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필사의 탈주

“읍, 읍, 윽.”

검은 형체가 억눌린 비명을 지르며 필사적으로 숲을 헤쳐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 움직임이 수상쩍고 괴이했다. 흐린 달빛으로 보니 다리를 움직이지 못하고 있음이 분명해 보였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손으로 잡고 끌며 부지런히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아무리 보아도 사람이 아니고, 그렇다고 짐승처럼 보이지도 않는 괴이한 형체였다.

그 모습이 귀신도 보고 놀랄 모양인지라 달도 구름 속으로 숨어들어 어둠만이 숲을 감싸고 있었다.

“으윽.”

뿌직, 미끄덩, 바사삭.

나뭇가지에 긁히고, 돌에 부딪히고, 바위에서 미끄러지면서도 이를 악물고 나아가다가 한참을 쭈르륵 밀리더니 결국은 몇 번이고 굴러 떨어졌다. 알 수 없는 이는 다행히 개울가의 무른 흙에 몸이 박혀 버렸다.

“흠… 윽… 험.”

입에서 터져 나오려는 비명을 어떻게든 참고 몸을 일으키려 하지만, 지친 팔이 더 이상 힘을 쓰지 못해 결국엔 고꾸라져 물에 풍덩 빠져버렸다. 힘겹게 허우적거리다 다행히 나무 뿌리에 걸려 냇가에 몸을 숨기고 깜깜한 하늘을 응시해 보았다.

“헉… 헉… 헉.”

입을 막고 필사적으로 소리를 죽이고, 귀는 쫑긋 세워 쫓아오는 기척이 있을까 사방을 두루 살피며 몸을 최대한 웅크리며 숨길을 고르고 있었다. 어디쯤인지 길을 알 수가 없으니 오로지 산 아래로 내려가려고 작정을 했다. 아직은 아무런 기척이 들리지 않는 것을 다행으로 여길 뿐이었다. 조용히 물을 양손에 떠서 한 모금 두 모금 마셔보고 얼굴에도 물을 적셔보았다. 얼굴이며 손의 생채기에서 피가 묻어나오면서 비릿한 냄새가 풍겨옴과 동시에 쓰리고 시린 아픔이 느껴졌다.

‘하, 얼마나 오랜만에 만져보는 물인가.’

그는 비록 얼음장 같은 물이지만 고맙게 느꼈다. 몸에도 물을 조금씩 적셔보며 귀를 기울이고, 사방을 둘러보고, 다시 귀를 기울이고를 반복해보았다. 얕은 물을 손과 엉덩이로 밀어 앞으로 나아가며 몸에 묻은 흙과 오물들을 부지런히 닦아댔다. 몸에 밴 냄새를 조금이라도 약하게 해보려는 속셈이었다.

‘연홍, 힘을 주세요. 내가 당신께 갈 수 있게.’

과연 여기가 어디쯤일까. 대체 어디로 가야 하는 것일까. 밤하늘의 달과 별을 보며 가야 할 방향을 신중히 가늠하고자 하나, 구름이 잔뜩 낀 흐린 달빛은 좀처럼 무언가를 비춰주지 않았다. 그러다 일단은 물길을 따라 앞으로 나가야 한다고 결정하고 비록 차갑기 이루 말할 수 없으나 별수 없이 물길을 따랐다.

근처의 늘어진 나뭇가지를 꺾어 몸의 중심을 잡고, 깊지 않은 냇가는 다리를 움직이지 못하는 몸으로 산길을 타는 것보다는 유리하기에 몸을 맡기고 조용히 내려가기 시작했다. 뼈를 파고드는 추위로 몸이 덜덜 떨려오다 못해, 이 부딪는 소리가 마치 자갈로 바위를 때리는 소리처럼 귓가에 크게 들렸다. 그 소리는 긴장을 늦추지 못하는 탈주자인 그의 마음을 조급하게 했다. 하지만 간간이 멈춰서 귀를 기울이며 주위를 살피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으으으…으으으.”

더 이상 추위를 참을 수 없어 물가의 바위에 몸을 실어보지만, 바위 또한 그 차가움이 물 못지않았다. 흠뻑 물먹은 옷이 무거워 발걸음을 느리게 하자 추위에도 미련 없이 옷을 벗어 물웅덩이 깊은 곳에 묻어두고 큰 돌을 굴려 눌렀다. 힘이 빠진 주먹으로나마 몸을 여기저기 두드리고 주무르다가, 마냥 멈춰 쉴 수 없는 상황이기에 물길을 따라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엑! 윽…흡.”

