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초야

‘토독 토로록 토독’

빗물이 초가지붕을 타고 흐르는 소리가 거슬릴 만도 한데 창호문 너머에서는 규칙적인 숨소리가 끊어지지 않았다.

화사한 모란 병풍과 새 원앙금침 그리고 정성이 가득 담긴 주안상. 방 풍경으로만 보자면 이 숨소리는 밤새 사랑을 나누느라 지친 신혼부부의 것이어야 맞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연두색 원삼에 화려한 족두리를 쓴 신부 의진은 반닫이에 등을 기댄 채 홀로 졸고 있었다.

위태롭게 끄덕이던 고개가 크게 떨어지며 무릎에 부딪히자 의진은 얼얼한 통증으로 얼굴을 번쩍 들었다. 그러고는 혀에 퍼지는 비릿한 피 맛을 느끼며 냉큼 방문 쪽을 쳐다보았다.

어젯밤 아버지가 닫아준 방문은 꼭 닫힌 그대로였다. 빈방을 휘휘 둘러 본 의진은 큰 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밀어붙이시더니…. 이리되어 속이 후련하시려나.”

중얼거리는 그녀의 목소리에는 슬픔이 전혀 묻어나지 않았다. 대신 거추장스러운 혼례복을 입고 생고생을 한 것이 억울한 듯 보였다.

다시 한번 한숨을 푹 내쉰 의진은 앞으로 쏟아진 댕기를 귀찮다는 듯 휙 쳐서 넘기고는 주안상의 다리를 제 앞으로 끌어당겼다.

대례 준비를 한답시고 어제 아침부터 굶은 탓에 몹시 허기가 진 그녀는 차갑게 식은 전을 제대로 씹지도 않고 꿀꺽 삼켰다. 그러더니 켁켁 기침 소리를 내며 급히 술잔을 연거푸 비워냈다.

그렇게 전과 떡을 안주 삼아 술 한 병을 비운 의진은 원삼 위에 둘린 허리띠를 훌렁 풀어냈다. 그리고 원삼마저 벗으려 옷고름을 붙잡았다.

하지만 그 순간 밖에서 ‘찌그덕’하고 마루를 밟는 소리가 들려오자 곧바로 손을 멈춘 그녀는 숨을 죽이고 문을 바라보았다.

다시 한번 마루가 소리를 내자 의진은 재빨리 허리띠를 집어 허리에 둘렀다. 그리고 문이 열리기 직전 소맷자락으로 다소곳이 얼굴을 가리고는 얌전히 눈을 내리깔았다.

벌컥 열린 문틈으로 밀려든 찬바람이 이마에 닿는 것을 느끼며 의진은 문이 닫히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신랑이 들어온 뒤에도 문이 닫힐 기미가 없자 그녀는 호기심에 눈을 살짝 치켜떴다.

그리고 동시에 그녀는 놀람과 공포로 얼어붙었다.

물을 뚝뚝 흘리며 문 앞에 서 있는 이는 신랑이 아니었다. 대신 검정 일색으로 차려입고서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사내가 그녀를 매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살기 어린 사내의 눈빛에 입술을 덜덜 떨던 의진은 그의 손에 들린 시퍼렇게 날이 선 검을 보았다.

“누, 누구시오?”

간신히 목소리를 쥐어짜 물은 보람도 없이 말이 없는 사내는 한 발짝 더 다가왔다. 그리고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높이 칼을 치켜들자 의진은 본능적으로 머리를 감싸며 몸을 움츠렸다.

‘으악!’

몸을 강타한 충격에 정신을 잃었던 의진은 잠시 후 바위에 짓눌리는 듯한 답답함을 느끼며 깨어났다.

자신을 덮친 것이 축축하게 젖은 사내의 커다란 몸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그녀는 진저리를 치며 사내의 등에 주먹을 꽂았다. 그러나 방금까지도 살기등등했던 사내는 축 늘어진 채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간신히 그를 밀어내고 몸을 일으키던 의진은 피투성이가 된 자신의 두 손과 앞섶을 보고는 까무러칠 듯 놀라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이내 몸을 적신 피가 자신의 것이 아님을 깨닫고는 미동도 없이 누워 있는 사내 쪽을 돌아보았다.

