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그게 끝이야.”

허탈한 듯 내뱉고는 스트로를 쥐고 음료를 마시는 은빈을 세희가 어이없이 쳐다보았다.

“그러니까, 요약하자면, 그 맞선남이 네 배경 때문에 맞장구를 쳐주는 줄 알고 기분이 나빴다가, 결국엔 그 남자한테 퇴짜 맞고 끝났다고?”

세희가 지금까지 은빈이 들려주었던 구구절절한 맞선 사연을 단 한 줄로 명쾌하게 요약을 해버렸다.

박은빈과 한세희는 오랜 친구이자, 가족과는 같은 친한 사이다. 세희가 대학에 들어와 방황하며 혼자 놀던 때, 조용히 다가와 준 친구가 바로 은빈이었다. 은빈의 아버지는 자주 신문에 오르내리는 유명 로펌의 대표였고, 어머니는 은빈과 세희가 나온 한국대 로스쿨에서 학과장으로 현재 재직하고 있었다. 이렇게 대단한 부모에게는 세 명의 딸이 있다. 어렸을 때부터 영재로 불리며 줄곧 수석의 자리를 놓치지 않던 첫째. 그녀는 현재 서울중앙지방법원 검사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다. 그리고, 맏언니만큼은 아니어도 못지않게 영특하던 막내는 작년에 한국대 로스쿨에 진학해 미래 법조인으로서 열심히 공부하는 중이다. 그런 그 둘 사이에 지극히 평범한 국문학과 출신의 대학원생 박은빈이 존재했다.

이런 은빈에게 부모님은 아버지 로펌에서 잘나가는 변호사 한 명을 최근에 소개해주셨다. 은빈은 하는 수없이 맞선이란 이름으로 그 자리에 나가야만 했다. 그렇게 만난 남자는 초반엔 말도 안되는 공통점으로 은빈의 호감을 사려고 노력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결국엔 그녀의 화려한 집안 배경에 자신은 어울리지 않는다며 미안하다고, 더는 만날 수 없을 거 같다고 사과를 했단다. 결국 그 둘의 만남은 그것으로 끝이 났고, 은빈은 아직도 여전히 찜찜한 기분이 든다며 세희를 학교 근처로 불러냈다.

“콜록, 콜록, 야! 퇴짜라고?”

은빈은 세희의 말에 놀라 사래가 걸렸다.

“그렇지, 결국엔. 네가 차인 거잖아?”

세희가 자기 쪽에 있던 냅킨을 조용히 집어 은빈에게 내밀며 말했다.

“아, 그걸 몰랐네. 나는 여태 왜 이렇게 뒤가 찜찜한가… 했네. 바보네.”

믿었던 친구의 지나치게 객관적인 말에 은빈이 처음엔 놀랐다가 이어 탄식이 흘러 나왔다.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자책하는 귀여운 친구의 모습에 세희는 간신히 참고 있던 웃음이 터져버렸다.

“푸하하. 아, 내가 박은빈이 때문에 못살겠다. 너 진짜 웃겨.”

세희는 은빈이를 처음 대학 신입생 때 만나 지금까지 친구라는 이름으로 7년을 함께해오고 있었다.

‘왜 스무 살에 뒤늦게 만났을까. 더 일찍 왜 우리는 만나지 못했을까.’

내내 아쉬워할 만큼 세희와 은빈은 서로 너무나도 각별했다. 마음에 있는 이야기, 살아온 이야기, 함들고 고통스러웠던 과거의 이야기, 행복하고 웃긴 현실에서의 이야기, 앞으로 하고 싶은 꿈, 앞으로 되고 싶은 소망, 이 모든 것들을 둘이서 끊임없이 공유했다. 세희의 다소 까칠한 성격을 포근함으로 감싸주는 친구. 세희의 베베 꼬인 마음을 반대로 돌려 금세 풀어버릴 수 있는 친구. 유일하게 세희가 맘 놓고 편히 마주하고 웃을 수 있는 그런 마음 편한 친구. 은빈은 세희에게 그런 존재다. 그런 은빈이가 세희는 늘 좋기만 했다.

“하하하.”

세희의 터져버린 웃음에 은빈도 처음엔 눈을 흘겼다가 못 참겠다는 듯 같이 따라 웃었다.