물길을 따라가다 깊게 경사진 곳을 보지 못하고 힘없이 개울 깊은 곳으로 쭈욱 미끄러지며 허망하게 떠밀려 내려갔다. 물길은 어느새 점점 세지고 깊어졌다. 다리에 힘을 넣을 수 없는 그로서는 힘에 겨웠다. 점점 팔 힘마저 빠져 쥐고 있던 나뭇가지는 이미 놓쳐버렸고, 헤엄을 칠 여력도 없어 주위 바위를 짚으면서 물길을 따르려고 필사적이었다. 급기야 목구멍으로 들어오는 물을 어찌하지 못하고 오로지 코만은 내놓으려 애를 쓰며 마냥 흘러간다.

“꿀꺽. 꼬르륵. 허푸!”

점점 정신이 가물가물해지는 찰나, 천행으로 옷이 나무뿌리에 걸렸다. 그는 한참을 나무뿌리에 잡고 기대어 숨을 고르고 있었다.

“연홍. 여….”

잠시 후 나뭇등걸 사이에 끼인 채로 그만 정신을 놓아 버렸다.

*

-연홍. 여….

“서, 서방님!”

진화공주는 잠을 자다가 마치 옆자리에서 서방님이 자신을 부르는 것 같은 느낌에 화들짝 놀라 일어났다. 그러다 현실을 알고는 소름이 쫘악 끼쳤다. 서방님은 벌써 7년이 넘도록 아무 소식 없는 실종상태였다. 그런데 이렇게 간절하고 확실하게 목소리를 들은 것은 처음이었다. 분명 서방님 신변에 무슨 일이 생긴 것이 아닌가.

무영대사께서는 서방님의 기운이 아직 사라진 것이 아니라고 확신을 하셨다. 그러기에 진화공주도 오직 그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방금 서방님의 간절했던 소리를 듣고, 차마 더 이상 따뜻한 잠자리에 누워있을 수가 없었다. 진화공주는 서둘러 촛불을 켰고 알고 있지만 사방을 다시 비춰보았다. 자신의 안방이 분명했고 낯익은 문갑이며 장롱들로 둘러싸인 곳 비단 이불 위에 앉아있는 자신이었다.

무슨 생각이 든 것인지 겉옷을 주섬주섬 걸치고 공주가 방을 나섰다. 뒷마당 장독대에 가까이 가니 휘영청 밝은 달이 무심하게 비추고 있었다.

“달님. 달님. 서방님을 지켜주세요. 양평위를 살펴주세요. 분명 무슨 일이 생긴 것입니다. 서방님을 꼭 지켜주세요. 저 연홍과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부디 지켜주세요. 달님.”

간절한 바람을 담아 손을 합장하고 하염없이 허리를 숙여 절을 하고 또 하고 하는 공주의 곁으로 어느새 한 상궁이 다가왔다.

“자가. 무슨 일이십니까? 날이 벌써 쌀쌀해졌습니다. 고뿔드실 테니 이만 들어가시어요.”

“아니네. 한 상궁. 서방님께서 분명 큰 곤경에 빠지신 것이 분명하다네. 지난 여러 해 동안 오늘처럼 확실하게 느낀 것은 처음이었어. 그런데 어찌 따뜻한 잠자리에 다시 들어간단 말인가.”

하염없이 달님을 보고 절을 하는 공주의 곁을 지키던 한 상궁도 한 걸음 물러선 채로 같이 기원하기 시작했다.

‘달님. 부디 양평위를 지켜주소서. 진화공주 자가를 돌보아주소서.’

두 여인의 간절함이 달님께 닿을 건지. 어찌 알 수 있으랴.

*

“음마야! 뭐시여. 곰이여? 설마, 죽은 짐승인가?”

아직 동트기 전 이른 새벽, 어쩔 수 없이 산중에서 추운 밤을 보내고 서둘러 무언가 먹을거리를 준비하려던 청년이 소피를 보러 계곡 나무 사이로 가까이 가다가 거무스름한 덩어리를 보고 화들짝 놀라며 물러섰다. 서둘러 불이 붙어있는 장작을 가져와 바닥을 비춰보던 아들이 말을 해왔다.

“아부지, 사람이 죽어있어라. 아이고! 시체 곁에서 함께 밤을 새웠구먼. 어쩔까 귀신이 붙었으면 음마야. 신새벽부터 재수 옴 붙었구만.”

