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빵!’

자동차 경적에 세희는 휴대전화를 들여다보던 시선을 들어 소리가 나는 곳을 돌아봤다. 낯선 차가 다가와 멈췄다.

“세희 씨, 타세요!”

운전석도, 조수석도 아닌 뒷좌석 창문이 열리더니 서진이 세희를 부르고 손을 흔들었다. ‘택시는 아닌 듯한데….’하며 운전석을 아무렇지 않게 바라보던 그녀가 놀랐다. 만나서 반가울 일이 별로 없을 남자. 아니, 만나면 늘 한동안 정신을 못 차리고 헤매게 되는 남자. 지난번 학교 주차장에서 그렇게 헤어지고도 지금까지 불쑥불쑥 그의 얼굴이 생각나 한숨이 지어지곤 하는데, 이렇게 예상치 못한 곳에서의 만남은 반가움보다는 두려움이 앞선다.

‘이제 더는 만나지 말죠, 이석훈 씨. 서로 재수 없으니까.’

그 말이 마지막 말이 될 줄 알았는데, 이렇게 다시 그를 만나 버리고 말았다. 세희는 잠시 고민이란 걸 했다. 그러다 차 안에 앉아있는 따가운 눈빛의 석훈과 긴장한 서진을 번갈아 보고는 어쩔 수 없이 조수석으로 몸을 실었다.

“석훈이 녀석도 오늘 학교에 나온다고 해서요.”

서진이 뒷좌석에서 앞에 앉은 세희와 운전하는 석훈의 눈치를 번갈아보며 고생을 하고 있었다.

“네.”

세희는 석훈 쪽으로 몸을 돌리기 싫어서 일부러 자동차 사이드 미러로 서진을 보며 대답했다. 그녀의 왼쪽 옆으로 계속해서 그의 시선이 와 닿는 게 느껴졌지만 애써 모른 척 넘어가기로 한다. 그저 그를 투명인간으로 취급하면 조금 덜 헤매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어디로 가야 합니까?”

무뚝뚝하고 차가운 석훈의 물음이 차 안을 채운다.

“한국아파트 G동이요.”

세희는 안전벨트를 풀며 대답했다. ‘거기 근처에 공용 주차장이 있어요.’라는 말을 덧붙이려다 말았다. 어차피 이쪽 지리는 오래 학교에 다닌 그가 더 잘 알고 있을 테니까. 만에 하나 모른다고 해도 일단 아파트 근처에 가서 알려줘도 될 일이었다. 세희의 말에 석훈은 차를 천천히 출발시켰다.

세희가 처음 타 보는 그의 차는 딱 그를 닮았다. 자동차 실내 액세서리 하나 없이 단정한 모습. 그 흔한 방향제도 하나 없었지만, 좋은 냄새가 나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근처에 마트 있으면 좀 들러서 뭐라도 사갈까요, 우리?”

사이드 미러로 서진만을 바라보며 세희가 물었다.

오늘 세희와 서진은 은빈의 집들이에 가기로 했다. 은빈이 이사하고 한동안은 시험이네 뭐네 하며 정신없이 살다가 이제야 조금 정신이 돌아왔다고 해서 세희는 불쑥 ‘그럼 집들이 좀 하자!’고 했다. 당연히 은빈은 세희만 오는 줄 알고 흔쾌히 그러자고 했고, 그런 은빈 몰래 서진에게 함께 가자고 연락을 했다. 그녀의 문자 연락에 서진은 곧 그러겠다고 해서 오늘 학교 근처에서 만나 함께 가기로 약속을 했던 참이었다. 이렇게 예상치 못한 인물과 전혀 계획에 없던 차까지 얻어 타고 가게 될 줄은 모르고서. 그저 ‘서진 씨를 만나 근처 마트에서 휴지라도 사서 가야지’하며 넋 놓고 기다리던 참이라 세희는 문득 빈손이 걸렸다.

“아… 아, 네. 근데 저희 둘이 오기 전에 이것저것 좀 사긴 했어요.”

당황한 서진의 대답에 세희는 사이드미러에서 시선을 거두고, 조수석 왼쪽, 석훈이 있는 운전석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천천히 뒤에 앉은 서진을 한번 보며 반갑게 미소를 짓고, 옆에 다소곳하게 자리한 선물들을 살폈다. 휴지, 세제, 비누. 그 흔하디흔하다는 집들이 선물에 커다란 과일 바구니까지. 남자 둘이서 오랜 시간 고민했겠다 싶어 세희는 문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잘하셨네요. 돈 굳었다.”