쓰러진 사내의 목덜미에는 꿩깃이 달린 작은 화살이 박혀 있었다. 그제야 의진은 화살을 맞은 그가 자기 위로 쓰러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겁에 질린 눈으로 복면이 반쯤 벗겨진 사내의 얼굴을 확인한 의진은 처음 보는 낯선 얼굴에 미간을 좁혔다.

‘일면식도 없는 사내인데 왜 나를 죽이려 했을까?’

방문 너머 화살이 날아온 방향을 확인하던 의진은 불현듯 스치는 생각에 얼른 구석으로 몸을 붙였다. 창호지가 덜덜 소리를 낼 정도로 거센 바람을 뚫고 사내의 목덜미에 화살을 꽂아 넣을 실력이라면 고수도 보통의 고수는 아닐 터였다.

‘활을 쏜 자는 누구지? 아버지였다면 벌써 나를 구하러 오셨을 텐데?’

생각하던 의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아버지가 활을 쏘신 게 아니라면 아버지는 어디 계신 거지?’

당장이라도 방을 뛰쳐나갈 기세로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의진은 걸음을 옮기지 못했다. 화살을 쏜 자가 자신을 구하려던 것이 아니라면 곧바로 저 사내의 옆자리를 차지할지도 모르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화살을 쏜 자는 도대체 누구인가? 그자는 나를 도운 것인가, 아니면 나를 노린 것인가?’

생각에 생각을 거듭해보았지만 지금 이 상황이 전혀 이해조차 되지 않는데 그걸 어떻게 알아낼 수 있을까. 게다가 아버지가 위험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그녀는 결국 방을 나섰다.

목덜미로 파고드는 차가운 새벽공기보다 누군가 자신을 겨누고 있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머리끝이 쭈뼛쭈뼛 솟아오른 의진은 이를 악물고 사랑채를 향해 내달렸다.

하지만 치렁치렁한 혼례복 치마를 입고 진창이 된 마당을 뛰기는 쉽지 않았다. 두 번이나 크게 넘어진 의진은 걸을 때마다 날카로운 통증이 파고드는 발목을 끌고 간신히 사랑채에 도착했다.

“아버지! 안에 계세요?”

활짝 열린 방문에 불길함을 느끼며 방 안으로 들어가자 어둠 속에서 난장판이 된 방이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방 어디에서도 아버지를 찾지 못한 그녀는 다시 마당으로 돌아왔다.

“어디 계세요!”

갑자기 밀려드는 두려움에 아버지를 부르는 목소리에 울음이 섞여들었다. 쏟아지는 눈물을 소매로 훔치며 의진은 사랑채 뒤쪽에 있는 아버지의 작업실로 향했다.

반쯤 열린 작업실의 문을 조심스레 밀자 어두운 바닥에 누운 사람의 형체가 눈에 들어왔다. 아버지 하길윤이었다.

“아버지!”

방과 마찬가지로 엉망진창이 된 작업실 바닥에 쓰러져 있는 아버지에게로 달려간 의진은 아직 온기가 남은 그를 세차게 흔들었다. 하지만 바닥이 흥건할 정도로 피를 흘린 그는 이미 축 늘어진 채였다.

“아버지! 일어나 보세요! 아버지!”

한참이나 아버지를 흔들던 의진의 눈에서는 마침내 체념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하지만 그 순간 밖에서 들려오는 낯선 사내의 소리에 그녀는 숨을 죽였다.

#02. 부녀

3년 전 한양 북촌.

방에 들어온 의진은 보료 위에 앉아 치마를 걷어 올렸다. 하얀 종아리 위로 선명한 회초리 자국에서 드문드문 피가 배어 나오자 그녀의 눈에서도 눈물이 방울져 떨어졌다.

10년 전, 처와 사별한 길윤은 하나밖에 없는 딸 의진을 유모 오 씨에게 맡기고는 나 몰라라 방치했다. 그 탓에 담대해진 오 씨가 사사건건 의진을 괴롭히기 시작하자 견디다 못한 그녀는 몇 번이나 아버지를 찾아갔다. 하지만 그때마다 돌아오는 대답은 오 씨가 다 너를 위해서 그러는 것이니 잘 따르라는 말뿐이었다.

