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장.

한여름 땡볕에 당나귀를 탄 청년이 한적한 시골길을 가고 있었다. 보기에는 유유자적한 모습이었지만, 가까이에서 보면 간간이 한숨을 쉬는 것이 무언가 풀리지 않은 앙금이 있어 보였다.

재 넘어가는 곳, 한편에 보이는 성황당을 보며 힘없이 중얼거렸다.

“귀신이 있다면 내 팔자가 왜 이리 사나운지, 말씀을 좀 해주시오. 하다 하다 이제는 20석지기 땅에 팔려 혼인하게 되었소.”

뺨이며 이마에 흐르는 땀이 화가 끓은 탓인지, 더위 탓인지 알 수 없지만 얼굴이 벌건 청년은 눈매가 순하고 곱게 자란 모습이었다. 다만 입고 있는 옷이 낡은 탓에 몰락한 양반가의 자제로 보였다.

“이쯤이 되지 않을까 싶은데, 주막에서 냉국이라도 먹으며 물어봐야 하는가?”

가슴에 묶은 술띠 끝에 매달린 작은 줌치에는 겨우 동전 몇 닢만 들어있어 함부로 쓰기도 어려웠다.

햇빛이 따갑도록 쨍쨍해 오가는 사람조차 별로 없는 길목이었다. 다행히 저편 마을 공동 우물가에 한 낭자가 아이와 함께 있는 모습을 보고 서둘러 그쪽으로 다가갔다.

“이보시오. 물 좀 마실 수 있겠소?”

“그러시지요.”

낭자가 물을 퍼 올리자, 곁에 있던 아이가 그 물을 바가지에 담아 청년에게 건네주었다. 청년은 물바가지를 받으며 낭자를 곁눈질로 보았다. 얼핏 보이는 옆얼굴이 상당한 미색이라 호기심이 동했지만, 차마 제대로 볼 수는 없었다.

“고맙다.”

청년은 건성으로 말하고 갈증이 나던 차에 꿀처럼 달콤하고 시원한 물을 꿀꺽꿀꺽 마셨다. 한창인 청년답게 모든 신경은 그 낭자를 향하지만, 살짝 돌아서 있는 탓에 자세히 볼 수는 없었다. 옆선이 미인이고, 키는 여인치고 컸다.

“복이야. 이것은 엄니께 잘 갖다 드려라.”

“아씨. 감사합니다.”

“그래. 엄니가 어서 병이 나아야, 복이가 말 그대로 복덩이가 될 것인데.”

“엄니는 아씨께 항상 고맙다고 하십니다.”

아이는 보퉁이를 안고 허리를 깊이 숙여 절을 하고 돌아서 갔다. 마치 이런 일이 처음이 아닌 듯 은근히 자연스러웠다. 청년이 낭자에게 막 말을 건네려는데, 누군가 급히 뛰어오며 소리쳤다.

“아씨! 명옥 아씨! 마님께서 돌아오셨습니다.”

“뭐! 벌써 오셨다고?”

“예. 날이 더워서 중간에 그만 돌아오셨답니다.”

“이런 큰일이구나.”

낭자와 하녀는 서둘러 걸음을 옮겨 멀어져갔다. 그 탓에 낭자와 말 한마디를 섞지 못하고 놓쳤지만, 청년의 귀에 쏙 들어온 말은 바로 “명옥 아씨.”라는 말이었다. 그것은 정혼자의 이름자였다.

‘저 낭자가 나의 정혼자인가?’

아버지의 말씀이 인물이 곱고, 성품도 덕이 있다고 하셨지만, 으레 하는 말이려니 하고 넘겼었다. 그런데 정말 저 낭자가 혼약자라면 그동안 마음고생한 보람이 있다 싶었다.

다만, 낭자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했음이 아쉬웠던 청년은 동리 안쪽으로 좀 더 들어갔다.

야트막한 산자락 앞으로 시냇물이 흐르는 곳에 고만고만한 집들이 평화롭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 한편에는 터줏대감으로 자리한 제법 큰 기와집이 있었다. 재물만 끌어모으는 이가 아닌 제법 뿌리 깊은 양반가로 보였다.

