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장 본능의 경고

본능이 머릿속에서 경고음을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수혜는 그 경고음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당장 간헐적으로 들리는 남성과 여성의 숨소리에 온 신경이 가서.

‘이강빈 대표님이 다치시기라도 한 건 아니겠지?’

청각에 집중하며 근원지로 슬금슬금 다가갔다.

다른 생각은 들지 않았다.

설마 아주 은밀한 행위가 벌어지기라고는 누가 생각할 수 있었을까?

조금 전까지 살점 하나 보이지 않도록 단단히 정장 갑옷을 갖춰 입은 이강빈 대표가. 월말 평가에서 차분하고 단호하게 이미지로 보이도록 했던, 그가 말이다.

들어가면 안 된다는 본능을 무시한 대가는 어마어마하게 컸다.

전혀, 줄곧 상상도 하지 못했던 장면을 보고야 말았으니까.

빼꼼히 열린 문틈 사이로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근육이 울룩불룩하게 튀어나온 넓은 맨 등이었다.

재차 확인하지 않아도 남성의 몸임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시선을 내려서 보였던 건 대표님 정장한 바지 좌우로 늘어진 날씬한 다리였다. 검은 미니드레스 지퍼가 한껏 내려간 채 여자의 하얀 맨 어깨도 보였다.

다음으로 보인 건 남자의 어깨 위로 작고 갸름한 여성의 얼굴이었다. 열기에 달떠 불그스름한 볼은 누구나 찬사를 할 만큼 아름다운…….

‘한가영 배우님?’

둘이서 서로의 보물을 찾기라도 하는 것처럼, 반쯤 눈이 멀어 다급히 움직이던 남녀의 모습. 그들이 담긴 대표실의 풍경은 마치 그림 같았다.

수혜는 쉽사리 시선을 떼지 못한 채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또 한 번 깊은숨이 들려오며 남자의 뒤통수가 뒤로 젖혀졌다. 황급히 그 방향으로 집요하게 쫓는 여자의 얼굴이 드러났다.

지난 8년 동안 종종 늦게까지 야근하던 대표님과 함께 퇴근하던 순간들을 떠올려보면 단 한 번도 여자가 있다는 기색은 없었는데.

그녀의 입술 주위로 피가 몰려있었고 그 큰 눈은 탐욕으로 물들어 있었다.

살짝 열린 문으로 시선을 던지는 듯하면서도 곧바로 강빈의 목선으로 입술을 파묻었다.

고지를 향해 빠른 속도로 달려가는 두 사람을 보던 수혜는 폐부에 담긴 숨이 부족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다른 쪽 손은 입을 막은 채 뗄 수가 없었다. 박자를 놓친 가쁜 숨소리가 두 사람에게 들려 자칫 들킬까 하는 걱정도 못지않게 컸기에.

‘왜 하필 이때……!’

위험하다.

정말로 위험했다.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고 문손잡이를 잡은 손도 피가 돌지 않아 새하얘졌다.

다리에는 완전히 힘이 풀려서 주저앉은 지 오래. 누군가 도움이 필요했다. 이대로면 완전히 정신을 놓을지도 모른다는 급박함이 감돌았다.

‘아무도 도와줄 사람은 없어.’

지독한 외로움조차 신체 고통의 물살에 잡아 먹힐 때쯤, 문손잡이를 꽉 쥔 손에서 생경한 온기가 느껴졌다.

덜덜 떨리는 손을 완벽히 감싸는 다른 이의 손이었다. 그 손은 좀 더 크고 두꺼워 마치 몸을 폭 감싸 안는 것처럼 따뜻했다.

실제로 손의 주인은 수혜의 등 뒤에 온몸으로 온기를 품고 있었다.

‘이 사람을 알아……. 신도진.’

수혜가 고개를 돌려 짐작 가는 얼굴을 확인하려 할 때, 남자는 재빨리 그녀의 눈을 가렸다.

가림막은 도화선이 된 양, 가려진 얼굴에 기다린 것처럼 눈물 두 줄기가 소리 없이 줄줄 흘렀다.

‘난생처음 마음에 품고 있었던 남자 대신 꿈을 선택한 대가가 이렇게나 클 줄은 몰랐어.’

