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부

“안녕하세요?”

조용하던 석진의 사무실로 들어서던 지혜가 직원과 이야기 중이던 소희에게 밝게 인사를 건넸다.

“아, 안녕하세요?”

소희가 갑작스럽게 등장한 지혜를 보며 다가와 인사를 했다.

“오빠 있죠?”

“네.”

지혜는 일부러 석진과 자신이 아주 가까운 사이라는 듯 사람들 앞에서 ‘오빠’라는 호칭을 서슴없이 사용했다. 누구 보란 듯이. 그리고 소희가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이자, 이번에는 지혜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자신을 호기심으로 바라보고 있던 다른 직원들을 향해 환히 웃으며 인사를 건넨다.

“안녕하세요? 수고 많으십니다.”

그녀의 인사에 다른 직원들은 어리둥절하지만, 자리에서 일어나 같이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후보님 약혼녀, 서지혜 씨에요.”

소희의 뒤늦은 소개에 다른 직원들이 ‘아’하며 그제야 알겠다는 듯 미소를 짓는다. 그도 그럴 것이 경제 신문에 약혼 기사가 나갔어도 사진까지 실리진 않았기에 모르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우리 오빠, 잘 부탁드릴게요!”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정중히 숙이고 부탁해오는 지혜에게 다시 한번 직원들이 어정쩡하게 고개를 숙였다.

“우리 결혼식이 조금 앞당겨졌어요. 들으셨어요?”

지혜가 소희 곁으로 와 조용히 물었다.

“아, 그러세요? 몰랐어요. 요즘 캠프가 좀 바빴어요. 이제 본격적인 유세 철에 접어들어서 정신이 없네요.”

그런 일이 있었다면 자신에게 먼저 알려줄 수도 있었을 텐데, 바빠서 잊어버린 건지 아니면 자신은 알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건지. 말해 주지 않은 석진에게 소희는 순간 야속하단 생각이 들었다.

“네. 그렇다고 하더라고요, 오빠가. 그래서 제가 결혼 준비 혼자 다 하잖아요, 요즘. 오빠는 선거 때문에 신경도 하나 못 쓰고….”

지혜는 말끝에 입을 뾰로통하게 하고는 귀여운 척을 했다.

“힘드셔서 어떡해요?”

“아니에요. 저희 일이잖아요. 오늘은 근데 웨딩 촬영 때문에 오빠가 꼭 필요하거든요. 잠깐 데리고 나갈 수 있을까요?”

“어, 일정 한번 조율해 볼게요. 지금 나가실 건가요?”

“네.”

소희가 지혜의 물음에 책상 위에 있던 다이어리를 들어 석진의 오늘 스케줄을 체크하기 시작했다.

“어떻게 왔어?”

어떤 일정을 미뤄야 할까 소희가 고민하고 있던 찰나에 석진이 자기 방에서 나와 지혜가 서 있는 쪽으로 다가오며 물었다. 그의 목소리는 무덤덤하고 차갑게까지 느껴졌다.

“반갑지? 말도 안 하고 이렇게 서프라이즈 해서?”

지혜는 소희와 사람들 보란 듯 석진의 팔짱을 끼며 그를 보고는 환히 웃었다.

“일이 있으면 어떡하려고?”

그런 지혜의 팔을 제자리로 돌려놓는 석진의 모습을 소희가 놀란 듯 바라보았다. 지혜 역시도 놀라고 멋쩍은 듯했지만 애써 태연한 척 웃었다.

“소희 씨한테 빼달라고 졸라보려고. 그래도 되죠, 소희 씨?”

“30분 후에 있을 미팅은 다음 날로 다시 조정하겠습니다, 후보님. 다녀오세요.”

소희가 석진을 보고는 사무적으로 말했다.

“소희 씨, 감사해요.”

석진 대신 지혜가 상냥하게 소희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아니에요.”

“오늘 꼭 해야만 해?”

석진은 굳은 얼굴로 마땅치 않다는 듯 지혜를 다그쳤다. 사람들 앞에서 이러는 게 옳지 않다는 걸 알지만, 계속해서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서두르는 지혜가 못마땅해 마음이 좋지만은 않은 상태였다.

“응. 오늘 꼭 해야 해, 오빠. 거기 대표님이 오늘밖에 시간이 안 된다고 하셨어.”

“5시까지 오도록 하죠. 그 후에 미팅 다시 잡아놔 주세요, 유 실장.”

석진은 썩 내키진 않았지만 이대로 거절했다간 몇 시간이고 사무실에서 지혜와 실랑이를 해야 할 것만 같아서 단념하기로 했다. 지혜는 소희를 향하던 석진의 다른 눈빛에 배알이 꼴렸다. 자신에게는 그토록 차갑고 딱딱하게 싫은 티를 팍팍 내는 사람이 소희에게만큼은 세상 둘도 없이 다정한 게 미치도록 속으로 화가 났다.

