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내가 당신에게 온 걸 까

“일어나요.”

쾅쾅.

“배 떠날 시간이라고요.”

누군가가 버럭버럭 고함치는 소리가 들렸다.

‘옆집인가? 아침부터 웬 민폐냐고.’

세이는 이불속으로 더 푹 들어가며 잠결에 투덜거렸다. 단잠이 귀를 닫아주길 바라면서.

쾅쾅.

문이 떨어져라 두드리는 저 소리는 두드리는 것이 아니라 발로 차는 것 같았다. 초인종 놔두고 도대체 누가 문을 발로 차는지 모르겠다.

눈을 뜨려는데 머리가 지끈거리고 아팠다. 다니던 회사가 망하는 바람에 어제 마지막으로 분노의 회포를 풀었더니 너무 마신 것 같았다. 모두 술을 물처럼 들이켰었다.

그런데 그 후에 집에는 어떻게 들어왔더라.

쾅쾅.

다시 문이 떨어질 듯이 울렸다. 덩달아 머리도 울렸다. 이건 일어나지 않을 수 없는 거였다. 우리 집 문이었기 때문이다.

비척비척 일어나 문의 잠금장치를 풀려고 했는데, 잠금장치가 없었다. 원룸이라 위험해서 항상 이중 삼중으로 잠그고 자는데 어제는 너무 취해서 그냥 잔 것 같았다.

손잡이를 돌리자마자 문이 활짝 열렸다.

“줘요.”

바로 코앞으로 자그마한 손바닥이 펼쳐졌다. 동그란 빵 모양의 모자를 쓰고 멜빵바지를 입은 처음 보는 아이였다. 몸이 호리호리하고 키가 또래보다 커 보였지만 얼굴이 어려 보이니 소년티가 물씬 났다.

은연중 넘 귀엽다는 생각을 하며 어리둥절한 채로 멍하니 서 있는데, 코앞에서 손바닥이 너울처럼 흔들렸다. 속이 좋지 않았는데 흔들리는 것을 보니 더 좋지 않아졌다.

“깨워주면 1실링 준다면서요. 배 곧 떠나니까 빨리 가는 게 좋을걸요.”

“그런데 도대체 넌… 누구니.”

“네?”

“집 잘못 찾은 것 같은데 그만 가라.”

그대로 문을 닫으려는데 닫히지가 않았다. 소년이 한발을 문에 턱 걸쳐 놓고 있었다. 까맣고 낡은 구두를 신은 발은 야무졌다.

문이 닫히는 걸 충분히 막을 수 있을 정도로.

“배 안 타도 돼요? 안 타면 안 될 것 같은데.”

“무슨 배.”

“하아….”

소년이 한심하다는 듯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런데 소년의 어깨너머로 보이는 바깥 풍경이 이상했다. 탁 트인 푸른 바다였다. 눈이 잘못된 것이 틀림없었다. 쓱쓱 손으로 눈을 비비는데 뱃고동 소리가 길게 울렸다.

그 순간, 소년이 문을 활짝 열었다. 잘 못 본 것이 아니었다. 바람결에 소금기 듬뿍 묻은 짭짤한 바다 냄새가 났다. 그때까지 눈에 묻어 있던 잠이 확 깨어버렸다.

“뭐지.”

“1실링 달라고요.”

소년의 재촉이 계속 이어졌다.

꿈이구나. 꿈속이었다. 잠이 깬 것이 아니었다.

주택가 밀집 지역에 있는 귀족 빌라 4층 407호인 내 방에서 바다가 보일 리가 없었다. 그러니 개꿈을 꾸고 있는 거였다. 상상력이 지나치게 풍부한 세이는 꿈을 자주 길게 이야기까지 만들며 꾸는 편이었다. 깨고 나면 거의 기억나는 것이 없었지만 아무튼 그랬다.

꿈이라고 인정하고 나니 이 소년이 달라는 돈도 줘야 할 것 같았다. 그래야 문을 부수지 않겠지.

“기다려봐. 1실링이 돈인 거지. 돈이 어디 있더라.”

주머니를 뒤지려고 했는데 옷에 주머니가 없었다. 그런데 내가 뭘 입고 있는 거지.

이건… 드레스구나. 감색 드레스는 입고 자서 그런지 꾸깃꾸깃 구겨져 있었지만 만져보니 질감이 부드러웠다. 고급스런 느낌이었다. 현실처럼 촉감까지 느껴지는 걸 보니 꿈이 참 생생했다.