‘저 집이 바로 내 처가가 될 집인가?’

이제껏 아버지의 말씀을 귓등으로 들었지만, 이제야 마음이 좀 편해졌다. 이번에는 허풍이 아닌 듯했다.

청년은 정혼자인 명옥 낭자를 먼발치로라도 다시 보고 싶었지만, 긴 여름 해라고 할지라도 집으로 가야 했기에 미련이 많은 발길을 돌려야 했다.

더위에 벗의 나귀를 빌려 타고 멀리 온 값은 충분히 했다는 생각과 함께 짜증이 사라져 홀가분하게 발길을 돌렸다.

종친이자 금상의 숙부인 아버지 도진군은 맏이 중덕군의 노름빚으로 가산을 다 잃은 탓에, 차남 경원군의 혼처를 재물 있는 집에서 고르고 있었다. 하지만 웬만한 집에서는 중덕군 탓에 모두 외면하고 있기에 상거래로 재물을 모은 이들과 몇 차례 혼담이 오갔지만, 매번 성사되지 못했다.

평소의 순한 성품과는 달리 유독 그 일에서만은 좀체 뜻을 굽히지 않은 차남 경원군 때문이었다.

아버지 도진군이 올봄 우연히 만난 이와 약식으로 혼서까지 교환하고 겨우 20석 지기 땅문서까지 받아 들고 돌아온 것을 본 경원군은 울화가 치밀었다.

-양평의 정가 규수는 인물도 좋고, 덕이 있다고 한다. 그러하니 이번에도 물려서는 안 된다. 이미 혼서까지 교환했음이야.

-아버지!

약관을 바라보는 시기, 언제까지 미룰 수도 없는 처지이기에 경원군도 체념하듯이 받아들였다.

며칠 전, 형님 때문에 또 집이 발칵 뒤집히자 답답한 심정에 집을 나서 정처 없이 헤매다 기대할 것은 없지만, 양평에 산다는 이를 먼발치로 보기라도 하자는 심정으로 온 길이었다.

‘그래. 저 정도의 규수라면 다행이야. 아이를 돕는 것 보니 성품도 나쁘지 않아 보이고, 목소리도 차분했지. 그래. 되었다.’

얼핏 옆모습으로 보였던 낭자의 얼굴은 기대 이상이었다. 그러니 바로 보지 못하고 말 한마디 섞지 못했다는 아쉬움은 있지만, 기분 좋은 느낌이 전해져 손으로 가슴을 톡톡 치며 진정시켰다.

# 1. 새날이 열리다.

승정원의 말단 관리로 직숙하던 정경문의 귀에는 그야말로 기절초풍할 소식이 들렸다.

“급보! 경원군이 보위를 계승하셨네!”

선임이 저쪽에서 뛰어오며 전하는 소리에 정경문은 손에 들었던 문서를 스르르 놓치고 한동안 경원군이 누구신가 골똘했다. 그만큼 의외의 소식이었다.

“그 말씀이 참이오?”

“당연하지. 내가 도승지 영감께 직접 들었네.”

‘헉! 이것이 바로 천지개벽이로다!’

경원군은 사촌 명옥과 혼약한 상대다.

올 초 잔치에서 변변찮은 도진군을 만난 숙부님이 종친이란 이유만으로 술김에 혼약하고 20석지기 땅문서와 함께 혼서를 교환했다. 숙부는 해 넘어가기 전에 명옥을 혼인시킬 예정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국상이 났다.

승하하신 선왕께서는 후사라고는 어리신 공주와 옹주뿐이신 탓에 종친 중에 적당한 이를 물색한다는 말이 돌았다.

그러나 이미 창의군이 다음 보위라는 것이 중론이었다. 가끔 경원군도 곁다리 물망에 올랐다는 말도 떠돌고 있었다.

그 소식을 들은 정경문은 어리석은 욕심이라고 일찍 체념했다.

도진군의 평판은 좋지 않았고, 장자 중덕군은 투전과 술로 악평이 자자했고, 차자인 경원군은 존재감이 없었다.