세희는 칭찬으로 시작해 혼잣말처럼 마무리하고는 몸을 바로 했다. 운전하던 석훈의 시선이 자주 그녀를 쫓아오는 게 느껴졌지만, 모른 척하며 앞만 보며 갔다. 왜 자꾸 보느냐고 묻기도, 보지 말라고 하기에도 우스웠으니까.

***

‘딩동!’

은빈의 아파트 현관 앞에서 세희가 조심스럽게 벨을 눌렀다. 그녀는 벌써부터 조금 두렵기 시작했다. 은빈에게 앞으로 얼마나 잔소리를 들을지 세희의 가슴이 두근두근한다. 물론 오늘 이 남자들이 있는 곳에서 대놓고 뭐라고 하진 않겠지만, 두고두고 욕먹을 각오는 해야 할 것만 같았다. 혹시라도 은빈이 인터폰으로 내다볼 때, 함께 온 남자들이 보이면 그녀가 문을 안 열어 줄까 봐 세희는 서진과 석훈에게 조금 멀리 떨어져 숨어 있으라고 했다.

‘달칵!’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고, 순간적으로 세희는 더없이 긴장되었다.

“어서 와….”

인터폰으로 세희를 확인하고 반갑게 문을 열던 은빈이 구석에 서 있던 서진과 석훈을 보고는 순간 얼음이 되었다. 많이 놀란 듯 했다.

“안… 녀엉?”

세희는 어정쩡하게 손을 올려 일부러 더 밝게 인사를 하려고 했지만, 당황하고 놀란 은빈을 본 순간 말이 늘어졌다. 은빈의 화들짝 놀란 눈이 곧이어 그녀를 향했고, 세희는 눈을 찡긋하며 어색하게 웃었다.

“어때, 이번엔 좀… 많이 자연스러웠나? 천하의 박은빈이 미리 눈치 못 챌 만큼?”

‘그래, 어차피 이렇게 된 거… 뻔뻔해지기로 하자!’고 세희는 다짐했다. 부디 화가 난 은빈이 다시 문을 쾅 닫고 들어가지 않기만을 바랐다.

“한세희!”

조용하지만 무서운 어조로 은빈이 그녀의 이름을 부르고는 눈을 흘겼다. 어떻게 네가 이럴 수 있냐고 속으로 얼마나 자신을 타박하고 있을지 불 보듯 뻔했다.

“나중에 혼날게. 손님들도 계신데….”

세희는 은빈의 매서운 눈을 보며 억지로 웃고, 또 웃으며 작은 소리로 친구를 향해 용서를 구했다. 조금 풀어진 은빈의 눈매를 본 순간, 몸을 돌려 구석에서 긴장하고 있던 남자들을 향해 말했다.

“자, 들어갈까요?”

그제야 천천히 서진과 석훈이 은빈의 현관문 가까이 다가왔다.

“잘 지냈어요?”

서진의 깊은 눈이 흔들리는 은빈에게로 향하며 다정히 인사를 건넸다. 문득 저런 다정한 안부 인사를 받고 있는 은빈이 세희는 한없이 부러웠다.

“불청객 한 명 더 추가했습니다.”

세희는 은빈에게 하는 석훈의 인사를 들으며 그는 늘 자신에게만 차갑고 싸늘하다고 생각했다. 그나저나 자신이 불청객인 줄은 아나 보다.

“들어오세요. 세희만 오는 줄 알고 청소도 제대로 못 했는데….”

하는 수 없이 문을 열어주고 옆으로 비켜나며 은빈이 들어오라고 했다. 세희는 그녀가 혹시 마음이 바뀌어 변덕이라도 부릴까 봐 냉큼 현관문 안으로 들어서며 호들갑을 떨었다.

“이야. 반짝반짝 광이 나는데, 뭐….”

작고 아담한 아파트였다. 하지만 주인인 은빈과 닮은 공간이었다. 차분하고 아늑했으며 따스하고 정겨웠다. 아직 정리가 덜 되었다고 하더니 깔끔함은 덤이었다. 오랫동안 꿈꿔 온 그녀만의 공간을 가지게 된 이곳에서 은빈은 어떤 꿈을 꾸고,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글을 쓸까 세희는 궁금했다. 둘만 있었다면 차분히 이런저런 걸 묻고 답을 들었겠지만, 두 명의 남자를 사이에 두고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오늘 세희는 큐피드 역할에도 충실해야겠기에 평소보다 더 많이 말하고, 더 많이 웃었다. 어쩌다 불편하게 마주치는 시선에도 저릿한 느낌이 드는 남자를 옆에 두고서.

