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인연이 아니라 악연

서늘한 바람이 해원의 전신을 휘감았다.

어둠이 깔린 도심. 그 도심에서 내로라하는 식품기업 ‘미미(美味)푸드.’ 자신이 다니는 회사의 옥상 난간에 올라선 해원은 지금 도심 속 사람들을 내려다보는 중이다. 반짝반짝한 불빛들과 도로를 오가는 수많은 차들, 퇴근길 한잔하고 기분 좋게 들어가는 사람들까지. 이제 이런 건 내일부터는 볼 수 없을 것이다. 아니, 내가 뛰어내리고 난 뒤부터 보지 못하겠지.

“야, 저기 저거 사람 아니야?”

“맞는 것 같은데?”

“설마 뛰어내리려고 하는 건 아니겠지?”

“야, 무섭게 왜 그래. 근데…… 예감이 안 좋다.”

지나가던 두 여자가 목을 최대한 뒤로 젖혀 옥상에 있는 해원을 보고 수군거렸다. 해원은 멀리 점처럼 보이는 그녀들을 잠시 바라보다가 저 멀리로 시선을 옮겼다. 지금 사람들이 수군거리든 말든 자신과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왜냐하면…….

‘난 이제 죽을 거니까.’

늘 같은 생활을 반복하면서 오늘만을 기다려왔다. 내가 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그날, 아무도 나를 기억하지 못하면 좋겠다고 해원은 생각했다. 어차피 인생은 혼자고 혼자서 모든 일을 헤쳐 나가야 한다. 타인의 도움 따위 받아봤자 결국엔 혼자라는 것. 그게 해원이 이 세상을 살면서 깨달은 것이었다.

해원은 한 발자국 앞으로 움직였다. 신발 앞코가 난간 밖으로 나와 아슬아슬하게 중심을 잡을 수 있을 정도였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의 솜털이 쭈뼛 서는 기분이다. 마음을 단단히 먹고 올라왔지만 떨리긴 마찬가지였다.

‘괜찮아. 고통은 한순간이야.’

해원은 눈을 지그시 내리감고 자신을 달랬다. 마음이 조금 진정되자 눈을 떴다. 다시 아래를 보니 아까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몰려있었다. 그들은 다 저를 올려다보고 있었고, 경찰에 신고라도 하는 모양인지 통화를 하는 이도 보였다. 그리고 그 가운데, 아주 익숙한 형체도 보였다.

‘……본부장님?’

미미(美味)푸드 마케팅본부 본부장, 한재윤.

두 시간 전에 퇴근한 걸로 아는데 왜 여기 있는 거지?

그 역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자신을 보고 있었다. 그의 표정까지 보이지는 않지만 해원은 재윤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별로 궁금하지도 않았다. 내일이면 못 볼 사람이니까.

다시 한 발짝, 앞으로 나아갔다. 이젠 진짜로 난간의 끝에 다다랐다. 거센 바람만 불어도 몸이 앞으로 쓰러질 것만 같은 느낌. 죽는다는 게 이렇게 떨리는 일인가. 굳은 다짐을 했지만 막상 뛰어내리려고 하니 심장이 거세게 두근거렸다. 어느 순간 재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대로 가버렸나 보다. 해원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점점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그때였다.

“지금 뭐 하는 겁니까!”

순간 해원의 몸이 허공에 붕 떴다.

“아!”

건물 벽에 부딪친 몸이 아팠다.

‘나…… 살아있는 거야?’

아래에선 사람들의 비명과 경찰이 확성기를 들고 뭐라고 하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정신이 없는 상태에서 정확히 알아들을 순 없었고, 해원은 한쪽 팔이 저릿저릿한 느낌을 받았다. 그제야 고개를 들어 보니 그곳엔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는 한 남자가 보였다. 방금 전까지 밑에 있었던 재윤이었다.