그 둘은 그렇게 한참을 마주 보고 웃었고, 그 웃음에 세희는 은빈이 느꼈다던 희한하고 복잡했다던 미묘한 감정들이 얼마쯤은 날아가 버릴 수 있기를 바랐다.

“그나저나 너 이번 일로 부모님께 엄청 깨졌겠다?”

간신히 웃음을 정리하고, 햄버거를 먹으며 세희가 은빈에게 물었다.

“응. 아빠는 괜찮다고 하시는데, 엄마한테 좀… 많이 꾸중을 들었지. 난 늘 그렇잖아.”

‘엄마’라는 단어에 늘 자신도 모르게 주눅이 드는 친구. 그 모습을 곁에서 무려 7년이나 봐왔지만, 항상 그녀는 그런 은빈의 말과 태도가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세희는 문득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함께 갈 곳이 생각났다.

“자, 얼른 먹고 일어나. 내가 오늘 네 기분 화끈하게 풀어 줄게. 부모님 여행 가셨다며?”

“어, 아빠는 출장, 엄마는 학회를 핑계로 두 분이서 같이 파리 가셨어.”

예정에 없던 세희의 갑작스런 제안에 처음에는 어리둥절하던 은빈은 어느새 입가에 미소가 걸려있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자유로움. 그리고 그 자유가 주는 홀가분함이 아니었을까.

“어쨌든지 간에… 오늘 하루는 늦게 들어가도 뭐라고 할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게 중요한 거야. 자, 빨리 먹자. 내가 물 좋은 데 데려가 줄게. 너 기절할 거야, 오늘 밤.”

세희는 말을 마치고 웃으며 남아있던 햄버거를 야무지게 먹기 시작했다. 은빈도 세희의 말에 기분이 조금은 풀렸는지, 햄버거를 들고 크게 한 입 베어 문다. 곁눈질로 그런 친구를 보며 세희는 마음이 놓였다. 일탈을 밥 먹듯이 하는 그녀와는 다르게 은빈의 오늘 저녁 짧은 일탈은 분명 은빈에게 신선한 전환점이 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

금요일 늦은 저녁, 화려한 조명들을 헤치고 택시 한 대가 다가와 멈췄다. 서울 시내에서 가장 땅값이 비싸다고 소문난 강남 한복판에 자리한 특급 호텔 1층 입구.

“여기야.”

도착한 택시 뒷좌석의 문이 열리고 세희가 먼저 내리며 은빈에게 말했다.

이런 호텔에 오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는지 은빈은 어색하게 세희를 따라 택시에서 내렸다. 그러고는 처음 와 본 이곳저곳을 신기한 듯 둘러보기 시작했다. 그런 은빈이 귀여워 세희는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여기 얼마 전에 인테리어 싹 뜯어고쳐서 확 달라졌거든. 제일 꼭대기 층에 루프탑 바가 있는데, 거기는 진짜 엄청나. 사실 예전에는 좀 별로였는데, 주인이 바뀐 거 같더라고. 아무튼 요즘 젊은 사람들 사이에서 엄청 핫하다고 소문이 자자해서 나도 같이 일하는 애들이랑 몇 번 와봤어. 너도 좋아할 거야.”

세희의 긴 설명을 들으며 은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휘황찬란한 불빛을 받으며 자동회전문을 통과한 후 눈앞에 펼쳐진 파노라마 광경을 마주하자 옆에서 걷던 은빈이 입을 쩍 벌린다.

“이 언니가 오늘 쏜다. 돈 걱정 말고 맘껏 마셔. 집에 무사히, 얌전히, 바래다줄 테니까.”

세희는 만들어진 멜로디에 글을 덧붙이는 작사가다. 대학 때부터 죽어라 쓴 소설로는 공모전 문턱도 못 뚫고 들어가더니, 재미삼아 낸 작사가 공모전에서는 생각지도 않게 떡하니 입상을 해버렸다. 그것을 인연으로 그녀는 지금까지 4년 동안 여러 곡을 썼고, 나름 안타는 치는 작사가로 밥벌이는 충분히 하고 있는 중이다. 이런 세희가 오늘 밤 친구 은빈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한턱 크게 쏠 예정이었다.

“너도 이런 날이 있어야지. 맨날 그렇게 조선 시대 통금령 내린 집구석에서 어떻게 살아?”

“숨만 간신히 쉬고?”

