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장

‘기루’임을 알리는 홍등이 큼지막하게 걸려있는 곳으로 20세 안팎의 사내들 여럿이 흥분된 발걸음으로 왁자하게 들어서고 있었다.

“명월아, 어디 있느냐. 서방님이 명월이 보고파 이렇게 왔느니. 하하하.”

“소월아, 너의 서방님 오셨다. 어서 고운 얼굴 좀 보자꾸나.”

“웃기는 친구로세. 어찌 명월이, 소월이가 자네들 사람이란 말인가. 술을 마시기도 전에 냄새로만 취했구먼. 하하하.”

“여보게. 오늘은 우리 모두 코가 삐뚤어지게 한탕 할 것이니. 어서 좋은 방을 내놓게.”

철없는 사내들의 허세가 기루의 문에 들기 전부터 요란하게 울렸다. 기녀들은 그 소리만으로도 벌써 누구인지 짐작이 되고 그들이 그다지 실속은 없는 잠깐의 재미를 쫓아 온 나비들임을 알고는 별 기대를 하지 않았다. 한가한 작은 고을에 사는 20대 안팎의 사내들이 주머니가 무거워봤자 별것 있겠는가. 좀 나이 듬직한 이들이라야 기녀들의 나긋나긋한 몸짓과 분내 풍기는 웃음에 주머니를 기꺼이 풀겠지만, 젊은 사내들이란 허세 든 목청과 가벼운 주머니만 요란할 뿐인 것을 모두 아는 까닭이었다.

“어서 오시어요. 서방님들 아니 도련님들이신가. 호호호.”

“모두들 무슨 일로 이렇게 다들 기분이 좋으십니까?”

“아이 도련님들, 다른 곳에서 이미 한 잔들 하신 것입니까?”

기녀들 또한 빈 웃음과 함께 콧소리로 사내들의 흥을 맞추며 한마디씩 던졌다.

“허허. 섭섭한 소릴 하는구나, 나는 이곳 남원정 아니고는 술맛이 나질 않는 것을. 오늘은 우리 최 생원이 주머니를 팍팍 열어 보일 것이야.”

“최 생원님이요?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과거 볼 시기는 아닌데요? 호호호.”

“흐흐. 과거보다 더한 것이 보름 후에 있다. 드디어 최 생원께서 총각 딱지를 떼게 되지 않았는가. 하하하.”

“정말이십니까? 아쉬워서 이를 어쩔까요? 한동안은 새색시 치마폭에 싸여 계시느라 잘난 생원님 얼굴 보기 어렵겠습니다. 호호호.”

“어서어서 방으로 드시어요.”

왁자하게 떠들며 방으로 들어서자 바로 술상이 들어왔다. 젊은 사내들 사이에 기녀들이 끼어 앉자마자 부어라, 마셔라 하는 것이 마치 어둠도 물러갈 만큼 소란스러웠다.

“생원님. 혼인하시어도 저희를 잊으시면 아니 되시어요.”

옆에 앉은 어린 기녀가 비위를 맞추느라 분내 나는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더니 최 생원의 팔을 꼬옥 끌어안고 가슴을 들이밀며 아양을 떨어댔다.

“암, 내 어찌 남원정의 꽃 같은 너희들을 잊을 수가 있겠느냐! 소월이 넌 나의 첫 정인이 아니냐. 암.”

“아이, 말씀은 이리하시어도, 새 신부를 보시면 우리를 까맣게 잊으실 분이. 호호호.”

소월이가 최 생원에게 바짝 붙어 아양을 떨어대는 뒤쪽에서 그녀의 엉덩이만 바라보고 있던 이가 손을 슬쩍 소월이 허리춤으로 밀어 넣고는 자신께로 끌어오며 말을 건넸다.

“소월아, 그렇게 실속이 없어서야 어찌 기생 노릇을 하려느냐. 최 생원은 혼인할 몸이니, 오늘은 내게 아양을 떨어야 하는 것이 아니더냐.”

사내의 손이 소월의 허리를 감고 끌어당기는 것을 보고 서둘러 소월의 팔을 잡아당기며 최 생원이 말했다.