* * *

두 시간 전, 퇴근했던 재윤은 집에 가는 길 중요한 서류를 놓고 왔다는 걸 깨달았다. 이미 퇴근길 막히는 도로를 뚫고 집 앞까지 왔는데 다시 돌아가게 생겼다. 어쩔 수 없이 차를 돌려 다시 회사로 갔다. 역시나 아직도 퇴근길이라 차는 막혔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천천히 가자고 생각해 조급한 마음을 내려놓았다. 정체된 도로로 인해 왔다 갔다 하는데 1시간이 넘게 걸렸고, 가까스로 회사에 도착한 재윤은 주차장에 차를 대고 나왔다. 옥상에 있는 해원을 발견한 건 그 순간이었다. 이미 회사 근처에는 많은 사람들이 몰렸고 다 위를 쳐다보고 있었다. 재윤은 그녀가 누군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홍보팀 대리 민해원. 웬만해선 남에게 별로 관심이 없는데 해원은 입사할 때부터 워낙 유명해서 알고 있었다. 실력이 뛰어나 입사 3개월 만에 대리로 승진한 사람. 이렇게 초스피드로 승진한 사람은 처음이었기에 재윤은 해원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그녀가 왜 옥상에 있단 말인가. 당장이라도 뛰어내릴 것 같은 그녀가 위태로워 보였다.

두근. 두근. 심장이 묵직하게 두근거렸다. 머리로 생각할 시간 따윈 없었다. 재윤은 몸이 시키는 대로 회사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엘리베이터가 내려오길 기다리는 것까지는 너무 오래 걸릴 것 같았다. 재윤은 비상구의 계단을 숨 가쁘게 뛰어 올라갔다. 옥상까지는 15층의 계단을 올라가야 했다. 그는 단 한 번도 쉬지 않고 빠르게 계단을 올랐다.

“지금 뭐 하는 겁니까!”

해원이 막 몸을 내던진 순간, 얼른 그녀의 한쪽 팔을 붙잡았다. 자신이 생각해도 놀라운 반사 신경이었다.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도 그는 붙잡은 해원의 팔을 놓지 않았다. 잡은 손에 더 꽉 힘을 주었다. 아래를 보던 해원이 자신을 올려다본다. 그 얼굴에 아무 표정 변화가 없어서 더 섬뜩했다. 자신을 담은 두 눈동자 역시 흔들림이 없었다. 마치 날 왜 붙잡았냐고 묻는 것 같았다. 계속 해원을 잡고 있던 손에 점점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재윤은 안간힘을 써서 그녀를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털썩하는 소리와 함께 두 사람은 난간 안으로 떨어졌다.

“하아…… 하…….”

뒤로 뻗어버린 재윤의 위로 떨어진 해원은 그의 가슴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걸 그대로 느꼈다.

지금 본부장이 날 살린 건가? 왜?

의문은 가득했지만 지금은 그의 위에서 떨어지는 게 먼저였다. 해원은 일어서 옆으로 비켜섰다. 그녀가 일어나자 재윤도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죽으려고 했습니까?”

부정할 수 없었다. 사실이니까. 해원은 대답 대신 다른 질문을 던졌다.

“왜 절 살리셨어요?”

하, 재윤의 입술 새로 비웃음이 터져 나왔다. 해원은 기분이 썩 좋진 않았지만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들어보기로 했다.

“민해원 씨는 죽음이 두렵지 않나 보죠? 살려준 사람한테 고맙다는 말도 안 하고.”

“…….”

“놀란 사람 마음은 생각 안 합니까? 내가 얼마나……!”

“본부장님한테 살려달라고 한 적 없어요. 먼저 가보겠습니다.”

“이봐요, 민해원 씨!”

어이없는 얼굴로 재윤이 해원을 불렀지만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옥상을 빠져나가 버렸다.

기껏 살려줬더니 살려달라고 한 적이 없단다.

“허!”

이 기가 막힌 상황에 재윤은 실소를 터뜨렸다.

옥상을 내려온 해원은 홍보팀 제 자리를 찾아갔다. 의자에 걸어두었던 가방을 챙겨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곧 13층에 엘리베이터가 도착했고 해원은 1층 버튼을 눌렀다. 스르륵, 문이 닫히려는데 그 사이로 손 하나가 불쑥 끼어들었다. 무언가 이상을 감지한 문은 다시 열렸고 재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단정하게 맸던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면서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그러곤 지하 1층을 눌렀다. 서로 적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서 있는 동안 층수는 빠르게 내려갔다. 중간쯤 내려왔을 때, 재윤이 입을 열었다.

