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재회의 밤

어둑한 밤거리.

영업 중인 약국 내부가 전면 통유리를 통해 훤히 보였다. 약사와 이야기를 나누던 연수는 물건을 받아들고 값을 치른 뒤 받은 거스름돈을 지갑에 주섬주섬 넣었다. 상대가 인사를 하지만 그녀답지 않게 대꾸 없이 터벅터벅 나섰다.

유리문을 열고 나온 그녀가 상당히 긴장한 상태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다음 향할 곳이 궁금할 때 그녀는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한가한 약국 매대 앞의 약사도 그녀의 행동을 바라보며 앉아있다.

지나가던 행인 한 명이 이상한지 괜히 한번 돌아보고선 다시 걸음을 뗄 때야 연수는 결심이 선 듯 다음 목적지를 향했다. 그 건물의 1층이었다. 입구로 쏙 들어가 버렸다.

“하…!”

화장실 칸막이 안, 연수는 임신 테스트기 결과를 보고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내내 짓누르던 절망적인 상황의 가능성은 배제되었다지만, 이런 상황까지 만든 것이 한심스러웠다.

‘정말 철이 없는 게 맞아. 그래, 엄마 말이 맞을 거야. 난… 한심하고… 대책 없고… 자격 없고….’

화장실 밖으로 나와서도 이런 자책을 하며 터벅터벅 바닥만 보며 걷고 있었다.

“헉!”

한순간이었다. 커다란 사내에 의해 팔이 붙잡힌 채 자신의 몸이 붕 뜨며 옮겨지고서야 인적 없는 건물 안에서 정신을 빼놓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어떻게 된 거야?”

나직하고도 어딘가 불안정한 호흡의 목소리가 귓가에 떨어졌다. 그제야 자신을 구석으로 끌고 가 벽에 밀어붙인 괴한이 태율임을 알아채는 연수였다.

연수가 올려다본 그는 검은 옷에 모자와 마스크로 꽁꽁 가리고도 큰 키에 곧은 직각의 어깨, 매력적인 길고 시원한 눈매로 자신이 한태율임을 드러내고 있었다. 벽에 팔을 짚고 선 태율에 의해 연수는 꼼짝하지 못하고 갇힌 신세가 되었다.

이내 그가 마스크를 내렸다.

“가… 갑자기 뭐야?”

“다 봤어. 약국에서 나오는 거. 바로 화장실 가서 뭐 했어?”

“…….”

놀란 마음을 다스리려 연수가 가슴과 배 사이에 손바닥을 대자 은근한 그의 시선이 따갑도록 따라붙는다.

‘아! 오해하려나?’

태율은 조금 전 자신이 임신 테스트기를 사용했음을 직감하고 있는데. 이 동작으로 인해 더욱 오해를 불러일으킬 거라는데 생각이 미치자 말을 급하게 내뱉는다.

“그런 거 아냐.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지난번에 봤을 때 그, 했잖아…?”

“뭘?”

헛구역질하는 걸 말하는 거겠지. 태율은 차마 입덧이라는 말을 하지 못하고 망설이고 있었다.

“하! 대체… 날 미행한 거야?”

“…….”

“무슨 짓이야 이게? 사람 놀라게나 하고!”

“그건 미안해. 그래도 확인은 해야 했어. 지난번에 그러는 거 보고 뭐 잘못된 건 아닌가 싶어서.”

“잘못?”

순간 연수는 울컥했다. 잘못된 거?

그런 감정 기복이 태율에겐 심상치 않게 여겨지기만 했다. 혹시 정말? 임신을 확인한다는 게 다른 질문이 먼저 튀어나왔다.

“아이 아빠가 누구야?”

만약 임신이 맞다면 자신은 단 하루만 함께했을 뿐이다. 아직 결혼하지 않았다는 그녀에게 그렇다면 교제하는 남자는 있느냐 묻지 않았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래서 내내 궁금했었고 결국 이 순간 그 질문이 먼저 나와 버린 것이다.

연수는 어이가 없었다. 태율이 조금만 더 떠들어대면 그럴 생각은 조금도 없던, 오래 묵은 원망이 꾸물대며 목구멍 밖으로 터져 올라올 것 같았다.

“누구냐고.”

다시 위험한 호흡의 음성이 내려앉았다.