***

점심을 먹으려고 은빈의 아파트 근처 패스트푸드점에 왔다. 서진이 점심 비용을 계산한다고 해서 세희와 은빈은 나란히 테이블에 먼저 앉아있었다. 그때 주문한 음식이 담긴 트레이를 들고 서진과 석훈이 그녀들이 있던 테이블로 왔고, 두 남자가 같이 나란히 앉으려고 하던 찰나, 세희가 서진을 불렀다.

“여기 앉으세요, 서진 씨.”

그를 일부러 은빈의 옆에 앉히고서 세희는 석훈의 옆에 아무렇지 않게 앉았다. 예전에는 그의 옆에 아무 생각 없이 앉곤 했는데, 이제는 막상 앉고 보니 몹시도 불편했다. 석훈도 마찬가지 감정인 건지 따가운 시선이 칼날처럼 날아들어 세희의 뺨 옆에 꽂혔다.

“집에서 맛있는 거 시켜 먹었어도 되는데….”

자신의 집에 온 손님들에게 은빈은 계속 미안해했다.

“도돌이표니? 몇 번을 말해. 햄버거도 한 번씩 먹어줘야 건강에 도움이 된다고…. 너무 건강한 것만 먹어도 일찍 죽어. 옛날 사람들을 봐. 그렇게 자연식으로 밭에서 풀 뜯어 먹고 살았어도 평균 연령이 얼마나 낮아? 다 이런 햄버거 같은 정크 푸드를 못 먹어서 그런 거라니까.”

세희는 자기가 말해놓고도 이게 무슨 논리인지 정리가 되지 않았다. 안 해도 되는 말까지 주절주절 떠들고 있는 스스로가 한심했다.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있지만, 그의 차에 올라타는 순간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서 1초마다 그가 신경 쓰여 세희는 미칠 것만 같았다. 일부러 석훈을 투명인간 취급도 해보고, 못 들은 척, 못 본 척하며 무시하고 있지만, 그는 서진보다도 은빈보다도 더 눈에 잘 띄고, 어쩌다 그가 조용히 말을 해도 확성기에 대고 말하는 것처럼 그녀의 귀에 또박또박 큰소리로 꽂혀 날아들었다. 세희의 시선은 줄곧 은빈 아니면 서진을 향하는 듯 보였지만, 곁눈질로는 끊임없이 그의 모습을 비굴하게나마 쫓고 있었다. 한순간, 단 한순간도 그의 행동과 몸짓을 놓치지 않으려는 듯.

“맞아요. 자주 먹어도 햄버거는 늘 맛있더라고요.”

세희의 말에 부드럽게 서진이 호응했다. 세희는 서진이 사람을 편안하게 해주는 능력이 있다고 속으로 칭찬했다. 서진은 ‘그렇지 않냐’고 눈빛으로 석훈을 향해 물었다. 그는 서진의 물음에 고개를 한번 끄덕하고는 말이 없었다. 사람을 불편하게 하는 것도 능력이라면 능력인 남자였다.

“그래도….”

모두가 괜찮다고 해도 오늘 집들이의 주인공인 은빈은 여전히 이 식사가 마음에 걸리는 눈치였다.

“휴. 나중에 서진 씨랑 결혼하고 정식으로 집들이하면, 그때 음식도 하고, 술도 내오고, 노래도 부르자. 됐지?”

세희의 말에 모두가 놀라 말없이 서로 눈짓으로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다 서진이 먼저 ‘푹’하고 웃었고, 은빈은 얼굴이 빨갛게 변하더니 친구를 향해 냅다 소리를 질렀다.

“야!”

그런 은빈을 보며 세희는 아무렇지 않게 미소를 짓고 햄버거를 입에 물었다. 지금 그녀의 말에 유일하게 웃지 않는 사람은 옆에 앉아있는 이 남자뿐. 말 같지도 않은 말에 바보처럼 맞장구를 치느니 차라리 딴생각을 하는 게 낫다는 생각인 것만 같았다.

“요즘은 누구 곡 써? 가사 쓰느라 바쁘다고 했잖아?”

은빈이 햄버거를 반쯤 먹고 나서 세희를 향해 물었다. 그와 동시에 일제히 모든 시선이 그녀에게로 단박에 쏟아졌다. 옆에 앉은 석훈까지도.

“아, 있어. 신인… 이번 곡으로 데뷔한대.”

“무슨 내용?”