“네, 알겠습니다. 다녀오세요.”

“고마워요, 소희 씨!”

부글거리는 화를 억누르며 해맑게 소희에게 지혜가 인사를 했다.

“아닙니다.”

“그럼, 수고들 하세요.”

이번에는 일하고 있던 다른 직원들에게 지혜가 사무실을 나서기 전에 더 큰 소리로 인사했다.

“다녀와서 봅시다.”

지혜의 인사에 직원들은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 어쩔 줄 몰라 했고, 석진은 그런 직원들과 소희 보기가 민망하고 미안해 얼른 사무실을 나섰다.

**

소희의 아파트. 소희는 낮에 사무실에서 다 못했던 일을 집에까지 가져와 마무리를 짓고 있었다.

‘따르릉.’

휴대전화가 울린 시간을 확인해 보니 밤 9시경. 이 늦은 시간에 누굴까 하며 발신자를 확인했다.

‘서지혜.’

소희는 혹시 석진에게 무슨 사고가 생긴 건가 싶어 황급히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 소희 씨?

“네.”

자신을 부르는 지혜는 느긋했다. 다행이었다. 적어도 석진에게는 아무 일도 없는 것 같다.

- 나 술친구 안 해줄래요, 오늘 밤?

희한한 일이었다. 소희는 단 한 번도 지혜와 술이란 걸 마신 적이 없는데 왜 불쑥 자신을 불러내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게다가 말투가 느릿느릿한 거로 봐서 이미 어느 정도 마시고 취한 상태 같았다. 솔직한 그녀의 마음 같아선 귀찮아서 거절하고 싶었지만, 석진을 생각해서 소희는 마음을 바꿨다.

“어디세요?”

- 명성 호텔 바예요. 올 수 있어요?

“네. 지금 집이라서 준비 얼른 하고 택시 타고 갈게요.”

- 기다릴게요.

“네.”

전화를 끊고 소희는 잠시 갸웃했다. 기다린다는 지혜의 마지막 인사가 마음에 내내 걸렸다. 서재에서 나와 소희는 드레스 룸을 향하며 발걸음을 서둘렀다. 순식간에 준비를 마치고서 택시를 불러 탔다. 그녀가 호텔 바에 도착한 시간은 정확히 9시 40분이었다.

**

“소희 씨?”

지혜는 소희가 들어서자 반기며 일어났다.

지혜가 앉아 혼자 술을 마시던 곳은 호텔 바 안쪽 깊숙이 위치한 프라이빗 공간이었다. 이런 곳에 룸이 있는 줄 몰랐던 소희는 안내를 받아 가는 동안 속으로 꽤 놀랐다. 아무래도 VIP들이 오게 되면 내주는 공간인 것 같아, 다시금 지혜가 사는 세상은 그녀와는 많이 다르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다.

“빨리 온다고 왔는데, 많이 드셨어요?”

소희가 지혜의 맞은편에 앉으며 물었다.

“아니요. 조금 먹었어요. 기다리다가….”

그녀의 말에 소희가 옆에 있는 양주병을 보니 벌써 3분의 2가 비어있었다. 40분 동안 비운 양치곤 꽤 많은 것 같아 아무래도 오래 앉아 혼자 술을 마신 것 같다고 생각했다.

“소희 씨!”

“네.”

“석진 오빠 때문에 너무 속상한데, 말할 사람이 없어서 불렀어요.”

소희는 가만히 지혜를 바라보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망설이는 중이다.

“음, 시카고에 있을 때, 오빠가 이렇진 않았거든요. 그래도 잘 웃어주고, 중간중간 농담도 하고, 머리도 쓰다듬어 주고… 그랬거든요.”

과거를 회상하며 쓸쓸한 표정을 짓는 지혜를 보며 소희는 그런 그녀가 안쓰러웠다.

“나는 대체 석진 오빠한테 뭘까요?”

지혜의 눈에 금세 눈물이 그렁그렁해졌다. 소희가 애써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결혼하실 분이시잖아요?”

“오빠는 결혼에 비협조적이고, 자꾸만 도망치고 싶어 해요. 나는 그런 오빠가 불안해서 미치겠어요.”

“아니에요, 후보… 석진 오빠는 감정 표현을 많이 안 하잖아요?”

소희는 석진을 ‘후보님’으로 부르려다가 멈칫하고 오빠로 정정해 지혜를 위로하기 시작했다.