“됐어요. 돈 안 받을게요.”

“응?”

“안 받는다고요. 배 떠나기 전에 타기나 해요.”

소년이 그대로 돌아섰다. 1실링 달라고 소리치던 것과는 어울리지 않게 빠른 포기였다. 그런데 소년이 돌아서자, 내가 꾸고 있는 꿈인데도 낯선 풍경, 낯선 공간에 홀로 남겨지는 것이 불안했다.

그래서 무의식중에 소년의 손을 덥석 잡고 말았다.

“그냥 가면 안 되지. 돈 줄게 들어와.”

소년은 자신의 손을 잡은 세이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세이도 마주 바라봐줬다. 그리고 약간 놀랐다. 바다를 닮은 소년의 푸른색 눈동자 때문이었다. 모자 안에서 삐져나온 머리카락은 검은색에 붉은 코팅을 한 것처럼 반짝거렸다.

무엇보다 하얀 볼이 찐빵처럼 빵빵해서 귀여웠다.

세이는 이런 캐릭터를 그린 적이 있었다. 검붉은 머리에 푸른 눈동자를 가진 소년, 여성향 게임 속 황태자 캐릭터로 딱 들어맞았다. 물론 망해버린 회사의 사장은 며칠 밤을 새워 그린 내 자식 같은 캐릭터를 한 번에 노라고 말하며 단번에 사장시켰다.

그런 캐릭터를 살아 움직이는 그대로 앞에 두고 있으니 얼이 나가버렸다.

“괜찮은 거 맞죠?”

소년을 너무 멍하니 보고 있었나 보았다. 소년은 그 귀여운 얼굴에 걱정 반 경계심 반을 담고 물어보고 있었다. 세이는 빵모자를 가볍게 톡톡 두드리며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무해하게 웃는 건 캐릭터 디자인하는 거 다음으로 세이가 가장 잘하는 것 중 하나였다.

“당연히 괜찮지. 걱정까지 해주는 거야? 기특하네.”

저절로 나오는 세이의 미소를 가만히 보며, 소년은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곧 경계심이 풀렸는지 문을 닫으며 안으로 들어왔다.

“이름이 뭐야? 나는 한세이라고 해.”

“…피터요.”

방 안은 한눈에도 다 살필 수 있을 정도로 좁았다.

옷걸이에 걸려있는 지나치게 크고 챙이 넓은 모자 하나, 그리고 고급스런 질감인 걸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짧은 재킷 하나, 이미테이션 주제에 진짜처럼 보이는 보석 장식이 붙은 가죽구두, 그리고 침대 옆에 있는 작은 짐가방 하나가 다였다.

아마도 가방 안에 뭔가 들어있을 것 같았다. 내게 아닌 것 같았지만 내 꿈이니까 내 거 맞겠지. 세이는 묘한 흥분을 느꼈다. 이 꿈은 모험 냄새가 물씬 났다. 현실에선 할 수 없었던 모험물 꿈인 게 틀림없었다.

“근데 피터, 내가 깨워달라고 한 거야?”

“그건 아니에요.”

“그럼?”

“제가 깨워준다고 했어요.”

“1실링 받으려고? 아직 어린 것 같은데 돈 벌어야 해?”

세이는 가방의 지퍼를 열려고 낑낑대면서 물었다. 생각보다 더 뻑뻑하고 잘 안 열렸다.

“그것도 그렇지만 그쪽이 조금 이상했잖아요. 세상 다 산 것처럼 보여서 무서웠다고요.”

“착하네. 걱정한 거였구나. 그래도 문 좀 살살 두드리지. 문 부서지는 줄 알았거든.”

그렇게 안 열리던 가방이 힘을 빼자 갑자기 훅 열렸다. 그리고 빵빵한 가방 안에서 갈색 유리병이 튕겨져 나와 바닥에 뒹굴었다.

그걸 본 피터의 얼굴이 금방 새하얗게 변했다. 피터는 후다닥 갈색병을 낚아채 갔다.

“이럴 줄 알았어.”

푸른 눈에 눈물이 가득 차오르고 있었다. 왜 이러는지 알 수가 없어 멀뚱멀뚱 볼 수밖에 없었다.

“이건 압수예요.”