햄버거를 들어 먹으려던 은빈이 궁금하다는 듯 눈을 빛내며 세희에게 물었다. 세희는 난감했다. 나중에 둘이 있을 때 물어보지, 계집애. 이 자리에서 말하긴 좀 그런데….

“여자가 먼저 좋아한다고 고백하니까 도망가는 덜떨어진 남자를 향한 경고? 욕이라고 봐야 하나?”

픽 웃으며 아무렇지 않게 가사 내용을 들려주던 세희가 문득 옆에 앉아있는 남자가 신경 쓰여 곁눈질로 바라봤다. ‘움찔’하며 남자가 햄버거를 먹다가 놀랐다. 서진과 은빈은 그녀의 이야기에 재밌어서 놀랐다면, 석훈은 정말 진심으로 경악을 금치 못한 것 같았다. 적어도 양심에 찔리긴 하나보다고 세희는 고소해했다. 그러다 그의 고개가 그녀를 향했고, 따가운 눈빛이 그녀의 오른쪽 얼굴에 총알처럼 와서 박히기 시작했다. 그래도 세희는 그런 그의 시선을 애써 신경 쓰지 않는 척했다.

“아니, 왜 여자가 먼저 고백하는데 도망을 가지? 좋지 않나?”

서진은 이미 어느 정도 세희와 석훈의 상황을 눈치채고 있어 일부러 한 번 더 친구를 떠보려 물었다. 그렇게 대놓고 묻던 서진을 바라보는 은빈의 눈빛도 차마 그 대상이 누군지 알겠지만 모른 척할 수밖에 없는 복잡함을 담고 있었다.

“덜 여문 거라고 봐야겠죠, 뭐. 왜 흔히들 사랑받을 자격도 없는 남자라고 하잖아요?”

“그 남자도 나름 사정이란 게 있지 않을까요?”

조용해진 테이블. 모두가 갑작스럽게 놀라 얼음인 상황이 되어버렸다. 골똘히 한동안 생각을 하는 것 같던 남자가 테이블 위로 폭탄을 던졌다. 그 폭탄을 마치 세희는 자신이 정통으로 맞은 것 같단 생각을 했다.

“그 남자의 사정을 여자는 알 이유도, 필요도 없을걸요. 그냥 여자에게 그 남자는 찌질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니까요.”

세희는 마음속에서 응어리졌던 말들을 시원하게 뱉어내고는 아무렇지 않게 햄버거를 다시 먹기 시작했다. 그런 그녀와는 다르게 서진과 은빈은 서로 말없이 둘만의 눈빛 대화를 시작했다. 세희와 석훈 사이에 있을 법한 일들을 자기들만의 언어로 주고받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리고 세희 옆에서 졸지에 찌질이가 되어버린 남자는 돌처럼 굳었다. 그녀는 문득 그에게 의도치 않게 상처를 준 것 같아 조금은 미안해졌다. 구태여 쏟아내지 않아도 될 감정의 찌꺼기였을 뿐인데 말이다.

***

“들어가서 차라도 한잔하고 가세요.”

패스트푸드점에서 점심을 먹고 나온 사람들을 보며 은빈이 권했다. 아무래도 계속해서 집에서 먹지 못한 점심이 내내 마음에 걸리는 눈치였다.

“배불러서 못 먹어. 그럼, 여기서 오늘은 우리 굿바이 할까요?”

세희는 미소를 지으며 은빈을 바라보았고, 바로 시선을 옮겨 서진을 향해 물었다. 옆에 서 있던 석훈의 시선이 친구인 서진에게로 곧장 가서 닿았다. 모두가 서진의 대답을 기다리는 상황이었다. ‘끄덕!’ 하는 서진의 답에 세희는 안도했다. 이제 이 거북한 만남에서 모두가 한꺼번에 자유로울 수 있는 시간이 왔다.

“어떻게 가세요?”

서진과 석훈을 향해 은빈이 다정하게 물었다.

“아, 석훈이 녀석이 오랜만에 차를 가지고 와서, 요 앞 공용 주차장에 있어요.”

그런 서진의 대답에 조금 놀란 눈으로 은빈이 세희를 바라보았다. ‘너도 같이 타고 온 거야’라고 눈으로 묻고 있었다. 세희는 고개를 까딱하며 그렇다고 대답해주었다.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이던 은빈을 향해 서진이 알 수 없는 시선을 보내기 시작했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눈치였다. 세희는 속으로 아마도 고맙다고, 잘 먹고, 잘 놀다 간다는 그런 뻔한 형식적 인사겠거니 했다.

“너 먼저 가.”