“새벽부터 웬 호들갑이냐. 죽은 사람 한두 번 보냐? 어디 보자.”

아들의 요란한 호들갑에 중년 사내가 잡목들 가까이 다가서며 유심히 들여다보려고 하자, 아들이 다급히 소리쳤다.

“아부지, 아부지 가까이 가지 마셔라. 냄새가 오래된 것 같소.”

“이놈아, 아직 숨은 쉬고 있다. 가서 이불 좀 가져와 봐라. 아주 얼굴이 백지장 같은 게 그냥 두면 곧 죽게 생겼다, 네 말대로.”

“아니 아부지, 우리 이불을 주면 어쩐다요. 저자가 죽기라도 하믄 우린 덮을 이불도 없이 길가에서 어쩌라고?”

“우리야 이불이 없다고 당장 죽기야 하것냐만. 이자는 지금 당장 이불 없으면 죽게 생겼다. 암시랑 말고 어서 이불 가져오고 넌 가서 불이나 더 피워라.”

“아이고, 무신 일이라냐. 그래서 꿈자리가 사나웠나!”

청년은 입술을 쭈욱 내밀고 뺨에 바람을 빵빵하게 불어넣고선 잔뜩 불만을 표시하면서도, 둘둘 말아 두었던 이불을 멀리서 휘익 던져놓고 돌아섰다.

“이놈아, 물 좀 넉넉히 넣어서 서둘러 준비해라.”

“뭔 소리랴. 우리 이불도 줘, 먹을 것도 나눠 줘. 아주 부처님 나셨네유. 참.”

청년은 말은 퉁명스럽게 뱉었지만, 짐 보퉁이에서 잡곡을 꺼내어 아버지 말대로 밥을 질게 안치고, 꾸러미에서 마른 생선도 꺼내어 불에 올릴 준비를 착실히 하고 있었다. 중년 사내가 보기에 이게 과연 머리카락일까 싶게 온통 흙이며 오물로 범벅이고, 옷이라 부를 수 없는 참 요상한 것을 다 찢어진 채로 입고 있었다. 또 괴이한 냄새까지 짙게 풍겨와 가까이 가고 싶은 마음은 없으나, 살아 있는 생명을 그냥 둘 수는 없기에 다가서서 별수 없이 이불을 꾹꾹 눌러 덮어주며 혼잣말을 했다.

“허 참, 무신 험한 일을 당해 이런 형용이라냐. 별꼴을 다 보고 살았지만 이런 꼴을 또 첨보네.”

점점 한쪽의 하늘이 푸른빛을 띠어갈 때 즈음, 저 멀리 떨어진 곳에서 말발굽 소리와 사냥개들이 컹컹 짓는 소리가 골짜기에 울려 퍼졌다. 그 소리에 산중의 부자는 저절로 마주 보며 눈빛을 교환했다. 왠지 저 다급한 소리는 아마도 지금 물가에 쓰러져 있는 이 사람과 관계된 것일 거라는 심증이 말없이 서로에게 전달되었다.

“경신아, 어서 불 위에 생선을 올려놓아라. 어서.”

중년 사내는 이미 마음을 정한 듯 단호한 손짓과 목소리로 아들에게 지시하고 물가의 사내 머리까지 이불로 덮어 꾹꾹 눌러주고 돌아섰다. 다른 쪽에서 청년도 아무 말 없이 부채질로 불을 키웠다. 마른 생선을 서둘러 겹쳐 올린 후 물까지 살살 뿌리자, 좁은 계곡에 냄새와 연기가 요란하게 퍼져나갔다.

잠시 후, 사냥꾼 복장에 말을 탄 사내 둘과 사냥개 두 마리가 소음과 먼지를 일으키며 위쪽 산길에서 멈춰 섰다. 그러더니 아래 냇가에서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는 청년에게 말을 해왔다.

“이보라, 자네 지금 거기서 뭐 하는가?”

굵고 쉰 목소리가 고요한 새벽 계곡에 울려 퍼지는데 잘못이 없어도 괜스레 주눅이 들 것 같은 소리로 묻고 있었다. 입고 있는 옷은 사냥꾼인 듯한데, 유달리 커다란 말을 타고 있는 이는 일반인보다 두 배는 커 보이는 것이 범상치 않았다. 하나같이 거친 꼴들이고, 옆의 사냥개 두 마리는 죽어라 짖고 있었다.

