끝나면 곧 방학이잖아. 그러면 곧 졸업이고.”

“다행이군.”

살살 진헌의 옆 모습을 훔쳐보니 입매가 꽉 다물려 있지 않았다.

휴, 화 안 났나 보네.

“근데 오빠.”

말해도 될까.

“아까 원석 선배는 그냥 나 후배로서 토닥이려고 그런 거야. 오빠가 그렇게 매몰차게 손을 쳐버리면 그 선배가 얼마나 무안하겠어. 다음엔 그러지 마. 알겠지?”

시아가 진헌의 팔에 매달려 눈웃음을 쳤다.

그래도 그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자 시아가 더 살살거리며 애교를 부렸다.

“오빠가 자꾸 그러니까 사람들이 오해하잖아. 오빠가 엄청 무서운 사람인 줄 알아. 괜한 오해는 살 필요가 없지 않아?”

나 안 무서워하는 사람은 윤시아, 너 하나야.

“특히 내 주변 사람한테는 더 잘해야 해. 알겠지?”

“…….”

시아는 여전히 대답하지 않는 진헌에게 마지막 애교를 짜내며 살포시 그의 팔에 머리를 기댔다.

“그 인간, 거슬려.”

결국 한마디 대답한 게 거슬린다는 말이었다.

오빠는 왜 이리 거슬리는 게 많은지.

일단 거슬린다는 것은 그 사람과 조금도 친하게, 아니 예의상이라도 정중히 지낼 수 없다는 뜻이다.

더 말해 무엇하랴.

거슬린다는 말 한마디로 진헌은 시아의 말을 따를 수 없다는 나름의 표현을 한 것이다.

“에효, 우리 오빠는 다정한 사람인데 왜 다른 사람한테 모나게 구는지 몰라.”

나보고 다정하다고 하는 사람도 너밖에 없어.

“사람들이 오빠의 진짜 모습을 좀 봐줬으면 좋겠어. 괜한 오해를 사면 오빠도 피곤하잖아.”

시아의 푸념을 듣던 진헌이 갑자기 차를 도로변에 급히 세웠다.

“왜 무슨 일 있어? 차는 왜 세워?”

시아가 놀라서 그를 쳐다보자 그가 급히 그녀의 입술을 덮쳤다.

“읍, 오…빠. 으읍읍…나 고기 먹었… 읍!”

깔끔한 그가 입에 남은 고기 맛을 불쾌해할까 얼른 입을 떼려고 했지만 그는 막무가내로 입술을 삼켰다.

열심히 밀어내도 진헌은 시아의 입술을 빨고 또 빨았다.

급기야 몸까지 밀착하며 그녀를 안기 바빴다.

밀어 오는 그로 인해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자 시아가 그의 어깨를 사정없이 때렸다.

그제야 시아의 얼굴이 온통 붉어진 것을 확인하고 진헌이 입술을 뗐다.

헉헉헉!

시아가 한꺼번에 급한 숨을 몰아쉬자 진헌이 등까지 토닥여 주었다.

“코로 숨 쉬라고 했잖아. 아직도 그게 안 돼?”

“헉헉, 오빠가 코까지 삼키면서 키스하니까 그렇지. 그렇게 하면 나 숨 막혀 죽어.”

“내가 그랬나?”

그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다시 그녀의 팔을 당겨 안고는 그녀의 얼굴 여기저기에 입술을 댔다.

“오빠, 나한테 고기 냄새 난다니까. 오빠 그런 거 싫어하잖아.”

그래도 그는 자꾸 그녀를 끌어안고 입을 맞춘다.

“너는 괜찮아.”

너는 고기 냄새가 나도 술 냄새가 나도 다 괜찮아.

안 씻고 더러워도 너는 괜찮아.

너는 다 괜찮아.

밀어내도 안아대는 그를 못 이겨 결국 그의 품에 안겨 버렸다.

그가 또 한참을 안고 입을 맞추고 귀를 물고 목덜미를 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