“진짜 고맙다고 안 할 거예요?”

“네. 그래야 할 이유가 없으니까요.”

칼같이 대답하는 해원을 힐긋 보았다. 정면만 응시하면서 서 있는데 냉기가 뚝뚝 흘러내렸다. 평소에도 표정 변화가 거의 없고 냉소적인 말투인 건 알았는데 이 정도까지인 줄은 몰랐다.

기본적인 예의도 없는 사람이었나.

“그럼 한 가지만 더 묻죠. 옥상엔 왜 서 있었습니까?”

“보셔서 아실 텐데요.”

“정말 죽으려고 했어요?”

두 번이나 묻는 재윤을 향해 해원은 몸을 돌렸다.

“네. 죽으려고 했어요. 본부장님 때문에 못 죽었고요.”

“…….”

“남의 계획 망치는 거, 그거 오지랖이에요. 안녕히 가세요.”

말이 끝나자마자 1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 문이 열림과 동시에 해원은 제 갈 길을 갔다. 밖으로 나오자 경찰들이 달려들어 괜찮냐고 물어왔다. 해원은 괜찮다고 대충 대답한 뒤, 다가오는 택시를 잡아탔다.

“도화동으로 가주세요.”

해원은 목적지를 말하고 가방에서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시간을 보니 9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원래라면 이 시간 이 자리에 없었어야 하는데, 운명의 장난인지 얄궂게도 살아있다. 집을 향해 가는 이 시간이 오늘은 꽤 낯선 기분이었다.

꼬르륵. 설상가상으로 배꼽시계까지 울려댔다. 야근하면서 저녁을 먹지 않았는데 배고픔이 이제야 느껴지는 것이다.

“이 타이밍에도 배는 고프네.”

해원의 입술을 비집고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오늘 죽으려고 했던 여자를 태운 택시는 복잡한 도로 위를 쌩쌩 달렸다.

* * *

심란한 마음으로 집에 도착한 재윤은 차가운 생수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탁, 소리 나게 식탁에 컵을 내려놓고 조금 전의 일을 떠올렸다.

‘네. 죽으려고 했어요. 본부장님 때문에 못 죽었고요.’

‘남의 계획 망치는 거, 그거 오지랖이에요. 안녕히 가세요.’

해원이 했던 말이 계속해서 머릿속에 맴돌았다.

오지랖. 내가 자길 살려준 게 오지랖이라니. 생각할수록 어이가 없었다.

죽으려던 사람을 살려줬으면 고마워해야 하는 거 아닌가?

재윤의 머리로는 당최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그녀의 행동도 그랬다. 자기 일에는 신경 쓰지 말라는 듯 무심하고 냉정하게 가버렸다.

“회사 옥상에서 직원이 뛰어내리려고 하는데 그걸 보고 누가 그냥 지나가?”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어도 분명 구하려 했을 것이다. 자신이 이상한 게 아니란 말이다. 그런데 해원은 원망하는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았다. 그냥 죽게 내버려 두지 왜 살렸냐고, 그렇게 눈으로 물었다. 대체 무엇 때문에, 뭐가 힘들어서 죽으려고 한 걸까. 당장의 위기는 넘겼지만 해원이 또 죽으려고 할지는 모르는 일이다.

“아, 서류.”

분명 서류를 챙기러 다시 회사에 갔던 건데 오지랖 부린다는 말만 듣고 왔다. 사람 목숨을 구했는데 이런 말이나 들은 게 어떤 기분인지 재윤은 확실히 느꼈다.

그는 컵에 물을 한가득 따랐다. 식탁 한쪽에 놓인 약통에서 약을 꺼내 물과 함께 목구멍으로 넘겼다. 약이 들어가니 속이 좀 진정이 되는 것 같았다.

민해원. 앞으로 자신을 무지 신경 쓰이게 할 여자라는 걸 재윤은 그땐 알지 못했다.

* * *

이틀 뒤.

“허억…… 헉…….”