“어허, 무슨 말을 그리하는가. 비록 혼인한다고 하지만 내가 어찌 소월이를 멀리할 것인가, 그리고, 난 아직은 혼인 전이지 않은가 말이야. 오늘 소월이는 내가 품을 것이야.”

“뭐라? 이 사람 보게. 겨우 혼인을 보름 남겨둔 자가 소월이를 욕심내는가. 정신 차리게. 자. 오늘은 나와 함께 지내자꾸나.”

두 사내 사이에 끼여 허리와 팔을 각각 잡힌 채로 소월은 입가에 미소를 띤 채, 자신을 끌어당기는 사내들의 손길에 이리저리 밀리며 그 재미를 즐기고 있었다.

“서방님들, 고정하시어요. 소월이 두 분의 말씀에 혼이 빠질 지경입니다. 호호호.”

“어허, 자네 술에 벌써 잡아먹혔는가? 내가 오늘 이곳에 온 것은 오직 소월이를 보러 온 것인데. 어디 자네가 발을 들이미는 것이야. 에잇, 저리 가게.”

“아니, 이자가 농담인 줄 알았건만. 소월이는 나의 정인이란 말일세.”

“뭐라? 정인. 허허, 참. 자네가 정신 줄을 놓았구먼. 소월아, 네가 말을 해보아라. 오늘 밤은 누구와 함께하고 싶은 것이냐?”

사내들의 목청이 제법 높아지자, 서둘러 중재를 하러 다른 기녀가 끼어들었다.

“서방님들 어찌 이러십니까? 이 남원정에는 꽃 같은 영춘이도 있습니다. 뭐가 문제라고 이러십니까. 벌써 취하신 겁니까?”

“나는 오늘 밤은 꼭 소월이와 함께 지내야겠네. 저자가 공짜 술을 얻어 마셨으면 그것으로 족하지, 괜한 억지를 쓰니 더욱 참을 수가 없단 말이네.”

“뭐라! 공짜 술! 허, 자네가 내 비위를 건드리려고 일부러 이러는 것 모를 줄 아는가? 근동 최고인 여인과 혼인을 하려면 네 몸가짐을 먼저 바로해라! 좀팽이처럼 스승님의 한마디에 매번 이런 시비를 거는 것이냐!”

“허. 시비? 내가 겨우 네깟 놈과 시시비비를 따질 거라 생각하느냐. 너는 나를 따라 오려면 한참은 부족하다. 한데 뭐 시비? 괜히 내 혼사에 네깟 놈이 열 받을 일은 없다. 쳇, 웃기는 비렁뱅이 같은 놈.”

소월이를 두고 언쟁을 벌이던 일행이 뭔가 이전에 마음에 두었던 일을 언급하며 언쟁이 시작되자 마침내 술상이 덜컹거리게 화를 내며 벌떡 일어섰다. 그 모습을 본 최 생원도 호승심에 질세라 일어서 마주 대거리를 했다. 하지만 둘 다 술을 급하게 들이마신 탓에 비틀거렸다.

“아이고, 선비님들 좋은 날 어찌 이러십니까, 고정하시어요. 제발.”

기녀들도 이제는 장난이 도를 지나친 것을 알고 중재하려고 했지만, 성미 급한 미숙한 사내들의 어리석은 행동은 순간이었다.

“뭐라! 지금 비렁뱅이라 했느냐?”

“그렇지. 다른 말이 필요한가? 흥!”

“에잇! 버르장머리 없는 놈!”

콰당탕.

술김과 홧김에 주먹을 쳤지만 서로 비틀거리다 보니 한 대 맞은 최 생원이 뒤로 밀려났다. 그 바람에 문이 떨어지고 최 생원은 그대로 마루로 밀려나더니 머리부터 뒤로 넘어가지 않는가. ‘쿵’소리가 들렸지만 소란 중이라 아무도 신경 쓰지 못했다.

“어허. 어찌 이리 난동들인가. 고정들 하게! 이보게, 최 생원 별 일 없는가?”

일행 중 한 사람이 비틀거리다 넘어진 술친구에게 가보니 촛불에 비친 최 생원의 머리에서 피가 검게 흘러 나와 순식간에 댓돌 위로 번져가는 것이 보였다.

“악, 이보게! 최 생원.”