서진의 눈은 은빈에게 머물러 있는데, 말은 친구를 향했다. 그런 낯선 서진의 말과 행동을 보던 은빈이 먼저 놀랐고, 그런 은빈을 보다가 세희가 더 놀랐다. 그리고 서진의 말을 들은 당사자인 석훈도 꽤 놀란 듯 했다.

“난, 은빈 씨 바래다주고 갈게.”

세희는 순간 ‘결심’이란 단어가 떠올랐다. 어쩌면 서진이 결단을 내려야 하는 순간을 깨달은 것인지도 몰랐다.

“아니에요. 전 여기서 금방인데…. 석훈 씨랑 같이 가세요, 편히.”

서진의 바래다주겠다는 갑작스러운 제안에 놀란 은빈이 애써 말리며 손을 내저었다. 하지만, 의외로 옆에 서 있던 그는 오늘만큼은 완고해 보였다. 은빈의 만류에 가타부타 별말이 없었다.

“그래, 그럼.”

석훈도 친구인 서진의 결정을 지지해주었다.

“그러지 말고 네가 세희 씨 댁까지 좀 바래다 드려.”

세희가 막 은빈이 잘 데려다 달라고 부탁하려던 참에 서진이 먼저 석훈을 향해 말을 건넸다. 말을 마친 서진의 시선이 이번에는 세희에게로 곧장 날아들었다. 이 상황이 뭘까. 세희는 당황스러웠다. 아니, 정확히는 그런 호의가 부담되고 놀랐다.

“아니에요. 저는 저 앞에서 택시 타면 기본요금이에요. 가까워요. 한 번에 가는 버스도 있고요.”

세희는 한국에 와서 처음 독립한 곳이 학교 근처여서 지금까지 아파트를 여러 차례 옮기면서도 늘 학교에서 멀지 않은 익숙한 동네만 찾아다녔다. 그러다보니 지금 사는 곳도 학교 근처라서 은빈의 아파트에서 가까웠다. 세희의 거절에 가타부타 별말이 없던 석훈의 시선이 못마땅하다는 눈초리로 곧장 그녀를 향했다. 하지만, 세희는 전혀 그런 그의 감정이나 눈빛이 문제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불편함과 불안감이 더 중요할 뿐이었다.

***

그렇게 네 사람은 제각각 헤어졌다. 은빈을 바래다준다던 서진은 은빈과 함께 아파트 단지 내로 사라졌고, 남은 석훈과 세희는 하는 수 없이 함께 걸었다. 하필 택시 정류장이 석훈이 차를 세운 주차장으로 가는 길목에 있어서 어쩔 수가 없었다. 애써 옆에서 걷는 그를 신경 쓰지 않으려고 하는데도, 보폭을 줄이며 천천히 그녀의 옆에서 걷고 있는 남자가 신경이 쓰여 미칠 것만 같았다. 발목에 모래주머니를 한 열 개는 차고 걷는 것처럼 한발 한발 내딛는 게 너무 힘들었다.

어찌어찌해서 가까스로 세희는 택시 정류장 가까이 석훈과 함께 걸어오게 되었다. ‘안녕히 가시라’라는 인사라도 하려다가 인제 와서 아무렇지 않게 말을 섞는 것도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녀는 말없이 택시 정류장 안으로 들어가려고 방향을 바꾸었다. 그러면 석훈은 계속해서 주차장 쪽으로 발걸음을 할 거라 생각했다.

‘탁!’

세희는 익숙한 손아귀의 힘에 이끌려 택시 정류장 속 대기 라인에서 얼떨결에 벗어났다. 당황한 그녀의 시선이 손목을 잡아끌고 가는 남자의 뒷모습에 닿았다. 그녀가 완강히 거부한다면 도망칠 수도 있을 상황이었다. 그런데 구태여 그러고 싶지 않은 이중적인 마음이 들었다. 불편하지만 이 남자의 다음 행동과 말이 기대되는 게 그녀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

‘삐릭!’

석훈은 세희의 손목을 잡지 않은 손으로 자동차 리모컨 버튼을 눌러 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대로 조수석 문을 열어 세희를 태웠다. 그녀는 반항 한번 안 하고 순순히 앉아 벨트를 했다. 세희는 어차피 타고 가야 하는 상황이라면, 그냥 순순히 타고 가서 내리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처럼 내리려다 태우고, 태우면 다시 내리려 하는 그따위 유치하고 치졸한 장난은 과감히 생략했다. 그저 택시 값쯤 벌었다고 생각하면 그만이었다.