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창림은 집으로 가고 있었다. 마지막 수업이 끝나자마자 울려댄 어머니의 삐삐호출 때문이었다. 보충수업에, 야간자율학습도 빼 먹고 땡땡이를 칠 수 있는 모처럼의 기회라 잠시 기분이 들뜨기도 했지만, 어머니의 호출을 무시 할 수 없었다. 친구들과 아지트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지킬 수 있을 지 걱정이었다. 창림은 어떻게 하면 좋을까 이리 저리 머리를 굴리며 걸었다. 동네 어귀까지 느긋하던 걸음이 골목을 접어들면서부터 빨라졌다. 검은 대문 앞에 털털거리며 서 있는 트럭을 봤기 때문이다. ''“갑니다, 간다구요!”''일주일 전쯤, 느닷없이 아래채를 세 놓겠다고 선포하신 어머니는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예정된 누군가를 맞기 위한 작업을 하셨다. 직접 도배지와 장판지 등을 고르셨고, 작업하는 인부들에게 세세하게 이르는 것을 지켜 본 창림은 조금 떨떠름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둘만 살던 커다란 이층집에 누군가가 이사를 온다니 좋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불편할 것도 같아 괜한 짜증이 나기도 했다. 결국 자주 마주 칠 일이 없을 듯 해 관심을 끊고 있었다. ''드디어 오늘, 그 누군가가 들어오는 것이다. 창림은 트럭의 창을 톡톡 두드려 주고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오랫동안 손대지 않아 녹이 슨 빗장을 풀고 대문을 활짝 열었다. 녹이 묻은 손을 탁탁 털면서 한 쪽 발로 문가에 있던 화분을 밀어 문을 고정시킨 창림은, 트럭의 짐이 얼마나 되나 힐끗 쳐다보았다. 기사와 자그마한 여자가 내려서 짐칸을 열고 있었고, 몇몇 가전제품을 빼면 그다지 짐도 없었다. ''“좀 도와 드릴까요?”''“아냐, 안 그래도 돼. 창림이라고 했던가? 언니한테 얘기 많이 들었어.”''“어, 저희 어머니와는 어떻게?”''“응, 고향 선후배야. 참, 내 이름은 현주야. 이현주. 이래 보여도 아줌마지. 자주 볼 건데 잘 지내자. 짐도 얼마 없으니까, 거들지 않아도 돼. 들어가서 공부해.”''자그마하지만 눈에 띄게 예쁜 얼굴의 여자, 현주라고 이름까지 밝힌 그녀는 곱게 웃으면서 그냥 들어가라고 손짓을 해댔다. 창림은 마주 웃어 주고는 냅다 뛰었다. 아줌마든, 아가씨든 상관없이 한 지붕 아래 살게 된 예쁘고 젊은 누나를 돕고 싶었다. 현관에다 아무렇게나 가방을 던져 놓고 나온 창림은 짐 중에서도 제법 무거운 것들을 옮겼다. 현주는 방을 청소하고 부엌을 쓸고 닦고 난리를 치고 있었다. 이삿짐 중에 제일 덩치가 큰 냉장고를 내리면서 아저씨를 돕던 창림은 등뒤에서 들려 온 울먹이는 소리에 놀라 움직임을 멈췄다. ''“엄마……!”''창림은 냉장고의 아랫부분을 든 어정쩡한 자세로 고개를 돌려 소리의 주인을 보았다. 트럭조수석의 문이 반쯤 열려 있고, 막 잠에서 깬 듯한 예쁘장한 꼬마가 두 눈 가득 눈물을 머금고는 차에서 내리고 있었다. ''“어, 엄마?”''그럼, 현주가 이 꼬마의 엄마가 되는 셈인가. 좋다 말았네. 누나가 생겨 좋아라 부풀었던 가슴의 바람이 순식간에 빠져 버렸다. 아줌마라고 했지, 애 엄마라는 말은 안 해 놓고……. ''창림은 약간의 배신감을 느끼며 꼬마를 노려보다가, 아저씨에게 양해를 구해 냉장고를 내려놓았다. 창림이 다가가자 꼬마는 울먹이면서 낯선 이에 대한 경계심으로 몸을 움츠렸다. 조금 긴 듯한 단발머리에 가운데 가르마를 타서, 양쪽으로 앙증맞은 딸기모양의 핀으로 고정시켜 놔, 귀여우면서도 단정해 보였다. 짙고 가지런한 눈썹과 크지는 않지만 맑은 눈망울을 가진 꼬마였다. 작은 입술은 뭘 바른 것처럼 반짝이고 있었고, 따뜻한 차안에서 자느라 볼이 발갛게 익어 있었다. ''“안녕, 귀여운 꼬마야!”''“나 꼬마 아냐, 준희란 말이에요!”''작은 손으로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을 비비면서도 당돌하게 자신의 이름을 밝히는 아이. 창림은 피식 웃으면서 꼬마와 눈높이를 맞춰 앉았다. ''“그래, 준희라……. 몇 살이니?”''아이는 대답 없이 고개만 푹 숙이고 있었다. 창림은 허리를 구부려 아이의 얼굴을 들여다 보았다. 