눈물을 주렁주렁 달고 있는 푸른 눈은 제법 매서웠다. 말 안 듣는 어른을 혼내는 느낌이 다분했다.

“그… 그래 뭔지는 모르겠지만 가지고 싶으면 너 가져.”

“이런 거 왜 들고 다녀요. 죽고 싶어서 그래요? 아무리 우울해도 이런 건 먹으면 안 돼요. 우리 누이도 이거 너무 많이 먹다가 죽을 뻔했어요.”

헉, 입이 벌어진 채 다물려 지지가 않았다. 이건 슬픈 꿈인 것 같았다. 잘 웃고 잘 우는 세이의 눈에도 금방 눈물 한 방울이 모아졌다.

슬픈 꿈 꾸고 나면 아침에 힘든데, 꿈에서 엉엉 울고 일어나니 눈이 탱탱 부어있기도 했었다. 세이는 꾹 눈물을 밀어 넣었다.

“그런 거라면 너도 만지면 안 돼. 위험한 거잖아.”

세이는 피터의 손에든 갈색 병을 얼른 빼내 들었다. 그리고는 방에 딸린 욕실 문을 열고 변기에 액체를 쏟아부었다. 꽃향기가 폴폴 풍겼다. 무슨 약이 이렇게 향기롭지.

아, 꿈이라서 그렇구나.

“됐지. 이제 괜찮아.”

피터가 고개를 끄덕이며 눈물을 쓱 닦았다. 세이는 다시 돌아와 가방 탐색에 돌입했다. 작은 가방 안에는 별게… 없었다. 레이스가 잔뜩 달린 드레스 한 벌 때문에 빵빵했던 거였다.

조금 더 안쪽에는 속옷과 양말 그리고… 옷가지들 사이에 복주머니처럼 생긴 것이 볼록하고 묵직한 부피감을 자랑하고 있었다. 딱 봐도 돈주머니였다.

그리고 그 옆엔 벨벳으로 된 작은 상자 하나와 편지 몇 통도 들어있었다.

‘내게 아닌가, 내 꿈이면 이것들이 다 뭔지 알아야 하는 거 아냐.’

세이는 고개를 갸우뚱했지만 다른 건 하나도 궁금하지 않았고 돈주머니만 눈에 들어왔다.

꿈에서 깨고 나면 당장 직장부터 구해야 했고, 새 직장 구할 때까진 돈을 아껴 써야 했다. 겜 시장도 포화상태라 망겜으로 망하는 작은 회사들이 많아 잘 골라야 했다. 한마디로 게임 캐릭터 디자이너인 세이는 이제부터 백수라 한동안 돈을 아껴 써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러니 돈주머니를 보고 눈이 돌아갈 수밖에.

세이는 저절로 벌어지는 입꼬리를 말아 물며 돈주머니를 열었다. 그러잖아도 큰 눈이 더 크게 휘둥그레졌다. 황금색으로 반짝이는 이것들은… 금화였다. 냉큼 하나 꺼내 이로 깨물어 봤다. 이렇게 하는 걸 드라마에서 본 적이 있었기에. 깨물어서 이빨 자국이 나는 걸 보니 금이 맞았다.

그런데 이빨자국 나면 금 맞는 거겠지. 세이는 조금 허술한 면이 있었는데 단짝친구 미진은 그걸 멍한 귀염이라고 했었다.

“뭐해요.”

“확인했지. 금이 맞는지.”

“그걸 더럽게 먹어보고 확인한다고요? 이렇게 글로 써있는데.”

피터가 금화 한 개를 꺼내더니 세이의 눈앞에 디밀었다. 받아들고 자세히 보니 글자 같은 것이 적혀 있었다. 꾸불꾸불 그림 같은 게 문자긴 한 것 같은데… 문자 맞나?

눈을 가늘게 뜨고 한참을 보았다. 그런데 꾸불꾸불하던 게 점점 글자로 보였다. 그리고 읽혔다. 이스타르라고 적혀 있었다.

“이… 이게 읽히네. 한글도 아닌데. 뭐지. 왜 이렇게 신기하지.”

허둥지둥 눈을 떼굴떼굴 굴리며 세이는 보고 또 보았다. 피터는 세상 바보를 보는 표정으로 그런 세이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뱃고동 소리가 또다시 길게 울렸다. 피터는 그 소리에 퍼뜩 놀랐다.

“일어나요. 배 떠나요.”