이에 더해 몇 년 전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의 벼슬을 내려놓은 길윤이 전국 각지를 떠돌며 몇 달씩 집을 비우자 오 씨의 방자함은 극에 달했고 급기야 오늘은 의진에게 회초리까지 든 것이었다.

도를 넘어도 한참 넘은 유모의 만행에 의진은 이를 갈았다. 하지만 집안 하인 중 자신의 편은 오직 몸종 월이와 힘없는 행랑아범뿐이었다.

베갯잇을 눈물로 적시다 깜빡 잠이 든 의진은 몸종 월이가 부르는 소리에 눈을 떴다.

“아씨! 어서 일어나 보세요! 어르신께서 돌아오셨어요!”

“아버지께서?”

부스스 자리에서 일어난 의진에게로 달려온 월이는 어두워진 방에 불을 밝혔다.

“드디어 기회가 왔어요! 얼른 가셔서 그동안 있었던 일을 모두 말씀드리세요. 아씨 종아리를 보시면 당장에 오 씨를 쫓아내실 거예요.”

이를 바득바득 가는 월이가 의진의 흐트러진 머리를 야무지게 빗기는 동안 그녀 역시 경대에 비친 제 얼굴을 보며 단단히 의지를 다졌다.

아무리 오 씨 편만 드는 아버지라지만 붉은 자국이 선명한 종아리를 보시면 제 말을 믿어주실 것이다. 사랑방으로 가는 내내 몇 번이고 할 말을 되뇐 의진은 당장 억울한 심사를 토해낼 기세로 방에 들어갔다.

하지만 오랜만에 마주한 아버지는 부쩍 노쇠해 보였다. 푹 팬 볼과 눈가의 주름골마다 등잔불이 만든 그림자가 짙게 내려앉은 모습을 보니 목구멍까지 차올랐던 말이 쏙 들어간 의진은 얌전히 자리에 앉았다.

마주 앉은 딸을 말없이 바라보던 길윤은 서안 위에 올린 두 손을 몇 번이나 비비듯 마주 잡았다. 굳은살과 거친 살가죽이 맞부딪히는 작은 소음이 짧게 이어지는가 싶더니 마침내 그가 입을 열었다.

“너도 이제 다 컸으니 시집을 가야겠구나.”

생각지도 못한 말에 의진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그러자 어색하게 미소를 지은 길윤이 덧붙였다.

“마침 너를 며느리로 맞이하고 싶다는 집안이 있다. 네가 혼인을 하면……. 나는 고향 산에 가서 생활할 생각이다.”

고향 산이라면 창례현에 자리한 지모산을 말하는 것이었다. 자신을 늘 짐처럼 여기시더니 이번에는 아예 남의 집에 넘기고 후련하게 떠날 심산인 모양이었다. 그동안 꾹꾹 눌러왔던 서운함이 터진 의진은 떨리는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혼인 따위 필요 없습니다. 저는 신경 쓰지 마시고 당장 내일이라도 떠나시지요. 늘 그렇게 해오시지 않았습니까!”

성난 눈을 치켜떴던 길윤은 딸의 눈에 맺힌 눈물이 뺨을 타고 길게 떨어지는 것을 보고는 체념하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더니 무언가를 생각하는지 서안 위에 올린 두 손으로 깍지를 꼈다가 풀기를 한참이나 반복하다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만일 나와 함께 간다면 혼례는 고사하고 여염집 아낙들보다 더 힘든 생활을 해야 하는데, 그래도 괜찮겠느냐?”

뜻밖의 제안에 의진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는 스스로 생각해도 터무니없는 물음이라는 듯 짧은 헛웃음과 함께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의진은 오히려 눈을 빛내며 물었다.

“누구와 가는 것입니까?”

딸을 보며 잠시 망설이던 길윤이 대답했다.

“너와 나. 단둘이서 가는 것이다.”

단둘이라는 말에 의진은 자기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버지와는 늘 어색했다. 게다가 어머니를 여읜 어린 의진을 모진 유모에게 던져두고 이제껏 나 몰라라 한 것에 대한 원망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혼례도, 홀로 한양에 남겨지는 것도 싫은 그녀에게 지모산은 나름 괜찮은 선택이었다.

“예. 가겠습니다.”

인생의 향방이 걸린 중요한 문제인데도 너무 쉽게 대답하는 의진이 못 미더운 길윤은 훈계하듯 덧붙였다.