“이놈들아! 조용히 해! 왜 이리 시끄럽게 짖는 것이야. 생선 맛이 그리도 좋아 보이는 게야!”

사내 중 한 명은 튀어 나가려는 개들의 줄을 잡아채며 구시렁거렸다. 그때 작은 키지만 어깨가 딱 벌어진 중년 사내가 엉덩이를 조금 흔들더니 앞섶을 추스르며 나무 그늘에서 나오다 위쪽을 쳐다보고 여상한 목소리로 물어보았다.

“우린 개성에 건어물을 가져다주는 짐꾼들인데. 무슨 일이쇼?”

험상궂은 얼굴의 사내들이 째진 눈으로 아래 냇가에서 끼니를 준비하고 있는 이들의 모습을 유심히 살펴보다가 이내 위협적인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이곳을 지나는 뭔가를 보질 못했는가?”

“이 새벽 산골에 짐승 아니면 뭐가 지나겠소? 우리야 급한 길을 가느라 어쩔 수 없이 산속에서 밤을 지냈소만, 짐승들이 우글거리는 산속을 밤중에 누가 다니것소?”

중년 사내가 한쪽 코를 막고 팽 풀더니 잡초에 손을 쓱 닦았다. 이어서 손에 황태 한 마리를 든 채 호기심이 가득한 눈초리로, 사냥꾼들의 개에게 조금씩 가까이 다가서기 시작했다. 보기에는 음식으로 사냥개들과 장난을 치고 싶어 하는 듯 보였다. 아들로 보이는 청년은 여전히 물가에서 끼니를 준비하느라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말 탄 두 사내는 말없이 중년 사내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가늠을 하는 듯 보였다. 그러나 냇가의 청년이 서툴게 생선을 굽느라 연기를 마구마구 피워 올리며 기침을 하자, 마침내 미간을 찌푸리며 물러서려 하지만 개들이 마구 덤벼들 듯 짖어대기에 목줄을 잡은 이가 불평을 했다

“이놈의 개새끼들, 할 일은 못 하고 이제 와서 생선 냄새에 발광하는 것이야? 시끄럽다.”

“가자.”

두 사내는 올 때처럼 갈 때도 휑하니 먼지를 피우고 산 아래로 달려 내려갔다. 중년 사내는 그들이 사라지는 것을 보다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황태를 쥐고 있다지만, 분명 개들은 사내의 냄새를 맡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고맙소.”

그때 다 꺼져가는 듯한 목소리가 중년 사내의 뒤쪽 나무 그늘에서 들려왔다. 중년 사내는 갑작스럽게 들려오는 목소리에 얼른 몸을 돌려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무슨 죄를 지어 저런 험한 자들에게 쫓기는 신세인지 모르겠지만, 일단 산 사람은 살려야 하는 것 아니것소. 먹거리를 준비 중인데 보아하니 먹을 형편이 되는지 모르것소.”

“주시면 달게 먹지요. 고맙소.”

보기엔 짐승 몰골이지만, 말하는 품이 단정하고 바른 모습에 중년 사내는 새삼 호기심이 생겼다. 그렇다 해도 남의 사정 자세히 알아봐야 내 심사만 복잡해진다는 게 오랜 기간 짐꾼으로 살아온 이가 가진 삶의 철학이었다.

“밥 다 되었냐?”

중년 사내가 돌아서자, 그는 이불을 더욱 꼬옥 죄며 몸을 덥히려고 웅크린 채 주변을 두리번거려 보았다.

*

이른 새벽 진화공주는 장독대를 깨끗이 닦으라고 했다. 그리고 정성 들인 흰밥을 그릇에 수북이 담아 장독들 가운데 가장 큰 항아리 위에 올려 두었다.

“어머니, 왜 밥을 장독대에 올려 두신 겁니까? 누가 먹을 것입니까?”

“궁금하냐? 이것은 멀리 계신 아버님께서 오늘 하루 잘 드시라는 어미의 마음이다.”

“그럼, 오늘부터 매일 이렇게 밥을 올립니까?”

“그렇지. 이 어미가 생각이 짧아서 미처 몰랐구나. 오늘부터 아버님 오실 때까지 매일 이렇게 할 것이야.”

“그럼 비가 오면 어찌합니까?”

“비가 오면? 아… 대청에 차리면 되는 것이지. 우리 보현이 생각이 깊구나.”

어머니의 행동을 본 어린 딸이 호기심으로 눈을 반짝이며 물어오자, 미처 생각지 못했던 것에 공주가 대답해 주었다.