밤 9시. 은빈의 통금 시간이다. 요즘 같은 시대에도 ‘통금’이 있냐고? 아마 믿기 어렵겠지만 있다. 지나치게 보수적인 은빈의 집안. 그리고 그 통금을 목숨처럼 지키는 사람이 세상에 존재했다. 박은빈이란 이름으로.

‘8시 신데렐라.’

언제 어디서든 저녁 8시면 집에 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야 했던 은빈에게 대학 동기들이 붙여 준 별명이었다.

세희의 과격한 물음에 픽 웃던 은빈이 웬일로 맞장구를 쳐왔다. 그런 은빈의 반응에 세희는 더 용기가 났다. 세희는 이해한다고 ‘씩’ 웃어 보이며 친구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불쌍한 것. 오늘은 이 언니만 믿어.”

세희가 ‘씩’ 웃어 보이며 은빈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 순간, 호기 있게 뱉어놓은 말 속으로 청량한 종소리가 ‘땡!’하고 들려온다.

화려한 무늬가 새겨진 엘리베이터 문이 ‘드르륵’ 소리에 맞춰 활짝 열렸다. 그와 동시에 세희와 함께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서려 발걸음을 떼던 은빈은 누군가를 보고 멈칫한다. 자동으로 세희 역시도 은빈의 놀란 시선을 따라 고개를 올렸다.

광택이 자리한 검은 구두, 깔끔한 블랙 슈트, 그리고 남자.

엘리베이터 뒤쪽 구석에 서 있던 남자는 상당히 키가 컸다. 잘생긴 이목구비가 멀리서도 시선을 끌었다. 역시나 남자도 세희와 함께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서려던 은빈을 단박에 알아본 모양인지 놀라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아, 저 남자구나.’

그 순간, 세희의 매서운 촉이 ON 스위치를 켜고 작동을 시작했다. 단박에 그녀는 직감할 수 있었다. 은빈의 발걸음을 멈춰 세운 저 남자가 바로 오늘 그들이 열심히 햄버거를 먹으며 뒷담화한 맞선 속 주인공임을. 예사롭지 않은 인연이었다.

은빈은 차마 남자를 못 본 척할 순 없는지 예의를 차려 그를 향해 가볍게 고개 인사를 했다. 남자 역시도 그런 은빈을 보고 놀라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남자가 미처 고개를 들기 전, 그녀는 새침하게 그를 등지고 돌아서 버렸다.

‘요놈 봐라.’

세희는 은빈을 향해 눈을 가늘게 떴다. 평소 그녀의 모습과는 어딘지 많이 달라 보였다. 세희 역시도 그런 은빈을 따라 몸을 돌린 후 엘리베이터 문을 보고 서 있게 되었다. 엘리베이터 문에 반사되어 얼핏얼핏 비쳐오는 남자에게 세희는 슬쩍슬쩍 호기심 어린 시선을 보냈다.

가만히 은빈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서 있는 남자.

손에 든 휴대전화를 들여다보는 척하며 힐끔거려도 될 텐데, 남자는 지나치게 솔직한 시선으로 은빈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런 그의 모습이 사실 세희의 마음에 쏙 들었다.

‘땡!’

순식간에 최상층으로 올라온 엘리베이터가 위아래로 작게 출렁거리더니 멈췄다.

‘드르륵!’

그들의 앞을 가로막고 서 있던 문이 동시에 양옆으로 사라져버렸다. 은빈은 이때만을 기다렸던 사람처럼 급하게 엘리베이터 밖으로 나섰다. 그녀는 누군가로부터 도망치고 싶은 급한 마음을 숨김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모르면서 무턱대고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기는 그녀를 따라 걸으며 세희는 웃음을 꾹 참아야 했다. 그러다 결국 세희는 궁금함을 못 참고 은빈에게 고개를 숙여 작은 소리로 물었다.

“아는 사람?”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거리며 세희를 향하던 은빈의 얼굴이 순간 얼음조각상처럼 굳어버린다.

“으익!”

외마디 비명을 내지른 은빈을 보며 세희는 대낮에 귀신을 봐도 이토록 놀라진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순식간에 하얗게 질린 그녀의 얼굴을 보다가 은빈이 머문 시선을 따라 세희가 고개를 돌렸다. 엘리베이터에서 본 남자가 어느새 옆에 와 장승처럼 서 있었다.

“은빈 씨?”