“신중하게 생각해서 결정하거라.”

“이미 결정하였고 번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단호한 목소리에 길윤은 말없이 딸을 바라보았다.

그 이후로도 길윤은 몇 번이나 생각에 변화가 없는지 물었다. 그리고 그녀가 다섯 번째로 같은 답을 내놓자 그는 마침내 세간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지모산으로 떠나는 날이 되어 길윤과 행랑아범이 짐을 챙기는 사이 의진은 안채에서 여종들과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패물을 하나씩 건네며 아쉬운 이별의 정을 나누던 그녀는 여종들을 모두 물리고 오 씨와 단둘이 마주 앉았다.

오 씨는 본래 남편과 사별한 과부로 노비의 신분이 아니었기 때문에 따로 갈 곳을 정해줄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일을 하지 않으면 생계를 꾸릴 수 없는 오 씨는 하 씨 부녀가 한양을 떠날 것이라는 소식을 듣자마자 발 빠르게 움직였고, 예문관 직제학 댁 보양부인 자리를 얻는 데 성공했다.

유모를 할 수 있는 나이가 훌쩍 지났음에도 직제학의 자녀들을 돌보고 교육하는 역할을 맡을 수 있었던 것은 성균관 대사성의 여식인 의진의 예절 교육을 전담했다는 경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돌아가신 어머니의 옷을 버젓이 입고 있는 오 씨를 빤히 바라보던 의진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동안 수고 많으셨습니다.”

혹시나 의진이 앙심을 품었을까 봐 염려하던 오 씨는 그제야 긴장을 풀고 점잖은 척 자세를 고쳐 앉았다.

“고맙구나. 의진이 너도 내 가르침을 잊지 말고 행동거지를 바르게 하고 여인으로서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행해야 한다.”

훈계하듯 이어지는 말에 의진은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예문관 직제학 댁으로 간다고 들었습니다.”

“며칠이라도 쉴까 했는데 어찌나 애걸복걸하던지……. 내일부터 그 댁 아이들을 돌보게 되었다.”

손끝으로 머리를 매만지는 그녀의 목소리에는 허세가 가득했다. 그러자 한쪽 입꼬리를 길게 끌어올린 의진이 당부하듯 덧붙였다.

“그 댁에서는 부디 성질을 죽이시지요. 제게 하듯 손찌검이라도 했다가는 아마 큰 사달이 날 것입니다.”

의진의 말에 오 씨는 눈을 매섭게 치켜뜨고서 쏘아붙였다.

“내가 괜히 그랬겠느냐? 지금은 네가 어려서 잘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나중에는 분명 내게 고마워할 것이다.”

“글쎄요. 남의 집 물건에 함부로 손대는 분께 고마워할 날이 올지 모르겠습니다.”

의진의 턱짓으로 오 씨가 입고 있는 옷을 가리키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그녀가 앙칼지게 대꾸했다.

“겨우 이까짓 것 때문에 십 년을 길러준 은혜도 모르고 그런 방자한 말을 하는 것이냐! 네 어미도 이미 죽고 없는데, 내가 좀 입는다고 무엇이 그리 큰 문제란 말이냐!”

오 씨의 말에 의진은 이를 악물고 그녀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애써 화를 가라앉힌 그녀는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 집에서야 문제가 되지 않았지요. 하지만 직제학 댁에서도 괜찮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대답을 마친 의진은 닫힌 방문을 향해 소리를 냈다.

“월아. 문을 열어라.”

의진의 분부를 기다렸다는 듯 문밖에 있던 월이가 문을 활짝 열자 기세등등했던 오 씨의 입에서 놀란 신음이 흘러나왔다. 마루에 직제학 댁 여종이 앉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의 대화를 다 들었는지 어이없는 표정을 한 여종이 오 씨를 빤히 쳐다보자 그녀는 뭔가 변명이라도 할 듯이 여종에게로 달려갔다.

“너는 가서 보고 들은 것을 하나도 빠짐없이 네 상전에게 고하거라.”

의진의 분부에 고개를 조아린 여종이 제 팔을 잡는 오 씨를 뿌리치고 마루에서 내려서자 오 씨는 버선발로 그녀를 따라 나갔다.