그럴수록 아이의 고개는 더 아래로 내려갔다. ''“엄마는 방을 치우고 계셔. 자, 오빠 손잡아. 데려다 줄게.”''창림은 준희의 숙인 얼굴 아래로 오른쪽 집게손가락을 내밀며 반응을 살폈다. 약간 움츠린 턱으로 눈만 치켜뜨고선, 키만 큰 낯선 이를 살피고 있는 꼬마의 모습에 창림은 미소를 지었다. ''“자, 괜찮으니까 잡아. 오빠는 저기 이층 방에 살아. 오빠는 형도 누나도 동생도 없거든, 그래서 준희랑 친하게 지냈으면 좋겠어. 어때?”''“……나도 그런 거 없어요. ……엄마한테, 물어 보고 친하게 지낼게요.”''“그래, 오빠이름은 창림이야. 서창림! 엄마한테 여쭤 보고 오빠랑 친하게 지내자! 자, 엄마한테 가자.”''준희가 등뒤로 감추고 있던 손을 슬그머니 내밀더니 자신이 내민 손가락 끝을 살짝 잡았다. 창림은 싱긋 웃으며 일어서서 정원을 가로질러 모녀가 살게 될 모퉁이 방으로 꼬마를 데리고 갔다. 그동안에도 준희는 두리번거리지 않고 눈동자만 굴리며 집과 정원을 힐끗거렸다. 잘은 모르겠지만, 예닐곱 살 된 여느 아이의 시선은 아니었다. ''“어머나, 우리 준희 깼구나!”''아이와 엄마가 만났다. 창림은 준희가 현주의 품에 안기는 것을 흐뭇한 시선으로 바라보고는 하던 일을 끝내기 위해 트럭이 있는 곳으로 나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꼬마는 창림을 따라 다니며 짐을 옮기기 시작했다. 부엌에서 쓰는 가벼운 냄비나 옷가지가 담긴 보따리가 대부분이었지만, 잠시도 쉬지 않고 움직이고 있었다. ''“우리 준희, 힘들지 않니? 엄마가 할 테니까 저기 앉아 있어.”''“아냐, 엄마. 나 힘세단 말이야!”''“그래, 우리 준희. 좀 있으면 학교도 가는데 힘 셀 거야.”''그 말에 창림은 발길을 멈추고 준희를 쳐다보았다. 저렇게 작은데 학교에 갈 수 있나?''“준희, 학교 가요?”''“응, 여덟 살 치곤 작지?”''“아냐, 아직 여덟 살 아니란 말이야. 일곱 살하고 반이야!”''준희가 현주의 손을 뿌리치면서 톡하니 내 쏘았다. 일곱 살 반? 창림은 터지려는 웃음을 억눌렀다. 그들의 표정을 보던 준희는 화난 얼굴로 식식거리며 방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준희의 등을 지켜보고 있던 현주와 창림은 키득거리며 짐을 옮겼다. 10여분도 지나지 않아 준희는 다시 밖으로 나왔고, 퉁퉁 부은 얼굴로 창림을 따라 다니며 길을 가로막는 등 심술을 부려댔다. 창림은 조금씩 돌아 짐을 옮겨야 했지만, 꼬마 준희가 밉지 않았다. 비어 있던 방이 제법 모양새를 갖춰 갈 무렵엔 모두가 땀에 젖어 있었고, 무지개 빛 노을이 하늘을 수놓고 있었다. ''“창림이도 수고했는데 밥 먹고 공부하러 가. 찬은 없지만 시장을 반찬 삼아서 먹자.”''“예. ……준희도 그만 화 풀어라. 오빠가 책 읽어 줄게, 응?”''“진짜? 오빠한테 책 많아?”''“밥 먹고 나서 오빠 방, 구경시켜 줄게. 이야, 맛있겠다. 잘 먹겠습니다!”''준희는 책을 읽어 준다는 말에 밥상 앞으로 다가앉았고, 세 사람은 가족처럼 오붓하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저녁을 먹었다. 어렵사리 준희의 말문을 튼 창림은 모녀의 셋방에 앉아 조촐하게 차려진 저녁을 먹고도 한참이나 더 있다가 자신의 방으로 갔다. 그래도 남자라고 여기저기 못도 치고, 잘 안 쓰는 물건들은 높은 곳에 올려 주는 등등의 일을 하면서 15년만에 생긴, 아니 만든 어린 여동생 준희와 안면 익히기를 했다. 준희는 잊어버리지 않고 창림의 방까지 따라 와서 제법 두꺼운 위인전을 두 권이나 봤다. 10시 넘어서 어머니가 들어오셨고, 준희는 웃는 얼굴로 인사를 하고는 집으로 돌아갔다. 그 인사가 참 가관이었다.''“저는 일곱 살 반이고요……. 음, 이제부터 오빠와 엄청 친하게 지내야 할…… 음……, 아! 사명 하에 동생이 되기로 한 이준흽니다. 오빠 방을 드나들 수 있는 특허를 내주세요.” ''방금 본 위인전의 영향이 컸나보다. 허락이라고 해도 될 것을 특허라니. 창림은 웃음이 터지려는 것을 헛기침으로 무마하며 가만히 준희를 지켜보았다. 사명이라는 말과 이름을 엄청나게 강조하면서 고개 숙여 인사한 준희는 어머니의 피곤한 얼굴에 웃음을 자아내게 만들더니, 창림의 방에 드나들 수 있게끔 허락을 받아 냈다. 창림은 친구와의 약속을 잊어버릴 만큼, 일곱 살 반 당찬 준희에게 빠져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