재윤의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그의 손에는 또 한 번 해원의 팔이 붙들려 있었다. 장소는 마포대교. 이번엔 난간을 넘어가려 하는 순간에 붙잡았다. 그래도 놀란 가슴은 쉽게 진정되지 않았다.

“미쳤어요? 대체 왜 이러는 겁니까!”

재윤은 두 번이나 죽으려고 하는 해원에게 화가 치밀어 올랐다. 대체 왜, 무슨 이유로 이러는 건지 알 수가 없으니 답답해서 화가 나는 거였다. 죽는다는 게 그렇게 쉽게 결정할 일이 아닌데 밥 먹듯이 하려고 하는 해원이 이상하기도 했다.

“이것 좀 놔주시죠.”

놀란 재윤과는 반대로 해원은 차분한 음성으로 말했다. 별일 아니라는 듯.

“싫은데. 내가 손 놓으면 뛰어내릴 거잖아요.”

“…….”

“그러니까 못 놔요. 아니, 안 놔요.”

재윤은 해원의 팔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악력이 얼마나 센지 해원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아프니까 놓으시라고요. 안 뛰어내려요.”

“……진짜죠?”

해원은 말없이 재윤을 뚫어져라 보았다. 그녀의 눈빛이 매서워서 재윤은 얼른 손을 뗐다. 해원은 잡혔던 팔을 몇 번 빙빙 돌리더니 탈탈 털었다. 소매를 걷어보면 빨간 손자국이 나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그제도 재윤이 잡은 팔에 자국이 생겼는데 하필 또 같은 위치였다. 그것은 부적처럼 지워지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없어지겠지만.

손이 자유로워진 해원은 벗어두었던 단화를 양쪽 발에 신었다. 그 모습을 본 재윤은 머릿속에 생각하고 있던 걸 그대로 내뱉었다.

“신발까지 벗고 아주 본격적이네요. 이러는 이유가 뭡니까? 누가 힘들게 해요? 회사 일이 힘들어요?”

“오지랖.”

바닥에 놓아둔 가방도 들어 어깨에 멘 뒤, 해원이 말을 이었다.

“오지랖이라고 했잖아요. 남의 개인사정 다 알려고 하는 거.”

“그래도 회사 직원이 죽으려고 하는 걸 그냥 지나쳐요? 이래봬도 본부장인데.”

아, 해원은 짧게 소리 냈다. 본부장이었지, 참.

“본부장이든 일개 사원이든 너무 다 알려고 하지 마세요. 저는 계속 이럴 거고, 실패로 돌아갈 때마다 더 괴로우니까.”

“그게 무슨…….”

“본부장님이 절 구할 때마다 괴롭다고요. 살아야 하잖아요.”

자신을 바라보는 해원의 눈동자가 슬퍼 보였다. 사는 게 괴롭다고 말하는 사람의 얼굴은 이때껏 보지 못한 얼굴이었다. 오만가지 감정이 다 들어찬 눈동자. 감히 상상할 수조차 없는 것들이다. 해원은 할 말을 끝냈는지 홱 뒤돌아 걸음을 옮겼다. 그런 그녀의 뒷모습에 대고 얘기했다.

“데려다줄 테니까 타요.”

“됐어요. 본부장님이나 편하게 가세요.”

“걱정돼서 그래요. 그러니까 타요, 제발.”

우뚝, 해원의 발길이 멈췄다. 서서히 몸을 돌려 조금 멀어진 재윤을 보았다. 제발이라는 말까지 해가면서 저를 데려다주고 싶은 마음이 얼굴 표정을 통해 잘 보였다. 해원은 하는 수없이 다시 돌아가 그의 차에 올라탔다.

“집이 어딥니까?”

해원이 조수석에 타고, 차를 출발시키면서 재윤이 물었다.

“도화동이요.”

“도화동? 나도 거기 사는데.”

아, 그렇구나. 해원은 속으로만 생각했다.

“아파트 이름은 뭐예요?”

“오피스텔 살아요.”

“혹시 하이트리?”

“그걸 어떻게…….”

“나도 거기 살거든요. 그냥 내가 사는 오피스텔 이름 말한 건데. 몇 호예요?”