그런데 천지가 개벽한 것이다.

정경문은 서둘러 숙부께 이 소식을 전하려 붓을 들다가 부들거리는 심장 때문에 가만 내려놓았다.

‘심장아, 그만 날뛰어라, 내가 지레 죽겠다.’

혹시, 욕심 많은 도진군께서 이 혼약을 없던 일로 하면 사촌 명옥의 앞날은 어찌 되는가?

정경문은 이럴 게 아니다 싶어 뛰었다. 좋은 길목에 자리 잡고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안절부절못하며 사방을 살피고 있었다.

드디어 대원군이 된 도진군이 저쪽에서 땅딸막한 체구에도 위풍당당하게 일단의 사람들을 이끌고 들어서고 있었다. 정경문은 어찌해서라도 그에게 가까이 다가설 기회를 엿보았다.

마침내, 도진대원군이 상석에 좌정하자, 누군가 서류 작성에 필요한 지필묵을 들고 가까이 가려는 것을 막무가내로 가로챘다. 조심스레 다가서서 지필묵을 책상에 올려두고, 허리를 숙여 인사를 올리며 분주한 사람들 틈에서 작게 말씀을 올렸다.

“합하. 감축드립니다. 양평의 정, 해자 월자 어른이 저의 숙부올시다.”

도진대원군은 가만히 정경문을 쳐다보았다. 지금 이자가 말한 의도는 명확했다. 그러하니 작은 눈으로 빤히 보다가 피식 웃으며 한마디 했다.

“염려 놓으시게. 내가 기억하고 있음이네.”

“황송하옵니다. 합하. 숙부께서 감사의 마음이 크실 겁니다.”

정경문은 아무 말 없이 허리 숙여 인사 올리고 뒤로 빠져나왔다. 얼마나 긴장했던지 손에 땀이 흥건하고 목뒤가 뻣뻣했다.

‘에헤야 디야!’

머릿속에서 풍악이 연이어 올랐다.

‘되었다. 어떤 봉작이라도 명옥이가 입궁만 하면, 그 아이 성정이라면 반드시 경원군의 마음을 사로잡을 것이다. 암! 얼굴이 고운 만큼 성품도 바르지 않은가. 드디어 천지신명께서 복을 내리셨구나.’

정경문은 마구 떨리는 손으로 붓을 꼭 쥐고 급히 몇 자 적었다. 이로써 만년 말단에서 벗어날 기회를 잡았고, 한양의 관직을 노리던 숙부도 앞길이 뜨일 희망이 보였다.

‘명옥아, 고맙다. 네 덕분에 오라비가 드디어 승차하는구나.’

푸른 하늘을 보며 가슴을 펴고 크게 웃고 싶었지만, 우선은 소식을 전하는 것이 먼저였다.

*

“영감마님. 무진 서방님의 서찰을 가져온 자가 있습니다. 급한 일이랍니다.”

사랑채 마루 한편에서 난 잎을 마른 헝겊으로 조심스레 닦고 있던 이가 뒤를 돌아보았다. 국상으로 한창 바쁠 조카에게서 온 서찰이라니, 의아했다.

박 집사의 곁에는 땀을 뻘뻘 흘리고 있던 심부름꾼이 집주인을 보더니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서찰이라니?”

심부름꾼은 허겁지겁 쫓아 온 것인지 땀과 흙먼지 냄새를 진하게 풍기며, 서찰을 내밀었다. 정해월은 무심하게 서찰을 펴보다가 화들짝 놀라 심부름꾼을 보고, 서찰을 보곤 했다.

“이 서찰이 거짓 없는 사실이냐?”

“예. 영감마님. 서방님이 서둘러 가라고 하셨기에 부리나케 달려왔습니다.”

“그래. 수고했다. 이미 해가 기울어 가는데 한양으로 돌아갈 수 있겠느냐?”

“예. 가능하면 영감마님의 답신을 받아 오라 하셨습니다.”

“알았다. 바로 답신을 써주마.”

정해월은 방에 들어가 앉아 다시금 서찰을 꼼꼼하게 읽어 내려갔다.