*

키가 큰 두 사내들이 이른 점심을 먹으러 주막에 들었다. 하지만 안에서 일하던 아낙 둘은 손으로는 배추를 다듬으며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나누느라 들어서는 객들에게 눈길을 주지 못하고 있었다.

“쯧쯧. 어찌 아비라는 이가 딸에게 그리도 매정한가? 필시 개구멍받이 딸이 아닌가 싶어.”

“아이고. 그런 말이 어디 있어? 금지옥엽 고운 따님으로 사방에 현모양처 감으로 소문이 자자했는데. 하필 고르고 고른 신랑이 그 모양으로 사달이 났으니 죽을 맛이지.”

“그래도 혼절해서 아직 기운도 못 차린 딸을 다그쳐 가마에 태운 아비가 아닌가 말이네.”

“흠흠. 무슨 말을 그리도 재미있는가. 객이 든 줄도 모르고 말이네.”

“아이고, 나리. 어서 오십시오.”

주모가 서둘러 치마를 털고 일어서다가 주막 입구 기둥에 말을 묶고 있는 이들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한눈에 봐도 먼 길을 가는 손님들이었다. 한데 그 입성이 동네에서 흔히 보는 이들이 아닐 뿐더러 한 사내는 생김조차 눈에 훤해질 만큼 대단해 보였다. 다만 함께한 사내는 어디 가서 절대 손해 볼 면상이 아닐 만큼 우락부락하지만 황소를 닮은 선한 눈빛에 그나마 조금 마음이 놓였다.

“아이고. 나리들. 어서, 어서 이리 들어오시지요. 마침 오늘 좋은 고기가 들어와 맛있게 국을 끓였습니다요. 호호호.”

주모가 손님들 비위를 맞추며 호들갑을 떨었다. 인물이 훤칠하게 생긴 사내가 먼저 평상에 자리를 잡고 앉더니 넉살좋게 말을 걸어왔다.

“무슨 일이기에 객이 든 것도 모르는가? 개구멍받이?”

이에 신이 난 주모가 잘 생긴 사내와 한마디라도 섞기 위해 말하는 내용하고 맞지 않게 함빡 웃음을 머금고 맞장구를 쳤다.

“아이고. 동네에 아주 흉한 일이 있어 그렇지요.”

“흉한 일이라니?”

“근동에 소문 짜한 세상 고운 처자가 혼인을 하게 되었지요. 한데 신랑이란 이가 하필이면 기생다툼을 벌이다 기루에서 죽어버렸습니다요. 그런데도 친정 아비라는 분이 기어이 오늘 그 시집으로 딸을 보냈답니다. 혼서를 교환했다 뭐했다 말이야 구구절절이지요. 배운 분들은 다들 그러합니까?”

“요즘 같은 때에도 그런 일이 있는가?”

“그러게 말씀입니다. 나리. 진사어르신 깐깐하다는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지만 그렇게 보지 않았는데. 어찌 딸에게도 그리 매정하신지. 마나님이 가마 앞에 드러눕고 혼절을 하고 야단이 났지 않습니까?”

“저런. 그래서 딸은 어찌 되었는가?”

“도리가 없지요. 아비가 등을 떠미는데 어찌합니까. 아비 말이라면 세상 순종하는 순한 아씨인데. 팔자가 이렇게 한 순간 꼬일지 누군들 알았겠습니까요. 얼마나 울었는지 글쎄 그 고운 얼굴이 퉁퉁 부은 채로 가마에 오르더랍니다. 동네의 입 달린 이들이라면 다들 흉을 보고 아주 난리가 아닙니다.”

“신랑이 기루에서 어쩌다 죽었는데?”
“동무하고 서로 기녀와 하룻밤을 보내겠다고 밀고 당기고 하다가 뒤로 넘어졌답니다. 그것도 시댁에서 쉬쉬했지만 친정 오라비가 쫓아가 알아보다가 그 말을 듣고 땅에 주저앉았답니다.”

“쯧쯧”

“혼례복도 못 입고, 초례청도 차리지 못하고 눈물 흘리며 가마를 타고 가니 가마꾼들조차 한숨만 나오지요.”