그녀가 올려다보는 태율의 눈 속엔 기어이 답을 들어야 한다는 의지가 일렁였다. 순간 놀랄 만큼. 그래서 뒷걸음을 치려 했지만, 다시금 벽에 몰려 한 발도 물러설 곳이 없음을 깨닫고 나니 급한 맘에 되물어버렸다.

“뭐, 어떤 아이를 말하는 거야?”

아차.

“어떤 아이긴. 지금 배 속에 있는 아이 말하는 거지. 테스트해본 거 맞지?”

휴.

“아니야. 아니라고.”

“거짓말.”

“무슨 거짓말이야?”

“…….”

“…그래. 혹시나 해서 나도 테스트해봤어. 아니었어.”

순간 그의 얼굴에 스쳐 지나간 것은 안도감일까 아쉬움일까? 종잡을 수 없는 잠깐의 어둠이 잘생긴 태율의 얼굴에 내려앉을 때, 연수는 이상하게 쿵 하는 감정이 들었다.

‘말도 안 되는 생각이지. 얘가 지금 임신 아니었구나 하고 아쉬워할 리가 없잖아.’

자신이 그에게 이 정도로나 미련이 남았나 싶은 연수였다. 표정을 잘못 읽어도 어처구니없이 읽은 자신이 또 한심했다. 뭘 기대하고 있던 거야.

“그러니까 잘못… 잘못됐을까 봐 걱정할 일 없고. 우린 여전히 아무 엮일 일 없는 사이 그대로고. 태율 씬, 그렇게 중요한 연예계 활동이나 신경 쓰면 돼. 나 감시하지 말고.”

한마디 한마디가 올려다보는 그녀의 얼굴과 함께 박혔다.

‘날 원망한다고 했지.’

거짓말로 다가가고 울먹거리는 그녀에게 헤어짐을 통보했었다. 지금 그녀가 강조하는, 그때 자신이 얘기했던 헤어짐의 이유. 미안함에 할 말이 없어졌다.

“더 할 말 없지? 앞으로 나 따라다니지 마. 그렇게 한가한 사람 아니잖아?”

오래전 해맑고 순수하던 연수의 눈길이 떠올려지는 태율이었다. 그리고 14년 만에 다시 만난 그 밤, 자신을 올려다보던 눈길…

‘이대로 보내도 되는 걸까? 정말 아닌 거 맞아? 아니면, 거짓말을 하기로 한 걸까.’

그녀가 거짓말을 하고 넘어가는 걸지도 모른다는 불안 때문일까, 아니면…

“전화번호 줘.”

“뭐?”

그제야 연수는 자신을 다시 올려다보았다. 오래전의 순수함과 지난달 밤의 젖은 눈망울이 희미하게 섞여 남았다.

“못 믿겠어. 혹시 모르니깐 연락처 줘.”

“알아서 뭐 어쩌자는 건데? 내가 왜 거짓말을 해?”

언성이 높아진 그녀의 눈이 이번엔 정말 미움만을 담아내고 있는 것 같다.

믿을 수 없는 게 아니라, 믿기 싫었던 것이었을까? 자신도 모르게 내뱉은 말이 이대로 헤어지면 또 만날 명분이 없어 질척대는 요구임을 금방 자각한 태율은 당황했다. 왜…

앞으로 또 만날 일이 있든 없든, 혐오 가득한 추억의 상대는 되고 싶지 않았다. 스르르 그녀를 가두던 팔을 내려 바로 섰다.

연수는 곧장 건물 밖으로 빠져나갔다. 운동화를 신은 그녀는 발걸음 소리마저도 남기지 않았다.

“휴….”

억누르던 불안함. 그것이 가셨으면 자신도 다시 갈 곳으로 돌아가면 되는데, 왜 남겨진 기분이 드는지 모를 일이었다.

“응, 먼저 자고 있어. 금방 갈게.”

마스크를 쓰고 건물 밖으로 나오자 연수는 전화를 받고 있었다.

“……!”

그리고 분명하게 그녀의 수화기 너머에선 남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무슨 말까진 하는지 모를 잡음 같은 소리였지만 분명했다.

“그래 끊어.”

전화를 끊고 나자, 연수의 어깨는 다시 축 처진다. 그녀가 핸드백에 전화기를 넣으려 할 때 순식간에 다시 앞을 막아서는 태율이다.