남자의 미소는 훌륭했다. 목소리는 다정했고, 몸가짐은 예의를 갖추고 있었다.

“안녕… 하세요?”

마지못해 어색한 듯 은빈이가 남자를 향해 인사했다.

“여기서 또 뵙네요?”

반갑다고 인사를 건네오는 남자를 세희는 위아래로 슬며시 훑어보았다. 예의가 아닌 줄 알면서도 은빈과 처음 선이란 걸 본 남자가 세희는 몹시도 궁금했다.

“여기 바에 오시나 봐요?”

세희가 ‘픽’ 웃음이 새어져 나오려는 걸 입술을 안으로 말고 간신히 참았다.

사실, 이 호텔 층에는 오로지 이 바만 있다. 예의로다가 떠본다고 쳐도 의도가 다분히 담긴 물음이라고 세희는 생각했다. 예를 들자면, 조금 더 말을 나누고 싶다거나, 대답할 사람의 목소리를 더 듣고 싶은….

“아, 네. 친구랑요.”

은빈은 대답 끝에 눈길을 세희에게로 보냈다. 세희는 고개를 슬쩍 숙였다가 들며 가볍게 남자를 향해 인사를 했다. 은빈이 눈에 띄게 당황한 게 세희 눈에 보여서 차마 정식으로 소개해 달라 말할 수는 없었다. 세희의 가벼운 고개 인사에 은빈의 맞선남 역시도 고개를 숙이며 정중히 인사를 해왔다. 하지만, 이내 시선은 다시 은빈에게로 금세 돌아가 버린다.

“네. 저도 친구랑 약속이 있어서요.”

“아, 네. 들어가 보세요.”

은빈은 그의 말에 들어가라는 손짓까지 해가며 이 우연한 만남을 단칼에 마무리하고 있었다.

사실 세희는 무척이나 궁금했다. 은빈이 묻지도 않은 말에 여러 번 사족을 붙이고 있던 남자는 낯선 곳에서 은빈을 만나 이토록 반가운 걸까. 아니면 은빈을 이렇게 다시 만나 또 다른 무언가를 기대하고 있는 걸까.

“네, 재밌게 놀다 가세요.”

세희는 마음 같아선 함께 놀자고 하고 싶었다. 하지만, 남자가 먼저 고개를 끄덕하고는 그녀와 은빈을 비켜 걸어갔다. 은빈은 그저 발끝을 내려다보며 고개를 숙이고 있었고, 세희 역시도 어정쩡하게 서 있다가 그의 인사를 받았다.

“휴!”

그때, 세희 옆에서 들려오는 한숨 소리. 보통 때도 한 소심하면 박은빈이었다. 그런 그녀가 이렇게 예고도 없이 맞선 본 남자를 맞닥뜨리게 된 상황에서 졸도하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었다.

“맞선 본 그 이서진 씨.”

“죽인다, 야!”

즉시 흘러나오는 감탄사에 조용히 좀 하라며 쿡 옆구리를 찌르는 은빈을 보고 세희가 혼자 킥킥 웃었다.

요즘 들어 세희에게 일어난 가장 재미난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정말 오늘 밤, 세희는 은빈을 기절시킬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다만, 약속한 대로 얌전히, 무사히, 집까지 그녀가 데려다줄 수 있을지는 솔직히 장담하기가 어려워졌다.

“들어가자.”

세희가 바 입구를 향해 발걸음을 막 떼려 하자, 은빈이 갑자기 그녀를 막아섰다.

“우리 그냥 다른 데 가면 안 돼?”

“어, 안 돼. 오늘 우리는 여기서 뼈를 묻을 거거든. 각오해.”

걱정스러워하는 은빈의 팔을 세희는 억지로 잡아 끌며 바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뒤에서 어쩔 수 없이 끌려오고 있는 친구를 힐끔 보며 그 순간 세희는 다짐이란 걸 하나 했다.

‘오늘 밤 나는 박은빈의 친구 한세희가 아니라, 박은빈의 사랑을 연결시켜 줄 큐피드가 되어야겠다!’고.

#<2>

“인연인가 봐, 너랑 저 남자.”

세희는 말을 꺼내면서 인연도 보통 인연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아마 옆에 앉은 은빈도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지 몰랐다. 그리고 저쪽 구석에 위치한 테이블에 친구와 마주 보고 앉아있는 은빈의 맞선남, 서진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것만 같았다.