숨조차 쉬지 못한 문수혜는 자신이 혐오스러워 못 견딜 지경이라는 생각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호흡의 리듬은 좀처럼 돌아오지 못해서, 눈앞에 있는 도진을 두고도 어떤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폐까지 닿지 못하는 과호흡만 반복해서 해댈 뿐이었다.

이제 눈앞이 노래져서 더는 살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하는 순간. 입술에 간질거리는 바람이 닿아왔다.

생명과도 같은 타인의 숨이었다.

‘자, 잠깐만!’

한껏 높인 목소리가 터지려는 찰나, 남자의 입술에 막혀 어떤 소리도 나오지 못했다.

이강빈 대표님이 볼지도 모르는데!

수정은 두 주먹에 힘을 줘 도진의 가슴팍을 팡팡 쳐댔다. 꿈쩍도 안 했다.

오히려 신념이 굳건한 목소리만 들렸다.

“내가 수혜 씨에게 했던 말은 언제든 변하지 않아요.”

이 사람이 어떤 말을 했더라? 수혜는 끊임없이 몸 안으로 들어오는 숨을 줄기차게 받아내며 혼자서는 답을 찾을 수 없는 심연으로 빠져들었다.

질문의 답은 헐떡이던 수혜의 어깨가 잠잠해질 무렵, 낮고 잔잔히 들려왔다.

“내가 수혜 씨 팬이라는 거.”

모든 사활을 걸었다고 생각한 마지막 월말 평가 날. 그날은 사랑과 꿈 어떤 것도 선택할 수 없다는 것을 체감한 순간이었다.

모든 것은 죽어버렸지만 또한 새롭게 부활하는 날이기도 했다.

#1장 화면을 위해 태어난 사람

스마트폰에 과거 아이돌 연습생이 계약 후 5년 연습한 후기에 관한 동영상이 업데이트되었음을 알리는 창이 나타났다.

액정을 바라보는 수혜의 표정은 사뭇 심드렁해 보였다.

‘연습생 5년이면 양호한 편이잖아? 나는…….’

기약 없이 5년을 보냈다던 동영상 속, 전 연습생의 말을 계속해서 들었다.

‘그래 이런 생각은 그만두자. 문수혜 너는 알고 있잖아. 아이돌 장기 연습생이 얼마나 하루하루 피를 말린 채 살고 있는지. 얼마나 장기간 연습했는지 따위는 상관없어.’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니, 마음에서 한 번도 실제 마주하지 못했던 동영상 속 여인에게 연민이 일었다.

문수혜, 그녀 또한 업계 표준을 알고 신중하게 계약한 아이돌 연습생이다.

아이돌 데뷔할 수 있는 기준 실력이 되면 데뷔한다고 대표님께 약속받았었다. 중학생이었던 수혜는 부모님 대신, 막 성인이 된 오빠를 끌고 가 연습생 계약을 체결했다.

‘그땐 당장이라도 아이돌이 될 거란 마음만 들었지, 스물셋이 된 지금까지 연습생 타이틀을 달고 있을 줄 누가 알았을까?’

달리는 버스 안, 창문을 통과해오는 햇살을 느끼며 수혜는 힘없이 웃었다. 아이돌 데뷔할 수 있는 기준 실력이란 무엇일까?

단순히 노래와 춤을 잘한다면 가능하다고 그녀는 그렇게 믿고 있었다.

8년. 수혜가 연습생 생활을 한 시간은 8년이다.

딱히 롤 모델이 있어서 아이돌이 되고 싶은 건 아니었다. 그렇다고 많은 사람에게 노래와 춤을 선보이고 싶다는 감정으로 이 일을 이어가기에는 너무나 순수해서, 누구에게 말을 하기도 민망할 정도였다.

그저 아이돌 레슨과 연습이 수혜의 생활에 있어 깊숙이 파고들어 버렸다는 게 가장 컸다. 그렇게나 습관처럼 해오던 춤과 노래를 하루 건너뛰면 몸이 근질거릴 정도였다.

그래도 매일 같은 연습으로 고루 해진 일과에 한 줄기 햇살은 분명히 있어.

곧 도착할 목적지가 비치는 창 너머로 ‘캐슬 엔터테인먼트’ 간판을 보는 수혜의 눈에는 빛이 어렸다.

소속사 회의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수혜가 매일 같이 보고 싶어 하던 남자, 이강빈 대표가 바로 있을 터였다.