피터는 세이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 피터는 동작도 재빠르고 손도 빨랐다. 가만히 서 있기만 했는데 벽에 걸려있는 모자가 머리에 씌워지고, 재킷이 입혀졌다. 발을 들라고 해서 들었더니 가죽구두가 신겨졌다.

‘뭐지? 이 꼬마는. 왜 이렇게 잘하지.’

어느새 가방 지퍼까지 꼭 잠근 피터는 금화가 든 주머니만 세이 앞에 내밀었다.

“잘 챙겨요. 금화 하나에 100실링이니까 함부로 꺼내지 말고요. 괴물 공작님 덕분에 치안이 안정된 곳이지만 도둑은 늘 있으니까요.”

“괴물 공작이라니.”

“정신 차려요. 괴물 공작이라고 했다간 목이 잘린다고요.”

“너도 방금 그리 말했잖아.”

“내가 언제요.”

불퉁하게 한쪽 볼을 부풀리며 딴전을 피우는 피터가 귀여워 세이는 웃고 말았다. 뭔가 굉장히 분주하고 많은 일들이 일어난 이상한 아침이었다. 그리고 귀여운 소년을 만난 날이었다. 피터의 이 귀여운 얼굴을 잘 기억했다가 꿈에서 깨어나면 열심히 그려놔야겠다고 세이는 다짐했다. 그래서 더 열심히 피터를 빤히 바라보았다.

“정신 나간 거 아니죠?”

“뭐?”

“아니라면, 얼른 받아요.”

피터가 금화 주머니를 흔들었다. 조금 전에 1실링 달라고 손바닥을 흔들었던 것처럼. 그래서 주머니에서 금화 하나를 꺼내 피터의 손안에 쥐어주었다.

“뭐예요.”

“1실링에 내 모델이 되어준 값을 얹은 거야.”

피터는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은 것 같았지만 괜찮았다. 이건 캐릭터 디자이너인 한세이만 기억하면 되는 것이었으니까. 세이는 재킷 주머니에 금화 주머니를 대충 넣었다.

아무리 금화라도 꿈에서 깨고 나면 사라질 허상이니 미련을 두지 않기로 했다. 준비가 다 되었다고 생각했는지 피터는 저보다 큰 어른인 세이의 손을 잡더니 곧바로 문으로 이끌었다.

*

머물던 건물을 나서자, 여러가지 소리가 한꺼번에 들리기 시작했다. 현대 도시의 소음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굳이 찾으려 하지 않아도 항구를 중심으로 발달한 도시 특유의 독특함이 곳곳에 보였다.

이곳은 세이가 모르는 전혀 다른 세상임을 인정해야 했다.

피터는 성큼성큼 앞서가고 있었다. 귀여운 빵모자를 열심히 따라가는데, 빵모자 쓴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피터.”

소리쳐 부르니 피터가 돌아보았다. 세이는 빵모자가 아니라 모자 사이로 삐져나온 피터의 검붉은 머리카락을 따라가기로 했다.

그런데 손가락에 감각이 없었다. 무겁지도 않은 작은 가방을 들었을 뿐인데도 그랬다.

다른 쪽 손으로 가방을 옮기고 나서 보니, 정신이 없어서 몰랐는데 손이 너무 하얗고 손가락도 가늘었다. 손톱도 어찌나 잘 관리되어 있는지 분홍빛 도는 손톱에 자잘한 초록색 보석들이 붙어 있었다.

원하는 걸 꿈에서 실현해 본적은 있었지만, 원하지 않는 설정이 나오는 것은 드물었다. 특히 손톱에 매니큐어라도 바르면 답답해서 견디지 못하는 세이였기에 악몽이 아닌 이상 손톱이 이럴 리가 없었다.

“뭐지.”

예쁘기는 했지만 확인한 순간부터 답답했다. 이 상황이 꿈같지 않다는 불길한 예감이 한 움큼 끌려 나왔다. 무언가가 이상했다.

이상할 때는 미련 없이 얼른 꿈에서 깨는 것이 제일 좋았다.

악몽이 되기 전에… 여길 빠져나가야 했다.

세이는 그 예쁜 손톱으로 하얀 손등을 냉큼 꼬집었다. 꿈이니까 얼른 깨라고 손톱에 날을 세웠다.

그런데… 헉… 너무 아팠다.

절대로 아프면 안 되었다. 그러면 꿈이 아닌 거니까.

“저기… 피터.”