“저도 그런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고요. 그 절제된 감정을 고스란히 드러내 보이는 한 사람이 있더라고요.”

지혜는 말을 마치고 빤히 소희를 바라봤다. 소희는 순간 뜨끔했다. 그게 자신일까.

“나, 소희 씨 너무 미워요.”

지혜의 직설적인 표현에 소희가 놀랐다. 의식하지 못했는데, 남들 눈에 그렇게 보였다면 그녀도 그리고 석진도 문제였다.

“소희 씨, 우리 친한 친구는 될 수 없어도 서로 적은 되지 말아요.”

너무 놀라 말이 없는 소희를 향해 지혜가 다시 말을 해왔다. 그녀의 말속에는 뼈가 있었다. 소희는 지혜가 지금 하고 있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 너무 잘 알 것만 같아서 고개를 끄덕했다.

“석진 오빠는 늘 저를 걱정해요. 아무래도 가족도 없고, 또 사교적이지도 못해서 친구도 없거든요. 그러니까 같이 살면서 들게 된 정 때문에 안쓰럽게 보는 거예요. 지혜 씨가 미워할 만큼 그런 거, 아니에요.”

“과연 그럴까요?”

지혜의 물음이 의미심장했다. 가만히 앞에 앉은 소희를 바라보는 지혜의 눈빛이 묘했다.

“네.”

소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단호히 그렇다고 했다. 그제야 지혜의 불안했던 마음이 조금 놓였다. 석진은 몰라도 소희는 아직 그의 흔들리는 마음을 받을 마음의 준비가 안 되어 보였다. 적어도 겉으로는. 어쩌면 석진 혼자만의 사랑으로 끝날 수도 있을지 모른다는 희망적인 생각을 지혜는 순간 품게 되었다.

늦은 오후 그의 사무실에 가서 일부러 소희 보란 듯 석진을 빼내 오고 나서부터 지혜는 내내 석진의 눈치를 살펴야만 했다. 석진은 별로 말도 없고,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요즘 들어 둘이 있으면 더 말이 없어진 석진에게 지혜는 불길함을 느꼈다. 어르고 달래서 웨딩 촬영 복을 몇 벌 간신히 입히는 동안 수명이 한 몇 년은 단축된 것 같았다. 자신이 아무리 더 많이 그를 좋아한다고 하지만 이건 너무 불공평했다. 그러다 결국 지혜가 폭발하고야 말았다.

‘오빠, 웨딩 촬영하지 말까?’

‘그럴래?’

하지 말자고 물어보면 미안하다고 아니라고 할 평소의 석진이었다. 이번 결혼을 준비하며 혼자만 설레고 들떠 하는 것 같아 서러웠다.

그를 사무실 앞에 내려주고 곧장 호텔 바로 왔다. 양주를 시키고 물처럼 들이켰다. 그러다 소희에게 전화를 했다. 지극히 충동적인 행동이었다. 그녀를 불러 이 흔들리는 남자를 네가 흔들고 있는 거냐고 대놓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눈앞에 나타난 그녀는 맑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눈치라서 그나마 지혜의 마음이 조금은 개운해졌다. 이제 내 남자만 채비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게 얼마나 어려운 일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

소희가 잠시 지혜에게는 화장실에 다녀오겠다고 하고서 룸에서 나와 석진에게 몰래 전화를 걸었다. 아무래도 둘 사이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나와서 저토록 힘들어하는 지혜를 다독여주고 풀어줬으면 싶었다.

- 응, 소희야.

“오빠, 여기 명성 호텔 바 룸이야. 지혜 씨가 오늘 좀 많이 취했어.”

- …하… 알았어. 금방 갈게.

석진의 놀란 듯한 목소리와 서두르는 모습에 소희는 그나마 다행이다 싶었다. 이제 그가 오면 지혜를 부탁하고 자신은 집으로 돌아가 내일을 준비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을 했다. 머릿속에서는 이토록 간단하고 아무렇지 않은데 그녀의 마음은 왜 착잡해지는지 알 수가 없었다.

**

지혜가 취해서 테이블에 엎드려 있었다. 그런 지혜를 소희가 열심히 물수건으로 손을 닦아주며 옆을 지켰다.

“어떻게 된 거야?”

석진이 문을 열고 들어서며 그 광경을 보고 놀라 물었다.

“어… 오빠. 술 한잔 같이했어. 근데 뭐 속상한 일이 있었는지 많이 드셨어, 지혜 씨가.”

소희는 놀란 석진을 향해 괜찮다고, 그저 술을 조금 과하게 마신 것뿐이라고 애써 차분히 대응했다.

“서지혜!”

석진이 지혜 옆으로 와 앉으며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다정하진 않았지만 차갑지도 않았다.