말솜씨만큼이나 손도 재빠른 주모가 따끈한 국밥을 내오자 사내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수저를 들기 시작했다. 세상은 빠르게 변해가고 있지만, 아직도 이런 시골구석은 예전 책에 나온 그대로 행해야만 진실 된 유학자라 생각하는 이들이 천지였다. 말을 한들 쉽게 고쳐질 수 없기에 지켜본 이들만 딱하다 여길 뿐이었다.

#1. 밤길을 가는 사람들

시골 양반가 행랑채의 허름한 작은방, 한때는 일손들이 머물던 방이었다. 그 작은 방 구석에는 방주인과는 어울리지 않는 고급 비단 옷감과 남녀 의복들이 차곡차곡 개켜져있었다. 아마도 바느질거리가 분명해 보였다. 낮에는 집안일을 하고 밤에는 바느질을 해야만 하는 여인의 방 안 모습이었다.

그런데 오늘 늦은 저녁시간 소복 입은 젊은 여인이 호롱불을 밝히고, 괴괴한 악취에 절은 병든 아이를 품에 안고 도란도란 말을 나누고 있었다. 하지만 그 내용이 결코 심상치가 않았다.

“연화야, 잘 들어라. 나는 이제부터 너를 나의 딸이라 할 것이다. 너도 나를 어미라 불러줄 테냐?”

“어머니요? 아씨. 참말입니까?”

여인이 아이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자, 기운 없는 몸짓의 아이는 여인 품을 파고드는 것으로 동의를 해왔다. 여인은 시큼하고 오묘한 냄새들을 진하게 풍기는 아이를 마다않고 품에 안고 다독이며 말을 계속했다.

“연화야. 나는 이제 이곳을 떠날 작정이다.”

여인의 입에서 나온 뜻밖의 말에 놀란 아이가 품에서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았다. 그 아이에게 눈을 맞추며 여인이 말을 이었다.

“어떠냐. 나를 따라 갈 것이냐?”

“예. 어머니.”

“어디를 간다고 선뜻 가겠다는 것이야.”

여인이 입가에 미소를 띠고 조용히 물어오자 아이는 비록 힘없는 소리지만 서슴없이 대답했다.

“어머니와 함께라면 어디든 가겠습니다.”

“그럼 되었다. 다행히 달도 밝구나.”

“지금 말씀이십니까?”

“그렇지. 생각이 들었으면 바로 실행에 옮기는 것도 나쁘지만은 않지. 어떠냐?”

“예. 어머니.”

여인은 아이를 품에서 떼어내더니 밖으로 나가 나무대야에 물을 담아와 아이를 꼼꼼히 닦아주었다. 아이는 요 며칠을 심하게 앓았던 탓에 오줌과 땀 냄새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또 벗겨놓고 보니 등이며 엉덩이가 온통 멍자국으로 차마 힘주어 닦을 수도 없을 만큼 참혹한 모습이었다.

“쯧쯧. 모진 인사가 아닌가. 어이해 여린 살을 이토록… 연화야, 너는 또 이런 몸으로 어떻게 나를 찾아온 것인지.”

“예? 뭐라 하신 겁니까? 어머니. 히히히.”

여인의 부드러운 손길이 좋아서 기운 없이 웃고 있는 천진한 아이가 말할 수 없이 안쓰러웠다.

“아니다. 자, 이 옷으로 입자.”

여인은 아이에게 조곤조곤 말을 하면서 며칠 전에 급하게 만들어 둔 무명옷을 입혀 주었다. 아이로서는 기억조차 나지 않지만 몇 해 전 생모가 죽은 후로 처음 보는 새 옷이었다.

“곱습니다. 아씨.”

“또 아씨라고 하느냐.”

여인은 차분한 손길이지만 재빠른 솜씨로 이불 홑청을 뜯어 보자기를 만들고 당장 필요한 몇 가지를 챙겼다. 냄새나는 옷은 잘 갈무리해서 들고 나가기 쉽게 순식간에 정리해 치워두었다. 시댁에서의 고된 날들에 단련된 것은 재빠른 손놀림뿐이었다.

“연화야. 이제 내 등에 업혀서 가자.”

“어머니, 제가 걸을 수 있습니다.”

“아니다. 내가 걸음이 빠르니 내 등에 업히는 것이 좋을 것이야.”