허둥대는 오 씨의 뒷모습을 보니 오래된 체증이 내려간 듯 속이 후련해진 의진은 월이와 한참을 웃었다. 하지만 월이는 이내 옷고름으로 눈물을 찍어냈다.

“아씨, 안 가시면 안 돼요?”

대답 대신 월이의 손을 꼭 잡은 의진은 그녀와 함께 대문 쪽으로 걸어갔다. 그러자 모인 하인들 사이로 큰 짐을 어깨에 멘 아버지와 행랑아범이 보였다. 눈물을 훔치는 하인들과의 인사가 길어지자 지모산 근처까지 짐을 나르기로 한 행랑아범이 송구한 듯 입을 열었다.

“어르신, 지금 출발해도 늦습니다.”

“이만 가세.”

길윤이 걸음을 내딛자 월이를 꼭 끌어안았던 의진은 두 사람의 뒤를 따랐다.

장장 엿새 동안 이어진 여정 끝에 지모산 초입에 다다른 부녀는 행랑아범과 아쉬운 작별을 고했다. 그러자 곧바로 어색한 침묵이 두 사람을 에워쌌다.

한참이나 아무 말도 없이 인적 없는 산길을 걷던 의진은 산마루에 그림처럼 넓게 펼쳐진 들판을 발견했다.

“아버지! 저기 좀 보세요!”

의진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에는 작은 초가집이 한 채 서 있었다. 혹여 사람이 있지는 않을까 하는 마음에 걸음을 재촉했던 길윤은 이내 실망한 듯 멈춰 섰다. 이미 오래전에 버려졌는지 초가집의 지붕은 한쪽이 무너져 있었고 떨어져 나간 문짝도 마당에 아무렇게나 뒹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마당 한쪽에 멀쩡한 평상이 놓인 것을 본 길윤은 잠시 쉬어갈 요량으로 지게를 내려놓고 그 위에 걸터앉았다. 그러자 그를 따라 평상 모서리에 앉은 의진도 실망한 듯 중얼거렸다.

“빈집이네요.”

의진은 허리에 찬 물통을 입에 가져갔다. 하지만 산에 오르기 전 가득 채워두었던 물병은 어느새 텅 비어있었다. 바싹 마른 입술을 혀로 적시던 그녀는 근처에서 들려오는 물소리에 벌떡 일어나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다 멀지 않은 곳에서 작은 개천을 발견하고는 냉큼 그쪽으로 달려갔다.

땀에 젖은 얼굴을 씻은 후 두 손을 모아 물을 한 모금 마신 의진은 시원하고 청량한 물맛에 빙그레 웃었다. 그러고는 물병에 물을 가득 채워 평상으로 돌아왔다.

“물 좀 드세요.”

의진이 건넨 물을 마신 길윤은 자리에서 일어나 개천을 확인하더니 곧장 집 쪽으로 다가가 주변을 유심히 살피기 시작했다.

“왜 그러세요?”

“많이 낡긴 했어도 기본 뼈대는 쓸 만 하구나.”

“예?”

“지붕도 완전히 무너진 것은 아니고.……. 그리고 무엇보다 물가가 가까워서 밭을 일구기에도 좋겠고……. 여러모로 괜찮구나.”

아버지의 말뜻을 알아챈 의진은 집과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버지의 말대로 고쳐진 집의 모양을 상상하니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그렇네요. 그런데 당장 오늘 잠이라도 자려면 지붕을 먼저 고쳐야겠는데요?”

야무지게 소매를 걷어붙이는 딸이 기가 차는지 너털웃음을 지은 길윤이 손을 내저었다.

“고치는 일은 내가 할 테니 너는 밥을 하여라. 벌써 끼니때가 지났구나.”

말을 마친 길윤은 날쌔게 지붕으로 올라가 망가진 곳을 살피기 시작했다.

한참 후 어둑어둑해진 마당 평상에 마주 앉은 두 사람은 모닥불을 등불 삼아 밥을 먹었다.

설익은 밥에 장아찌를 곁들인 식사 내내 어색한 침묵이 이어졌지만, 의진은 아버지를 따라 산에 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나 평상에 나란히 앉아 쏟아질 듯 무수한 별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아버지의 존재가 처음으로 친근하고 든든하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