“어, 오빠다! 오빠아!”

석진의 목소리에 지혜는 게슴츠레 눈을 뜨고 고개를 들어 곁에 다가온 그를 바라보았다. 꿈인가 싶어 몇 번 눈을 끔뻑거리던 그녀가 반갑게 석진을 부르며 그의 목에 아무렇지 않게 팔을 둘렀다.

“정신이 나? 집에 갈 수 있겠어?”

석진은 소희를 의식하고서 자신의 목에 둘린 지혜의 손을 떼어내며 물었다. 석진의 물음에 자리에서 겨우 일어서려던 지혜가 다시 풀썩 주저앉아 버렸다.

“하… 왜 이렇게 몸이 축축 늘어지냐.”

“지혜 먼저 데려다주고, 너 바래다줄게. 기다려.”

석진은 다시 쓰러진 지혜를 하는 수 없이 보다가 소희를 향해 말했다.

“아니야. 난 호텔 앞에 택시 타고 가면 돼. 금방이야. 지혜 씨 책임지고 오빠가 잘 바래다 드려.”

“늦은 시간이야. 데려다줄게. 지혜야!”

혼자 간다는 소희의 말이 마음에 안 든 석진은 눈살을 찌푸려 보이며 무서운 표정을 했다. 그리고는 다시 지혜 곁으로 가 그녀를 부축하며 이름을 불렀다. 좀 정신을 차리고 걸어보라고. 하지만, 지혜는 온몸이 축축 엉기고 늘어졌다. 그런 모습을 곁에서 보던 소희가 얼른 자신의 가방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빠, 나 먼저 갈게. 지혜 씨 잘 부탁해.”

소희가 얼른 룸을 나가려고 문으로 다가서자, 석진이 그런 소희를 잡으려고 일어났다.

“오빠!”

석진이 일어나 소희를 챙기는 모습을 취한 지혜가 보고는 석진의 팔에 매달리며 그를 불렀다. 그런 지혜와 석진의 모습을 보던 소희가 얼른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왜 이렇게 많이 마셔?”

걱정하는 듯한 그의 다정한 목소리에 지혜는 눈물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일부러 다시 테이블 위로 쓰러지며 말했다.

“오빠, 나 룸에 좀 올려다 주라. 이대로 집에 가면 엄마, 아빠 다 난리 나실 거 같아.”

“기다려. 룸 체크인하고 올게.”

문을 닫고 나가는 석진의 뒷모습을 보며 지혜는 생각이 많아졌다. 취해서 몸은 말을 안 듣는데 오히려 생각은 왜 더 또렷해지는지 영문을 모르겠다.

**

“후, 너무 많이 마셨네.”

지혜가 화장실에서 엉기적거리고 나오며 혼잣말을 했다. 석진이 체크인한 룸에 올라와 기다렸다는 듯 한바탕 토하고 나니 어느 정도 술이 확 깨는 것도 같았다.

“이제 좀 괜찮아?”

석진이 소파에 앉아 있다가 그런 지혜를 보고 물어왔다.

“아직은 그냥, 그래.”

지혜는 괜찮다고 하면 석진이 혼자 이대로 가버릴 것만 같아서 일부러 머리를 감싸고는 더 아픈 척을 했다.

“자고 가야겠어.”

지혜가 침대로 가 걸터앉았다. 흐트러진 모습. 대놓고 유혹까지는 아니라 할지라도 남자라면 한 번쯤은 흔들릴 법한 자세로 기대앉는 것도 이 와중에 그녀는 잊지 않았다.

“혼자 있을 수 있겠어?”

흔들리라고 한 포즈에 오히려 흔들리지 않는 석진의 물음이 깔끔했다.

“아니. 오늘 우리 같이 있자, 오빠. 나 그러고 싶어.”

“여전히 취했네. 먼저 갈게.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해.”

같이 있자고 뜨거운 시선으로 유혹하는 지혜를 무미건조하게 보며 석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늘, 그랬어.”

막 발걸음을 떼려던 석진의 귓가에 낮고 짙은 지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에 담긴 축축함에 석진은 지혜를 돌아봤다.

“항상. 오빠는 먼저 걷고, 나는 뒤에서 따라 걷고. 손 한번 따뜻하게 잡아 준 적 없고, 입맞춤 한 건 한 손가락으로 꼽혀. 그것도 다 내가 먼저 장난스럽게 해버린 것들이지만….”

석진은 자조하듯 웃는 지혜를 바라보며 미안함에 말이 없었다.

“약혼하고 결혼한다는 사람들이 늦은 밤 술에 취해 호텔 방까지 왔는데, 남자가 취한 여자를 두고 그냥 가. 누가 믿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