비록 아이가 자기 발로 걷는다고 말은 하지만 지금 형편에 그럴 수 없었다. 서로가 아는 사실이다 보니 여인이 내미는 등에 아이가 주저 없이 업혔다.

그렇게 한밤중, 여인은 동네 아이를 업고 보퉁이를 머리에 이고 얼마 전 여름장마에 무너진 집 뒤편 담벼락을 넘었다. 혹여 동네 사람들 눈에라도 띌까 종종걸음으로 걸어가는 모습이 마치 검은 눈사람이 걷는 것처럼 희한한 광경이지만 다행히 깊은 밤이었다.

달빛은 무심하게 밤길을 가는 여인과 아이를 비추듯, 떠나온 기와집도 비추고 있었다. 이 동네에서 가장 잘 산다는 커다란 기와집이지만 어쩐 일인지 일하는 이들이 거의 없기에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고 쉽게 벗어날 수 있었을 터였다.

이렇게 그간 4년의 세월을 혼인 전 죽은 신랑의 그림자 처로서 살아왔던 여인, 보영은 그 허물을 벗어 던졌다. 처녀 때에는 금지옥엽 고명딸로 부모님과 오라버니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세상천지 부러울 것 없이 지냈었다. 하지만 이 순간 모든 것은 돌이킬 수 없는 과거지사가 되어 버렸고, 보영이라는 여인의 앞날에 어떤 일이 펼쳐질 지는 달님만이 아실까?

*

동네 호방네 머슴 장쇠는 행랑채에 누워있어도 도무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식충이가 분명 다 죽게 된 것을 보았었는데, 마님 심부름을 다녀온 반나절 사이 온데간데없어져 버렸다.

“쯧쯧. 그 불쌍한 것이 정말 명을 달리한 것이여, 뭐여? 아니지. 그래도 내가 준 미음을 그 때는 조금 받아먹었단 말이여. 마님이 정말 그 어린 것을 어찌 해버린 것이 아닐까. 그럴 작정으로 날 일부러 심부름을 보냈을까? 하… 답답하구먼. 세상에 못할 짓 아니여.”

장쇠는 속이 답답해 방에 머물 수 없었다. 그러니 뒷간도 갈 겸해서 방을 나섰다. 속 모르는 무심한 달은 휘영청 밝게 비치는데 마음은 더 없이 착잡했다. 병이 들어 죽은 것도 아니고, 모진 매를 맞아 죽은 그 어린것을 주인마님이 어디에 갖다 버린 것이 분명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다시 한 번 혹시나 아이가 돌아왔을까 싶어 헛간 문을 열어 봐도 시큼한 냄새에 절은 가마니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뒷간의 뒤쪽으로 돌아나가면 뒷산 입구에 커다란 바위가 있어 가끔 답답할 때는 그 위에서 낮잠도 자고 하던 곳이라 무심코 올라갔다. 워낙 밝은 보름달이기에 겁도 없이 바위에 주저앉았다.

“달님. 달님. 식충이는 어디로 갔을까유. 정녕 마님이 잡아 먹었을까유? 그 어린 것 홀로 가는 저승길을 밝히려 이리도 밝으신 가유?”

장쇠가 홀로 구시렁대며 앉아 있는데 저 멀리서 둥근 공이 데구르르 구르듯이 튀듯이 하며 멀어지는 것이 보였다. 그걸 본 장쇠가 ‘악’소리가 나려는 것을 간신히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눈을 부릅뜨고 보았다. 하지만 잠깐 사이에 그 둥근 공은 검은 어둠 속으로 사라져 없어져 버렸다. 갑자기 무섬증이 왈칵 솟아오른 장쇠는 그 높은 바위를 후다닥 뛰어내려 방으로 달려와 문을 쾅 닫고 이불속으로 몸을 숨겼다.

“흠마, 내가 시방 도깨비를 본 것이여? 근디 도깨비가 굴러다니기도 한다냐. 가만 커다란 대가리가 동그랗든디? 뿔도 없었잖여. 흐미, 머여. 무신 그런 도깨비가 있다냐? 혹시 계집 도깨비? 머여?”

장쇠는 이불을 흠뻑 뒤집어쓰고 요모조모로 생각을 가늠해 보았다. 그러다 보니 자신이 너무 서둘렀다는 생각에 아쉽게 느껴졌다.