세이가 부르는데도 피터는 서둘러 걸음을 옮기느라 잘 듣지를 못했다. 달려가 팔을 잡아당겨 그의 걸음을 멈추게 했다. 아픈 감각도 제 손으로 해서 착각일 수 있으니, 다르게 해보아야 했다.

“있잖아. 나 좀 세게 때려봐.”

“뭐라고요?”

세이는 걸음을 멈추고 모자를 살짝 걷으며 뺨을 내밀었다. 이것이 얼마나 이상한 일인지 생각해 볼 겨를도 없었다.

피터만 급습을 당한 것처럼 당황하고 있었다. 뽀얗고 예쁜 얼굴이 바로 눈앞까지 다가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은빛으로 보이는 긴 속눈썹이 나비 날개처럼 팔랑거리는 것까지 보였다.

너무 놀란 피터는 저절로 몸을 뒤로 물렸다. 그러나 지나가던 사람들이 모자 아래로 살짝 드러난 세이의 얼굴을 보려 하자, 피터는 얼른 몸으로 막았다.

“뭐… 뭐 하는 거예요.”

“확인할 게 있거든. 있는 힘껏 때려도 안 아플 거니까 망설이지 말고.”

피터는 얼른 세이의 모자를 눌렀다. 눈이 다 가려져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이상한 말 하지 말고 저리 가요.”

피터가 당황하며 세이를 슬쩍 밀고 있었다. 그제서야 세이는 제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고 민망해졌다. 갑자기 때려 보라고 했으니까 피터는 많이 놀란 것 같았다.

그래도 확인은 해보고 싶었는데, 녀석이 너무 착해서 안 될 것 같았다.

세이는 이미 마음이 불편해지고 있었다. 고개를 다시 들고 복작거리며 지나가고 있는 사람들을 눈에 담았다. 다양한 머리색과 눈동자를 가진 사람들이었다. 그 정도까진 괜찮았다.

그런데 그들이 입고 있는 옷이, 중세시대 복식을 본뜨고, 더 현대식으로 변형한 듯 보였다. 멋을 낸 사람들을 보면 더 확연하게 보였다.

망겜이었지만, 세이가 맡은 게임 캐릭터 역시 중세의 기사였다. 물론 퓨전이라 갑옷 흉내만 냈었지만, 아무튼 그 시대의 배경을 찾아 본적도 있었다. 그래서 꿈에 섞여 나왔나 보았다.

원래 꿈의 배경이란 머릿속에 스쳐 간 기억들로 만들어지는 거니까.

자신이 느끼는 이 위화감은 지나친 거였다.

“그래, 그럴 리 없지.”

세이는 의심을 털어 내었다. 이왕 모험 가득한 꿈을 꾸고 있으니 즐기면 될 일이었다.

항구는 컸고 정박해 있는 배는 많았다. 세이는 한눈에도 엄청나게 큰 돛이 달린 범선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대형 크루즈선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짐을 싣거나 사람들을 태우거나 하는 다른 배들과 달리 홀로 고요하게 정박해 있었다.

“우리가 저 배를 탄다고? 저렇게 큰 배를? 어디 멀리라도 가야 하는 거야.”

거대한 배의 웅장함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고개를 한껏 들어 올려 배를 보고 있는 세이를 피터는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전날 저녁에 보았을 때만 해도 지친 얼굴에 눈물을 주륵주륵 흘리고 있었는데, 지금은 호기심과 기대감으로 가득차 있었다.

무엇보다도 붉은 입술 끝에 미소가 끊이지 않았다. 걱정이 무색하게도 밝아서 다행이었다.

“어제 배를 탈거라고 했잖아요. 제가 다 들었거든요.”

“내가?”

“그럼 누구겠어요.”

멍한 표정으로 어리둥절해 있는 세이를 보다가 피터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제 같지 않게 무슨 일을 낼 것 같진 않았지만, 그런데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피터는 우울한 사람이 어떤 눈을 할 때 위험한지 아주 잘 알았다. 그리고 어제 세이에게서 그 눈을 보았던 것이다.

“이곳은 이스타르 제국 남부에 있는 섬이고, 헤르니안 공작령에 속한 곳이에요. 저 배를 타고 가야 공작령을 벗어날 수 있어요.”

피터는 커다란 범선이 아니라, 그 옆에서 사람들을 태우고 있는 좀 더 작은 배를 가리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