[숙부님. 급한 마음에 본론부터 말씀 올리지요. 경원군이 창의군과 경합을 벌이다, 대비의 강력한 후원에 힘입어 다음 대 보위로 결정되었습니다. 아침에 도진대원군을 뵈었습니다. 명옥의 일은 기억한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으로 누이의 앞길은 정해졌겠지요. 경하드립니다. 추후 새로운 소식이 있으면 또 연락드리겠습니다.]

정해월의 붓을 쥔 손끝이 파르르 떨리자 크게 숨을 내쉬고 손을 움직였다.

경원군은 도진군의 둘째 아들이었다. 올해 입춘을 즈음하여 우연한 회갑 잔치에서 도진군과 합석하게 되었다, 자신이 청주 목사를 마지막으로 물러났지만, 항시 중앙 관료로 나가고 싶은 미련이 남았기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나갔던 자리였다.

뜻하지 않게 술기운에 기대 장녀 명옥이와 경원군의 혼인 말까지 나오게 되었다.

도진군이 맏아들 중덕군의 노름빚으로 생활이 어렵다는 지인의 귀띔에 선뜻 20석지기 논까지 주기로 약조했다. 도진군 측에서도 흐뭇해하며 반드시 올해를 넘기기 전에 날을 잡기로 했다.

그런 경원군이 갑자기 임금이 되었다니 정해월에게 이것은 말로만 듣던 경천동지할 일이었다. 20석지기 논문서로 인해 아직도 안사람과의 사이가 살얼음판이었다.

‘하! 언감생심 비빈을 바랄 수야 없다고 해도 명옥이 그 아이에게 이런 복이 있을까?’

부들거리는 손으로 답신을 써서 심부름을 온 머슴에게 두둑이 용채까지 쥐여 보냈다.

정해월은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서둘러 안채로 향했다. 벌써 여러 달, 눈에 쌍심지를 돋워 대드는 안사람의 코를 납작 눌러줄 생각이었다.

“마님. 안에 계시냐?”

“예. 영감마님.”

정해월은 아주 요란하게 “으흠, 흠.” 헛기침하며 안방에 들어섰다. 방 안에는 둘째 딸 금옥이의 옷을 만들려는지 고운 옷감들이 줄줄이 펼쳐져 있었다.

“대낮부터 웬일이시오?”

여전히 쌀쌀맞은 마누라의 대꾸를 듣고도 흥분이 된 정해월은 발로 쓱쓱 비단들을 치워놓고 자리를 잡고 앉았다. 영 마음에 들지 않은 영감의 행동에 마누라가 흰 눈으로 노려보는 것을 모른 척 딸에게 말했다.

“금옥이는 잠시 자리를 비켜다오. 어머니와 상의할 게 있다.”

“아이가 있어서 안 될 말이 무엇입니까?”

“어허. 이 사람이.”

“어머니. 제가 다시 와서 고르지요.”

금옥이는 아버지의 눈치를 보고 나갔지만, 마누라는 영 못마땅한 투로 등을 돌리고 앉아 비단들을 치우고 있었다. 정해월이 마누라의 등을 툭툭 치며 말했다.

“경사가 났다네, 경사가. 이 사람아. 명옥이가 입궁하게 되었네. 허허허.”

마누라는 등을 툭툭 치는 서방님의 손길을 거세게 뿌리치다, 입궁이란 말에 귀가 번쩍 뜨여 돌아보았다.

“그 무슨 소리요? 영감. 백일몽이라도 꾸셨소?”

“어허. 사내대장부의 말을 그렇게 받는가? 방금 무진이 일부러 소식을 보내왔네. 대비께서 경원군을 지목하셨다네. 무슨 말인지 아는가? 바로 경원군이 보위에 오르게 되었단 말이지, 알겠는가? 하! 벌써 궁에 들어갔을지 모를 일이지. 암.”

“정말이오! 정말 경원군이? 설마. 세상이 알아주는 도박꾼의 동생인데?”

마누라의 눈이 휘둥그레지며 입이 한껏 벌어졌다.