진화공주는 어젯밤. 아니 새벽에 들린 부름이 심상치 않다고 확신했다. 이제껏은 무탈하게 돌아오시기를 기원하며 수없이 불공을 드렸었다. 하지만 집 안에서 자신이 아무것도 한 일이 없다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그리고 이 부름은 뭔가 특별한 예감이 분명하다고 느꼈다. 그래서 이렇게라도 해야 우선 마음이 안심이 되고 의지가 될 것 같아서 실행 해보는 것이다.

서방님이 무탈하게 돌아오시기만 한다면 머리카락으로 짚신을 삼기를 마다하겠는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자고 작정을 한 진화공주 연홍이었다.

“한 상궁. 아무래도 서방님 의복을 새로 지어야겠어.”

“자가. 의복은 이미 많이 있습니다만.”

공주께서 긴 시간을 소일거리삼아 또, 간절한 마음을 담아 실종된 서방님의 의복을 해 둔 것이 이미 넘쳐날 지경이었다.

“그렇지. 내 말은 무명침의를 여러 벌 지어두는 것이 좋을 듯싶다는 거지.”

“무명침의를요?”

“응. 아무래도 집에 돌아오시면 한동안은 자리보전하실 것이 분명해 보이네.”

한 상궁은 그 말씀이 옳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껏은 하루빨리 집에 오시기만 기원하며 시시때때로 고운 비단을 보면 옷을 지어두었었다. 그런데 공주의 말씀을 듣고 보니 좀 더 현실적이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자가. 뭔가 확신이 드신 듯하니 이불도 여러 채 마련해보겠습니다.”

“응, 급하게 해서 부족한 것보다는 미리 생각나는 것부터 차근히 준비를 해 두어야 할 듯싶네.”

한 상궁은 진중하게 말하는 공주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공주께서 3살 때부터 보살펴 왔던 자신의 눈에 점점 어머니로서, 한 여인으로서, 지혜로운 모습을 보이는 것이 참 좋아 보이는 한 상궁이었다.

*

한편, 깊은 산 계곡에서는 짐승 꼴의 사내가 부자와는 몇 걸음 떨어진 나무 그늘에서 작은 바가지에 담긴 음식을 먹고 있었다. 쌀 한 줌에 옥수수, 콩, 나물이 뒤섞인 게 전부라 밥이라고 하기도 애매하지만 물을 넉넉히 넣어 푹 끓인 터라 천천히 꼭꼭 씹어서 먹으니 속이 훅 풀리는 것 같았다.

얼마나 오랜만에 먹어본 따뜻한 음식인가. 과연, 이런 음식이나마 다시 먹게 될 거란 희망도 거의 접을 뻔하지 않았던가. 비록 어렵게 산 어린 시절에도 보지 못했을 거친 음식이지만 꿀맛이란 이런 것일까 싶게 맛이 달았다.

눈을 꼭 감고서 천천히 씹으며 그 맛을 음미하고 있는데, 순간 툭 무언가가 바가지에 담기는 소리가 났다. 깜짝 놀라 눈을 떠보니 생선 살 조각이 밥 위에 얹혀 있었다. 그 고소한 냄새에 저절로 미소가 떠오르고 입속에 침이 고였다.

“고맙소. 이런 음식 냄새가 너무 오랜만이라…… 꿈인 듯, 생시인 듯합니다.”

“음식이 오랜만이라니, 도대체 누구시오? 또 아까 그자들은 뭐라요?”

“경신아, 다들 사정이 있는 거지, 일일이 알려고 하지 마라.”

“그래도, 어처구니도 없고 궁금도 하고요. 이게 지금 사람 몰골이랍니까? 아부지.”

사내가 하고 있는 꼴을 보고 무심히 넘어갈 이가 얼마나 되겠는가. 당연히 호기심을 가지고 캐묻기 바쁜 것이 보통 청년의 모습이었다.

“이곳이 어디쯤입니까.”

사내가 말없이 밥을 먹다가 주변을 둘러보고 물어왔다.

“이곳은 갑산 용두골이오.”

경신이 아버지는 오랜 경험으로 그가 이곳 지리를 전혀 모르는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는지 얼른 말을 덧붙였다.

“보아하니 모르는구먼. 이리로 개천 따라 쭈욱 한없이 내려가면 북청이오.”

그가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더니 조심스럽게 묻는다.

“죄송하지만, 옷 좀 얻을 수 있겠소? 미안하외다.”