“어맛!”

“뭐야? 결혼 안 했다더니, 남자랑 살고 있었어?”

“……!”

놀람을 진정시킬 새도 없이 그가 통화를 들었다는 것에 연수는 심장이 요동쳤다. 뭐라고 말해야 할까?

“뭐, 뭐? 그게 왜?”

“그래놓고 나하고 잤단 말야? 속인 거잖아! 나를 외도한 여자 상간남 만드는 거라고.”

생각해 보니 맞는 말이다. 이대로 인정하듯 넘어가면 안 될 것 같다.

“영찬이야. 내 동생.”

“어?”

“기억하는지 모르겠지만, 남동생 일곱 살 차이 난다고 했잖아. 지금은 회사 다녀.”

물론 고향에서 다니지만, 상관없다. 이대로 굳혀야 했다. 설마 이것도 확인 작업하지야 않겠지.

‘그동안 다른 여자들도 많이 사귀었을 텐데, 오래전에 나랑 남동생 이야기 나눈 것까지 기억하려나 모르겠지만….’

“아! 그래? 서울에서 직장생활 하는구나.”

예상외로 태율은 바로 기억했다. 혼자 오해하곤 화를 냈다는 게 민망했는지 더없이 순하게 수긍하며 눈빛을 떨궜다. 그 모습에 괜히 그의 얼굴을 매만지고 싶어지는 연수였지만 꾹 참았다.

“갈게. 다신 내 일에 상관하지 말고.”

“저기….”

“그렇게 남의 시선 예민한 몸이 길 한가운데서 이렇게 행동하면 안 되지.”

“…….”

연수는 태율을 지나쳐 걷기 시작했다.

“태워다 줄게.”

돌아볼까. 거절의 말을 하며 한 번 더 그를 쳐다볼까? 그러지 말아야겠다고 마음을 다잡으며 앞만 보고 걸었다.

“집이 어디야? 이 근처야? 아님, 버스 정류장으로 가는 거야?”

어둑한 길을 따라 멀어져 가는 연수는 끝까지 말이 없었다.

이연수.

스무 살 그의 마음을 사로잡은 그녀였다. 남들처럼 다가가고 썸을 타고, 대시하고, 받아주고… 연애하고. 그러다 헤어졌다.

남들처럼이라고 하는 흔한 연애는 저마다 모두에게 특별하듯 사랑의 깊이와 상처 또한 저마다 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태율에게 그녀와의 연애는 스무 살 풋사랑의 추억이었고, 그녀에게 그 사랑은 남자친구의 배신으로 끝난 아픔이었단 걸 얼마 전에야 알았다.

둘 다 어렸던 시절이니 그녀도 추억으로 간직할 줄 알았다. 그리고 그녀에게 자신이 첫 남자라는 특별함이 더한 추억일 거라고.

지난달 다시 만나게 된 그녀는 원망을 가득 담았다. 그러면서도 다시, 한 번 더 하룻밤 사랑을 원했다.

지금쯤은 결혼했으려나? 아이도 낳고? 순해 빠지기만 하던 그녀는 나이 먹고 얼마나 변했을까 궁금했던 적이 많았는데, 정말 상상 못 했던 모습이었다. 어느새 삼십 대 중반이라는 나이의 그녀는 소녀에서 여인이 된 듯한 또 다른 매력의 사랑스러움을 가득 가지고 있었다. 그것이 몹시도 아찔했다.

자칫 배우 지성훈처럼 임신 스캔들로 번질지 모를 불씨를 찾아 이곳을 배회한 한태율, 낯선 건물의 화장실에서 떨리는 임신테스트를 마친 이연수. 풋풋한 연인 사이였던 그들이 14년 만에 달갑지 않은 이야기가 오고 간 데는 지난달 밤의 우연한 만남이 시작이었다.

***

한 달 전.

다세대 주택의 옥탑 집.

보글보글 끓는 소고기뭇국이었다. 집어 든 냄비 뚜껑을 손이 데지 않게 조심히 싱크대 상판에 놓고 연수는 국자를 살짝 담가 국물 간을 본다.

“음~ 좋아!”

“좋아?”

만족하는 말끝에 서준이 뒤에서 얼굴을 그녀의 어깨에 내려 얹고는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묻는다.