“어허. 말조심하게. 이제 도진군이 대원군이 된 세상이야. 세상이 하루아침에 바뀌었단 말일세.”

“아이구야. 자세히 좀 말씀해 보시오.”

“왜 이제야 귀가 번쩍 뜨이는가? 내가 선견지명이 있었음이네. 허허허.”

정해월은 마누라 권 씨가 눈에 불을 켜고 마주 보는 시선을 즐기듯 하면서 소매 춤에 넣어둔 편지를 꺼내 일부러 천천히 읽어주었다.

“어떤가? 내 말이 이해되는가?”

“혹시 도진군이 없던 일로 하자, 그러지는 않겠지요?”

“이 사람아. 장부 일언 중천금인데. 한번 뱉은 말을 어찌 그러하겠는가.”

“그런 자를 믿을 수 있을까? 아들이 그렇게나 유명한 도박꾼인데? 아비라고…….”

“믿어 봐야지. 내가 그 땅을 주었을 때 그가 얼마나 감격했었는지 자네는 모르네. 그런 자가 이제 와서 나 몰라라 하지는 않을 거라 내가 장담하네.”

“호호호. 정말 그렇게 되기를 부처님께 빌어야지요. 호호호.”

“이제야 웃음소리가 나오는구먼.”

마누라 권 씨가 치마로 입을 가린 채 웃음 짓는 모습은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활짝 펴진 마누라 얼굴을 자신만만하게 마주 보는 정해월은 요 몇 달 20석 지기 논문서를 상의 없이 주었던 일로 인해 닦달당했던 것이 씻겨 내려갔다.

*

“아이구야!”

이렇게 좋을 수가 있을까. 정해월은 엉덩이가 들썩이고, 어깨춤이 절로 났다. 처음 서찰을 보내고 사흘 후, 조카 무진이 다시 소식을 보내왔다.

[숙부님. 합하를 뵐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 어르신이 인사를 올리는 저의 등을 툭툭 두드려주시며 ‘숙부님께 염려 놓으시라 하게.’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주변의 모두가 듣고 보았습니다. 분명 공사다망하신 분이라 제게 따로 말씀하실 수 없었지만, 그것으로 분명히 저를 알고, 누이의 일도 잘 처리될 것이라는 언질이 아니겠습니까? 숙부님. 누이의 입궁 준비를 잘하십시오. 다시 소식 전하겠습니다. 경하드립니다.]

“되었다! 이제 되었어!”

정해월은 오른손으로는 조카 무진의 서찰을 쥐고, 왼손으로는 허벅지를 철썩 소리 나게 때렸다. 며칠이나마 의구심을 가졌던 마음이 안정되었다. 도진대원군은 이제 보통의 양반이 아니었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에 무게가 있음에도 조카에게 그런 행동을 했다는 것은, 그가 분명히 마음을 정했다는 의미다.

되었다. 이제는 확실하다. 순간적으로 앞길이 탄탄하게 열리는 환영을 백일몽처럼 보았다.

서둘러 안채로 향하다 집사 박 서방을 보았다.

“명옥이는 어디 있는가? 안채로 들이게.”

“지금 빨래터에 가셨을 것입니다. 영감.”

“빨래터에? 쯧쯧. 일손이 없는 것도 아닌데 뭐 하러. 어서 불러오게.”

정해월은 새삼 무심한 안사람을 탓했다. 어이해 두 딸을 이렇게 차별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안채의 마루에 올라서서, 으흠 거리며 인기척을 내고 방에 들어섰다.

재빨리 서방님의 기색을 살피던 권 씨 부인은 방 안에 있던 이들을 서둘러 밖으로 몰아냈다.

“밖에 명옥이 오거든 들여보내게.”

나가는 일손에게 말하는 소리에 권 씨 부인이 화들짝 놀라 만류했다.

“아니다. 되었다. 그냥 나가봐. 내가 조금 후에 차분히……. 영감, 앉아서 말씀해 보세요.”