그러더니 또 한참을 뜸을 들이다 작정한 듯이 말을 이었다.

“어디로 가시는 길입니까? 가능하시다면 한양까지 저를 좀 데려다주실 수 있겠소? 어처구니없어 보이겠지만, 한양에 도착하면 사례는 수월찮게 쳐 드리리다. 제가 다리가 이 모양이라 걸을 수가 없어 그럽니다.”

“아니, 걷지 못하면서 이 깊은 산속까지 어찌 온 거요? 그리고 우리는 한양에 가지 않소. 우리는 개성 가요. 그렇쥬? 아부지.”

청년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중년의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중년 사내도 망설임 없이 입을 떼며 거절해 왔다.

“뭐 하는 사람인지 모르겠지만, 한양은 우리가 안 갑니다.”

단호한 거절에 그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맥없이 바가지만 바라보며 천천히 음식을 씹기 시작했다. 동시에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처량하고 참으로 처절하게 느껴져 보는 이의 마음조차 짠해졌다.

“또 한 번 죄송합니다만, 제 머리카락 좀 잘라 주시겠소? 물가에 비춰 보니 귀신 산발이 따로 없구먼요. 허허.”

손을 머리에 올려보지만, 온통 엉켜서 산발인 데다 물까지 적셔지는 바람에 머리카락 사이로 손조차 들어가지 않았다.

“머리를 잘라라? 아니. 어찌 머리를… 부모님이 물려주신…?”

“몇 년을 이 꼴로 지냈더니 아마 빗질을 할 수도 없을 듯하고 이도 바글바글한 게 별수가 없는 듯합니다. 불가에선 삭발도 하지 않습니까. 스님처럼 아주 싹 밀어버리는 것도 방법인 듯해서요.”

그들은 각자의 생각들이 복잡하게 엉킨 눈빛으로 서로를 빤히 마주 보았다. 그렇게 한참을 넋 놓고 보다가 중년 사내가 먼저 자리에서 툭툭 털고 일어나더니 결심한 듯 말을 했다.

“경신이는 어서 설거지하고 짐을 챙겨라. 뭐라 불러야 할지 몰것지만, 형씨는 내가 머리를 싸악 밀어드리리다. 어차피 그 수밖에 없겠구먼.”

그는 서서 자신을 내려다보는 중년 사내를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이며 살짝 미소 지었다. 그러나 얼굴이 워낙 야윈 데다 상처와 멍까지 가득해 씰룩이는 그의 모습은 괴이하게 보일 뿐이었다.

중년의 짐꾼은 허리춤에 고이 차고 다니던 장도를 꺼내 들었다. 백통으로 만든 장도는 국화와 태극무늬가 정교하게 조각돼있어 값이 나가는 물건이 분명했다. 보통의 짐꾼의 것이라기엔 너무나 호사스러운 장도였다. 사실, 이 장도는 중년 사내의 아버지가 눈도 감지 못할 정도로 한을 품고 돌아가실 때 패용하였던 것으로, 이제는 유일하게 남아있는 유품이었다. 그래서 중년 사내는 이를 그 어떤 물건보다도 소중히 간직하고 다녔다. 그런 귀한 장도로 이런 머리를 잘라야 한다는 것이 조금은 찜찜한 느낌이 든 중년 사내지만 사정이 딱하니 이해를 하고자 했다.

온통 산발한 머리는 아주 떡이 져서 오랜 시간 고생을 하며 살았던 중년 사내조차 손으로 만지기가 꺼려질 정도였다. 진흙이 묻은 짐승 털처럼 보였고, 손으로 만지자 퍼져오는 냄새도 고약했다. 이런 냄새를 조금 전 사냥개들이 못 맡았을 리가 없었다. 다만 때마침 생선을 굽고 있었기에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사냥꾼들이 혼동을 일으켰음이 분명했다.

만지기도 꺼려지게 떡이 진 머리를 우선 한 주먹씩 크게 잘랐다. 이어서 대강 삐죽삐죽 자르고 보니 이도 많고, 흙이며 모래며 온통 알 수 없는 것들이 잔뜩 묻어 있었다. 바가지로 물을 떠 와서 조금씩 적셔가며 긁어내고, 나머지 부분도 싹 밀려고 했지만 도통 깔끔하게 머리카락이 깎아지지는 않았다. 도리 없이 대충 그 정도로 만족하기로 했다.

“되었소. 이 정도만 해도 씻으면 불편은 없을 듯하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