“그것까지 아실 필욘 없잖아요.”

“같은 동에, 같은 오피스텔에. 이 정도면 인연인 것 같은데. 민해원 씨는 어떻게 생각해요?”

때마침 적색신호에 걸려서 재윤은 부드럽게 차를 멈췄다. 그러고선 해원에게 고개를 돌렸다. 엷은 미소를 띠고 있는 그와 눈을 맞추던 해원은 휙 정면으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인연이 아니라 악연인 것 같은데요.”

“민해원 씨는 참…… 냉정하네요.”

이런 대답을 할 거라고 예상을 하긴 했지만 막상 직접 들으니 별로였다. 재윤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참 친해지기 어려운 여자다.

오피스텔에 도착해 동시에 내린 두 사람은 같은 출입문으로 들어갔다. 엘리베이터에도 똑같이 탔다. 층만 다를 뿐.

“10층이네요.”

해원이 누른 버튼을 본 재윤이 말했다. 해원의 눈길도 저절로 층수 버튼으로 향했다. 그러자 재윤이 8층을 눌렀다. 단 2층 차이를 두고 살고 있었다니. 본부장과 같은 오피스텔에 산다는 걸 알고 나서 조금 놀라긴 했다. 지금까지 같은 곳에 살고 있을 줄은 전혀 몰랐으니까. 출근길에도 마주친 적이 없고 엘리베이터에서도 마주친 적이 없었다. 나가는 시간이 달라서 그런지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해원이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엘리베이터는 8층에 도착했다. 띵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고 재윤이 내리면서 인사했다.

“먼저 내릴게요. 엄한 생각하지 말고 오늘은 푹 자요. 내일 회사에서 봅시다.”

재윤은 입꼬리를 올려 미소 지으며 손까지 흔들어주었다. 그의 모습을 빤히 보는데 문이 스르르 닫혔다.

‘저렇게도 웃을 줄 아는 사람이었어……?’

평소 회사에선 잘 웃지 않아서 로봇 같다는 말을 듣는 그였다. 그런데 웃는 얼굴을 보니 전혀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10층에 도착했는데도 해원의 머리는 재윤의 미소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처음 보는 본부장의 미소에 충격을 받은 날이었다.

* * *

다음 날 아침. 해원은 출근 준비를 하고 1층으로 내려왔다. 갑작스러운 남자의 등장에 그녀는 가려던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잘 잤어요?”

재윤이 어깨를 으쓱이며 물었다.

“설마 저 기다리신 거예요?”

“네. 민해원 씨 기다렸어요.”

망설임 없이 대답하는 이 남자를 어떡하면 좋을지. 뭐, 같이 출근이라도 하자는 건가?

해원은 쌩하니 그를 지나쳐갔다. 재윤은 그 뒤를 바짝 따라붙으며 말을 이어갔다.

“내 차 타고 갈래요? 민해원 씨가 또 이상한 짓 할까 봐 두려운데.”

“이상한 짓이라뇨?”

“어제 같은 그런 일이요. 난 누가 죽는 거 싫거든요.”

“출근 잘 할 테니까 본부장님은 알아서 혼자 가세요. 남의 도움 받는 거 딱 질색이니까.”

“도움 받았잖아요.”

해원이 신경질적으로 몸을 홱 돌려세웠다.

“두 번이나.”

검지와 중지를 펴 보이기까지 하는 그를 보며 해원은 푹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다 그런 모습을 보여서는 일을 이렇게 만드는지. 죽으려고 했던 순간을 재윤에게 보였다는 것이 이렇게 약점 잡힐 일일 줄은 몰랐다. 도움 받은 건 받은 거고, 지금은 같이 출근하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다. 해원은 다시 몸을 돌려 걸어갔다. 재윤도 더 이상 제안하지 않았다. 그녀가 걱정되는 건 사실이지만 같이 차를 타고 갔다가는 무슨 얘기가 나올지도 모르니 조심해야 했다.

“꼭 회사에서 봅시다! 꼭이요!”

재윤은 큰소리로 해원의 뒷모습을 향해 외쳤다. 꼭 보길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