“간 떨어질 뻔해서 자세히 보질 못했구먼. 어쩐다냐, 아깝구먼. 도깨비면 잡아서 장가를 보내달라고 매달렸어야 하는디 말이여. 언제까지 여기서 머슴노릇으로 세월 다 보낼 수는 없는 것 아녀.”

말은 그리하지만 도깨비가 무서워 이불 안에서 이 생각 저 생각을 하다 깜빡 잠이 들었다. 그런데 갑자기 우르릉 쾅쾅 요란한 천둥번개 소리가 나더니 빗방울이 후드득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다 잠시 후에 다시 한 번 천지가 진동할 듯한 천둥 번개가 ‘우르릉 콰쾅’ 하늘이 무너질 듯 울리고 세찬 비가 몰아치기 시작했다.

“음마마마. 무시라, 아까 본 것이 도깨비가 확실하구먼. 그래서 도깨비를 본 나를 겁주는 것 아닌가. 난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것구먼요. 도깨비님. 그래도 나는 죽기 전에 지발이지 장가는 가고 싶구먼요. 도깨비님.”

장쇠는 화들짝 놀라 이불을 머리에 뒤집어쓴 중에도 소원을 빌다가 다시 깜빡 잠에 빠져 들었다.

*

둥근 보름달이 유난히 밝은 밤길을 덮어쓴 장옷을 휘날리며 급히 걷는 이가 있었다. 언뜻 보아서는 위 아래로 둥근 공이 굴러가듯 보이기도 하지만 큰 공위에 작은 공이 얹혀있는 모습이었다. 아이를 업고 짐까지 머리에 인 보영은 잰 발걸음으로 집들이 몰려있는 민가를 벗어나자마자 곧바로 지친 발걸음이 조금씩 느려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연신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도 달빛을 등불삼아 부지런히 길을 가고 있었다.

“연화야. 아무 걱정 마라. 어미가 너를 살릴 것이야. 아무 걱정 마라.”

기운 없는 발걸음을 재촉하는 보영은 밤길의 무섬증을 등 뒤에 축 늘어진 아이에게 수시로 말을 걸어 극복해가며 앞으로 나아갔다. 등 뒤의 아이는 잠이 들었는지 대답은 없지만 따뜻한 온기가 있기에 힘이 되고 있었다. 그렇게 아이를 업은 보영은 작은 언덕을 넘고 간간히 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려오고 무시무시한 달그림자들이 펼쳐진 길을 이를 악물며 앞으로 나갔다. 밤의 산길은 생각보다 힘들어 장단지가 뻣뻣이 굳어오고, 발목은 쇳덩이가 매달려 뒤로 당기는 것 같았다. 보영은 거친 숨소리를 거듭 내더니 급기야 길가의 나무 밑으로 비틀거리며 들어서고 말았다.

“허흑, 허흥. 연, 연화야. 허흐… 잠시만… 잠시만… 여기서 숨을 좀 돌리고 가자. 후”

보영이 등 뒤의 아이에게 가만히 귀를 기울여보니 아이는 코를 색색 골며 깊이 잠이 든 듯 느껴졌다. 하지만 길가 나무 밑에서 새벽을 맞을 수는 없다는 생각에 다시 무거운 몸을 ‘끙차’ 일으켜 천천히 나아갔다. 이제는 뛸 기운도 없다보니 한 걸음 한 걸음 허리를 앞으로 숙이고 간신히 걸어가고 있을 뿐이었다. 한데 밝은 달이 갑자기 구름에 가린 듯 어두워지더니 굵은 빗방울이 한 방울 두 방울 떨어지는 것이 심상치 않았다.

“어, 비! 비가 아닌가. 갑자기 비님이 오시네. 어찌해, 연화가 아픈데 비까지 맞아서는 안 되는데. 어떡하나. 달님. 도와주세요. 길을 좀 비춰 주세요. 달님.”

보영의 간절함이 통했는지 구름 사이로 잠깐 달빛이 비쳐 저쪽에 흐릿하게 기와의 윤곽이 보이고 있었다. 앞뒤 가릴 것 없이 젖 먹던 힘까지 동원해 그쪽으로 어둠을 헤쳐 나갔다. 가까이 가니 집이 아니고 성황당이 아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