“한세희! 그 사람 좀 그만 봐. 너 자꾸만 그 사람 신경 쓰고 그러면 나 갈래.”

“아, 진짜. 알았어. 계집애. 성질머리하고는… 알았다고. 그나저나 저 남자 너무 괜찮다, 야!”

세희는 평소 그녀답지 않게 불안해하다 결국 폭발하는 은빈을 진정시키려고 말을 돌렸다. 역시나 은빈의 고개가 칵테일을 들어 마시는 척하며 자연스럽게 서진이 앉은 쪽으로 돌아갔다. 그럴 거면서 큰소리는. 세희는 새어 나오려는 웃음을 간신히 참고, 맥주병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맞선 날이랑 크게 달라진 건 없어 보이는데?”

“와, 너 웃긴다? 네 남자 말고… 그 앞에 앉은 남자 말이야. 저 남자가 솔직히 네 남자보다 훨씬 분위기 있지 않아?”

“….”

세희는 일부러 은빈을 향해 슬며시 낚싯바늘을 던지고 그녀의 본심이 슬쩍 걸려오길 바라며 그녀를 자극했다. 하지만, 은빈은 입을 꾹 다물고 말이 없어졌다.

“와, 그래도 지 남자라고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나 봐?”

“내 남자 아니라고… 이제 끝난 일이라고… 대체 몇 번을 말해?”

은빈은 붉은 뺨과 귀를 하고서 발끈하며 놀리는 세희를 무섭게 째려봤다. 그런 은빈의 모습을 보던 세희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걱정 마. 이 언닌 화장실 좀 다녀올 테니까. 자리 잘 지키고 있어. 도망가지 말고… 알았지?”

세희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더없이 흔들리는 눈빛으로 불안해하는 은빈을 최대한 안심시키며 그녀는 천천히 화장실로 향했다.

‘일단은 무턱대고 들이대 보자!’

결국 세희는 뻔뻔해지기로 했다. 이럴만한 대책도 없었고, 구체적인 계획도 없었지만, 남녀 사이에서 그녀가 해야 할 일들을 하나부터 열까지 나열한다고 해도 딱딱 맞게 실천되리란 보장은 늘 제로에 가까웠다. 그러니 일단 서진에게 아는 척을 해보고, 슬쩍 남자를 먼저 떠보는 것이 가장 빠른 지름길이란 생각이 들었다.

“자, 큐피드가 될 차례네, 이제.”

세면대에서 손을 씻으며 세희는 거울 속 자신에게 용기를 주며 혼자 중얼거렸다. 모르는 남자에게 먼저 다가간 적이 솔직히 처음은 아니었지만, 자주 있는 일도 아니었다. 뻔스러운 큐피드에게도 용기란 것이 필요한 밤이었다.

***

“오래 기다렸어?”

서진은 미리 와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남자에게 인사를 건네고는 맞은편에 자리했다.

“아니야.”

남자는 들여다보던 휴대전화를 슬쩍 한쪽으로 밀어 놓고는 먼저 친구의 안색부터 살폈다.

이석훈. 서진과는 고등학교 동창이었고, 학창 시절 농구부와 학생회 간부를 함께하면서 둘은 친해지게 되었다. 서진은 문과에서 늘 전교 1등, 전국에서도 열 손가락 안에 들던 수재였다. 그런 그에 반해 석훈은 공부를 좀 하면 1등, 하지 않고 놀거나 방황하면 10등 밖으로도 심심치 않게 밀려나 선생님들의 애를 먹이던 학생이었다. 까탈스럽고 차갑기로 소문난 석훈의 성격을 다정다감하고 유한 서진이 편히 받아주면서 석훈은 그런 서진을 누구보다 믿고 의지하게 되었다. 그렇게 둘은 나란히 한국대에 합격했고, 서로 전공은 달랐지만, 대학 생활 내내 거의 함께하다시피 했다.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을 곁에 머물다 보니 석훈도, 서진도, 가장 친한 친구로 서로를 떼어놓고는 생각할 수가 없었다. 대학 졸업 후, 서진은 전액 장학금을 받고 로스쿨에 진학해 현재 수로펌 변호사로 밥벌이를 하는 중이었고, 석훈은 석사를 마치고, 박사 논문 마무리 단계를 거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