“깜짝이야….”

돌아보는 그녀의 얼굴은 전혀 놀란 사람처럼 보이지 않는데. 분명 살금살금 다가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맛을 보며 흐뭇해하는 추임새도 그래서 일부러 낸 거겠지. 하루의 아침을 상쾌하게 시작하자는 긍정의 기운을 위해.

“왜 옷도 아직 안 입었어? 빨리 챙겨 입고 밥 먹어.”

씻고 나서 옷을 갈아입으러 들어간 줄 알았던 서준의 옷차림은 그대로였다.

“내가 찾는 티가 안 보여. 흰색 티.”

“아 가을에 산 거? 그거 빨래했는데 말라서 걷어놓고 아직 정리 안 했어. 저기 봐봐.”

연수는 거실의 식탁 옆 바닥을 가리켰다. 그리곤 서준이 빨래를 뒤적일 때 연수는 밥통의 밥을 뒤적여 담았다.

“이거 청바지 내 거잖아! 작아서 못 입는데 왜 빨았어?”

“작다고 아깝게 왜 버려? 내가 입으면 돼. 좀 크긴 해도 걷어입으면 돼.”

“아, 참! 그러지 말라니까?”

“뭐가? 집에서만 입을 거야….”

질색하는 투의 서준이 말에 아무렇지 않게 말하던 연수가 조금 뻘쭘해져 소심히 대꾸한다.

“집에서 무슨 청바지야? 남자 바지를. 그냥 버려.”

“청바지에 남자, 여자가 어딨어? 맞으면 입는 거지….”

서준은 불만 가득해져선 흰색 면티를 찾아들고 방으로 들어갔다. 그 불만이 어떤 감정인 줄 알아 심란했다.

‘나도 이러고 싶진 않은데….’

너무 구질구질한가? 그냥 버릴까? 싶으면서도 망설여진다. 이런 이유, 저런 이유로 버리고 새로 사고 하면 언제 돈을 모으지?

탕 탕 탕!

초인종이 따로 없는 집이라 방문 시 문을 두드릴 수밖에 없긴 하지만 언제 들어도 적응이 되지 않았다. 투룸의 옥탑 집 현관문 앞은 식탁만 떨렁 놓이다시피 한 좁은 거실이었고, 바로 맞은편에 싱크대가 있다. 그 싱크대 앞에 있는 연수는 귓속이 울리는 듯했다.

“열어주지 마.”

오늘은 서준이 단호히 말하며 현관문으로 향하려던 연수를 제지했다. 연수도 뻔히 누군지 알 수 있었다. 그 여자애겠지.

“문 열어~!”

정말 저 여자애한테 나란 존재는 안중에도 없나? 다짜고짜 한다는 말이 ‘문 열어’라니. 이 집에 서준이 혼자 사는 게 아니란 건 알고 있잖아? 짜증이 확 났다.

챙길 걸 다 챙겨 든 서준은 그대로 현관문으로 향했다.

“왜 들고 있어? 설마 밥도 안 먹고 그냥 갈려고?”

“응.”

“그러지 마. 밥은 먹어야지.”

“쟤 봐. 밥 생각 없어졌어.”

연수가 잡을 새도 없이 문을 홱 열어젖힌 서준. 그의 얼굴이 드러나자 밖에서 문을 두드리던 여자애가 웃는다. 웃는 여자애를 향해 인상을 확 쓴 후 연수를 돌아본 서준은 신경 쓰지 말라는 듯 씩 웃곤 말했다.

“학교 다녀올게요, 엄마~!”

***

이틀 밤을 보내고 모레 오후에야 올 녀석이 그저 여느 날과 다름없이 가볍게 인사하고 나섰다.

‘밥 먹어야 하는데, 잠깐 기다려.’

‘아냐. 갈게요! 전화할게.’

‘어머니, 안녕히 계세요! 야, 이서준~ 같이 가.’

늘 반기지도 않는 서준을 향해 일방적으로 들이대는 수빈이었다. 그런 수빈을 피해 아들이 수련회를 떠나는 날 아침에 막 떠놓은 밥과 국도 못 먹고 나가버렸다. 이러니 연수는 볼수록 수빈이 맘에 안 들 수밖에 없었다.