서둘러 사람들을 내보내고, 서방님의 다음 말을 재촉하는 마누라였다. 정해월은 권 씨가 가끔 뜻밖의 일을 거리낌 없이 벌이는 것을 아는 까닭에 순간 의아함이 뇌리를 스쳤다. 하지만 우선 무진에게 들은 소식을 전하는 것이 먼저였다.

“무진이 도진대원군을 직접 만났다고 하네. 염려 놓으라 하셨다는구먼. 그러니 입궁 준비나 잘하고 있으라고, 말이네…. 알겠소, 부인?”

“그날이 언제일까요?”

“국상이 어느 정도 마무리가 되고, 정식 간택이 진행되고 하면 아마도 반년은 족히 잡아야 하겠지. 자네는 명옥이에게 필요할 것들을 차근히 준비하시게.”

마누라 권 씨가 생각이 복잡한 얼굴로 가만히 서방님 정해월을 보고 있었다.

“왜? 왜 그러는가?”

“아닙니다. 호호호. 이제 영감도 채신없이 행동하지 마시오. 아셨지요?”

정말 오랜만에 본 웃음기 어린 다정한 소리였다. 정해월은 속없이 마주 보고 웃었다.

*

양평 정해월의 집 안방마님은 며칠을 골똘히 생각했던 일을 실행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그런데 규중의 여인인 탓에, 일의 중간을 연결할 사람이 아무리 살펴봐도 없었다. 결국 꺼림칙하지만, 대를 이어 집안일을 하는 박 집사를 조용히 불렀다.

“박 서방. 내가 어려운 일을 시킬 사람을 구했으면 하는데, 동네에 안면이 있으면 곤란한데 말이지.”

“어떤 일을 하시고자 하십니까? 일을 알아야 맞는 사람을 수소문할 수 있습니다.”

“그게 말이지. 흠.”

안방마님 권 씨는 8폭짜리 화려한 모란 병풍 앞에 앉아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면서, 집사 박 서방을 가늠만 할 뿐 말을 주저하고 있었다. 눈치 빠른 집사는 재빨리 생각했다.

분명 함부로 발설할 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성사만 되면 그만큼 큰돈이 들어온다는 소리다.

“마님. 양평 나루터로 나가면 어려운 일을 해주는 뜨내기들이 더러 있습니다. 조용히 물색하면 찾을 수 있지요. 다만 액수가 좀 커질 수는 있습니다.”

“액수는 내가 이해하네. 하지만 입이 무거워야지.”

“당연하지요. 청탁이 들어오면 살인마저 소리소문없이 합니다. 누구든 자신이 한 일은 말하지 않는 게 그쪽의 불문율입니다.”

“확실한가?”

“예. 다만 사람을 고를 줄 아는 경험 있는 눈이 필요하지요. 아버님께 들은 말이 있습니다.”

박 집사는 강수를 둔다는 느낌으로 살인이란 말과 대를 이은 집사였던 아버지를 강조했다. 그러자 마님 권 씨가 눈을 번쩍 뜨며 물었다.

“살인? 흠…흠. 이보게. 송덕사…… 으음. 자네도 알지.”

“예. 마님.”

“……나는 말이네. 그 절이 이제는 없어졌으면 하네.”

“네.”

박 집사는 마치 오늘 밥 먹었는가, 하는 소리를 들었다는 듯 아무 표정이 없이 말하고 있었다.

안방마님 권 씨는 어렵게 한 말을 별일 아닌 듯 받아주니 힘이 생겨 한 걸음 더 나섰다.

“그 절 요사채에 사람이 머물 것이네. 나는 그가 없어졌으면 하네.”

“네. 마님.”

박 집사는 아무런 동요 없이 말하는 듯 보이지만, 속으로는 너무나 놀랐다.

‘아니. 이 여편네가 드디어 미쳤구나. 절에 불을 지르는 것도 부족해 사람마저 죽이려는가? 누구를?’

“어떤가? 이런 일도 마땅한 사람을 구할 수 있을까?”

“마님. 이 일은 이중의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러니 상당한 재물이 소요될 것은 분명합니다.”

“나도 그 정도는 가늠하고 있네. 대강 이백 정도면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