수혜는 전공 책을 품에 안은 채 문에 달린 유리창 너머로 회의하는 광경을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저쪽은 A&R팀, 이쪽은 보컬 팀 그리고 이 앞쪽에 앉은 분은 댄스팀.

마지막으로 중앙에 앉아서 부드럽지만 예리한 눈으로 한 곳을 주시하는 프로페셔널한 모습을 보이는 그는……

수혜가 가장 좋아하는 이강빈 대표였다.

‘아직 멀었나?’

‘빨리 좀 끝나라, 빨리.’

몇 번이나 눈에서 레이저가 나올 듯 쏘아보았지만, 수혜의 눈에는 도저히 회의 따위 끝날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혼자 무언으로 가슴을 치는 수혜. 그녀의 가슴에 미열이 식을 무렵이었을까, 창문 너머로 주시하는 대표님은 갑자기 미간을 구겼다.

‘왜? 대표님 뭐 안 좋은 일이 있으신 건가?’

‘그나저나 어쩜. 저렇게 얼굴을 찡그리는 모습도 멋있네.’

‘그래도 강빈 대표님 나오시면 얼굴 그렇게 찡그리지 말라고 말씀드려야겠다. 너무 멋있으니까.’

팀 회의가 마무리된 건지 서로 인사를 주고받는 모습이 수혜의 눈에 띄었다.

‘끝났다!’

수혜의 발뒤꿈치가 바짝 올라가서는 대표에게로 시선이 한껏 닿았다. 곧 문이 열리고 팀장님들은 하나둘 대표실에서 나오기 시작했다.

“문수혜 씨네. 새로운 과제 곡 연습은 잘 되어 가고 있어요?”

“수혜, 대표님 뵈러 왔구나?”

겸연쩍어하던 수혜는 익숙한 얼굴의 팀장들 하나하나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하하, 네, ”

회사에서 관리자분들 중 그녀가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어쩌면 관리자들이 이곳, 캐슬 엔터테인먼트에 근무한 기간보다 수혜가 몸담은 기간이 더 길 수도 있을 터였으니 말이었다.

마지막으로 나온 사람은 그녀가 그토록 기다리던 강빈이었다. 그는 부드러운 몸짓으로 천천히 소파에서 일어나 수혜에게로 다가왔다.

“대표님하고 점심 먹으려고 일찍 왔죠.”

“그렇다면 당연히 함께 먹어드려야죠, 우리 수혜랑.”

콧대 높으신 캐슬 엔터의 대표 이강빈. 그는 선심이라도 쓴다는 듯 말했다. 말투는 그래도 수혜 어리광은 항상 받아주었다. 그녀가 15살 어린 나이에 연습생으로 들어왔을 때부터 줄곧.

**

음식점에 오자마자 수혜는 한 톤 높아진 말투로 근황을 읊어댔다.

“그래서 말이에요, 교수님이 저한테 음정이 정확하다고 오늘 칭찬해주셨다니까요.”

“음정이 정확하다고 하면, 수혜가 회사 레슨을 잘 받는 거라고 할 수 있네.”

“트레이너 선생님들께서 대표님께 다 보고하고 있잖아요. 제가 얼마나 레슨에 착실한지 다 들었으면서 모르는 척하지 말아요?”

“……너는 정말…….”

강빈은 말을 잇지 않고 피식 웃어버렸다.

왜 웃는담?

아삭거리는 샐러드와 함께 씹히는 닭 안심의 쫄깃함을 느끼며 수혜는 강빈을 뚫어져라 보았다.

“제가 뭘요, 네? 제가 뭘 어쨌는데요?”

“수혜가 귀여워서.”

그 말을 끝으로, 그 비스트로 음식점 자리 근처 여성들은 거의 강빈에게 시선이 향했다. 동시에 정적이 감돌았다.

웃음기 담긴 강빈의 말은 누가 들어도 달콤했다.

오로지 수혜만 빼고서. 그녀는 입술을 삐죽이더니 뾰족한 말투로 대꾸했다.

“귀엽다고 하지 말라니까요.”

“귀여운 애한테 귀엽다고 하지 않으면 뭐라고 하겠어?”

실은 알고 있었다.

15살 캐슬 엔터에 들어오면서 귀여워했던 그 중학교 2학년 아이. 여전히 이강빈이라는 사람은 성인이 된 지 몇 년이나 지난 수혜를, 그때와 별로 달리 여기지 않고 있다는 것 말이다.