‘정말 가정교육을 어떻게 받은 건지….’

행여 아빠 없는 아이라며 색안경을 끼고 보는 학부모들이 있을까 늘 신경 썼던 자신이었기에 삼켰던 말이었다. 하지만 이젠 굳이 삼키고 싶지도 않다.

학교에서 본 잘생긴 남학생이 한 동네 사는 걸 알곤 무작정 쫓아왔단 말에 요즘 애들은 참 과감하구나 하며 처음엔 귀엽게 봤었다. 하지만 거듭 짜증을 내며 경고하는 서준을 귀찮게 하고, 거리낌 없는 수빈이의 표현들이 어떤 이의 기준에선 ‘요즘 애들이 다 그렇지’라 할지라도 연수는 못마땅했다. 한눈에 질이 안 좋아 보이는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는 걸 목격한 후론 더욱 신경이 쓰였다.

홀로 키운 아들이 그동안 속 안 썩이고 잘 컸는데, 마의 사춘기도 잘 보내려나 늘 노심초사하는 연수는 하필 그런 아이가 서준의 주변을 기웃대는 게 불안하다.

‘유난 아니야? 에휴, 난 모르겠다. 아직 우리 하준이가 그렇게 크려면 한참 남았으니.’

미혼인 친구들도 많은 주변에서 이제 네 살 된 아들 하준이를 키우는 선미에게만 은근한 걱정을 내비쳤지만 역시나 공감하진 못했다.

그렇게 아들 걱정을 하며 미뤄둔 집안일을 하는 사이 휴일 오전은 금방 지나고, 곧 알바 갈 시간이 되었다.

지금 다니는 쥬얼리 매장이 주 5일 근무다. 연수는 주 6일이라도 상관없으니 페이를 더 받길 원했지만, 원하는 방향으로 맞춰지진 않았다.

6시 정시퇴근인 수입 주방용품 회사에서 십 년을 일하다 홀로 정리해고 당했다. 그 직장에 비교하면 늦은 시간 퇴근과 줄어든 신입 직원 월급이지만 그래도 돈을 벌 수 있음에 다행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그렇더라도 늘어나도 부족한 수입에 줄어들기까지 하니 여간 걱정되는 게 아니었다. 월급은 손안의 모래처럼 다음 월급날이 되기 전에 스르르 빠져나갔다.

“서준이 새 농구화도 사 줘야 하는데….”

원래는 지난달에 사주려던 건데 예상치도 못하게 농구부에서 수련회를 간다며 삼십 만원이나 걷어가는 통에 밀려난 거다. 아이는 꿈을 키우며 노력하는데 연수가 그 꿈을 지켜줄 능력은 한없이 쪼그라들고 있었다. 안 되겠단 생각에 이틀의 노는 날이 아까워 일당벌이라도 알아보자 마음먹고 지난주부턴 주 1회 파출부 일을 나가고 있다.

편하되 너무 후줄근해 보이지 않게 하얀 블라우스와 베이지색 면바지를 입었다. 옅게 화장을 하곤 거울을 보다, 두 손가락을 턱에 대고는 위로 당겨 밀어 본다.

‘쳐진 건가?’

탱탱해 보이는 얼굴이지만 예전보다 턱선에 조금 몰린 것 같기도 하고.

‘이렇게 나이를 먹는 건가.’

이전이라고 이런 생각을 해보지 않은 건 아니지만 연수는 요즘 나이를 먹어가는 게 너무 서글퍼졌다.

‘애가 커가니까 그렇지. 중학생인데, 다들 그런다더라.’

정말 방실방실 웃던 아이가 어느새 자기 할 일 다 하는 시크한 미남으로 쑥 자라버려서일까? 그럴지도 모르겠다.

이 아이를 고등학교 졸업 할 때까지라도 잘 키워야 할 텐데… 라는 생각으로만 살아왔다. 그런데 서른 이후 더욱 무감각한 채 먹어온 나이처럼, 그렇게 금방 마흔이 될 것 같다. 그 사이를… 정말 이렇게만 보내도 되는 것일까?

허전하다고 해서 누군가와 가정을 꾸리도록 억지로 맘을 먹겠다는 건 아니지만, 거울을 볼 때마다 이렇게 흘려보내기엔 너무 아까운 시간이라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