수혜는 도전적으로 닭 안심을 포크로 찍어누르며 맞은 편에 앉은 그를 바라보았다.

평소 같지 않은 일을 하다 보면 탈이 나기 마련. 다소 전투적으로 치아를 부딪치던 수혜의 입속에서는 예기치 못한 상황이 벌어졌다.

“아야!”

“수혜야, 왜? 어디 봐.”

그녀를 주시하던 강빈의 표정이 걱정스레 변해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혜의 턱을 한 손으로 감싸 쥔 채 그녀가 입을 벌리도록 했다.

동시에 수혜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돌아갔다. 입을 벌리면 아직 넘기지 못한 샐러드 잔해가 입속에서 보일 텐데, 그걸 어떻게 대표님께 보일 수는 없었다.

“으으으응, 싫어요.”

그녀는 얼른 입술을 오므린 채 강빈에게서 입속을 사수하겠다는 일념으로 계속해서 고개를 저었다.

“보여달라니까, 수혜야. 난 네 또 다른 친오빠로 여겨도 된다고 했잖아.”

친오빠. 세 글자에 수혜는 양 입술에 줬던 힘을 탁 풀어버렸다. 그녀의 턱을 쥐던 강빈의 손안에도 힘이 풀린 게 느껴졌다.

다만 그는 오직 수혜의 입 안을 살피는 데에만 열중했다.

“잇몸을 살짝 씹었구나.”

“…….”

“오늘은 연고 꼭 바르고 푹 자.”

여자의 잇몸을 차분히 살피는 강빈의 시선은 사뭇 따뜻했다. 소중하고 귀한 존재라는 듯 아껴서 마지못하겠다는 눈빛이었다.

하지만 그 시선을 받아내는 수혜는 영 못마땅했다.

“……그러지 말아요.”

턱에 간질거리게 닿는 강빈의 손끝을 턱을 비켜 털어 냈다.

“대표님이 제 친오빠를 자처하는 거 말이에요, 난 그거 싫어요. 우리 친오빠는 따로 있으니까.”

단호한 수혜의 말에 강빈은 쉽게 손을 뗐다. 거두는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수혜가 한 마디씩 내뱉을 때마다 강빈의 얼굴이 굳어갔다. 웃음기 없어진 강빈의 표정을 마주한 그녀는 금세 풀이 죽어버렸다.

“…….”

“미안해요. 괜히 제가 대표님께 화냈죠.”

“우리 수혜, 요즘 대학 생활하랴, 아르바이트하랴, 저녁에는 레슨하고 연습까지 한다고 힘들지?”

수혜가 이렇게 짜증을 낼 때면, 강빈은 그녀의 눈치를 조심스레 살피곤 했다.

따뜻한 그의 눈동자에 들어간 것만 같다. 그런 생각을 하니 수혜 마음속에서도 따스함이 서서히 번져 나왔다.

“아니에요. 그냥 저 어린애로 보지 말아달라고요. 이제 대학교 졸업할 때도 다 되었단 말이에요.”

그녀의 말을 가만히 듣던 강빈은 눈썹이 치켜 올라가 멍해진 표정이었다. 벌써 그렇게 됐나? 혹은 왜 갑자기 그런 말을 하는 거지, 의아한 눈치였다.

하지만 놀란 얼굴을 거두고 곧 그는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되물었다.

“시간 빠르다, 그렇지?”

대표님의 웃음은 어느 때나 근사하다고 수혜는 생각했다.

그래서 데뷔를 꼭 하지 않더라도 이렇게 이강빈 대표님과 오래도록 가까이 있으면 되지 않을까……하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언제나 사사로운 마음보다는 꿈이 먼저다. 수혜는 마음을 다잡고 시선을 들어 신중히 입을 열었다.

“저……말이에요.”

턱을 들고 강빈을 쳐다보며 이어 물었다.

연습생으로서 앞으로의 방향을 정하는 일에는 분명 소속사 대표의 결정이 중요하다. 기세를 몰아 수혜는 한 마디 더 덧붙여 물었다.

“저 아직 연습이 더 필요한 건가요?”

연예인만큼이나 잘생긴 그 얼굴에 평온함이 감돌았다. 그는 수혜의 물음에 답하는 대신 오른손을 들어 시계를 보았다.

곧 웃음기 스민 자상한 표정으로 강빈이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